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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213화 (213/475)

〈 213화 〉 206화 : 뜻밖의 시간 (1)

* * *

율리아 공주의 단짝인 까마귀가 돌아간 후, 나는 메린과 로나, 두 사람과 함께 의사당으로 향했다.

입구에 자리한 접수원에게 암피오 의장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잠시 뒤, 우리 세 사람은 이전처럼 의장실로 안내를 받았다.

이번에도 의장은 우리에게 커피를 대접했고, 나는 지난번처럼 크림과 설탕으로 캐러멜 빛깔로 만든 후,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용사,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정말 반갑군.”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엘프가 스스로 볼모를 보낼 정도로 아주 박살을 냈다면서?”

“아닌데요.”

“아니긴! 우리 정찰병이 똑똑히 봤네. 엘프 놈들의 숲 쪽에서 커다란 흰색 불꽃이 피었다 하던데? 그 뒤에는 잿빛 연기가 마구 피어올랐고.

하핫, 정말 축하하네, 용사! 엘프의 숲을 불태우고 싶어하더니, 무사히 염원을 이루었군!”

“그런 소리 한 적 없다니까요!”

돌겠네, 진짜.

블루벨은 볼모가 아니고, 나는 엘프의 숲을 불태우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다.

상황에 따라 불태우겠다고 다짐했을 뿐이지!

그리고 박살을 냈다니?

나와 내 일행은 그런 망측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저 엘프를 타락시킨 원흉을 찾아내어 쫓아냈을 뿐.

그 과정 중에 왕의 친위대와 경계를 서는 엘프들을 조지고, 오염되고 뒤틀린 생명수를 성검으로 태웠을 뿐이다.

덤으로, 생명수 근처에 있던 창고…… 아니, 희생된 애들의 시신들을 태우기도 했지.

아무튼 ‘박살을 냈다’고 할 만한 짓은 전혀, 개미 솜털만큼도 하지 않았다.

“……”

………박살낸 건가?

왠지 깨달으면 안 될 것 같은 사실이 밝혀질 것 같아, 손을 휘휘 내저어 머릿속 상념들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만족스럽게 껄껄 웃고 있는 의장에게 말했다.

“……아무튼, 저희와 같이 온 엘프는 볼모가 아닙니다.”

“그럼 뭔가?”

“동료요.”

“동료? 자네의?”

“네.”

의장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잠시 나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일족 전체가 자네의 적 아니었나?”

“그랬죠.”

“근데 어떻게 동료가 돼? 원래 그 숲의 추방자라도 되나?”

“그게 말이죠……”

중간중간 커피를 홀짝이며, 나는 드워프의 최고권력자, 암피오 의장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그 숲에 나흘간 머무르며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드워프를 성가시게 하던 그 엘프 왕의 최후가 어떠했는지…….

의장은 내가 이야기를 마치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완전히 박살을 냈군!”

“………아니라니까요!”

부정은 했지만, 나 역시 그 말이 어느 정도 맞다는 걸 알고 있다.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나 스스로 어렴풋이 깨닫고 만 것이다.

나와 내 일행, 즉 블루벨을 뺀 우리 네 명이 엘프의 숲을 아작냈다는 것을……!

나는 친위대원들을 조져버렸고, 메린은 친위대장의 목을 날렸으며, 위슨……의 정령들은 숲의 경계병들을 박살냈고, 로나는 살짝 비뚤어질 것 같은 엘프 장로들을 보내버렸다.

후후후후, 다들 하나씩 저질러버렸는걸?

죄다 공범이야……!

끝까지 같이 가는 거라고……!

뭐, 그걸 후회하는 건 아니다.

솔직히 멀쩡한 걸 잿더미로 만든 게 아니잖아?

이미 썩어버린 걸 치웠을 뿐인데 후회할 게 어딨어?

굳이 한다면……

좀더 빨리 가지 못한 게 후회스럽지.

아무튼, 의장의 말은 일부만 옳다.

왜냐?

박살내긴 했지만, 완전히 낸 건 아니니까……!

“뭐, 자네 이야기는 알겠네.”

의장은 턱을 문지르며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하지만 엘프는 엘프야. 그 숲에 아직 ‘왕’이 있는 이상, 엘프는 아직 우리의 잠재적인 적일세.”

……선대 왕의 업보가 깊구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자네가 동료라고 했으니…… 뭐, 어쩔 수 없지.”

