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화 〉 203화 : 계획은 틀어지는 법 (3)
* * *
나를 지명한 로나의 분위기도 그렇지만, 그녀의 주위에 서 있던 네 사람의 상태도 예사롭지 않았다.
골든로드와 위슨은 녹초가 된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고, 블루벨과 블루스타는 아예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다.
그들의 안부를 먼저 살피고 싶었지만, 나를 빤히 쳐다보는 로나의 시선이 묘한 압박감을 풍기는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문득, 골든로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완전히 지친 얼굴로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로나를 가리키면서 입을 달싹였다.
어…… 소리를 낼 힘도 없는 건가?
입 모양만으로는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뭐하냐? 얘기하라잖아.”
“꺄악!”
……아잇, 진짜!
그냥 말 걸 것이지, 왜 갑자기 옆구리를 찌르고 난리야!
깜짝 놀랐네!
“무, 뭐라고?”
“골든로드가 방금 로나 가리키면서 그랬잖아. 얘기하라고.”
그렇게 말하며, 메린은 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와, 이 녀석, 입 모양도 읽는 건가!
근데 활자 읽는 건 왜 서툰 거지?
아무튼 골든로드를 포함한 다섯 사람은, 내가 로나…의 모습을 한 어떤 존재와 이야기하길 바란 것 같다.
이대로 그냥 멀뚱히 있는 건, 저들의 고생을 수포로 만드는 거겠지.
싸우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하라는 건데, 못할 게 뭐 있어?
나는 위엄이 잔뜩 뿜어져 나오는 로나앞에 선 후, 크게 심호흡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그…… 뉘신지…….”
“나는 계시하는 자요, 만물의 주관자의 명(?)으로 소식을 전하는 자라. 이들의 기원(??)이 천상에 닿았기로, 그대에게 전할 말을 받아 임하였노라.”
만물의 주관자……이면 보통 창조주를 가리키는 말인데.
그럼 지금 천사가 로나에게 깃든 건가?
아니 뭐, 로나는 그래봬도 일단 사제이니까 악마를 불러올 리 없긴 하지만…….
“천사…이신 거죠? 로나는 괜찮은 건가요? 저기 저 둘은…….”
……그럼에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존재에게 몸을 빌려준 로나가 정말로 괜찮은 건지.
그리고 쓰러진 채 미동도 하지 않는 두 엘프도 무사한 건지.
내 질문을 들은 로나…가 아닌 천사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 어린 검은 본디 그릇이 빈 자요, 그 공허함을 신앙으로 메운 자라. 나의 시간이 끝나면 무사히 눈을 뜨리니, 그대는 염려하지 말지니라.
두 어리숙한 숲 또한 그저 기력이 쇠했을 뿐. 추후 눈을 뜰 것이니라.”
음, 다들 괜찮다는 것 같군. 그러면 됐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이자, 천사는 일순 한층 더 깊은 미소를 짓고,
“용사는 들을지어다.”
다시 무감정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바다의 자녀는 그 거처를 잃었으니, 그대의 발걸음을 남으로 옮기어 고래의 무덤으로 향할지어다.
대평원의 끝에서 여왕이 기다리고 있노라. 대언자의 충신이요, 전능자의 주석(??)이 그대의 길을 인도하리라.”
“……”
큰일이다.
남쪽에 있는 고래의 무덤으로 가라는 것 말고는 못 알아먹겠어……!
받아 적을 테니 다시 한번 더 말해달라고 해도 되나?!
“개의치 마라. 나의 전언은 그대의 기억에 확실히 심겨질지니, 차후에 조력을 얻으라.”
“아, 네…….”
“이후는 전언이 아닌 조언이니,”
천사는 나를 향해 빈 손을 펼쳤다.
“남측 산에 그대를 위한 진실이 자리하고 있노라. 허나 고통이 그대를 꺾으려 들 것이요, 그를 넘어서지 못하면 멸망을 피할 수 없으리라.
만일 감당하지 못하리라 여긴다면, 이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간 후에 남으로 향하여라.
용사여, 길을 선택하고 나아가라. 진실을 구하고 고통을 안을 것인지, 혹은 안락함 속에서 방황할 것인지.”
허세로라도 뜻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는 알쏭달쏭한 말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마음속에 깊이 박혀오는 듯했다.
여기서 남쪽 산에, 나를 위한 진실이 있다…….
“혹여 묻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말하라.”
전할 말은 더 이상 없는 듯했다.
나는 잠시 생각한 후, 두 금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일 년이라는 제한은 누가 정한 겁니까?”
