소설리스트

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204화 (204/475)

〈 204화 〉 200화 : 어른의 이야기……!

* * *

다음날, 나는 임시 왕인 골든로드와 함께 왕궁의 기록실 겸 장서관을 찾았다.

맹약서에 도장을 찍으려 했는데, 정작 그 도장이 궁 안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서, 혹시 어디 기록이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근데 옛날 엘프들은 기억력이 좋잖아요. 안 써 놨을 거 같은데요.”

어쩌면 도장 자체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수호 의무에서 벗어난다’는 기념으로 화형식이라도 한 거 아냐?

골든로드는 내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아무리 권능으로 충만해도 독엔 얄짤없으니까, 갑자기 자리가 빌 때를 대비해 무언가 남겼을 거 같은데.”

그리고 선대 왕이 도장을 없앴다면 오히려 기록이 남아있겠지.

골든로드는 그렇게 말하며 장서관의 맨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 주요 사건들의 기록물들을 시간순으로 배열해두었다는 듯했다.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면서, 나는 장서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최근에 공간을 넓힌 건지, 일정 지점부터는 벽과 바닥장식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안을 밝히는 조명도 옛 횃불이 되어 있는 등, 세월을 거슬러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사람 많네요.”

책과 기록물을 보관하는 곳이라고 하길래 한산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부산스럽다.

책상에 앉아 부지런히 깃펜을 놀리는 사람, 책과 종이뭉치를 들고 여기저기 바삐 오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진중한 얼굴로 책을 읽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 사서이다. 교대로 책을 관리하거나 필사하고 있지. 그걸 왕궁 관리나 연구원들이 이용하고 있다.”

“그렇구나…….”

책 읽는 사람들도 일반인이 아니었군.

왕궁 안에 있는 시설이니 일반인에게 열려 있진 않은가보다.

그건 그렇고……

“블루스타 당신은 왜 있어요?”

“내 말이. 아니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따라와? 쓸데없이 알짱거리지 말고, 가서 블루벨이랑 놀아!”

음, 난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골든로드는 상당히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다.

그러나 블루스타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친위대장으로서 폐하를 보위하는 건 당연한 소임이니이다. 괘념치 마소서.”

“아직 왕 아니잖아! 하지 마, 이 자식아!”

대관식이라고 해야 하나, 임명식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다음주에 그걸 한 후에야, 골든로드는 정식으로 왕이 된다.

뭐,‘엘프의 새 대표’를 선출하기 전까지만 왕의 직무를 수행하는임시직이라지만……

……그게 정말로 임시일지는 외부인인 나조차 회의적이다.

그리고 블루스타는 다시 친위대장으로 복귀하게 되었는데, 수행원의 일도 겸하게 된 듯했다.

사람을 꺼리는 걸로 유명한 그가 교육을 맡았었고, 또 아직도 그럭저럭 친분이 있으니 그가 덜 꺼려할 것 같다는 이유라나?

확실히 꺼려하진 않고 있다.

엄청나게 질색해하고 짜증을 내서 그렇지.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블루스타는 무척이나 즐거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주종 아닌 주종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나는 블루스타에게 말을 걸었다.

“블루벨은요?”

“집에 있다. 그대의 결정을 전했으니 아마 준비하고 있겠지.

……내일 출발이라니, 생각보다 이르군.”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푹 쉬는 블루스타를 보니, 또 다시 쓴웃음이 나왔다.

평생 다시 못 볼 걸 각오했던 사람이랑 겨우 다시 가까워졌는데, 또 한동안 헤어져야 하니 아쉽겠지.

아니, 이전보다 더 쓸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왕궁에 오는 김에 위슨에게 들렀는데, 그가 돌보고 있는 애들이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깨어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대로 다섯 명의 아이들 모두 혈색이 좋아져 있었고, 꿈을 꾸는지 이따금 뒤척이며 잠꼬대까지 하고 있었다.

……즉, 이제 그 애들은 괜찮다.

그러니 내가 이곳에 더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기왕 머무는 거, 하루이틀 더 있다가 깨어나는 거 보고 가지, 왜?”

“됐어요. 바빠요. 저희 대신 무사히 돌려나 보내주세요.”

“걱정 마. 키워달라고 해도 안 키울 거야. 이딴 동네에서 키워봤자 해만 끼치지.”