“……”

가만히 잔을 기울이며 그녀의 결정을 기다렸다.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그 엘프에게도 무구를 마련해주지.”

“예, 알겠……네?”

어라?

예상한 거랑 정반대인데?

멀뚱멀뚱 의장을 바라보자, 그녀가 한숨을 푹 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좀 그렇기는 해. 하지만 어쩌겠나? 용사를 지원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인 것을.

용사인 자네가 동료로 받아들였다면, 우리 역시 그 엘프를 인정해야 하겠지.”

“우와, 어른이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중얼거렸다.

세상에, ‘우리의 적을 동료로 맞이했으니 너희도 적이다!’라고 선포하면서 쫓아낼 줄 알았는데!

앗, 아니야.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어쩌면 이곳 ‘바위궁전’이 아닌 바깥에서 머무르라고 내보낸 다음, 지원해주기로 한 무구만 따로 보낼지도 몰라.

의장은 작게 땋아 내린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엘프에게, 이곳을 돌아다닐 자유까지 줄 수는 없네. 놈들의 수작 때문에 가족이나 친우를 잃은 자들이 좀 있거든.

물론 의회가 그 엘프의 체류를 허락했으니, 숙소에 쳐들어가진 않을 거야. 하지만 엘프가 나다니는 걸 직접 본다면…… 글쎄, 아무 보장도 할 수 없군.”

그런 소란이 일어나는 건 질색일세.

그렇게 덧붙이며, 그녀는 찻잔을 기울였다.

……와, 안 쫓아내는 거야?

이야, 진짜 어른이네.

속으로 감탄하는 나를 대신해, 로나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면 무구를 어떻게 준비하나요? 무기는 어쨌든, 옷은 치수를 재어야 할 텐데요.”

“……그게 다음 회의 주제일세.”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며, 의장이 투덜거렸다.

그 후, 우리는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 엘프의 숲을 향해 펼쳐져 있는 진영으로 향했다.

드워프들에게 빌린 장비들……

즉, 망토와 ‘손목 갈고리’, 쓰다 남은 끈끈이 공, 그리고 메린에게 주어진 검을 돌려주기 위해서이다.

그런 우리를 맞이한 건, ‘바위의 일족’이란 말에 어울리는, 무척이나 딱딱한 인상의 남자였다.

“마르미노 스트레토 대장이오. 만나게 되어 영광이외다.”

“아, 예. 카엘 에스트렐이라 합니다.”

“귀하의 활약은 이미 들었소. 내 손으로 놈들을 불살라버리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쉬우나, 놈들이 징벌을 받은 것은 기쁘다오. 정말 고맙소이다.”

“……”

누가 들으면 숲 전체가 불탄 줄 알겠네.

내가 태운 건 나무 두 그루랑 꽃 몇 송이밖에 없다고!

그러나 대장이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진중하게 감사인사를 하는 탓에, 나는 그저 넋을 내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여, 우리의 무구가 도움이 되었소? 다른 것은 몰라도 ‘손목 갈고리’는 단기간에 익히기 어려운 장비인 터라, 조금 애를 먹었을지도 모르겠군.”

“아, 예. 그 부분은 훈련교관에게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요긴하게 쓸 수 있었어요.”

“그거 다행이로군.”

다른 세 명은 어쨌든, 나는 그 장비 아니었으면 정말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친위대원은커녕, 경계병조차도 이기지 못했겠지.

그런 유용한 장비를 이제 쓸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손목 갈고리’는 어디까지나 전투를 위한 장비이지, 여행을 위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어디 수직절벽을 올라갈 것도 아닌데, 잘못하면 사고가 날 수 있는 전투장비는 없는 편이 낫다.

솔직히 손목에 차고 풀고 하는 것도 좀 번거롭고.

대장은 여전히 웃음기 하나 없는 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망할 터이니, 더 붙잡지 않겠소.

용사 카엘, 정말 감사하오. 귀하 덕에 나와 내 부하들 모두 한시름 놓았소. 부디 ‘바위궁전’에 편히 머물다 가시오.”

“아, 예. 음, 말씀 감사합니다.”

그가 내민 손을 마주잡고 악수를 나눈 뒤, 우리는 막사를 뒤로 했다.

어느 정도 멀찍이 떨어져 나온 걸 확인한 다음,

“하아아아………”

나는 참고 있던 한숨을 단번에 푸우욱 내쉬었다.

