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화 〉 외전 3) 잊지 않는 기억 (Side : Merin) (3)
* * *
※ 뒷부분은 196화 시간대입니다.
무언가 작은 바람이 닿는 느낌에, 그녀는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깊이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
분명 내려다보고 있었던 그의 얼굴이, 바로 정면에 있었다.
‘잤나……?’
멍한 머리를 움직여 기억을 되새겨보았다.
병상에서 잠들기 전에 항상 하던 것처럼, 그녀를 향해 내밀어진 그의 손을 잡은 건 기억하고 있다.
그대로 손을 그의 가슴 위에 올린 것도, 맞잡은 손 너머로 느꼈던 그의 미약한 심장소리도 다시 떠올릴 수 있다.
“……”
그리고 그 다음이 바로 지금, 카엘의 잠든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는 이 상황이다.
그렇다는 건, 그의 맥박을 느낀 직후에 잠이 들었다는 뜻이겠지.
‘참 희한해.’
그가 그녀의 손길과 체온에 평정을 찾거나 잠에 드는 것처럼, 그녀 역시 그의 근처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눈이 감기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며, 결국은 잠에 들게 된다.
그렇게 잠들어 있는 시간이 얼마나 짧건, 그녀는 집에서 홀로 잠에서 깨어났을 때보다 더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너도 그러냐?’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녀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후……”
마치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가 긴 숨을 내쉬었다.
아무 괴로움도 느껴지지 않는 숨소리.
아무런 주름도 잡히지 않은 편안한 얼굴.
그런 그를 보는 그녀의 입이 절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아직도 잡고 있던 손을 살며시 놓고, 메린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바닥에 섰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니, 하늘은 짙은 주황빛으로 밝게 빛나는 반면, 그 아래 땅은 어두침침해 있다.
하늘이 땅으로부터 빛을 거두어가는 것처럼.
‘어쨌든 저녁이군.’
소리 없이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한 후, 그녀는 다시 침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침부터 내내 자면서도 아직 잠이 부족한 건지, 카엘은 여전히 깨어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내버려두는 게 제일 좋겠지만…… 역시 저녁은 먹여야겠지.’
어제는 고열 때문에, 그리고 오늘은 계속 자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그의 뱃속은 텅텅 비어 있을 것이다.
국물이라도 먹이지 않으면 도로 상태가 나빠질 터.
조심스럽게 방을 나온 후, 그녀는 화덕을 보며 팔짱을 꼈다.
“음……”
이틀이나 쫄쫄 굶었으니 건더기가 있는 요리는 가급적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럼 결국 수프밖에 없는데, 채소만 넣은 수프로는 기력을 제대로 보충할 수 없다.
‘그렇다고 고기 넣을 수도 없고.’
열에 시달려 약해진 그의 위장은 고기기름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오늘은 안 된다.
“……”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무심결에 이리저리 살피던 그녀의 눈이, 벽 쪽에 놓여 있는 나무통에 꽂혔다.
그 안에는 한창 행사 감독을 하고 있을 카엘의 아버지, 엘리아스 앞으로 온 맥주가 들어있다.
‘맥주……. 맥주……?’
그래. 맥주.
고민하던 그녀의 표정이 일순 환하게 피었다.
맥주는 보리나 밀을 숙성시킨 것이니, 그냥 물보다 훨씬 좋을 것이다.
거기에 양파나 당근 등의 채소와 각종 치즈를 넣고 끓이면, 고기가 없어도 그럭저럭 힘이 나는 수프가 될 터.
맥주를 넣은 수프는 이 마을 사람들도 종종 만들어 먹는 음식이니, 딱히 이상한 요리도 아니다.
그러니 그의 입에도 잘 맞을 것이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녀는 곧장 식량창고로 가서 재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사냥을 하러 갈 때처럼 경쾌한 발걸음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수프가 담긴 냄비를 마지막으로 테이블 세팅을 마쳤을 무렵, 카엘이 터덜터덜 방에서 걸어나왔다.
두툼한 겨울옷을 걸쳐 입고,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그의 눈은, 아주아주 살짝 풀려 있다.
목욕통 안에서 깜빡 졸은 게 분명했다.
“역시 내가 씻겨주는 게 나았을 거 같은데.”
“응, 아냐.”
