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화 〉 207화 : 뜻밖의 시간 (2)
* * *
메린과 함께 드워프의 시장을 다니는 건 처음이 아니다.
지난번…… 대충 닷새 전에 왔었지?
다른 두 녀석이랑 같이.
그러고보니 그날 밤, 메린의 머리를 빗겨줬었지.
엘프들에게 머리 잡힐지도 모르니까 바짝 올리는 게 좋을 거 같아서, 그녀에게 핀을 주면서 제안했었다.
근데 이 녀석이 시범 보여달라고 하는 바람에……
음, 뭐, 결국은 잘 끝났지만.
그리고 그 전날 밤엔……
“……”
키스, 했었지.
목도 만지고.
뭐, 그냥 서로 입술을 맞댔을 뿐이었다.
진짜 말 그대로 입맞춤이었지.
하지만 이틀 전엔…… 음, 깊었다.
그녀의 입술을 살짝 핥았을 때나 혀끝이 맞닿았을 때, 그녀가 살짝 몸을 떨며 얕은 숨소리를 내뱉는 거에 끌려서 그만……!
숨이 부족해져서 얼굴을 뗀 후에야 깨달았다.
그녀가 침대에 누워 있고, 내가 그 위에 엎드려 있고……
또 내 손이 뭘 하고 있었는지를……!
후우, 내가 그때 그녀에게 뭐라고 하며 방을 나왔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그건 그렇고, 엄청 부드러웠었지.
셔츠 위였는데도 그 정도면, 맨살일 때는 얼마나 굉장,
“뭔 생각하냐?”
“히잇!”
나도 모르게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올랐다!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리며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 으, 무, 뭐?!”
“뭔 생각하냐고.”
“아,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
“뻥치네. 저 앞만 멍청히 보고 있다가 갑자기 손을 뚫어져라 쳐다봤으면서. 뭔 생각했냐?”
제길, 쓸데없이 그런 건 또 왜 쳐다보고 있대?
돌겠네, 뭐라고 해야 되지?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는데!
‘네 가슴 생각하고 있었다’고 어떻게 말해?!
이 녀석은 괜찮아도 내가 안 괜찮아!
나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머리를 겨우겨우 굴려서, 간신히 대답을 냈다.
“다, 다섯 개면 충분할까 생각하고 있었지!”
“뭐? 저 샌드위치를? 우와, 너 그렇게 배고팠냐?”
“아니, 크, 크로케! 숙소 돌아갈 때, 다섯 개면 충분할까 싶어서……!”
거짓말은 아니다.
방금 막 생각해낸 거긴 하지만, 숙소 갈 때 뭔가 사가려고 하긴 했으니까 아무튼 거짓말 아니야!
“크로케…… 아, 그 으깬 감자 튀긴 거? 어. 대충 손바닥만 한 크기였으니까 다섯 개면 되겠네.
그러고보니 지난번에도 그거 먹었었지 않냐? 이번 게 훨씬 낫더라.”
“그, 그래? 잘됐네. 그럼 이따 거기서 또 사지, 뭐.”
그리고 그녀는 그 이상 묻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몇 번 까닥였다.
가게 앞에 사람이 몇이나 서 있는지 세어보는 듯했다.
……휴, 어떻게 잘 넘어갔군.
아까 했던 팽이치기보다 몇 배는 더 심장 떨렸어.
“유명한 가게인가? 뭔 줄이 열 명이나 서 있대?”
그녀가 살짝 표정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시장에 오자마자 먹은 크로케와 봄볼로네는, 두 시간동안 돌아다니면서 전부 소화되어버린 듯했다.
하긴 말이 시장이지, 크기가 거의 마을 하나이니 뭐…….
어쩐지 도시 전체가 시장이나 다름없던 말리스가 생각난다.
물론 여기는 거기보다 작고, 구경꾼을 현혹시키는 각종 화려한 장식도 없다.
하지만 나는 이 ‘바위궁전’의 시장이 훨씬 마음에 든다.
일단 돈독이 덜 올랐으니까!
