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 201화 : 계획은 틀어지는 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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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란 무엇인가?
도덕과 윤리에서 말하는 ‘어른’은, 스스로의 행동이 주변에 미치는 영향을 분명히 인지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때문에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아이일지라도, 자격만 갖춘다면 어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어른은 ‘밤놀이를 즐길 수 있는 사람’,
그 중에서도‘남녀가 한 침대에서 치르는 밤일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건 나이가 어느 정도 되어야 할 수 있을뿐더러, 그에 대한 지식 또한 나이가 차야지만 얻을 수 있다.
누가 정했냐고? 사회가 어지러워지는 걸 싫어하는 어른들이 정했지.
물론 성년 전에도 기본적인 지식은 배우고, 또 술 취한 사람들의 입방아를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곤 한다.
내 경우엔 책에서 알게 된 것도 있는데……, 하, 전문서적이나 그런 게 아니고 소설이었다.
나 참, 성년 기념으로 아들에게 성인소설 필사를 시키다니, 지금 생각해도 진짜 어이가 없다.
아무튼, 그래서 경험은 없을지언정, 지식은 그럭저럭 갖출 만큼 다 갖춘 줄 알았는데.
근데 아니었어.
저 아저씨 말마따나 난 애송이였다!
으으으……!
사백 년 묵은 아저씨의 가르침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그보다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여자만 알 법한 내용 같은데!
아, 묘지의 꽃들 중 하나한테 들었나?!
심심해한다더니 진짜 별 소리를 다하네!
“……후우……”
겨우겨우 그 낯뜨거운 지식을 소화시킨 후, 다시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 위에 잔뜩 쌓여 있던 책의 1/3이 바닥으로 옮겨져 있다.
……나 얼마나 엎어져 있던 거야?
“이제야 진정했나보네. 어쨌든 괜찮은 방법 같지?”
“괜찮긴 개뿔!”
빽 소리지르며 대꾸하자, 골든로드는 책장을 휙휙 넘기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왜, 너무 자극적이야? 그럼 대신 가슴을……”
“안 해요! 그거 관계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하하, 그렇긴 하지.”
아잇, 진짜!
웃을 일이 아니구만!
근데 또 저 아저씨는 나름 진지하게 말해주는 거라서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뭐, 요지는 쾌감을 느끼게 하는 거지. 감정은 어쨌든, 감각 자체는 있을 거 아냐?”
“………네, 뭐.”
메린이 그런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지난번에 이미 확인한 바이다.
그리고 어제…… 나는그 사실을 완전히, 확실하게 뼛속까지 새길 수 있었다.
……어제 의도했던 것보다 키스가 훨씬 더 깊어진 건, 그녀의 몸이 반응하는 거에 끌린 거니까.
후…… 본능 무서워…….
“그러니 자네만 눈 딱 감고…… 응? 이건가?”
책장을 넘기며 또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던 골든로드가, 별안간 손을 멈추었다.
“……뭐 찾았어요?”
“흠, 지금으로부터 350년 전에 반환식을 했다는데.”
웬 반환식?
천사에게 도장을 돌려주기라도 했나?
블루스타도 책을 살피던 손을 멈추고, 골든로드가 보고 있는 책을 들여다보았다.
“흠…… <역사서 편찬을="" 기념하여,="" 왕이="" 맹약의="" 도장을="" 거울호수로="" 반환하는="" 기념식을="" 가졌다.="">……?
이런, 거울호수라니…….”
천천히 내용을 읽더니, 어쩐지 난처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스승 역시 마뜩잖은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음, 일단 망했다는 건 알겠군.
그래도 어떻게 얼마나 망했는지 들어봐야겠지.
마른 침을 삼키고, 두 엘프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그 호수가 왜요? 이름만 호수이고 실상은 늪인가요?”
“아니, 맑은 물이 넘쳐흐르는 호수야. 근데…… 밑바닥이 바다랑 이어져 있거든.”
“……바다?”
바다라면 그, 한없이 물이 펼쳐져 있는 곳 말하는 거지……?
인어가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그, 물로 가득찬 평원.
“그럼 가끔 인어가 올라오나요?”
“응? 웬 인어? ……아, 바로 붙어 있는 게 아니라, 호수 밑바닥에 물이 빠져나가는 구멍이 있거든? 여길 통해 쭈우우우욱 가다 보면 바다가 나와.
물론 직접 가진 못해. 구멍이 좀 많이 깊거든.”
근데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꼭 누가 가본 것 같은 이야기인데?
눈을 멀뚱멀뚱 끔벅이며 묻자, 골든로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옛날에 거기다 인장반지 빠뜨렸었는데, 인어들이 찾아줬대.”
거참 별일이 다 있네……
어, 잠깐. 그럼 설마……!