“……”

이렇게 자신이 사는 마을을 흉보는 사람이 다음주부터 왕이라니…….

진짜 괜찮은 건가?

고개를 살짝 젓는 나를 향해, 블루스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고보니 카엘, 그 검사는……?”

“메린이요? 여기 보초들이랑 친위대원들 등등 조지……아니, 대련하러 갔어요.”

아침에 좀이 쑤시다며 그녀가 투덜거리자, 골든로드가 곧바로 그런 무시무시한 제안을 던졌다.

그 말에 곧바로 화색이 도는 그녀를 보며, 나는 하루 아침에 날벼락을 맞게 된 그들의 명복을 빌어주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직전까지 그녀와 대련한 탓에, 테이블에 뻗어 있었으니까.

후, 사람 하나를 조져놓고, 그 당사자 앞에서 부족하다며 투덜대다니, 역시 무서운 녀석이야.

“흠흠, 이쪽 부근의 기록들을 보면 되겠네. 블루스타, 어차피 할 일 없지? 너도 같이 봐라.”

“명 받들었습니다.”

“하, 이 놈 이거 재미 들렸네…….”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한숨을 푹 쉬는 골든로드.

그는 뭐라뭐라 혼자 투덜대면서 책들을 꺼내어 나와 블루스타에게 나누어 준 후, 자신도 한아름 들고서 벽 쪽에 놓인 테이블을 향해 고갯짓했다.

“……우와.”

테이블에 놓고 보니 책이 산더미다.

세상에, 이걸 셋이서 오늘 다 볼 수 있을까?

여기 사서들 도움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자, 이게 자네 몫.”

골든로드는 책장에서 가져온, 육백 년 전부터 지난 달까지의 주요사건 기록들 중, 총 220년분의 기록물을 나에게 넘겼다.

……그게 딱 열 권이었다.

“이게 다에요?”

“응.”

의외로 되게 평화로웠네.

나머지 기록들은 골든로드와 블루스타 둘이서 나누어 확인하기로 했다.

나도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380년 전 이후의 기록들은 죄다 엘프어로 적혀 있는 탓에 불가능했다.

“하, 진짜 썩을 놈이야. 문자만 새로 만들었다면 내가 자네한테 가르쳐서 읽혔을 텐데, 아예 말을 바꿨으니…….”

투덜투덜대면서 그는 책 하나를 집어 펼쳤다.

그렇게 나란히 앉은 채 시작된 기록 뒤지기 작업.

한참동안 말소리 하나 없이 종이 뒤적이는 소리만 울렸다.

“………없네.”

……그리고 내 몫은 진짜로 금방 끝나버렸다!

그것도 아무 성과 없이.

아트라토스 토벌에 참가한 것, 맹약을 맺었다며 공표한 내용, 그리고 선대 왕이 선선대 왕을 처형한 것 등등, 주요 사건과 그와 관련된 일들이 상세하게 적혀 있긴 했다.

하지만 맹약서를 만들 때 쓴 도장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

음, 갑자기 한가해졌네.

괜히 여기 앉아 있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나만 어디 가 있을 수도 없고…….

여기 다른 책이라도 읽을까?

“카엘,”

그때, 내용을 보고 넘기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종이를 휙휙 넘기던 골든로드가 말을 걸었다.

“메린이랑 어제 무슨 얘기했어?”

“네?”

“궁금해서 들을까 했는데, 그만 깜빡하고 습관대로 귀마개 하고 자버렸거든. 뭔 얘기했어?”

엿들으려 했다는 소리를 어떻게 저리 당당하고 태연하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엘프 대단해.

“……별 얘기 안 했는데요.”

“안 하긴, 자네 아침에 보니까 제대로 메린 얼굴 보지도 못하더만. 뭔 일 있었지?”

제길, 이 아저씨, 쓸데없이 눈치는 좋아서……!

어제 일 때문에 왠지 민망해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던 모양이다.

“………별 얘기 안 했다니까요!”

“어차피 자네 할 일도 없잖아. 그러지 말고, 둘이 언제 만났는지 그런 거 좀 얘기해줘.”

“그게 왜 궁금한데요?!”

“젊은이의 이야기는 항상 흥미로운 법이지. 특히나 이종족의 이야기는 더더욱. 아, 얼른.”