뭐, 처음에 내가 혼자 시장을 돌아다녔을 때는 환전 사기를 당하긴 했지만, 그건 상인이라는 종족의 고유 특징이겠지.
아무튼 우리는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음악과 춤 공연을 구경하거나,팽이를 던져보거나, 바람총을 불어서 표적을 맞춰보거나, 대장간을 둘러보거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점심거리를 찾는 중이다.
“그럼 다른 거…… 아니지, 야, 메린, 그냥 식당 가자. 푸딩이나 케이크는 어차피 실내에서 먹어야 하잖아.”
“비쌀 거 아냐. 의자도 작고.”
“여기 사는 사람들도 사 먹어야 되니, 안 비싼 식당도 있겠지. 그리고 좀 비싸도 괜찮아.”
원래 갖고 있던 돈도 아직 넉넉한데, 아까 율리아 공주의 까마귀가 또 금화 한주머니를 전해주었다.
신전에 맡긴 돈도 아직 한 푼도 안 썼는데.
……돈 쓸 일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어째 계속 쌓이고 있다.
남은 돈은 신전에 돌려주면 되나?
아무튼 그녀가 돈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지금 그녀가 걱정할 건, 배가 터지지 않을까 하는 것.
그거 하나뿐이다.
지난번 약속은 애매하게 지켜버렸으니까 말야.
이번엔 완전하게, 확실하게 지켜야지.
“그리고 의자는 안 작을걸? 아까 공연 객석도 컸잖아.
아무튼 빨리 식당 찾으러 가자. 배고프다.”
그녀의 손을 잡고 살짝 당기며 재촉하자, 그녀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적당해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가 앉았다.
천장과 테이블이 좀 낮긴 했지만, 의자 크기는 넉넉했기에 별 문제없었다.
나는 펜네 그라탕, 메린은…… 뽀모 어쩌고 하는 걸 주문했고, 우리는처음 느끼는 풍미에 서로 마주보며 감탄했다.
“야, 이거 먹어봐. 치즈가 엄청 진해.”
“음…… 와, 이렇게 진한 건 처음 먹어봐. 야, 너도 이거 먹어봐라. 저번에 그 의장이랑 먹었던 것보다 좀더 새콤해. 자.”
서로서로 한 입씩 먹여주고,
“……오. 근데 뭔 향이 강하네. 향신료인가?”
“마늘인가 뭔가 하는 거일걸? 창고에 있는 거 봤는데 향이 똑같아. 저번엔 뭔지 몰라서 안 썼는데 이따 저녁에 써볼까?”
“좋지. 아, 그 숲에서 잡은 고기 아직 남았지 않냐? 마늘 넣어서 미트볼 하자, 미트볼.”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눈다.
“이게 네가 말한 푸딩이지? 판나…코타랬나? 야, 이거 봐라, 막 흔들려! 근데 안 무너지네, 되게 신기하다.”
“오, 달다.”
“얌마, 왜 네가 먼저 먹냐?!”
“얜 먹으라고 있는 거지, 구경하라고 있는 게 아니란다. 우와, 야, 알았어. 이거 한 입 줄 테니까 눈의 힘 풀어. 어우, 무서워라.”
디저트보다도 훨씬 더 달콤한 그녀의 웃음을 만끽한 후, 또 다시 그녀와 함께 거리를 걷는다.
의사당을 본 따 만든 조각품에 감탄하고, 마치 열쇠처럼 무언가 꽂혀져 있는 걸 돌리면 음악이 나오는 것에 깜짝 놀란다.
그 뒤, 그깟 걸로 놀라냐며 서로 놀리며 웃는다.
파란 하늘에 닿은 산맥을 그린 그림.
그 앞에 잠깐 멈춰 서서, 이전에 눈에 담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그 하나하나가 무척이나 즐겁다.
무언가 구경하지 않고 그냥 길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녀와 함께 있으니까.
거리에서 들은 노래가락을 흥얼거리는 목소리.
내 입에 과자를 들이밀고 낄낄 웃는 얼굴.