머릿속을 스친 불길한 생각에 눈이 저절로 커졌다.
그리고 골든로드는, 그런 나를 향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아악, 아니야!
거짓말이라고 해줘!
“아니아니, 아직 단정하긴 일러요! 그냥 바닥에 가라앉아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구멍에 딱 들어가도록 물 속에서 떨어뜨렸다는데.”
거 참 쓸데없이 치밀하네!
그럼 뭐야, 인어들에게 가서 주워달라고 해야 되는 거야?
근데 그 도장을 내가 찍어봤자 별 효과 없을 거 아냐!
그렇다고 도장 받으려고 여기 다시 오는 것도 웃기고……!
망할, 그 악마 들린 선대 왕, 진짜 끝까지 말썽이네!
만약 이것까지 그 부에르라는 악마가 계획한 거였다면, 부아가 아니라 감탄이 터질 것 같다.
“이거 원, 인어랑 연락한지도 꽤 됐을 텐데 아직 연결이 되어 있나?”
“방법을 아십니까?”
“선대 왕, 아니 선선대 왕이 워낙 수다쟁이라서.”
뜻 모를 이야기를 나누는 두 엘프를 빤히 쳐다보자, 이번엔 블루스타가 입을 열었다.
“거울호수는 숲 안쪽, 산맥과 맞닿은 곳의 동굴 지하에 있는 호수이다. 특별한 방법으로 물을 동하게 하면, 멀리 있는 자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하더군.”
“맞아. 맹약을 맺은 종족이나, 하늘의 귀인에게 연락할 때 쓰는 거야. 문제는……”
골든로드는 곤란한 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자네, 피리 연주할 줄 아나?”
웬 피리? 당연히 못 불지.
눈을 끔벅이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 동료들 중엔?”
“글쎄요. 악기 다루는 걸 본 적이 없긴 한데요.”
“그럼 물어보러 가자. 위슨이랑 로나는 궁에 있을 거고…… 메린은 훈련소에 있겠지? 블루벨도 할 줄 모를 거 같긴 한데…… 일단 물어나 보지, 뭐.
불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내가 가르치고.”
없으면 가르친다고?
윽, 왠지 심각하게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아니 잠깐만요!”
벌써 테이블을 벗어나기 직전인 그를 황급히 붙잡고 말했다.
“굳이 그러면서까지 그 거울호수를 써야 돼요? 도장 없으면 그냥 서명만……”
“맹약서 보니까 도장 찍어야 인정이 되는 것 같던데?”
“그럼 골든이나 블루스타가 피리 불면 되잖아요!”
“왕은 호수 앞에서 글귀 읊어야 돼. 그리고 이 놈은 악기 재능이 없어서 소리 못 내.
아, 시간 없으니까 얼른 따라와!”
막무가내로 끌고 갈 기세구만?!
제길, 할 수 없군…….
한숨을 푸우욱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골든로드를 따라가려 했다.
그러나 테이블에서 몇 발짝 떨어진 순간,
“정지.”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떤 회색머리 엘프가 눈 깜짝할 새에 나타나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그냥 길을 막을 뿐 아니라, 골든로드의 어깨를 꽈아악 힘주어 잡기까지 했다!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엘프가 중얼거렸다.
“자료들, 도로 제자리에 꽂고 가시죠.”
“미안한데 좀 바빠서요. 대신 수고 좀 해주시면…… 히익?!”
딱딱한 목소리로 거절하던 골든로드가 숨을 삼키며 몸이 바짝 얼어붙었다.
이 자유분방한 아저씨가 뭘 봤길래 기겁을 다 하지……?
살짝 옆으로 돌아, 그의 어깨를 잡고 있는 엘프를 힐끔 쳐다보았다.
“……!”
……심연.
사람 얼굴에 심연이 떠올라 있어……!
등골이 오싹해지며, 몸이 확 굳어버리고 말았다.
세상에,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을 얼마나 힘들게 했길래, 사람 얼굴이 피로에 절다 못해 아예 시커멓게 떴대?!
“일이 많아서…… 저희도 여유 없습니다…….”
그 엘프는 고개를 흐느적거리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러니 꺼내신 자료들……! 제자리에……!”
“브, 브브, 블루스타가 할 겁니다!”
우와, 이 아저씨, 제자 팔아먹었어!
진땀을뻘뻘 흘리며 대죄를 저지른 스승은, 건조한 눈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제자에게 변명하기 시작했다.
“너, 너도 알잖아. 이거 진짜 중요하다고. 그러니,”
“물론 그러시겠죠. 옛날에도 곧잘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저에게 일을 다 떠넘기셨으니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때도 다 중요한 일이었다니까! 아, 아무튼 부탁 좀 할게!”
내던지듯 말하고서 빠른 걸음으로 가버리는 임시 왕.