아잇, 진짜.

술집에서 좀 취한 아저씨가 툭툭 건드리면서 말 시키는 거 같아.

근데 그런 아저씨들은 다음날 아침이 되면 잊어버리기라도 하지, 이 아저씨는 평생 기억할 거 아냐!

혹시 나중에 내 이야기를 책으로 쓰는 거 아냐?!

제길, 역시 딱밤을 걸었어야 했어……!

“이야기를 남기는 게 뭐 어떻다고 그래? 어차피 여기에 다른 종족이 찾아올 일도 없을 텐데.”

“아니 그래도…….”

“걱정 마. 난 그냥 자네 이야기를 듣고 싶을 뿐이야. 그리고 어차피 나랑 이 놈 말고는 들을 사람도 없어. 봐, 다들 제 할 일 하느라 바쁘잖아.”

주변을 대충 가리키는 그의 손을 따라 주위를 돌아보았다.

골든로드의 말대로, 장서관의 엘프들은 죄다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다음주부터 왕이 되는 골든로드를 보고도 그냥 지나가거나 고개만 살짝 까닥이고 있다.

몇몇은 책장 앞에 붙어 서서 책을 정리하고 있는데, 얼마나 신경을 쏟는 건지,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해서야 겨우 고개를 돌렸다.

뭐…… 발소리에 종이 긁는 소리로 부산스러우니, 내 말소리 따위 금방 묻혀서 들리지 않긴 할 것 같다.

“……근데 제 말 들으면서 책 보면 헷갈리는 거 아니에요?”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 말고.”

머릿속에 공간이 따로 있기라도 하나?

어떻게 헷갈리지 않을 수 있는 거지?

……아무튼 더 거절할 이유도 없어진 나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고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나와 메린이 같은 고향마을 출신이라는 것으로 시작해, 가족 구성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뭐하고 살았는지 등등……

거의 인생사를 늘어놓은 거나 다름없었다.

때때로 두 사람에게 질문을 받으면서 쭉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어제 있었던 일까지 입에 올리고 있었다.

……그녀와 키스했다는 대목에선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개미만 해졌는데, 두 사람의 귀는 그조차 놓치지 않고 담은 게 분명했다.

토끼마냥 귀가 쫑긋거렸으니까.

“……그래서 아침에 그랬던 거에요.”

말을 마친 후,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어쩐지 아주아주 조금 더워진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계속 책을 뒤적이던 골든로드는,

“잠깐, 그게 다야?”

책에서 눈을 떼고 나를 황당하다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뭐가요?”

“키스했다며?”

“어…… 네…….”

……그것도 원래 의도보다 훨씬 진하게.

하으…… 아무리 메린이 허락했어도 그렇지, 침대에 엎어뜨릴 정도로 하면 어쩌자는 거야?

게다가, 손까지 멋대로……!

덕분에 아기 때에나 느꼈을 그 말랑한 감촉을 손 안에 담을 수 있었지만……

그 탓에 자정이 한참 지난 뒤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또 다시 더워진 얼굴을 어떻게든 식히고 있는데, 골든로드가 나를 뚱하게 쳐다보며 캐물었다.

“그 다음에 한 거 없어?”

“네……? 없는데요.”

그렇게 선포하는 순간, 갑자기 주변에 싸한 기운이 몰려들며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뭐야?

갑자기 뭔 일이라도 생겼나?

무거운 적막이 감도는 가운데, 골든로드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없다고?”

“어…… 네에……. 방에 가서 잤는…데요…….”

알 수 없는 무게감에 나도 모르게 쭈뼛거리면서 대답하자,

후드득, 퉁, 쿵!

갑자기 장서관에 한바탕 난리가 터졌다!

책이 막 바닥에 흩어지지를 않나,

우리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들고 있던 종이뭉치를 내팽개치질 않나,

어딘가 멀리서 외마디 짧은 함성이 울리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깃펜을 책상에 던진 후, 무어라 중얼거리며 우리 쪽으로 오다가 다른 사람에게 끌려가기도 했다.

한순간에 벌어진 이 소동들에, 나는 그저 벙벙한 표정으로 눈만 끔벅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진짜 영문을 모르겠네.

왜 갑자기 난리가 나냐?

“아니 어떻게 거기서 끊을 수가 있어? 불을 지폈으면 끝까지 태워야 할 거 아냐, 도중에 왜 꺼?!”