단호히 부정하는 그의 목소리엔 어느 정도 기운이 돌아와 있었지만, 여전히 그 발걸음은 불안불안했다.
열이 내리고서 장장 여섯 시간을 내리 잤음에도, 아직 걸어다니는 게 고작이라니.
그게 다 뱃속이 빈 탓이다.
그렇게 기운이 아직 없으면서도, 그는 목욕을 도와주겠다는 그녀의 제안을 한사코 거절했다.
그가 목욕물에 빠지진 않았나 살펴보려고 방 문을 열었을 때는, 아예 새된 비명까지 내질렀다.
‘정말이지, 뭘 그리 창피해하는 건지…….’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며, 테이블을 향해 고갯짓했다.
“다 됐으니까 앉아라, 똥고집아.”
“네가 아무리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근데…… 이게 다 뭐야?”
치즈를 넣은 맥주수프,양고기와 쇠고기를 잘게 다진 속을 넣은 파이,숙성된 포도향이 물씬 풍기는 조쉬의 푸딩.
그리고 데운 물에 담겨 있는 작은 포도주동이.
비록 하얀 테이블보도, 화려하게 꾸며진 촛대도, 잔칫상의 꽃인 통구이 요리도 없지만, 그럭저럭 축제일다운 저녁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적어도 메린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이거 다 네가 준비한 거야?”
완전히 얼이 빠진 표정이 우스워, 그녀는 풉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수프랑 포도주 빼고는 다 받은 거야. 케이크도 있는데, 그건 내일 먹는 게 나을 거 같아서 뺐어.”
“받았다고? 누구한테?”
“푸딩은 슐 언니, 파이랑 케이크는 사범님. 아, 촌장님이 맥주 한 통도 보내셨는데, 그건 아저씨 거니까 안 땄어.”
수프 재료로는 이 집의 식량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썼다.
다른 건 몰라도 맥주는 꼭 있어야 한다며, 엘리아스가 항상 넉넉히 보관해두는 덕분이었다.
“그 사람들이 왜……?”
멍하니 묻는 카엘을 마주보며,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범님은 축제 요리 준비 안 했을 거 같아서 주는 거래. 슐 언니는…… 글쎄. 아, 그 언니가 너 걱정하더라. 푸딩 꼭 먹으란다.”
“그래……? 들어가려나…….”
“한 입은 먹어야지. 그냥 푸딩도 아니고 ‘조쉬의 푸딩’인데. 그…… 아, 그래. 만든 사람 정성이 있으니까, 맛은 봐주는 게 도리잖아.”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며, 그녀는 푸딩과 파이를 각각 한 조각 잘라 그의 앞에 두었다.
“허, 그런 말을 어디서 배웠냐?”
“너한테.”
“나?”
수프를 뜨던 그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조금 전보다 더 크게 뜬 눈을 끔벅거리며, 그는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내가 그랬다고? 언제?”
“작년에 네가 처음 파이 만들었을 때.”
“엥? 진짜로? 음………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지, 그는 잔뜩 인상을 쓰면서 수프를 떴다.
그녀의 몫과, 자신의 몫을 다 뜨고 나서도 그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역시 기억 안 나는구나.’
늘 있는 일이다.
웬만하면 보고 들은 것을 잊지 않는 그녀와 달리, 카엘은 곧잘 이것저것 잊어버렸다.
처음에는 그가 양처럼 기억력이 나쁜 줄 알았으나, 오히려 반대였다.
그녀가 일반 사람들보다 뛰어난 것이지, 그의 기억력은 평범한 수준이었다.
즉, 이상한 건 그가 아니라 그녀 자신인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기억 안 나면 그냥 잊어버리고, 밥이나 먹어라. 별 중요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약간 가라앉아 있는 것에 의아함을 느끼며, 그녀는 작게 잘라낸 푸딩에 포도주를 살짝 뿌리고 불을 붙였다.
화르륵, 푸른 불꽃이 푸딩 조각을 감싸며 테이블을 한층 더 밝혔다.
“하하, 이러니까 축제일답네.”
“그러냐.”
그러고보니, 광장에서도 비슷한 걸 한다고 했었다.
이 작은 조각, 아니, 슐이 준 푸딩의 몇 배나 되는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이다.
그녀는 불꽃을 바라보며, 이 테이블보다도 더 큰 푸딩이 타오르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보았다.