“그대에게 허락되지 않은 지식이니라. 내가 답할 수 있는 것은 이 하나뿐. 만사만물은 전능자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노라.”
“……그럼 내년까지 드래곤, 아트라토스를 물리치지 못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죠? 세계가 어떻게 멸망하는 겁니까?”
“기묘한 것을 묻는군.”
살짝 눈썹을 올리며 그렇게 말한 후, 천사는 잠시 눈을 감고 침묵했다.
혹시 떠난 건 아닌가 슬슬 걱정되려는 순간, 천사가 다시 천천히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허락된 지식은, 마지막 징조의 일시와 그 방식뿐이로다.
……다음 4월, 하늘에서 별이 떨어져 지상의 절반을 부수고 태우리니, 이를 마지막 징조로 여기어라.”
“……!”
지상의 절반이 날아간다면, 설령 드래곤을 물리친다고 해도 회생하기 어려울 터.
……사실상 그전까지 드래곤을 물리쳐야 한다는 선고나 다름없었다.
지금이 7월이니까…… 앞으로 9개월인가?
생각 같아서는 내일 당장에라도 끝내고 싶다.
그리고는……
음, 역시 고향으로 돌아가겠지?
“다른 징조들은 또 무엇이 있나요?”
“답할 수 없다.”
“아트라토스는 완전히 깨어나 있는 건가요?”
“답할 수 없다.”
“정확히 북쪽 산 어디에 있나요?”
“답할 수 없다.”
“……”
아니 대답할 수 있는 게 뭐야?!
이럴 거면 왜 물어보라고 한 건데?
정말 어이가 없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멍해진 머릿속에, 어제 골든로드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자네는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른 채 여기까지 왔어. 하지만 누구도 그걸 깨우쳐줄 수 없고, 이끌어주지도 못하지.
……나 참, 아무래도 사명과 관련된 건 다른 누군가에게 들을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럼 하나밖에 못 물어보겠구만.
한숨을 푹 쉬며, 어째서인지 자애로운 미소를 띄고 있는 천사에게 물었다.
“위슨이 목을 고칠 방법을 어디서 찾을 수 있나요?”
시야 구석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눈 마주치면 괜히 어색해질 것 같아,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 질문을 들은 천사는,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찌하여 그것을 묻느냐?”
“자격 있는 자는 저밖에 없다고 하셨으니, 제가 대신 물어보고 싶어서요.”
나를 보자마자 천사가 했던 말이다.
그 자격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 천사와 말을 나눌 수 있는 건 나 하나뿐인 게 분명하다.
이 짧은 대화 내내, 천사는 오직 나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천사가 먼저 질문을 받겠다는 말까지 했다.
살면서 또 이런 기회가 언제 있겠어?
내 궁금증은 하나도 못 풀었으니, 대신 다른 사람 것이라도 풀어야 덜 아쉬울 것 같았다.
마침 가까이에 간절히 답을 찾는 사람도 있겠다.
잘됐지, 뭐.
“그를 가여이 여기는 까닭이더냐?”
“……그런 것도 있습니다.”
누구든 그를 동정할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가 어떤 음색인지도 모르는 열 다섯 살짜리 소년을 보고, 어떻게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질 더러운 파랑새가 실시간으로 위슨의 품위를 깎아 먹고 있는 것도 그렇고!
“하지만,”
……하지만 나는 어른이니까, 동정심만으론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골든로드 말마따나, 그래서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리고 부탁도 안 했는데 손을 내미는 건 위슨에게도 부담일 거야.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때 느끼는 건 고마움만이 아니니까.
그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어른답게 실리를 입에 담았다.
“하지만 그가 목소리를 되찾으면, 지금보다 한층 더 유용해지리라는 게 더 큽니다. 마법의 위력은 직접 체험해본 상태이니, 아트라토스 토벌에 큰 보탬이 되리라 믿습니다.”
“반대이지. 그대가 물음을 던진 것은, 그가 자유로이 소리를 내는 것을 보려는 소망으로 인함이니라.”
“………”
그리고 역시 초월적인 존재답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보다 다 알면서 왜 묻는 거야? 시험하는 거야, 뭐야?
차마 그런 불평을 입에 올릴 순 없어, 나는 그냥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천사는 그런 나를 향해, 부드러이 웃으며 말했다.
“허나 그것은 그의 과업. 스스로 푸는 것에 의미가 있느니라.”
“……”
나 참, 이것도 답을 못 듣는 건가?
정말 한숨만 나온다.
