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화 〉 215화 : 이미 시작된 변화 (2)
* * *
그렇게 맞이한 오후, 나는 내 방 책상에 앉아서 깃펜을 움직이고 있다.
자기 전에 늘 하는 기록은 아니고, 숙소 책장에 꽂혀 있던 책 일부를 옮겨 적고 있는 중이다.
간단히 말하면, 간만에 본업으로 돌아간 거다.
“……됐다.”
깃펜을 내려놓고 손을 털었다.
으, 역시 두 달이나 안 했더니 손이 좀 굳었어.
고작 세 쪽밖에 안 되는데 손이 뻐근하네.
그나마 매일 일지 비슷한 거라도 써서 망정이지, 그것도 안 했으면 글씨체도 다 망가졌겠구만.
작게 한숨 쉰 후, 침대 쪽을 돌아보았다.
“메린, 다 읽었지?”
“………아직.”
“뭐? 아직?! 얌마, 그거 동화책이야. 삽화까지 딸려 있는 어린애용 동화책! 내가 다 읽으라고 한 것도 아니고 첫째 장만 읽으라고 했는데도 아직이라고?!”
세상에……
메린 녀석, 완전히 다 까먹었구만?
이거 설마 알파벳부터 다시 해야 되는 거 아냐?
돌겠네, 진짜.
한숨을 푹 쉬자, 메린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간 뭐 읽을 일이 없었잖아. 그래도 까먹진 않았어. 좀 생각이 안 나서 그렇지.”
“그게 까먹은 거지, 임마. 그러게 입간판 같은 거라도 좀 읽고 다니라니까.”
“……”
할 말이 없는지, 그녀는 말없이 꿍한 표정으로 시선만 돌렸다.
음, 저 표정도 참 간만에 보는군.
몰래 피식 웃으며, 그녀의 옆에 앉아 동화책을 들여다보았다.
“어디까지 읽었냐?”
“……여기.”
“우와.”
반도 못 읽었네…….
작년에는 그래도 3/4 정도는 읽었을 텐데.
이렇게 떨어진 거 보면, 두 달이 아니라 일 년 내내 아무것도 안 읽은 게 분명하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우리 마을 평균인가…….
“……?”
묘하게 말이 없어서 그녀를 힐끗 보니, 살짝 시무룩한 표정으로 책에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다.
내 타박에 기분이 상했다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에 실망한 기색이다.
뭐, 생각해보면 그녀가 글을 까먹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맨날 마을 여기저기 다니면서 일했으니까, 가만히 앉아서 뭐 읽을 새도 없었겠지.
애초에 독서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격려해주었다.
“야, 괜찮아. 너 머리 좋으니까 금방 다시 배울 거야. 성서도 막힘없이 쭉쭉 읽을 수 있게 될걸?”
“……그 정도까진 필요 없어.”
“그만큼 확실하게 공부시켜주겠다는 거야. 모처럼 네가 읽기쓰기 봐달라고 한 건데, 당연히 내가 힘써야지!”
이야, 근데 진짜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네.
세상에, 메린이 나한테 글공부를 부탁하다니!
그 때문에 아까 오전에 책을 보러 잠깐 나갔었다나?
그리고 메린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블루벨이 스튜라는 이름의 독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었다.
참고로 그 사악한 엘프는, 점심 이후에 메린에게 대련을 구실로 완전히 묵사발이 나버렸다.
‘감자껍질 벗겨놓으라고 했더니 감히 고기를 만지냐’고 소리쳤던 걸 보면, 고기를 버릴 뻔한 게 굉장히 열이 뻗쳤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대련이 끝난 뒤, 메린은 나에게 글공부 좀 도와달라며 부탁을 했고, 지금 이렇게 내 방에서 동화책과 씨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근데 진짜 웬일이냐? 일행에서 너 혼자 문맹이라는 게 쪽팔렸어?”
“아닌데.”
