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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220화 (220/475)

〈 220화 〉 213화 : “밤에는 술 한 잔이지.”

* * *

손바닥만 한 크기의 둥근 반죽이 소복이 쌓여 있는 그릇을 든 채, 메린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물었다.

“끝났냐?”

“어? 아, 응.”

내 대답에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그녀는 반죽을 프라이팬에 하나하나 올리기 시작했다.

미리 기름을 둘러 두었는지, 반죽이 팬 위에 올라가자마자 지글거리기 시작했다.

“……”

크윽! 소리가 너무 치명적이야!

근데 뭘 만들고 있는 거지?

작은 의문에 눈썹을 올리며, 조리대로 시선을 옮겼다.

지느러미, 뼈, 커다란 생선 대가리, 감자와 양파 껍질, 그리고 달걀 껍데기가 나뒹굴고 있다.

……흠, 피쉬 케이크인가?

오후 열 시가 되어 가는 이 야심한 시간에?

이 녀석의 그 철철 넘치는 힘은, 여유가 있을 때마다 먹은 야식에서 솟아난 거였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피쉬 케이크는 야식으로는 좀 그렇지 않냐? 소화 돼?”

“내 거 아닌데? 술꾼 안주야.”

“술을 즐길 줄 아는 어른이겠지! 술꾼이라니, 누굴 보고…….”

방금 전까지는 아무도 없던 문간에, 블루벨이 어느새 기대어 서서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건 아까 마시던 술, 독하디 독한 증류주 병이다.

세 시간 전과 다를 바 없는, 훌륭한 술꾼의 몸가짐이라 할 수 있었다.

근데 의외네.

그 반절 남은 걸 아직도 마시고 있다니.

“아까는 병나발 불더니 아껴 먹는 거야? 한두 병 더 있을 테니 그냥 후딱 마시고 자.”

쓴웃음을 지으며 말해주자, 블루벨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술병을 흔들었다.

“이거? 새 건데.”

“그만 퍼 마시고 잠이나 쳐자, 이 술꾼아!!”

아니 뭔 세 시간 동안이나 계속 술만 쳐먹고 있어?!

단숨에 다가가 들고 있는 술병을 낚아채려 하자, 블루벨이 사색이 되어서는 내 손을 이리저리 피하기 시작했다.

“아, 그만 먹으라고, 이 주정뱅이야! 술 내놔! 안 내놔?!”

“싫어! 아까 별로 못 마셨단 말야! 너 끌려간 다음에, 꼬맹이가 술값이라면서갑자기다 빼앗아 먹었다고!! 그리고 내가 왜 주정뱅이야?! 취하지도 않았는데!”

취하지 않았다는 건 정말인 듯했다.

세 시간을 쭉 마셨을 텐데 얼굴이 붉어지지도, 눈이 풀리지도 않은 상태다.

허, 엘프 대단해.

근데 위슨이 술을 빼앗아 먹었다고?

녀석, 지난번에 블루벨이 말벌주를 훔쳐먹은 거 단단히 벼르고 있었구만?

……그냥 내가 없는 틈에 술 먹을 구실을 댄 걸지도 모르지만.

제길, 일행에 술꾼이 둘이나 있네.

그것도 하나는 불법이고!

아무튼, 나는 블루벨에게 화딱지가 일었다.

술꾼이 술 처먹는 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왜 그 안주를 메린이 만들고 있어?

“그럼 혼자 조용히 먹든가. 왜 얘한테 안주해달라고 시켜, 시키길?!”

“안 시켰거든! 생선 구우려고 했는데 쟤가 갑자기 나타나서 칼 빼앗아간 거거든!”

“내장도 안 빼고 뭉텅뭉텅 자르려고 했잖아. 그걸 어떻게 가만보고 있냐?”

“그게 뭐가 어때서? 씁쓸한 게 얼마나 맛있는데!”

그렇게 소리치는 블루벨의 목소리엔, 억울해 죽겠다는 감정이 담뿍 들어 있다.