와, 씨, 쓸데없이 긴장돼서 죽는 줄 알았네!

“아니 한 명밖에 없었구만, 뭘 그리 긴장을 하냐?”

“후…… 세상에는 말이지, 메린. 그냥 서서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를 무겁고 딱딱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단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대개, 혼자서 거진 두세 명분의 위압감을 뿜어낸다.

방금 전의 그 스트레토 대장은 표정까지 딱딱해서 그런지 거의 열 명분은 되는 것 같았어.

괜히 대장이 된 게 아닌 거지, 암.

“지랄. 그냥 혼자 쫀 거면서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니라고, 이 둔탱아. 넌 머리에 더듬이도 달렸으면서 그것도 모르냐? 야, 이걸로 주변 상황만 파악하지 말고 분위기도 좀 감지해라. 제발.”

“더듬이 아니거든, 등신아. 왜, 부럽냐? 부러우면 만들어줄게.”

앗. 음산한 기운.

재빨리 뒤로 빠지며 머리를 감싸려 했지만 녀석의 손이 더 빨랐다.

정수리 부근의 머리카락이 한 움큼 잡히는 순간, 온 몸의 피가 얼어붙으며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쭉 당기면 생기겠지. 안 그러냐?”

“아냐아냐아냐, 안 생겨, 안 생긴다고, 안 생기니까 이거 놔, 이 사악한 새끼야!

아, 와아악! 뽑혀, 새꺄, 뽑힌다고! 으아아, 안 돼요, 귀하게 키운 머리카락이에요, 살려주세요, 메린 님!”

이 자식, 하필이면 머리카락을……!

메린의 완력이라면 머리카락만 뽑히는 걸로 안 끝나, 머리가죽까지 뜯겨져 나갈 거라고!

그렇게 되면…… 로나가 있으니까 머리가죽이 뜯어져도 죽지 않겠지.

하지만 머리카락은 완전히 죽을 거다!

“메린 님,”

그때, 로나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말투가 조용한 걸 보니 말려주려는 게 분명하다.

제발 부탁이야, 내 머리카락을 구해줘……!

“군수장교 저쪽에 있는 거 맞죠? 왠지 저쪽 같은데…….”

“지금 그게 중요해?! 이거부터 말려줘야 할 거 아냐!”

“네? 사이좋게 놀고 계시는 걸 제가 굳이 왜요? 아무튼 가요!”

“노는 거 아냐, 임마! 아, 우와아악, 얌마, 메린 이 자식아, 걷지 마! 아무리 그래도 이대로 가는 건 좀 너무하는 거 아니냐?!”

……결국 메린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로 군수장교에게 간 다음, 위슨 몫을 포함해, 빌렸던 장비들을 모두 반납했다.

‘혹시 모르니 얼굴 보여달라’고 군수장교가 요청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내내 머리채 잡혀 있을 뻔했다.

“흑흑, 고마워요, 장교님. 당신이 제 머리카락을 구했습니다……!”

“훗, 아닙니다, 용사님. 전 그저 도리를 다했을 뿐입니다. 머리카락은 목숨만큼 소중하니까요……!”

울먹이는 내 손을 힘차게 잡으며, 군수장교는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에 맺힌 작은 눈물이 조명 빛을 반사하며 서글프게 반짝였다.

……완전히 벗겨진 그의 윗머리와 함께.

“……머리가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뭔 헛소리야?”

“아하하, 누구든 소중한 게 있는 거에요, 메린 님!”

뒤에서 들리는 두 잡음을 무시한 채, 한동안 그와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다시 ‘바위궁전’으로 내려온 후,

“어쩔까.......?”

나는 팔짱을 끼며 광장에 멈춰 섰다.

“어쩌긴, 숙소 가야지. 장비들, 아직 완성 안 됐을 거 아냐.”

“……”

물론 그렇기는 하다.

지난번, 여기 ‘바위궁전’의 최하층에 있는 개발연구소에 유니콘의 뿔을 전달할 때 들었다.

이들이 지원해주기로 한 무기와 옷들이 완성되면, 그 연구소에서 확인해야 한다고.

그때 무기는 대강 사나흘쯤, 그리고 옷은 대략 일주일 정도 걸릴 거라고 했다.

오늘이 그날로부터 엿새째니까……

아마 내일 오후에나 완성되겠지?

그러니 모레 아침에 방문하는 게 가장 확실할 것이다.