그리고 이 임시 왕께서, 뭣 때문에 내 어깨를 잡고 흔들며 성을 내시는지도 모르겠다.

그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 지피고 도중에 끄다니, 뜬금없이 뭔 소리에요?”

“세……가 아니라 합방 말이야! 두 젊은 남녀가 보내는 뜨거운 밤 어디 갔냐고!”

“하, 합방……?!”

이 아저씨가 미쳤나!

큰 소리로 뭘 떠드는 거야?!

“아아아, 아니, 걔, 걔랑 저는 그런 사이가 아닌……!”

“키스했다며! 홧김이래도 한 번은 자빠뜨렸다며! 그럼 얘기 다 끝난 거지, 뭘 따져?! 입에서 혀 왔다갔다했으면 그 다음엔 아래……”

“와아아악! 대낮부터 공공장소에서 뭔 소리하는 거에요!!”

이런 망할, 누가 엘프 아니랄까봐……!

제길, 얼굴이 화끈거려서 익어버릴 거 같다.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이란 말인가!

“아무튼 원래 키스하면 그 다음은 침대잖아. 어떻게 거기서 멈춰?”

“그, 그야! 메린은, 저한테 그런 감정 없으니까…….

……근데 골든, 여자 사귄 적 없다면서 그걸 어떻게 알아요?”

“자네는 뭐 여자 경험 많고? 이 친구야, 얘기 들은 것만 따져도 내가 자네보다 훨씬 많이 들었어. 그리고 이 셋 중에서 동정은 자네 하나뿐이야. 알아?”

“골든은 느릅나무가 있었으니 그렇다 치고, 블루스타는…… 아으아와아으아악!”

블루스타까지 경험이 있냐고 물으려던 말이, 그만 비명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골든로드가 싸늘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팔로 내 머리를 조인 탓이다.

잠시 후, 테이블에 풀썩 엎어진 내 머리 위로 골든로드의 긴 한숨이 들려왔다.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몹쓸 재미만 들려서 말야. 그래도 카엘 자네는 맘껏 응징할 수 있으니 훨씬 낫군.”

“으으…….”

“아무튼 블루스타는 어제 블루벨이랑 같이 집에 갔잖아. 당연히 뗐겠지. 나는 전에 어떤 여자한테 떼였고.”

……떼이다니?

우와, 설마…….

가만히 그를 쳐다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육욕이 생겨났을 때, 하필이면 어떤 여자 엘프가 우리집을 방문하고 있었어. 그 여자 담당교육자가 묘지에 묻혀 있었거든. 그리고 뭐…… 그랬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고, 그 후로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며 그는 덤덤히 말했다.

“허…… 혹시 그거 때문에 사람을 싫어하게 된 거에요? 그래서 쭉 혼자 사는 거고?”

사실 ‘그때의 상처 때문에 사람이 아닌 나무를 사랑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가 들고 있는 책의 모서리를 맞고 땅에 파묻힐 것 같아서 참았다.

“그건 아닐걸? 내가 여길 싫어한 건 스무 살때부터인데, 그거랑 이건 다르잖아.

음, 그냥 생각이 없어. 남자이든 여자이든, 하다못해 날개사슴이든 말이든…… 나무이든!

……누구랑 그런 행위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더라.”

진짜로 나무성애가 아니었군.

그건 그렇고,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욕구가 생기지 않는다…….

문득, 이 숲에 오기 전, 드워프들이 마련해준 집에서 그녀가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낯선 사람이 만지는 건 싫지만, 그나마 가까웠던 사람들……

나나 검술 사범님이 자신을 만지는 상상을 해봐도 별 느껴지는 게 없었다고 했던가.

“……왠지 메린 같네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다시 책을 뒤적이던 골든로드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나는 누구든 싫은데, 메린은 아니잖아. 자네랑 키스했다며?”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던데요.”

“싫어하지 않는다. 이게 중요한 거지. 안 그래, 블루스타? 삼백 년 만에 사내가 된 남자여.”

“그 전에도 사내였습니다만…….”

어깨를 두드리며 과장된 웃음을 짓는 제 스승을, 블루스타는 잠시간 건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여하간 카엘, 그녀가 진정 그대에게 아무런 마음도 없다면, 아무런 부담감 없이 입맞춤을 받아들였을 리가 없다. 그건 그대도 알고 있을 듯한데.”