춤 공연의 발동작을 조금 따라해보는 모습.
어떤 화려한 공연보다도, 심금을 울리는 음악보다도, 내 눈과 귀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으니까.
……데이트하는 것도 아닌데.
“은근히 이것저것 많네. 그렇게 다녔는데도 아직 못 본 데도 있고.”
“내일 딴 애들이랑 또 나가든가.”
“싫어. 그럼 너랑 블루벨만 남잖아.”
“아, 그래.”
숙소로 돌아가는 이 순간까지도, 심장은 계속 빠르게 뛰고 있다.
봄볼로네와 크로케, 마지팬 등등, 각자 간식거리가 든 꾸러미를 들고 걷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손을 잡고 가는 것보다도 더 쑥스럽다.
……왠지 무도회에서 춤을 추었던 것만큼이나 선명하게,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
“……”
나 참, 이게 뭐 특별한 거라고 감상에 젖고 있냐?
진짜 데이트면 또 몰라, 그냥 친구끼리 시장 구경하며 놀았을 뿐이잖아.
오늘 우리는 데이트를 한 게 아니다.
왜냐면…… 데이트는 서로 이성적인 호감을 품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니까.
우리가 오늘 보낸 시간을 데이트라 하기엔, 한 사람분이 부족하다.
……그렇지? 메린.
투웅. 끼이익
‘주택 층’에 도착한 승강기의 문을 열고, 숙소를 향해 걸었다.
곳곳에서 작은 가방을 맨 어린 드워프들이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고 있다.
개중에는 문 안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뛰쳐나와, 제 친구들로 보이는 다른 애들과 어디론가 달려가기도 한다.
보이는 모습은 확연히 다르지만, 어쩐지 낯설지 않은 풍경.
……우리는 겪어보지 못한, 따스한 풍경이었다.
“……야, 메린.”
나는 그 애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오늘 즐거웠어?”
그럴 리가.
……오락거리들 대부분은 우리 키에 맞지 않아서, 우리는 말 그대로 여기저기 먹고 돌아다니기만 했다.
나와 달리, 그녀는 몸을 움직이는 걸 더 좋아하니까……
지루하진 않았더라도, 즐겁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터.
그걸 어렴풋하게 알면서도, 나는 그녀에게 굳이 묻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둘러대면 되는데, 그녀의 대답을 굳이 기다리고 있었다.
……승강기에서 감상에 젖었던 게 아직 이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건만, 나 홀로 이 깊은 지하에서 뜨지도 않은 노을에 잠겨 있는 기분이었다.
메린은 똑바로 앞만 보던 시선을 살짝 돌려서 나를 본 후,
“응.”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공연도 보고, 팽이치기도 하고, 바람총도 불어보고, 혼자 춤추는 나무인형도 보고…….응, 재밌었어.
그리고 크로케랑 파스타랑 푸딩…이 아니라 판나 코타랑 케이크랑 전부 맛있었고.”
“어? 아, 그래? 음, 뭐, 다행이네. 하, 하하.”
우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인데, 이거……!
덕분에 오히려 내가 허둥지둥하고 말았다.
그런 나를 향해 평소처럼 ‘왜 그러냐’고 묻는 대신, 그녀는 다시 정면 앞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똑같았을까?”
“어? 뭐가……?”
“너랑 축제에 갔다면…… 똑같이 즐거웠을까?”
그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다.
언젠가 별 아래 들판에서 보았던, 마을을 내려다보며 그녀가 지었던 미소.
체념과 동경이 어우러져 있는, 애달픈 미소다.
“저번에 그 도시를 돌아다녔을 때도 그렇고, 무도회에 갔을 때도 그런 생각이 들더라.
네가 같이 가자고 할 때 갔다면, 그때도 이렇게 즐거웠을까, 하고.”
“………”
“근데 왠지 아니었을 거 같아. 거긴 시끄러우니까.”
덤덤히, 그녀는 눈을 돌릴 수 없는 현실을 이야기했다.
“시끄러운 건 싫어.”
“시끄러운지 아닌지 어떻게 아냐? 한 번도 안 나왔으면서.”
