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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206화 (206/475)

〈 206화 〉 202화 : 계획은 틀어지는 법 (2)

* * *

반쯤 부숴지다 만 벽.

그리고 그에 붙어 대롱거리고 있는 조개 모양의 조명.

그 불빛이 없었다면, 그저 시커먼 어둠만 보였겠지.

금방이라도 암흑에 삼켜질 듯한 그 유약한 빛 덕분에, 지금 거울호수가 비추는 곳이 어떤 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방이었다’고 해야 되겠구나.

지금은 폐허밖에 없으니까.

보이는 건 너덜너덜한 벽 하나와, 거기에 달린 조명 하나뿐.

나머지는 온통 어둠 속에 파묻혀 있다.

그럼에도 감히 입을 떼지 못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정말로 인어에게 연락한 게 맞는 것인지 물어야 할 텐데.

그러나 그런 의문들은, 불길한 고요에 잠긴 이 광경 앞에선 사소할 뿐이었다.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이 참혹한 현장을 앞에 두고 무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좀…… 너무 뜻밖인데……?”

먼저 침묵을 깬 건 다음주에 왕이 되는 골든로드였다.

실로 일족을 이끄는 지도자다운 패기라 할 수 있었다.

임시직이지만.

그리고 그가 침묵의 무게를 덜어준 덕분에, 나 역시 목소리를 쥐어짜낼 수 있었다.

“골든, 이거……어디로 연결되는 거에요?”

“각 수장의 방.”

“……!”

어느 고위직 관리의 방이었다면 그나마 희망을 가졌을 텐데, 수장의 방이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큰 싸움이 있었던 건 분명했다.

“설마, 멸족해버린 건……?”

“아뇨, 그건 아닐 거에요.”

블루벨이 불안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로나가 굳은 표정으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한 종족이 완전히 멸망에 이르렀다면, 율리아……대언자님에게 계시가 내렸을 거에요. 그럼 저에게 곧바로 연락을 주셨을 거고요.

하지만 아무 연락도 못 받았어요.그러니 큰 고난을 당하긴 했지만, 반드시 어딘가에 생존자가 있을 거에요.”

“그럼 그걸 찾아야 돼? 바다를 다 뒤져서?”

본래 계획은 이랬다.

드워프의 나라인 ‘바위궁전’에 들른 후, 대륙 북동쪽에 있는 섬에 가서 인어의 나라 위치를 확인한다.

그 다음 그곳을 찾아가서 지원을 요청한 뒤, 북쪽 산으로 가서 드래곤을 물리친다.

그런데 그 인어의 나라가 완전히 박살이 난 거다!

로나는 생존자가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걸 어떻게 찾아?

바다라는 건 굉장히 넓다고 들었는데, 찾다가 일 년 다 지나는 거 아냐?

“으음…… 지하 신전에 연락을 넣어봐야 할까요…….”

로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안 서는 듯, 팔짱을 낀 채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이걸로 연락해볼까?”

“자정 직전이 아니면 방에 안 계세요.”

“저런.”

골든로드는 정말로 낙담한 듯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 뒤,

“……할 수 없지.”

낮게 중얼거리더니 위슨에게 손을 내밀었다.

“피리 줘.”

“뭐 하려고?”

“연락.”

“……”

그러나 위슨은 눈썹을 찡그리며 오히려 뒤로 물러났다.

그가 들고 있는 저 피리는 본래 골든로드의 것이다.

그러니 남에게 빌려주기 싫다고 생떼를 부리는 건 아닐 텐데……, 뭐지?

그리고 뒤로 물러난 위슨을 보호하듯이, 스라소니가 그 앞에 우뚝 섰다.

행여나 한 발짝이라도 다가오면 달려들겠다는 것처럼, 골든로드를 향해 몸을 낮추고 이빨을 드러냈다.

그런 그를 정색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골든로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하는 거야?”

“그대의 무모를 만류하는 게다, 젊은 숲이여. 어찌 생명수의 지원없이 천상에 연통(?)하려 하느냐! 설령 그대의 존재를 대가로 바친다 하여도 도달하지 못하리라!”

스라소니의 엄격한 목소리가 동굴 안을 쩌렁쩌렁 울리자, 동굴 자체가 골든로드를 강하게 꾸짖는 것 같았다.

그 메아리치는 소리에 귀가 따가운지, 골든로드는 잔뜩 인상을 쓰면서 대꾸했다.