글을 모르는 것에 단 한 줌의 부끄러움도 없는 이 자세.
역시 메린도 훌륭한 놋지빌 사람이었다.
“그럼 갑자기 왜 공부하려는 건데?”
“……너 없을 때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엥? 내가 왜 없어?”
내가 메린과 떨어져서 다닐 일이 있나?
지금처럼 숙소에 머물 때 말고는 거의 없는 거 같은데?
뭐, 강제적으로 떨어질 뻔한 적은 한 번 있긴 하다.
그리고 그땐 내가 곧바로 메린을 쫓아갔었지.
그러느라 절벽에서 뛰어내려야 했지만.
“저번에 그 도시 근방에서 잠깐 따로 다녔잖아. 그땐 블루벨이 있어서 별 문제없었기는 한데, 맨날 누가 나랑 같이 있을 거란 보장도 없고.
또…… 나 혼자 읽고 쓸 수 있게 되면, 장봐야 할 때 네가 굳이 따라올 필요도 없을 거 아냐.”
“허…….”
오, 창조주시여, 이게 현실입니까?
세상에, 메린이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다하다니……!
여행을 하면 사람이 성장한다더니 진짜였구나.
그간 다니면서 이 녀석 나름대로 뭔가 많이 느꼈던 모양이지?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그녀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래그래, 적어도 네 몫은 네가 직접 메뉴 보고 시킬 수 있어야지! 하하, 야, 진짜 잘 생각했어!”
“……그렇게 좋냐?”
“어. 무지하게 좋아.”
무려 글을 다시 깨치려고 하는 거다.
지식과 지혜의 보고인 책을 읽기 위한 걸음마를 다시 떼려는 것이다!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으로서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으랴!
무엇보다도,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무척 기쁘다.
한껏 웃은 후, 나는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럼 시작한다. 여기까지 읽었다고 했지? 그럼 다시 처음부터 읽어봐. 소리내서.”
“어어………”
더듬더듬, 그녀가 다시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했다.
줄이 바뀔 때마다 잠깐 헷갈리는 것 같아, 그녀의 손을 잡고 손가락으로 글자를 따라가게 했다.
“……단단한, 바위가 깨지더니, 그 안에서, 꼬…꼬……”
“꼬리.”
“꼬리……가 달린, 남자아이가, 나왔습니다……”
“응, 잘하고 있어. 천천히 계속해.”
……그렇게 ‘드래곤의 꼬리가 달린 남자아이가 홀로 산에서 살다가 내려왔다’는 첫째 장 내용만 두 번 읽은 후, 그녀를 책상에 앉혔다.
그리고 아까 필사해둔 종이 세 쪽을 들이밀고서, 그녀에게 깃펜을 내밀었다.
“자, 내가 여기 한 줄 한 줄 쓴 거 보이지? 그 바로 밑에, 똑같이 따라서 써.”
“……이 깃펜 네가 쓰던 거 아니냐? 내가 쓰다가 부러지면 어쩌려고?”
“엉? 부러지면 깎으면 되는데? 더 깎을 부분이 없어지면 하나 더 사면 되고. 어차피 소모품이야. 신경 쓰지 마.”
말은 안 했지만, 그녀를 위해 동화책을 살 때 깃펜도 하나 더 사두었다.
만약 그 예비용도 날려먹는다면……
위슨에게 부탁해서 파랑새 깃털이라도 써먹지, 뭐.
적당한 깃털만 있으면 직접 만들 수 있으니까.
“펜 한 번 잡아봐.……음, 역시 까먹었구나. 주먹 쥐지 말고, 이렇게 엄지랑 검지로……”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교정해준 후, 그 손목을 살며시 잡고 그녀의 눈에 잘 보이도록 이리저리 돌려주었다.
“이렇게 잡고 쓰는 거야. 기억해.”
“어…… 응.”