“일반적이라면 그렇겠지만……, 메린은 그런 욕구 자체를 느껴본 적이 없다고 했는걸요.”

“푸핫, 그런 것도 물어봤어? 자네 대단하네!”

“아잇, 진짜.”

남에게 듣거나, 스스로 우연히 깨닫는 성욕조차 느껴본 적 없는 그녀이다.

내가 무슨 잣대로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즉, 성애를 모른다고?”

“유니콘이 되게 좋아하겠네.”

그 유니콘이랑 한 판 떴다는 말을 들으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지만, 메린의 명예를 위해 입을 다물기로 했다.

“어쩌면 자네를 좋아하는데, 그게 좋아한다는 건지 모르는 것뿐인 거 아냐? 메린이 자넬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었어?”

“어…… 편하다던데요.”

나와 같이 있으면 편해서 잠을 푹 잔다고 했던가?

그리고 어제, 내가 블루벨과 가까이 지내는 게 싫고, 또 내가 힘들어하는 게 싫다고 했지.

“어렵군.”

“되게 애매하네.”

“그렇죠?”

잠깐동안 종이를 뒤적이는 소리만 울리다, 블루스타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 애매함이 성애를 모르는 것에서 기인한다면, 성애를 알게 하면 되지 않겠나?”

“……아니, 그건……. 그야 그렇겠지만…….”

우와, 메린과 관계를 가지라는 권유를 받는 건 이게 두 번째인가?

처음엔 로나였지?

감정 교감에 탁월한 방법이고,성애를 아는 것으로 보다 빠르게 감정을 일깨울 수도 있을 거라면서.

그리고 이번엔 블루스타가 권유하고 있다.

연심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하아…… 근데 그건 나중에 그녀가 후회할 수도 있잖아요……. 괜히 그랬다면서…….”

“흠?”

눈 딱 감고 저질러서, 그녀가 그걸 알게 됐다고 치자.

그 뒤에도 나를 꺼리지 않는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만약 꺼린다면?

그리고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하아…… 비록 내가 저질러서 그런 감정들을 깨달았다고 해도, 어쨌든 날 원망할 거 아냐.

어쩌면 그 때문에 불행해질지도 모르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지금처럼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혼자 깨달을지도 모르고.

“혹여나 그대, 거부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저 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네?”

“확인하는 것이 두려워, 그녀를 위한다는 말로 포장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왠지 모르게 정곡을 찔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지도 몰라.

그간 온갖 추태를 보여온 나를 그녀가 피하지 않는 건, 단순히 성애를 몰라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즉, 오래 봤으니까, 친숙하니까 그냥 있는 거지.

그런 그녀가 성애를 알고, 여자의 본능이 깨어난다면……

그때도 나와 있어줄까?

지금은 원인이 좀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툭하면 쓰러질 정도로 약한데.

엄마 대신 내 병시중도 들었는데.

남성미의 대표인 근육도 별로 없고.

체력은 더 없고.

이런 나를……

그녀가 좋아할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쩌면껴안는 건 물론이고, 내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 자체를 싫어하게 될지도 몰라.

그래서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녀의 그 애매한 감정에 매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겁쟁이의 마음을, 그녀를 위한다는 말로 포장해서, 나 자신마저도 속이고 있는 건지도 몰라.

“너무 비관적이잖아. 좋아할 수도 있는 거 아냐?”

“그럴까요…….”

“나 참, 자신을 가져! 이거 술만 안 먹었지, 블루스타가 주정부리던 거랑 똑같네.”

“아니 여기서 제 얘기가 왜 나와요?”

……왠지 여러모로 침울해졌다.

딴 사람들은 이러지 않겠지?

그 촌장 아드님 새끼만 봐도, 그냥 거리낌없이 돌격만 해댔잖아. 멧돼지마냥.

그 무식한 돌격 정신에 여자들이 빠졌던 걸까?

어쨌든 자신감은 철철 흘러 넘쳤으니까.

“카엘, 고민만 해선 될 것도 안 돼. 그냥 눈 딱 감고 질러 봐. 블루스타처럼.”

“그래서 깨졌잖아요. 무려 이십 년 동안.”