눈앞의 스라소니가 아닌, 위슨을 향해.

“위슨 자네, 내 속 읽었어?”

위슨은 고개를 젓고, 자신의 어깨에 앉아 있는 파랑새를 가리켰다.

“위슨에겐 피리 주지 말라고만 했어. 네 꿍꿍이를 아는 건우리뿐이야.”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한 후, 파랑새는 날개를 파닥이며 공중에 뜨더니,

“악.”

그대로 골든로드의 이마로 돌진했다!

그런 뒤, 고통에 신음하며 이마를 문지르는 그의 얼굴 앞을 날면서 빽 소리질렀다.

“등신아, 네가 지금 개지랄 떨 위치냐?! 네가 없어지면 다른 귀쟁이 놈들은 그대로 끝장이야, 얼간아! 넌 새로이 부여받은 역할에나 집중해!

너 포함해서 귀쟁이 놈들 다 뒤져도 내 알 바 아닌데, 올해는 너네 있어야 되니까 특별히 말려주는 거야! 알았으면 짜져 있어!”

……저거 드래곤 없었으면 안 말렸을 거란 소리이지?

거참 매정하네. 그렇게 엘프가 싫은가?

골든로드는 자신의 눈앞에 떠 있는 파란 공을 빤히 쳐다보다,

“……에휴.”

한숨을 푹 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체념 섞인 긴 한숨과 함께, 풀풀 풍기던 살벌한 분위기도 차츰차츰 누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정령이 엘프를 꾸짖다니 말세야, 말세. 근데 지난번에 입 막은 것도 그렇고, 역시 자투리 정령이 아니구만? 위슨 자네, 보기보다 대단했구나.”

“흥. 알면 받들어 모시라고.”

“싫어, 이 노인네야. 귀인이면 몰라, 내가 왜 너희를 모셔? 그래봤자 정령 주제에!”

“이 싸가지가……!”

그리고 갑자기 엘프와 파랑새의 혈투가 시작되었다!

무언가 흙먼지가 일기도 하고, 동굴 안이 웅웅 울리기도 하는 등, 굉장히 화려하고 치열한 결투였다.

다른 사람들이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는 걸 보면, 정말로 기억에 길이길이 남을 명승부였으리라.

……그래서 더욱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내 눈엔 둘이 제자리에서 계속 아웅다웅하는 걸로만 보였으니까.

정말 쓸데없이 웅장하고 조촐한 혈투를 마친 후, 골든로드는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묶으면서 말했다.

“근데 달리 방법이 없잖아. 밤에 로나네 수장과 연락한다고 해도, 그 수장이 알고 있을 거란 보장도 없고. 이럴 땐 상급자에게 묻는 게 최고야.”

“하지만 아저씨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는 거죠? 그럼 절대 안 돼요!”

“맞습니다, 스승님. 지금 스승님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엘프의 앞날은 없어지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스승님의 모든 기억을 책으로 남긴 뒤면 모를까…….”

책을 다 남긴 후라면 괜찮다는 건가?

역시 냉혈한이야. 스승이라 해도 가차없구만.

골든로드 역시 그 뒷말이 거슬리는지, 뾰로통한 얼굴로 혼자 작게 투덜거렸다.

“그럼, 제가 매개체가 될 테니 연락하세요.”

그렇게 말하며, 로나가 등에 맨 철퇴를 손에 들고 지팡이처럼 땅을 짚자, 골든로드가 손을 내저으며 안 된다고 말리기 시작했다.

……매개체? 뭔 매개체?

문외한인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게 이야기해주었으면 좋겠는데, 분위기를 보니 그런 친절은 기대할 수 없을 듯했다.

“……”

이럴 땐 조용히 빠져주는 게 상책이지.

한숨을 쉬면서, 발걸음을 돌려 벽 쪽으로 향했다.

언제부터 거기 있던 건지, 메린이 동굴 벽에 기대 앉아 있길래, 나도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후우…….”

긴 숨을 내쉬자, 찬 기운이 느껴져 몸이 살짝 떨렸다.

으, 망토 걸치고 올 걸 그랬나?

동굴이라 그런지 여름인데도 쌀쌀하네…….

“엥? 너 춥냐?”

“……약간.”

“진짜 추위 잘 타네……. 영차.”

“……?!”

갑자기 메린이 나를 제 어깨에 눕히더니 뒤에서 감싸안았다!