……저러다 한 달 내로 또 반란이 일어나는 거 아냐?
여기 푸른머리 엘프가 수괴가 되어서.
“하아…… 카엘, 여긴 내가 정리할 테니 스승을 따라가라.”
“어…… 진짜 괜찮겠어요?”
혹시 그 불씨가 이미 피고 있는 거 아닌가 싶어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얼굴엔 반발심은커녕, 체념 섞인 쓴웃음만 피어 있었다.
“본디 저런 성미이신 것을 어쩌겠나? 나는 괘념치 말고 가보아라. 정말이지, 변하시질 않는군.”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안심한 듯한 기색이 살짝 묻어나왔다.
……반란이 일어나더라도 알현실이나 방 안에서만 소소하게 일어나겠군.
굳게 확신하며, 벌써 출구 근처까지 도망가버린 임시 왕의 뒤를 따랐다.
그날 오후, 나를 포함한 일곱 명의 사람들은 노을빛에 잠긴 숲을 걷고 있었다.
인간이 넷, 엘프가 셋이라는 기묘한 구성이다.
목적지는 숲 안쪽, 어느 동굴 지하에 있다는 거울호수.
엘프의 수장…… 왕이 가지고 있어야 할 도장을 버린 곳이자, 동맹종족에 대한 연락수단이다.
당연히 거기 빠진 도장을 찾으러 가는 건 아니고, 거울호수로 인어에게 연락해, 바다로 흘러갔을 도장을 주워달라고 부탁하려는 것이다.
……몇백 년 만에 온 연락이 ‘도장 주워주세요’라니, 받는 사람도 되게 어이없겠네.
“350년 전이면 이미 썩어서 가루가 됐겠구만, 뭐.”
“아뇨, 위슨 씨. 그 도장, 고래 뼈로 만든 거라서 쇳물에 던져도 안 녹아요.”
고래라면……
바다에 산다는 엄청나게 커다란 물고기였던가?
우와, 쇳물에도 안 녹을 정도로 뼈가 튼튼하다니, 바다 생물들 굉장하네.
“좀 특이한 고래인데, 이름이…… 아, 폭풍고래였어요.”
“폭풍고래? 허 참, 그 뼈를 어떻게 구했대?”
예사 생물이 아닌지, 기가 막히다는 말투로 묻는 골든로드.
로나는 그의 등 뒤에서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연안에 온 걸 잡았다던데요?”
“이야, 인간들 대단하네~ 내가 듣기로 그 고래, 지나가는 데마다 폭풍을 불러 일으킨다던데.”
“에이, 그래봤자 고래인걸요. 듣기로는, 최초의 대언자님이 창조주의 힘을 빌어서 물리치셨대요. 돌려차기로.”
……아니 거기선 기도가 나와야 되는 거 아냐?
왜 돌려차기가 나와?
이 교단, 처음부터 성스럽고 장엄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구만?
어쩌면 초기 교단엔, 로나와 같은 전투사제만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처럼 엄숙하게 설교하거나 의식의례를 집행하는 건, 한참 나중에나 하기 시작한 거 아냐?
“저기 보이네.”
앞서 걷던 골든로드가 별안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눈엔 나무밖에 안 보이고 있으니, 아직 한참은 더 가야겠군.
그리고 정말로 십 분은 더 걸어서야 동굴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허, 진짜 눈 좋네.
골든로드는 동굴 안을 슥 들여다보고는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 박쥐 같은 것도 하나 없네. 카엘이랑 다른 셋, 조명 있지? 들어가자.”
“네…….근데 진짜 괜찮아요? 왕이랑 후계자만 들어갈 수 있다면서요.”
법도가 어쩌고, 전통이 어쩌고 하면서 누가 문제를 삼으면 귀찮아질 텐데.
그러나 임시 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 마. 쓸데없이 문제 삼을 만한 놈은 왕궁에 없어. 블루스타가 로나랑 같이 어제 다 처리했다더라.”
“……”
진짜 어제 왕궁 밖을 나와있길 잘했구나.
로나가 껴 있었다니, 분명 여러모로 듣기 힘든 소리들이 마구마구 울렸겠지.
뭔가 와작 부숴지는 소리나 귀 찢어지는 비명소리 같은 거.
그보다 사제님이 이렇게 이종족 일에 관여해도 되는 건가?
악마 들린 왕은 이미 처치했는데.
가만히 로나를 보자, 그녀는 내 표정에서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히히 웃으며 말했다.
“악마가 주변에 힘을 흩뿌렸을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협조한 자들은 누구든 싹 다 검사해야 돼요. 하~ 어제는 참 보람찬 하루였어요!”
“……너 또 그 진실의 의식인가 그거 했냐?”
“당연하죠! 정결의식도 했는걸요. 부에르의 조각은 다 없앴으니, 한동안은 악마 걱정 안 해도 될 거에요.”