그대로 그녀의 손등을 감싸듯이 잡고 천천히 이끌기 시작했다.
“펜 끝에 잉크를 찍고 종이에 댄 다음, 적당히 누르면서 쓰는 거야. 너무 세게 누르면 펜이 금방 닳고, 종이도 찢어져. 그렇다고 너무 약하게 대면 글씨가 안 써지고. 이건 너 스스로 맞춰야 돼.”
내가 적은 단어 밑에, 그림을 그리듯이 하나하나 선을 그어서 똑같은 단어를 그려내었다.
음, 원래는 이렇게 글자를 따라써서 단어를 익히게 할 생각이었는데…….
“야, 메린, 너 알파벳 쓰는 법은 기억하냐?”
“………아마도?”
“……”
까먹었구만.
곧바로 새 종이를 꺼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다했다!”
환호성 섞인 외침과 함께, 메린이 거의 몸을 뒤집듯이 뒤로 쭉 폈다.
“어디 봐.”
그녀가 건넨 종이를 받아들고 빠르게 훑어본 후,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합격.”
“하…… 겨우 끝났네…….”
책상에 추욱 늘어지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오오, 뜨끈해!
“우와, 열 나네, 열. 이거 차도 우릴 수 있겠는데.”
“닥쳐……. 으으,머리 아파…….”
“뭐 얼마나 썼다고 머리가 아프냐?”
동화책 첫 장 읽기, 알파벳 쓰기, 동화책 두 페이지 필사밖에 안 했구만.
천하의 메린이 완전히 진이 빠져버리다니, 역시 간만에 하는 글공부라 좀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원래는 조금 쉬고 받아쓰기도 하려 했는데,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내야겠네.
좀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일 년 만에 다시 공부한 것 치고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다.
깃펜을 두 번 부러뜨리긴 했지만, 애초에 버릴 생각으로 준 건데 아직 쓸 수 있으니 오히려 선방한 거지.
“수고했어. 내가 뭐랬냐? 너 금방 배울 거라 했잖아.”
여전히 엎어져 있는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해주자,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아직 멀었지?”
“당연하지. 일 년이나 안 했잖아. 그 공백이 하루만에 메워지겠냐? 한 일주일 잡고 빡세게 하면 모를까.”
“으으…… 싫어, 죽을 거야…….”
앓는 소리를 하는 모습에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걱정 마, 임마. 어차피 못해.”
빠르면 내일 오후, 아니면 모레 아침에 여길 떠날 테니까.
만약 내일 드워프들이 준비해준 장비를 확인했을 때,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면 하루나 이틀 더 머물겠지.
……그래도 일주일은 안 된다.
세계가 점점 망해가고 있는데, 별 상관도 없는 이유로 지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 이따 저녁 먹고 또 해줘.”
“엥? 머리 아프다며. 오늘은 이 정도로 해.”
“내일이나 모레 아침에 여기 뜰 거라며. 그럼 이제 이렇게 빡세게 할 여유 없을 거 아냐.”
그렇기는 한데……
왜 이리 서두르지?
도로 까먹을까봐 그런가?
“뭐가 그리 급해? 그러다 괜히 지치고 싫증만 난다. 그럴 바에야 조금씩 꾸준히 하는 게 더 나아. 검술도 단시간에 몰아서 하면 몸살 나서 죽잖아.”
“……길 가는 중엔 네가 못 봐주잖아. 그러니 빨리 혼자 공부할 수 있게 돼야지.”
“내가 왜 못 봐? 불침번도 안 서는데.”
나와 메린, 그리고 로나만 있을 때는 나도 불침번을 섰었다.
따로 얘기해서 정한 건 아닌데, 희한하게 내가 항상 처음 순서였지.
그러나 그것도 위슨이 일행에 들어온 뒤부터 없어졌다.
원래 늦게 자는 위슨이 처음 불침번을 서고, 그 다음에 메린이, 그리고 원래 일찍 일어나는 로나가 마지막을 서고 있다.