망할, 일행에 저주받은 혓바닥이 둘이나 있네.

하나는 말씨, 하나는 맛에 대한 불치의 저주가 걸려 있다!

……음? 근데 둘 다 위슨 관련이네.

거참 희한한 인연이로군.

그나저나 블루벨 녀석, 메린에게 항의하느라 주의가 쏠렸군.

지금이다……!

손을 불쑥 뻗어, 그녀가 안고 있던 술병 주둥이를 잡고 홱 당겼다.

“아아앗, 안 돼애애!”

품에서 술병이 빠져나가자마자, 블루벨이 처절히 외치면서 내 다리를 부여잡았다!

“뭐하는 거야, 이거 놔!”

“돌려줘어어! 얘기가 틀리잖아, 이 나쁜 놈아! 내가 다 먹어도 된다며! 그거 거짓말이었어?!”

“아니 적당히 먹어야지, 뭔 세 시간씩이나 먹냐고! 더는 안 돼, 그러다 버릇 들어!”

고향에서 본 적이 있다.

만삭의 임산부보다 더 커다란 배를 출렁거리며, 술을 먹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한숨을 쉬면서 술잔을 숨 쉬듯이 비우던 어느 술꾼을……!

‘바위궁전’을 떠나면 또 한동안 야영할지도 모르는데, 그런 몹쓸 버릇이 들면 곤란하다.

그러다 또 위슨 술 훔쳐먹고 독 걸릴라!

그러나 블루벨은 오히려 내 바지를 꽉 붙들고 마구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세 시간 아니야, 방금 막 딴 거란 말야! 쟤랑 가볍게 한 판 붙었더니 출출해져서 그런 거라고! 돌려줘어어!”

“아잇, 진짜! 다 큰 아가씨……가 아니라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여자가 무슨 추태야! 이거 놓고 얼른 일어나!”

“술 줘어!”

평소엔 나름 도도한 분위기를 풍기는 엘프가, 술 돌려달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고 있다.

심지어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하고 있다……!

돌겠네, 진짜.

이거 술꾼을 넘어서 술독에 아예 빠진 거 아냐?

“하……”

나 참, 진짜. 이러다 울겠구만.

나는 두 손 다 들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자.”

“아싸!!”

술병을 내밀자마자 순식간에 병이 사라졌다!

블루벨이 병을 안고 히죽히죽 웃는 걸 보니, 한층 더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한두 잔만 먹고 자. 그러다 병 난다.”

“어머, 내가 뭐 그런 자제력도 없는 주정뱅이인 줄 아니? 걱정 마! 진짜 두 잔만 딱 마실 거니까.”

“그래, 앞으로 두 잔 더 먹겠다, 이거지? 어휴…….”

내가 오기 전에 먹은 건 안 치겠지. 그게 술꾼이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부엌 안쪽에 있는 창고로 향했다.

뭔가 먹을 게 있으면 좋겠는데…….

“야, 어디 가냐? 너 먹을 거 있어.”

“응?”

“저기.”

메린이 턱으로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조리대 구석에, 빵조각이 얹혀 있는 수프 한 그릇과 염소젖 한 잔이 올려져 있다.

“식었겠지만 그냥 먹어라. 한 그릇만 도로 데우기도 뭐하다.”

“……내 몫 남겨둔 거야?”

“당연한 거 아니냐? 버리면 아깝잖아. 아까 한 술도 안 떴었으니 뭐 먹으러 올 게 뻔하기도 하고. 저거랑 이걸로 충분하지?”

“……어. 충분해.”

……피쉬 케이크,내 몫까지 미리 계산해서 만들고 있었구나.

그냥 내가 그렇게 듣고 싶은 걸 수도 있지만, 음, 진짜로 그랬으면 좋겠다.

“그, 이거 먹고 있을게.”

“그래라.”

조리대에 올려진 수프와 잔을 들고, 블루벨의 앞을 지나쳐 식당으로 들어갔다.

부엌에는 테이블이 없는 탓이다.

그렇게 자리 하나를 잡고 앉아서 수프를 뜨려는 찰나,

텅!