“야, 지금 뭐하는……!”

“춥다며?”

“아니, 그래도 다들 있는데……!”

어디 안 보이는 구석도 아니고, 고개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는데!

특히 골든로드는 시선만 좀 돌려도 바로 보일 텐데!

“그게 뭐?”

“……”

그리고 메린은 정말로 뭐가 문제인지 하나도 모른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돌겠네, 진짜.

“다, 다들 진지한 얘기하는 중인데 딴짓 하면 안 되잖아.”

“너도 저 얘기 못 알아먹으니까 여기 온 거 아냐?”

“그야 그렇지만…….”

저 앞에서는 계속 희미하게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매개체가 어떻다는 둥, 불러오기엔 힘이 부족하다는 둥,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벽 쪽으로 물러난 우리 둘을 신경 쓰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이게 왜 딴짓이냐? 그냥 체온으로 덥히는 건데. 너 감기 걸리면 골치 아프잖아.”

“……”

하긴, 감기 걸리면 골치 아프지.

특히 여름감기는 몸을 덥히는 것 자체가 죽을 맛이라서 힘들다.

게다가 계속 버둥거리기엔 그녀가 풀어줄 맘이 조금도 없으니 헛수고였고……

……무엇보다도, 그녀가 베푸는 따스함을 거절하기엔 점점 더 추워지고 있었다.

체념 섞인 한숨과 함께 몸의 긴장을 풀자, 그녀의 팔이 더 깊숙이 감싸고 들어왔다.

“어때? 아직 춥냐?”

“………아니. 괜찮아.”

남들 보는 앞에서 이러고 있다는 민망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어깨에서부터 온 몸으로 퍼지는 포근한 온기.

내 감정과 그녀의 체온이 만든 따뜻한 기운에, 몸을 으슬으슬 떨리던 쌀쌀함은 진작에 가셔 있었다.

문득, 차분한 향내가 코 끝을 간질였다.

시선을 살짝 움직이자, 그녀의 땋은 머리가 내 얼굴 옆에서 라벤더 향기를 은은히 풍기고 있다.

‘이제 안 올려도 되겠지’라며, 예전처럼 한 줄로 길게 땋아 내린 탓이었다.

“……”

……온 몸에 퍼진 따뜻한 기운이, 마음속 긴장까지 풀어버린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그 머리를 손바닥에 올리고, 엄지손가락으로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머리칼이 약간 흩어지면서 향기가 더 진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무슨 허브도 아니고.

속으로 자조하듯 웃으며, 땋은 머리 끝을 살며시 가져와 입을 맞추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모른다.

머리가 멍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향에 취했나?

“……”

두근. 두근. 두근……

가만히 심장소리가 들려온다.

나와 그녀,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다.

행여나 눈을 감으면 주인 찾겠다고 귀를 기울일 것 같아, 나는 저 앞에서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이러고 있는데 어떻게 쌀쌀함이 파고들겠어?

뜨겁게 활활 타오르지 않으면 다행이지.

“어깨 넓어졌네.”

“……엉?”

그 열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데, 그녀가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아주아주 조금이긴 한데, 너 어깨 넓어졌다.”

“……그래?”

“근육도 좀 붙은 거 같고.”

이번엔 팔뚝을 살살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으악, 이 녀석이 불타오르라고 아예 기름을 들이붓는구나!

살려줘!

“오늘 대련할 때도 좀더 힘이 실리고, 좀더 매서워진 것 같던데. 그러고보니 검은 안 썼지만 그 엘프들을 혼자서 상대했었지?

너 강해졌구나.”

“………그래봤자 한참 멀었는데, 뭐.”

그녀에 비하면 난 곰 앞에 선 쥐일 뿐이다.

도저히 따라갈 수도, 당해낼 수도 없는 아득히 먼 존재.

“그래도 이제 고블린 서너 마리는 거뜬할 거 같은데?”

“……그런가?”

“뭐, 아직 열 다섯 살짜리 실력이지만.”

……역시 성인까진 한참 멀었잖아!

자괴감에 한숨을 푹 쉬자, 그녀가 킥킥 웃으며 내 어깨를 한차례 더 꽉 끌어안았다.

“야, 그래도 너 엄청 빠른 거야. 거의 한 달 반 만에 여닐곱짜리에서 열 다섯 살 수준이 됐잖아.

꼬우면 매일 아침저녁으로 대련하든가.검술은 대련이랑 실전경험을 쌓는 것밖에 길이 없어, 임마.”