아무래도 그 악마는 악마답게, 지저분하게 잔여물을 남기고 갔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진실의 의식인가…….
물론 로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니 했겠지만……,
“하아, 역시 고문은 좋지 않아…….”
“……”
……응?
왠지 블루스타와 블루벨이 나를 뚱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 같다.
별일이네.
홀로 어깨를 으쓱이며, 골든로드의 뒤를 따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이라고 했으니,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약간 침침한 정도였다.
그러나 그냥 가기엔 발밑이 위태로워서 야광석등을 꺼내보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빛이 약했다.
흠, 바깥 빛을 받으면 야광석이 빛을 못 내나보네.
결국, 위슨이 스라소니를 꺼내야 했다.
“언제 봐도 참 밝다니까.”
“볼 때마다 그 소리로군.”
그치만 신기한걸!
동굴 안이 대낮처럼 환해졌는데!
아무튼 환히 밝아진 동굴을 쭉 내려가기 시작했고, 얼마 안 있어 기둥 하나 없이 넓게 파인 공간으로 나왔다.
일곱 명이 천막을 치고 야영까지 할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 그 중앙엔 바닥이 보이지 않는 물웅덩이가 반짝이고 있었다.
이게 그 거울호수인가?
호수라기보다는 샘인데?
아니, 동굴인 시점에서 샘일 수밖에 없구나.
아무튼 그 샘 위로, 주황빛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자, 동굴 천장에 샘과 비슷한 크기의 구멍이 뻥 뚫려 있고, 그 틈으로 노을이 낀 하늘이 보였다.
이래서 동굴이 그럭저럭 환했구나.
수면도 잔잔하니, 물을 들여다보면 정말 거울처럼 얼굴이 선명하게 비추일 것 같다.
“자, 그럼 한 번 해볼까? 위슨, 음률 기억하지?”
그의 말에 위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서 작은 피리를 꺼냈다.
배운 지 서너 시간밖에 되지 않아서 조금 자신이 없는지, 표정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그런 그에게 빙긋 미소를 보내며, 골든로드는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괜찮아, 자신을 가져! 요 다섯 중에선 자네가 제일 감각이 있다니까?
혹시틀리더라도 신경 쓰지 말고.중요한 건 마음을 담는 거야. 알았지?”
위슨은 재차 고개를 끄덕인 후,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 다음 피리에 입을 대고 두세 번 시험삼아 삐 삐 소리를 낸 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내,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며, 피리에서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골든로드가 샘을 향해 두 팔을 뻗고, 연주에 맞추어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높낮이 하나 담겨 있지 않은 평탄한 말투인데도, 왠지 노래를 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똑. 똑. 똑. 붉은 재앙 앞에 모인 다섯 생명 중 하나, 엘프가 문을 두드립니다.
똑. 똑. 똑. 붉은 재앙 앞에 모인 다섯 몸 중 하나, ‘숲’이 ‘바다’에 인사합니다.”
어딘지 경쾌하고 가벼운 듯한 말소리와, 발랄한 피리소리가 동굴의 천장까지 높이 울려퍼졌다.
이윽고 그 소리가 한데 뭉쳐 하나의 울림이 되어, 이 공간 전체를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안부에는 안부를, 축하에는 감사를, 경고에는 대비를.
우리들 다섯 종족, 서로 달라도 붉은 재앙 앞에선 하나랍니다.”
골든로드의 말소리는 거기서 끝이 났지만, 위슨의 피리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연주가 아닌 한 음…… 피리로 낼 수 있는, 가장 낮은 음을 길게 내고 있다.
마치 뿔나팔을 불어 호출하는 듯한, 묵직한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퍼지고, 메아리치면서 점점 더 큰 울림이 되었다.
속이 떨리는 듯한 느낌에 무심코 시선을 내리자, 샘…거울호수의 표면이 크게 떨리는 게 보였다.
마침내 떨림이 물결이 되어 일렁이는 순간,
휘우웅!
갑자기 바람이 불며, 동굴을 채웠던 울림을 몽땅 거두어갔다.
“……”
소리를 내면 안 될 것 같은 무거운 고요함이 느껴진다.
근데 뭐 변한 게 없는 거 같은데…….
혹시 실패했나?
어리둥절해하는 내 귀에, 거울호수 앞에 서 있던 골든로드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야, 한 번에 성공할 줄이야. 역시 마법사인가?”
“네……?”
“물을 봐. 곧 풍경이 보일 거야.”
그의 말을 따라 가만히 거울호수를 들여다보였다.
물 표면에 떠오른 내 얼굴상이 찬찬히 흐려지더니,
“……허?”
완전히 폐허가 된, 처참하게 박살이 나 있는 풍경이 떠올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