……맑은 울림소리와 함께 내 앞에 빈 물잔 하나가 더 놓이고, 투명한 액체가 쪼르르 담기기 시작했다.

하하, 진짜 어이가 없네.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블루벨이 증류주 병을 안은 채 방긋 웃고 있었다.

“염소젖으로 되겠어? 밤이잖아. 어른답게 한 잔 해야지!”

“……이거 독한 거잖아. 물을 타면 몰라, 생으론 좀…….”

“야, 이런 건 생으로 마셔야 하는 거야. 식사 후에 먹으면 훨씬 더 좋고! 소화 잘되게 해주거든.”

술이 소화를 돕는다는 소리는 난생 처음 듣는다.

오히려 속 버리지 않나?

이거 그냥 술꾼 특유의 합리화 아냐?

“어머? 왜 그렇게 봐? 누나가 좋은 거 가르쳐주는 건데 고맙다고는 못할 망정!”

“누나는 개뿔……, 댁의 어디가 누나야?”

얼굴은 어리지, 몸도 빈약하지…….

키도 메린보다 조금 작다.

말투나 몸가짐에서 어른스럽다는 느낌이 들지도 않고 말야.

연상의 여성이 으레 갖추는 요소가 하나도 없으면서, 뭔…….

하, 진짜 어이가 없네.

“사람들한테 물어봐라, 십중팔구 내 여동생 아니냐고 할 거다.”

“어머, 내 풍부한 경험과 노련함에서 나오는 이 성숙미가 안 느껴지니?”

“응, 전혀.”

“흥, 술맛도 모르는 어린애가 뭘 알겠어?”

그렇게 투덜대면서, 블루벨은 또 다른 잔에 술을 콸콸 부었다.

거의 넘치기 직전까지 따른 후, 용케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홀짝였다.

“하아~ 이거야, 이거! 후후, 드워프들 태도는 맘에 안 들지만 술 빚는 솜씨는 인정해야겠어. 우리 일족 것보다 더 맛있는 거 같단 말야?”

약간 상기된 채 웃음을 흘리며 잔 가장자리를 핥는 모습은, 영락없는 술꾼 그 자체다.

맥주는 빵 맛이라도 나지, 저런 쓰기만 한 게 뭐가 맛있다고…….

“근데 이 밤에 메린이랑 대련했다고? 왜?”

“으음…… 그냥, 잠이 안 와서.”

“왜? 벌써 고향 생각나? 아니면 블루스타?”

“블루스타 생각도 나고, 아까 들었던 이야기도 있고…….”

한숨을 푹 쉬더니, 블루벨은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런 뒤, 술이 담긴 물잔으로 시선을 떨어뜨린 채, 그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그 사람, 쌀쌀맞고 냉정하긴 해도 속정이 깊거든. 너무 쓸쓸해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댁은 괜찮고?”

“나? ………히히, 어제까지는 괜찮았는데 오늘은 좀 그러네. 너랑 쟤가 붙어 있는 거 봐서 그런가?”

무슨 차를 마시듯이 잔을 홀짝인 후, 그녀는 열이 담긴 숨을 길게 내뿜었다.

테이블이 좀 커서 건너편과는 거리가 좀 되는데도, 왠지 톡 쏘는 듯한 향취가 느껴지는 듯했다.

“나랑 메린이 뭐했다고.”

“아침에 쟤가 네 머리를 쓰다듬었었잖아. 블루스타도 나 자주 달래줬었거든.”

옛 추억이라도 떠올리는지, 그녀는 잔 속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어쩐지 약간 쓸쓸하기까지 보이는 그 미소에,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고르는 사이,

“자.”

메린이 피쉬 케이크가 든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노릇하게 지져진 음식 위로 기름기가 살짝 흐르는 모습에, 수프 덕분에 가셨던 허기가 다시 되살아나고 말았다.

“햐~ 술맛 살아난다앗! 메린 너도 꽤 하네.”