……아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스스로 푸는 것에 의미가 있다는 건, 위슨의 능력이 충분하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소리잖아?
즉, 그의 목은 언젠가 고쳐진다.
천사가 그걸 보장해준 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답을 구하는 자를 이끄는 것 또한 나의 일.”
“……?”
그렇게 말하며, 천사는 처음으로 위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숲의 사랑을 받는 자여, ‘끝없는 장서관’을 찾으라. 그곳에서 실마리를 얻으리라.”
“……!”
위슨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고개를 끄덕이자, 천사가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혹여 더 물을 것이 남아있느냐?”
“아뇨.”
“그 여인에 대한 것은 묻지 않는 것이냐?”
천사는 여전히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그렇게 물었다.
……그가 말한 여인이 누구인지는 불 보듯 뻔하다.
나를 향해 깊은 웃음을 짓는 천사에게, 나 역시 미소를 돌려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 다짐을 한 자 한 자, 말소리로 바꾸어 입에 올렸다.
“묻지 않을 겁니다.”
천사가 아닌, 나 스스로에게 들려주기 위해.
“……제 과업이니까요.”
온기를 전해주고 있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며, 단호히 대답했다.
힐끗 옆을 보자, 메린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다.
……방금자신의 이야기를 한 거라곤 꿈에도 모르겠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살짝 갸웃거리는 얼굴.
순수하게 반짝이는 주홍빛 눈동자를 향해 환히 웃으며, 맞잡은 손에 깍지를 끼우고 힘있게 잡았다.
“……그를 과업으로 삼는가. 그것이 그가 그대를 택한 이유로구나.”
“……?”
“그러하다면 청년이여, 남측의 산, 그 꼭대기에 있는 사원으로 향하여라. 용사를 위한 진실과 고통이, 그대의 과업에 대한 시련이 되리라.
……택함을 받은 용사이자 택함을 얻어낸 청년이여, 그대의 발걸음에 전능자의 빛이 있으라.”
천사는 말을 마친 후, 빈 손을 철퇴자루로 옮겼다.
아까 로나가 했던 것처럼 천천히 철퇴를 들고, 다시 바닥을 찍었다.
쿠우웅!
종소리와 같은 묵직한 울림이 또 한 번 동굴에 울린 뒤,
“잘됐나요?”
잿빛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로나가 나를 향해 방실 웃었다.
메린과 골든로드, 그리고 정령이 두 엘프와 위슨을 데리고 각각 집과 왕궁으로 서둘러 떠난 후.
“휴~ 예상보다 훨씬 더 잘 되어서 다행이네요~”
나는 로나와 함께 걸어서 돌아가고 있었다.
로나는 그저 천사에게 몸을 빌려주었을 뿐인지라 기력을 별로 쓰지 않았다는 듯했다.
“출발을 하루 늦출까?”
“아뇨, 예정대로 출발해도 문제없을 거에요. 메린 님이 계셔야 푹 쉴 수 있는 카엘 님과는 달리, 다들 한 체력 하니까요.”
“그렇구나.”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후, 헛소리할 정도로 기운이 철철 넘치는 사춘기 꼬맹이에게 딱밤을 먹여주었다.
“히잉…… 아파요…….”
“다행이네. 아프라고 한 거니까.”
“딴 건 금방 안 아파지는데, 왜 카엘 님 딱밤은 한참이나 얼얼한 거죠?”
“나야 모르지.”
빨갛게 부은 이마를 문지르면서, 로나는 정말로 신기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카엘 님, ‘바위궁전’에 다시 간 다음, 거기서 남쪽 산으로 가실 거죠?”
“응.”
메린에게 사람의 감성을 심는다는, 내 평생의 과업을 위한 시련이 거기 있다고 했다.
그리고 용사를 위한 진실이 기다리고 있다고도 했지.
……메린 때문이 아니어도 아마 그곳을 찾아갔을 거야.
제대로 답변 받은 게 하나도 없으니까!
“만약 위슨 씨가 가야 하는 ‘끝없는 장서관’이 반대 방향에 있다면요? 어디 먼저 가실 거에요?”
“그야 ‘장서관’ 먼저 가야지. 위슨의 목을 고칠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는데.”
나와 메린은, 적어도 몸은 멀쩡하니, 당연히 위슨을 더 우선해야지.
그 생각에 곧바로 대답하자, 로나가 한숨을 푹 쉬더니 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좀 고민이라도 하시죠? 카엘 님은 너무 양보하시는 경향이 있어요! 물론 그 뛰어난 배려심은 감격스럽지만요.”
“표정은 감격이랑 거리가 한참 먼데?”