‘……한 번 보고 싶긴 하다.’
얼마나 큰지는 몰라도 ‘거대한 푸딩’이라 했으니, 분명 사람 머리보다는 훨씬 크겠지.
떠들썩한 분위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거대한 푸딩이 불타는 모습을 보고, 그 조각을 먹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내년에는 진짜 데려가줄게.”
“엉?”
별안간 들린 중얼거림에 그녀가 시선을 돌리자, 그 역시 파란 불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이내 푸딩 조각에 시선을 떼고 수프를 휘적이면서, 그가 재차 중얼거렸다.
“대축일 축제. 내년 수확제도 그렇고…… 아니, 신년축제부터 데려가줄게. 대축일 축제만큼 볼 게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축제는 축제이니까.”
“아, 됐어. 축제는 무슨…….”
“……같이 가고 싶어.”
수프에 향해 있던 시선이 들리며, 그의 두 눈이 그녀를 향했다.
언젠가 숲에 있는 호수 바닥에서 보았었던, 그 깊은 물빛이 떠오르는 눈동자.
고요하게 그녀를 감싸던 그 푸른빛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촛불에 반짝이고 있었다.
“같이 가자.”
“……그러든가.”
그 눈이 그녀를 향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단호한 말투 때문에?
어쨌든, 그녀는 왠지 모르게 싫다고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 알 수 없는 싱숭생숭함에 눈살을 살짝 찌푸린 그녀의 귀에,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 참, 사범님이 파이를 나눠주시다니. 파이는 안 하길 잘한 거 같다.”
“왜. 네 것도 괜찮지 않냐?”
“엄청 맛있는 게 아니잖아. 클로다 씨가 한 거에 비하면 밀가루덩어리나 다름없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왠지 그게 신경이 쓰여,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툭 던졌다.
“다음에 해줘.”
“뭐?”
“다음 축제 때…… 아니, 내가 해달라고 하면 해줘. 고기파이.”
그러자 그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평소에 바쁜데 어떻게 하냐? 반죽도 그렇고, 속 만드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는데.”
“너 안 바쁠 때 해달라고 하면 되겠네. 얼마나 걸리든 기다릴 테니까, 아무튼 나중에 해줘.”
“……나 참.”
별 걸 다 조른다고 중얼거리면서도,
“알았다, 임마. 해준다, 해줘.”
어째서인지 환히 웃으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그녀가 기억하는 대축일의 밤이자 약속이었다.
벌써 7개월이나 지났건만, 그녀는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메린 소더는 맞은편에 엎어져 있는 연노랑머리 남자 같은 엘프가 아니다.
그녀에게 엘프의 피가 섞여 있지도 않다.
그녀를 낳은 부모는 놋지빌의 토박이인 인간이며, 그녀 스스로 자신이 인간이라고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유독 카엘과 연관된 기억은 오래도록 색이 바래지 않는다.
언제 일어난 일인지는 잊더라도, 그 일 자체는 절대로 잊히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처럼, 무언가 할 때마다 하나, 둘, 기억을 다시 돌아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 틈만 나면 되새긴다는 건……
그녀 자신이, 그 기억들을 잊고 싶지 않아 한다는 뜻이겠지.
‘참 신기해.’
다른 사람과의 일을 잊지 않으려고 그런 수고를 들이다니, 자신이 봐도 정말 신기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녀는 기름 묻은 천으로 계속 칼날을 닦았다.
“메린, 배 안 고파?”
“고파.”
“배고프면 먼저 먹지.”
“응…… 별로 안 땡겨서.”
엘프의 어머니라는 그 나무를 태워버리고, 이 엘프들의 숲에 온 애들로 만든 비료들이 보관된 지하실을 태워버린 후, 카엘은 또 다시 기력을 전부 잃고 축 늘어졌다.
그 모습을 보니 어째서인지 식욕이 당기지 않아, 그녀 역시 점심을 건너뛰고 말았다.
고향에서도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너 아까 거의 뻗어 있었잖아. 그거 보니까 뭐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던데.”
있는 그대로 그에게 전하자, 그의 얼굴이 살짝 굳으면서 약간 붉어졌다.
‘또 저러네.’
요즈음 카엘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면, 자주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돌린다.