“……아뇨, 괜찮습니다.”

매일매일 아침저녁으로 대련한다고? 메린이랑?

검술 실력이 성년인 열 아홉 살이 되기 전에, 내 몸뚱이가 먼저 죽을 거다.

이제 블루벨도 일행에 합류했으니, 내 수명을 깎으면서까지 서둘러 강해질 필요는 없겠지.

마을 등의 안전한 곳에서 머물 때만, 그것도 아침에만 대련을 한다.

그녀가 세운 이 방침이 나에게 가장 맞는 훈련강도일 거다.

어차피 마을 바깥에 나가면, 하루에 두세 번 꼴로 전투를 치르니까.

그런 면에서, 지난번에 잡생각을 못하게 만들어주겠다고 며칠간 저녁에도 대련을 했던 그때는……

후후, 정말 죽는 줄 알았지.

오죽하면 메린 자신이 ‘안 되겠다’며 철폐했을까?

아무튼 나에겐 이 정도가 딱 맞는 것이다.

뒤지게 힘들지만, 몸이 곯지는 않는 딱 알맞은 정도.

물론 드래곤을 상대해야 하니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 되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잖아?

나 혼자 싸우는 것도 아닌데.

“뭔가 하려나보네.”

“……?”

그녀의 말에 앞쪽으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또 다시 피리소리가 울렸다.

이번 연주자는 골든로드.

거울호수가 아닌, 철퇴를 땅에 짚고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로나를 보며 연주하고 있었다.

그 옆에선 위슨이 로나를 향해 서서, 허공에 손을 휘젓고 있었다.

그 움직임을 따라 빛이 궤적을 그리며 어떤 문양을 하나하나 만들어내고, 문양이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로나에게 날아가 그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이전에 보라색머리 마녀가 냈던 것보다는 가늘고 약한 빛.

그러나 로나를 맴도는 문양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그 문양들 전체가 점점 더 강한 빛을 품어갔다.

그 건너편에선 블루벨이 눈을 감은 채 노래를 부르고 있다.

엘프어로 된 노래인지 가사를 알아들을 수가 없다.

피리의 선율과는 완전히 따로 노는 운율과 가락인데,희한하게 어떤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골든로드의 건너편에서 블루스타가 무언가 읊조리는지 입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

철퇴를 붙잡고 기도를 올리는 로나, 그런 그녀를 둘러싸듯이 서서, 각자 무언가를 하고 있는 네 사람.

대체 저게 무슨 상황인지 짐작도 안 된다.

그러나 그 광경을 보는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의문이 아닌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외였다.

왠지 모르게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나까지 따로 놀게 되면 메린 혼자 어리둥절할 테니, 무릎을 꿇는 대신 그녀의 손을 잡고 눈앞에 펼쳐진 기묘한 가극을 지켜보았다.

‘마음을 표하는 소리, 힘을 담은 문자.’

……마치 해설처럼, 마음속에서 속삭임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품은 소망이 한데 모여 하나의 울림이 되니.’

조금 전과는 다른 빠르고 격정적인 피리의 음색,

로나의 주위를 떠도는 스물 몇 개의 문자,

느릿하고 차분한 노랫소리,

주변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 기도와 말소리.

도무지 어우러지지 않는 울림들이 한데 섞여, 하나의 메아리가 되어 동굴을 울렸다.

‘그 하늘 위의 하늘을 울리는 기원(??)에, 답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 메아리 속에서 로나가 천천히 일어서더니, 땅을 짚고 있던 철퇴의 자루를 쥐고 그대로 바닥을 크게 때렸다.

쿠우웅­!

분명히 돌바닥을 쳤는데, 어째서인지 종소리 같은 묵직한 울림이 퍼지면서, 그때까지 동굴 안을 가득 채웠던 소리들을 집어삼켰다.

아까 거울호수 때 느꼈던, 무겁고도 무거운 적막이 사위에 내려앉았다.

이번에도 골든로드가 먼저 침묵을 깰 것인지 궁금해지는 찰나,

“……부름에 응하여 임하노라.”

메아리가 낀 로나의 목소리가 적막을 깨부숴버렸다.

로나는 철퇴자루를 쥔 손을 하나 떼더니, 나를 향해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가까이 오라, 용사여.……이중에 자격 있는 자는 그대 하나이니라.”

금빛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무감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선언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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