“그야 걱정이 더 크니까요. 카엘 님의 그 배려심은, 스스로를 낮게 여기는 거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아닌데.”
훗, 내가 봐도 전혀 설득력이 없군.
일단 그녀의 시선을 피한 시점에서 거짓말이라는 걸 실토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나는 내 얼굴을 빤히 보는 그녀의 시선에 두 손을 들고 항복 표시를 했다.
“나 참, 너도 뭐 사람 속마음 읽냐?”
“설마요. 어디까지나 반응을 보고 추측하는 거에요. 전투사제에겐 두 번째로 중요한 능력이랍니다. 일반 사람들 중에서 이단을 찾아내야 할 때가 있거든요.”
“그럼 첫 번째는? 역시 전투능력인가?”
“땡! 보직 때문에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데, 전혀 아니에요!”
키득키득 웃으면서 로나가 손을 내저었다.
이 녀석, 그 ‘땡’이라는 말을 외칠 때 제일 밝게 웃는 것 같단 말야.
재미있나?
“그럼 뭔데?”
“믿음이에요.”
“……”
굉장히 사제다운, 정석적인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런 대답이 로나에게서 나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탓에, 나는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게 되었다.
“……지금 되게 뜻밖이라고 생각하고 계시죠?”
“………비밀이야.”
“그거 긍정이나 다름없잖아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대꾸한 후, 그녀는 샐쭉한 표정으로 재차 말을 이었다.
“내가 하는 일이 창조주를 위한 것이라는 것. 이단을 멸하는 것이 내 사명이라는 것. 창조주께서 나와 함께하시며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
무엇을 보고, 무엇을 부수고, 무엇을 해치게 되든,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답니다.”
믿음을 잃으면 바로 죽거든요.
느긋하게 덧붙이며, 로나는 방실방실 웃었다.
“엥? 죽어?”
“네, 죽어요. 저희가 발휘하는 능력들은 모두 신심이 기저(??)이거든요. 특히나 저 같은 전투사제는 전투가 일상인데, 전장에서 능력이 없어져봐요! 바로 죽지 않겠어요?”
그 때문에, 전투사제의 훈련과정은 다른 보직보다도 훨씬 강도가 세다.
몸도 마음도 완전한 무기가 되어야만 서품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국 꺾인다.
단순히 적의 힘에 밀린 거라면, 제 소명을 다하다 스러진 검으로서, 경의와 찬사를 받겠지.
“근데 대부분은 마음이 꺾인대요. 가끔 피에 미치기도 하고요.”
“왜……?”
“무엇이 계기가 되든 원인은 같아요. 의심. 의혹. 회의. ‘이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면 끝장인 거에요.”
……선대 왕, 아코나이트가 단 한 방울의 의혹으로 파멸을 불러온 것처럼.
로나는 기지개를 켜며, 마치 남 얘기를 하는 것처럼 태평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건, 그들의 본바탕이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마음을 차갑게 하고, 감정을 버리더라도 결국 사람은 사람인 거에요. 무기를 흉내내는 사람.”
“……”
풍요로운 도시와 평화로운 마을이 아닌 폐허와 잔해를 거닐며, 필요하다면 제 손으로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어야 한다.
사람의 상처와 마음을 치유하는 게 아닌, 그 상처를 헤집어 그에 깃든 사악을 꺼내야 한다.
일평생 피웅덩이와 잿더미 속을 다녀야 하는 그 삶을, 사람은 절대로 버티지 못한다.
그 때문에 전투사제의 훈련엔, 반드시 감정을 버리는 과정이 포함된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버리고, 그것을 느끼는 것처럼 흉내를 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억제하고 억누르는 것일 뿐.
언젠가 반드시 터져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전투사제가 꺾이는 때라고 그녀는 말했다.
“제가 고평가를 받은 이유도 거기에 있어요. 오래오래 활동할 수 있으니까요.”
“……”
천사가 그녀를 가리키며 했던 말이 슬며시 떠올랐다.
그릇이 빈 자.
공허함을 신앙으로 메운 자.
……어쩌면 로나는, 메린처럼…….
“카엘 님,”
그녀는 잿빛 눈동자를 깜빡이면서 나를 부르더니,
“저는 불쌍한가요?”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그 망설임 하나 없는 얼굴에 쓴웃음을 지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아니. 무시무시해.”
힘겹게 짜낸 대답을 들은 그녀는 환히 웃었다.
슬며시 떠오르기 시작한 달처럼, 어쩐지 가슴이 시리는 밝은 웃음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