그 도시의 무도회에서 그녀는 말했다.
그녀를 보며 수군거리는 게 싫어서 축제에 가지 않았다고.
분위기 파악이란 걸 못하는 그녀다운 이유였다.
“안 봐도 뻔하잖아.”
“아닐 수도 있잖아. 그런 말은 임마, 한두 번은 직접 겪고 하는 거야.”
“……그런가?”
“그래, 임마.”
쏘아붙이듯이 말한 다음, 나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지 않으면, 이 다음 말을 할 때 더듬거리거나 목소리가 튀어버릴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음, 다음엔 꼭 같이 가자.”
“엉? 어디를?”
“어디긴, 임마. 축제이지. 이 여행 끝나면 고향에 돌아갈 거 아냐. 하지 축제이든 수확제든 대축일이든…… 전부 가자고. 저번에 약속도 했으니까.”
작년 말에 그녀와 약속했다. 반드시 축제에 데리고 가겠다고.
그러나 그 바로 다음이었던 신년축제 때, 내가 또 다시 크게 앓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3월의 봄맞이 축제 때, 그녀는 그전처럼 ‘시끄러운 건 싫다’면서 칼 같이 거절하고, 자경단원 일을 하러 가버렸다.
……나와 약속했던 사실은 새까맣게 잊어버린 듯이.
만약 내가 그때 그녀에게 ‘너도 가겠다고 약속했지 않냐’고 말했다면 달랐을까?
메린은 기억력이 좋으니까, 잊어버린 기억도 금방 다시 떠올릴 수 있었겠지.
그럼 그녀는 좀더 빨리, 이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놀란 눈으로 나를 보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넌 까먹었지만, 지난 대축일 때 내가 너한테 그랬어. 너 축제에 데리고 가겠다고.”
“어. 알아.”
“……뭐? 어, 잠깐. 너 까먹은 거 아니었어?!”
“내가 너냐? 그걸 까먹게.”
“얌마, 그럼 저번 봄맞이 축제 같이 가자는 거 왜 거절했냐? 네가 평소처럼 그러니까 까먹은 줄 알았잖아.”
이런 젠장할, 괜히 나 혼자 넘겨짚은 거였어.
하…… 그럼 그때 내가 말만 했어도 됐겠구만?
아니, 진짜 어이가 없네.
야, 카엘, 이 머저리 등신 새끼야, 메린 뭐라 할 거 없다.
너도 똑같아, 멍청아, 왜 말을 안 하냐?!
자괴감에 빠지기 시작하는 내 귀에, 그녀가 조용히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약속, 아니, 다짐을 한 게 있어서.”
“뭔 다짐?”
“………비밀.”
“엥?”
“비밀이라고. 안 가르쳐줘.”
아니 이젠 이 녀석까지 비밀 타령이네.
혹시 유행인가?
나도 뭐 비밀거리 하나 만들어야 하나?
“……그럼 저번에도 그렇고, 왜 나랑 같이 돌아다닌 거냐?”
“축제 아니잖아.”
“아, 그래.”
……아무래도 축제만 아니면 되는 모양이다.
뭐야, 그거? 무슨 서원한 것도 아니고.
아무튼 축제만 아니면 되는 거군?
“메린,”
어느새 숙소 가까이에 다다른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말했다.
나를 따라 멈춰 선 그녀가, 의아한 듯이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렸다.
“다음에도 같이 놀러 가자. ……둘이서.”
“애프터 신청이냐?”
“?!?!”
이 녀석이 지금 뭔……?!
“가, 가가가가, 갑자기 뭔, 애, 애프터……?!”
“엉? 데이트 끝나고 또 하자고 하는 거, 애프터 신청 아니냐?”
“아, 아니 그건 맞는데, 데, 데이트라니 그게 뭔……!”
“엥? 아니었냐? 아까 로나가 그러길래 데이트인 줄 알았는데.”
눈이 핑 돌기 직전인 나와 달리, 그녀는 살짝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뿐이다.