“어쨌든 다시 이어졌잖아. 아니면 다른 여자 찾으면 되지. 세상에 여자가 하나도 아니고.”

“……저기, 이 여행 끝날 때까진 계속 같이 다녀야 되거든요?! 관계 박살나면 여러모로 껄끄럽거든요?!”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고 있어!

발끈하는 나를 향해, 골든로드와 비슷한 속도로 책을 휙휙 넘기며, 블루스타가 말했다.

“아니, 카엘, 내가 단추를 잘못 끼워서 그렇지, 블루벨은 처음부터 내게 연심이 있었다. 그저 눈을 돌리고 있었을 뿐이지.

말하지 않았나? 그녀가 내 품에 안기는 건 예정된 것이라고.”

“우와.”

“여하간, 폐하…가 아니라 스승의 말도 일리는 있어. 언제까지고 애매한 채로 둘 순 없잖나?그대가 그녀를 연모한다면, 더더욱.”

……그렇기는 하다.

내가 메린을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그녀가 평범한 사람의 감성을 가지길 바란다.

그러니 정말로 그걸 원한다면, 그녀가 하루라도 더 빨리 감정들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

로나가 말한 대로, 그녀와 최대한 교감하기 위해서 그녀를 안아야 한다.

설령 나중에 그녀가 나를 원망하고, 그 때문에 미워하게 될지라도.

……아니, 근데 역시 그건 불행의 지름길 아니야?

내가 그녀에게 전심전력으로 실연당하는 거 이외에도 문제잖아!

“으……역시 아니에요.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안기는 것 자체가 불행이잖아요.”

그렇게 대답하자, 골든로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래? 블루벨한테 듣기론, 하룻밤 보내고서 사귀는 사람도 있는 거 같던데. 인간은 안 그러나봐?”

우와, 엄청나게 개방적이잖아!

엘프 대단해!

“안 그래요! 순결에 목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수명도 짧으면서 이것저것 따지는 건 많구나. 피곤하게 사네. 자네만 안 하는 건 아니고?”

“으아악, 아니야! 그럴 리 없어요!”

내 동족이 그런 문란한 생활을 하고 있을 리가 없어!

……아, 그치만 술김에 자버리는 사람이 많은 건 사실이잖아. 특히 축제 때.

그래서 결혼을 시키니, 배상을 하라니 등등 매년 시끄러웠고.

……이거 진짜 나 혼자만 절제하는 거고,다들 그냥 막 살고 있는 거 아니야?

아니 그래도…… 그래도 역시 싫은걸!

메린이 헤픈 여자로 보일 거 아냐!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거부하는 내게, 골든로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럼 순결을 잃지 않는 방법으로 하면 되지.”

“네?? 그게 뭔…….”

“몰라? 귀 대봐.”

그가 잠시 손을 멈추더니 나에게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갑자기 소리 왁 지르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미심쩍어하면서도 귀를 가까이 대자, 그가 내 귀에 여러 말을 속삭였고,

“…………!!!!”

나는 머리가 폭발할 것 같은 열기를 느끼며 그대로 테이블에 엎어졌다.

우와, 우와우와우와……!

아아아, 난 못 들었어!

아무것도 못 들었다고!!

으와아아악!

“훗, 애송이 녀석.”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어느 여인의 귀한 말씀. 이거 들었을 땐 묻지도 않은 걸 주절거린다 했는데. 이야, 무슨 지식이든 후학이 되는구나~”

“……???”

초고도의 지식에 터지기 직전이 된 내 머리 위로, 유쾌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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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 200화!

인기와는 거리가 먼 작품입니다만, 그래도 여기까지 계속 쓴 건, 매화매화 읽어주시는 여러분 덕분입니다.

글쓴이 의욕만으론 안 될 게 뻔하거든요.

아무튼 이대로 끝까지 달리자구YO! 이예­이 ( / ' ▽')/

주인공 남녀를 내세워 감사 인사드립니다!

응원해주시는 분들, 꼬박꼬박 댓글 달아주시는 친절한 분들모두모두 감사합니다!!

Q) 카엘 옷은 왜 저럼? 예복이라며?

A) 중세니까요. 예복은... 자료 못 찾앗써여...

Q) 메린 드레스는 중세 아닌데?

A) 여캐니까요.

다음화도 잘 부탁드려요!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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