“……”

그리고 블루벨은 순식간에 도로 술꾼이 되어 있었다.

방금까지 풍기던 그윽한 쓸쓸함 어디 갔어?

진짜 어이가 없네.

고개를 살짝 저으며, 나 역시 피쉬 케이크 하나를 입에 넣었다.

다진 생선살과 감자의 담백함이, 아삭하면서도 달큰한 양파와 어우러지며 목을 넘어갔다.

……음, 맥주가 살짝 생각나긴 하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메린을 힐끗 보았다.

의자에 앉은 채, 테이블 위에 엎드려선 하품을 하고 있다.

오늘 하루에만 블루벨과 두 번이나 대련을 해서 피곤한 듯했다.

“피곤하면 먼저 올라가. 뒷정리는 내가 할게.”

“……싫어.”

작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시선이 블루벨을 아주아주 잠깐 향했다는 건 두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지금은 살짝 뾰로통한 표정으로 저 앞을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근데 카엘,”

나지막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블루벨이 살짝 어두운 표정으로 잔 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넌 괜찮니?”

“엥? 뭐가?”

“아까 두 꼬맹이가 그랬잖아. 염소 빼고는 전부 자식을 못 낳는다고. 그게 세계 멸망의 징조 중 하나라며?

지난번엔 ‘불구덩이’, 이번엔 ‘출산’……. 다음엔 뭘까? 그 생각을 했더니 왠지 잠이 안 오더라고.”

……그래서 메린이랑 또 대련한 건가.

몸을 움직이면 쓸데없는 생각할 새 없이 푹 잘 수 있으니까.

아마 출출해질 줄은 몰랐겠지.

“왜? 무서워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재앙이 일어나는 거잖아. 아저씨랑 블루스타도 걱정되고…….

아, 노파심에 말하는 건데, 너 걱정해서 묻는 건 절대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

“허, 그럼 왜 물어보는데.”

“네가 지금보다 더 미쳐서 나나 다른 녀석 해칠까봐 그런다!”

별 희한한 걱정을 다하고 있네.

난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미치지 않았다.앞으로도 그럴 거고.

나한테 고문당했던 원한과 분노는 다 털었다더니, 역시 은연중에 아직 남아있는 게 분명해.

“그래서, 넌 아무렇지도 않아?”

“글쎄? 아무 생각 안 하고 있어.”

“………그래.”

홀짝거리던 잔을 약간 더 높이 기울인 후, 블루벨은 긴 숨을 내쉬더니 내 잔을 가리켰다.

“마셔.”

“뭐?”

“그거 마시라고. 얼른.”

……뭐지? 묘한 압박이 느껴진다.

나를 보는 그녀의 시선엔, 당장 마시지 않으면 자신의 손으로 내 입에 술을 부어버리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팍팍 느껴지고 있다!

아니 갑자기 왜……?

술버릇이라 하기에는 굉장히 또렷한 그 시선을 받으며, 그녀가 내 몫으로 따라 둔 술을 머뭇머뭇 마셨다.

“아으……!”

우오오, 목이 타는 거 같아!

역시 엄청 독하잖아, 이거!

와, 얼굴이 바로 후끈해지는 거 같다.

“어때? 이거랑 어울리지?”

“후으으…… 그런가아…….”

……그리고 내 혀가 곧바로 맛이 가버렸다.

와, 나 지금 술 한 모금 먹고 바로 취한 거냐?

세상에, 이 술 진짜 장난 아니구만.

“뭐야, 요만큼 먹고 취한 거니? 너 진짜 술 약하구나. 자자, 염소젖 그거 쭉 마셔. 그럼 좀 나아질 거야.”

“내가 야칸 게 아니라아…… 댁이 센 거야…….”

“그래그래, 알았으니까 그거나 쭉 마시렴, 아가야.”

“……”

두고 보자, 다음에 기회만 되면 골든로드에게 들었던 그 얘기 다 까발려버릴 테다……!

속으로 이를 갈며 염소젖이 담긴 잔을 그대로 쭉 들이켰고,

정신을 차리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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