자신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당황해하지도 않고, 그저 덤덤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무슨 대답을 하건,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듯이.
“……”
데이트는 아니다.
그녀는 나를 남자로 보고 있지 않으니까.
나에게 그런 종류의 감정을 품고 있지 않으니까.
그러니 데이트가 아니다.
……하지만,
“………어. 맞아. 애프터 신청하는 거야.”
내가 마음속으로 그러길 바라고, 그녀가 그런 거라고 알고 있다면, 데이트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모자란 마음과 감정은, 내가 대신 채우면 되지 않을까?
“음, 그래서, 대답은?”
그녀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이 시선을 돌린 채 잠시 침묵했다.
그런 후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살짝 숙여봐.”
“……왜?”
“아, 얼른.”
귓속말이라도 하려는 건가?
의아함에 눈을 깜빡이며 살짝 고개를 숙이자,
“……!”
온기를 품은 촉촉함이 뺨에 닿으며,
“좋아.”
숨결 섞인 속삭임이 귀로 흘러들어왔다.
그러자 찌릿하는 느낌이 온 몸을 휘감은 탓에 머리가 마비되어서……
그저 멀거니 그녀를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주워들은 건데 어떻게 생각이 났네. 어떠냐? 맞게 했지?”
“………”
“엥? 틀렸냐? 뭐, 아무튼 또 데이트하자!”
대체 어디서 그런 요망한 지식을 주워들은 거야? 또 우리 마을인가?
누가 그딴 소리를 했는지 몰라도 그 사람 탓이다.
아니지, 효력도 모르면서 그냥 무작정 따라하는 이 녀석이 문제구나.
……아니면, 그녀가 그저 흉내내는 거란 걸 알면서도 그대로 유혹당하는 내가 나쁜 놈인가?
아냐, 역시 얘가 문제야.
내가 지 뺨에서 입을 떼고, 천천히 지 입술에 맞대는데도 물러나지 않았으니까.
“……후우…….”
“……”
그리고 입술 떼자마자 숨까지 내쉬고!
어쩐지 그녀의 뺨이 살짝 붉어진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아직 뜨지도 않은 노을이 내 눈에 씌인 모양이다.
“그, 아무튼, 음, 약속한 거다!”
이 이상 마주보고 있으면 정신이 나갈 거 같아, 나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황급히 숙소 문으로 향했다.
으, 심장 터질 거 같아……!
먼저 가서 얼굴에 물이라도 끼얹어야지, 안 그러면 또 로나 녀석의 놀림거리가 될 거야!
빠른 걸음으로 숙소에 들어가, 들고 있던 꾸러미를 부엌 조리대에 둔 후 세수를 했다.
차가운 물이 얼굴을 식혀주자, 신나게 요동치던 심장이 차츰차츰 진정되기 시작했다.
“휴우…….”
어째 자꾸 그녀랑 키스하는 거 같은데……
이거 괜찮은 건가?
괜찮을 리가,
‘괜찮아, 괜찮아.’
속삭임이 다른 속삭임을 곧바로 덮어버렸다.
……음, 내 정신 상태가 괜찮지 않은 것 같군.
그나저나 이 녀석들 어디에 있길래 코빼기도 안 보이냐?
방에 있나?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꺄아아아아!!”
귀청을 찢을 듯한 비명소리가 울렸다!
2층인가?!
누구의 비명인지도 모른 채, 단숨에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문 하나가 살짝 열려 있는 게 보였다.
“싫어, 싫어!! 이거 놔아아!!”
“블루벨?!”
그리고 그 문틈으로 블루벨의 비명이 들렸다!
설마 원한이 강한 드워프들이 블루벨에게 해코지를 하고 있는 건가?!
위슨 녀석, 당한 거야?!
“블루벨!! 무슨 일이야?!”
벌컥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간 내 눈에 비춘 것은,
“어, 왔네.”
“………”
얇은 천옷을 입고 있는 블루벨을, 위슨이 깔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밧줄을 손에 든 채.
“……무슨…일이야……?”
겨우겨우 그 말만 할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