껴안거나 하면, 예전보다 훨씬 더 당황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체온이 오르고, 심장소리가 더 빨라진다.
가끔은 바지가 살짝 부풀 때도 있다.
물론 그 이유는 알고 있다.
그 스스로 밝혔던 것처럼, 그가 그녀를 안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말을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메린 소더, 너를 좋아해.
‘좋아한다…….’
단어는 알고 있다. 그 뜻 역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게 어떠한 것인지는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진 않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어떠한 느낌인지, 그녀는 모르기 때문이다.
걱정하는 것은 다른 사람도 한다.
그가 다치는 걸 보기 싫은 것도, 그가 죽는 게 싫은 것도……
로나나 위슨 같은 ‘친한 사람’이면 다 하는 생각이다.
사람을…… 남자를 좋아한다는 건 무엇이 다른 것인가?
그가 말한 것처럼, 누군가에게 안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
아니면 그가 하는 것처럼, 누군가를 안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꾹 참는 것?
애초에 왜 참는지도 알 수 없다.
여행 중에 애를 배면 난감하니까 그런 거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네가 가능한 즐겁게 웃으며 살았으면 좋겠어. 가끔 불안하고, 무섭고, 슬퍼서 울고 화가 나더라도, 나머지 시간엔 환히 웃었으면 좋겠어.
……알 수 없다.
그가 들려준 그 말들을,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가 웃기를 바란 적이 없다.
환히 웃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그저 싫을 뿐이다.
그가 겁을 먹어 떨거나, 울고 있는 걸 보는 것이.
그의 가슴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항상 따뜻하고 잔잔하게 빛나는 그의 두 눈동자가, 그녀에게서 멀어지는 게 싫을 뿐이다.
난 네 마음을 원해.
그가 들려준 말들과 전혀 맞지 않는 이 생각들은, 대체 어떤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를 답답함에, 그녀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럼 대충 간단히 수프 끓인다.”
수프. 어째서인지 그 단어가 굉장히 크게 들렸다.
조금 전까지 대축일 때의 일을 떠올린 탓일까, 그녀의 입이 멋대로 말을 꺼내버렸다.
“나 고기파이.”
“뭐? 별로 안 땡긴다며.”
“갑자기 먹고 싶어졌어. 만들어주라.”
그의 푸른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기억하고 있을까?’
그 대답은 그녀 스스로 알고 있다.
그는 기억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한 달 전 일도 깜빡깜빡하는 그가, 7개월 전의 일을 기억할 리가 있나.
그걸 알면서도, 왠지 모르게 그녀는 그의 대답이 기다려졌다.
“어…… 지금? 그거 시간 좀 걸리잖아.”
“……”
……역시 그는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알고 있듯이, 그건 7개월도 더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 뒤에 그에게 고기파이를 부탁한 적도, 약속을 상기시킨 적도 없다.
평범한 기억력을 지닌 그가 잊어버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걸 지금도 기억하는 자신이 이상한 것이다.
그가 축제 때마다 데려가주겠다고 했던 약속은, 그녀 자신이 계속 거절해온 거지만.
아니, 어쩌면 그저 축제이니까 같이 가자고 하는 것일 뿐, 약속 자체는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뭐, 어때.’
……설령 그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그녀 자신이 기억하는 한, 그 약속들은 계속 살아있다.
정말로 있었던 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때에 그가 짓던 표정, 그의 한 말.
정말로 있었던 그 일들을 다시 떠올리는 걸로도 속이 따뜻해지니까.
그 일들은 꿈도, 환상도 아니니까.
그래서 그녀는 슬며시 웃으며, 그에게 대꾸했다.
“기다리는 동안 수프 끓여 먹으면 되지.”
7개월 전의 그날처럼, 수프와 함께 고기파이를 먹는 것이다.
비록 맥주수프는 아니겠지만, 그녀에게 그 차이는 별달리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네가 만든 파이, 간만에 먹고 싶어.”
“……저번에 먹었잖아.”
“그건 호박이었고. 너 고기파이 잘하잖아. 해줘.”
그날처럼 그녀가 수프를 끓이고, 그녀가 그에게 파이를 조르고,
“…………뭐, 그렇게 먹고 싶다면야…….”
……그날처럼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
그녀에겐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또 다시 빨갛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웃음지었다.
……그가 바라는 것처럼, 환하고 환한 웃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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