“아니면, 오늘 가서 경과를 확인해보시는 게 어때요?”

“음………… 싫어.”

고민 끝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거기 너무 덥고, 무엇보다…… 거기 소장이랑 또 만날 수도 있잖아. 거긴 가급적 안 가고 싶다.”

“아…… 네에, 소장님이 좀…… 많이 특이하시긴 했죠…….”

좋게 말해서 특이한 거지, 그냥 미친 사람이었다.

연구실적이 뛰어난 미치광이……!

메린이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리더니 “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치,”

“그래그래, 그 굉장히 독특한 분 말야. 응, 그래서 그냥 내일 저녁이나 모레 아침에 가려고.”

메린의 입을 재빨리 손으로 막으며 약간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그게 빼도 박도 못할 진실이라 해도, 가끔은 입 밖이 아닌 속으로만 중얼거려야 하는 법이다.

지금처럼 드워프들이 오가는 광장에서, 다른 드워프의 뒷담을 할 때와 같은 경우엔 더더욱!

아무튼 지금 당장 그곳에 가야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블루벨의 장비 문제도 걸려 있으니, 숙소에서 의회의 결정을 기다리는 게 가장 낫겠지만……

“……”

역시 이대로 돌아가는 건 조금 아쉽다.

아직 오전이고……

……나는 이 눈치 없는 둔탱이와 약속한 게 있으니까.

“저기, 로나. 같이 시장에 가자.”

“네? 왜요? 뭐 사실 거 있나요?”

“어…… 음, 이 녀석한테 맛있는 거 사주기로 했거든. 원래는 다같이 먹으러 가려고 했는데, 위슨이랑 블루벨은 숙소에 있잖아. 그러니 그 둘 몫까지 먹을 거 사서 가져가려고.”

왠지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나는 뺨을 긁적이며 시선을 저편으로 돌렸다.

“아~ 그런 약속을 하셨어요~?”

시야 바깥에서 로나의 늘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나 녀석, 분명히 히죽거리고 있을 거야.

으으, 맹랑한 사춘기 꼬마 같으니라고!

“아, 그야 물론이죠~ 그런 거라면 친히 협력을 해드려야죠~ 그러니,”

“……?!”

갑자기 내 쪽으로 무언가 넘어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붙잡아 보니,

“……”

메린의 머리가 바로 턱 아래에 놓여 있다!

허둥지둥 그녀를 다시 똑바로 세우는데, 저 멀리서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이서 오붓한 시간 보내세요~! 점심도 드시고 오시고요~! 꺄아아, 데이트한다, 데이트~!”

“얌마, 데이트 아니야! 야, 이 자식아, 너 거기 안 서?!”

……그러나 로나는 이미 저 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저 망할 꼬맹이, 대낮에, 그것도 사람 많은 데서 그딴 말을 외치다니……!

드워프가 남의 일에 관심이 없어서 망정이지!

“……저 녀석, 진짜 돌겠네.”

입 밖으로 투덜투덜거리며 메린을 돌아보니, 그녀가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살짝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꿈에도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뭐. 왜. 저번에 약속했잖아. 기억할 거 아냐.”

“……기억하고 있었냐?”

“사흘 전에 한 건데 당연하지. ……약속한 건, 대부분 기억한다고.”

전부 기억한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녀가 고기파이 해달라고 할 때 해주기로 한 약속은 까먹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솔직히 네 잘못도 있지 않냐?

약속하지 않았냐고 따지지 않았으니까.

그 한 마디만 해줬으면 바로 기억했을 텐데, 네가 말을 안 해줘서 저녁에 수첩 쓰다가 기억났잖아.

어쩌면 그 약속 말고도 여럿 까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녀석이 통 말을 안 하니까.

……나 참, 약속을 혼자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건 꽁해서 말을 안 하는 거야?

참 웃긴 녀석이야.

“……아무튼, 가자.”

그녀의 손을 잡고 냅다 걷기 시작했다.

그 심술쟁이 사제님이 점심까지 먹고 오라고 했으니, 오후 티타임 언저리에 돌아가면 되겠지.

데이트라니, 나 참, 진짜 어이가 없어서.

“……”

……진짜 어이가 없다.

데이트 아닌데, 이렇게 들뜨다니.

……진짜 아닌데.

그녀가 뒤에 있어서 내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것에 안도하며, 나는 그녀와 함께 시장으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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