즉, 나는 불침번 당번에서 아예 빠져버린 것이다.
그게 미안해서 불을 피우거나 식사당번을 맡는 등, 다른 소일거리를 도맡아서 하는 중이다.
메린의 공부를 봐주지 못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대꾸했다.
“너 쉬어야지. 그러라고 불침번 뺀 건데.”
“어차피 수첩 적느라 바로 안 자. 그리고 네 공부 봐줘봤자 한 시간 정도일 텐데, 뭐.”
게다가 내가 크게 수고를 들이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직접 해줄 수 있는 건, 그녀에게 받아쓰기를 시키거나 숙제를 내주고 검사하는 것뿐이니까.
읽고 쓰는 것 자체는 그녀 스스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참고로 내가 처음에 써둔 세 쪽이, 그녀의 첫 숙제가 될 예정이다.
글씨체 검사는 물론, 그 글이 무슨 내용이며 어떤 의미인지 확인할 계획이었다.
그러니 지금 그녀가 걱정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다.
안 그래도 그리 많지 않은 수면 시간이 더 줄어들 테니까.
“나? 조금 못 자는 것 정도는 문제없어. 야간 토벌 작전도 하고 그랬는데, 뭐.”
“그게 며칠이나 계속 이어지면 문제가 되지, 임마.”
“내가 너냐? 쓸데없는 걱정 마라.”
“……”
쓸데없는 게 아닌데 말이지?
아무리 평소에 체력이 흘러 넘친다 해도, 잠이 부족하면 말짱 황이다.
게다가 그냥 길만 다니는 게 아니라 몬스터도 상대해야 되는데, 수면 부족으로 판단력이 떨어지거나 움직임이 둔해지면 여러모로 위험해진다.
물론 어지간한 상처는 로나의 기도로 치유할 수 있지만……
잘려 나간 건 고칠 수 없으니까.
왠지 걱정이 되어, 나는 그녀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으면서 말해주었다.
“메린, 열심인 건 좋은데 너무 열내지 마. 나 어디 안 가. 말했지? 내가 너 떠날 일은 없을 거라고.”
“아니 나는……”
“알아. 하루라도 빨리 도움이 되고 싶은 거잖아. 내가 그걸 왜 모르겠냐?”
나도 그러는데.
그녀와 대련할 때마다, 길 가다가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서 싸울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그걸 어떻게 모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걱정이 되었다.
몸이 튼튼한 걸 믿는지, 그녀는 은근히 제 몸을 돌보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해줘. 밤새거나 너무 무리하지 않겠다고.”
“뭐? 야, 뭐 그런 걸로 약속까지 하냐?”
엎어져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며, 그녀가 황당하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해야 돼.”
그 주홍빛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보면서,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야 내가 안심할 거 같아.”
“……”
“메린.”
“……알았어, 임마. 약속할게.”
샐쭉한 표정으로 내가 내민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것을 걸며, 메린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쓸데없이 눈치는 좋아 가지고.”
……역시나.
밤을 새서라도 단기간에 익힐 작정이었구만?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얌마, 이건 밤새서 한다고 되는 게 아냐. 오히려 반대야, 반대. 머리가 맑아야 더 쏙쏙 들어온다고.”
“근데 내가 그러려고 한 줄은 어떻게 알았냐?”
“네가 그럴 게 뻔하니까. 야,내가 너랑 한두 해 알고 지냈냐? 속속들이 아는 건 아니어도 대충은 알아, 임마.”
십 년을 약간 넘은 세월 동안 봐온 것이다.
아주 약간의 변화밖에 없는 그녀의 표정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지냈는데,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 못하면 등신이지.
……그리고 곧바로 나는 등신이 되었다.
그녀가 별안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랬었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입엔 엷은 미소가 떠올라 있다.
이내 그녀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미소를 띤 그녀의 입술이 더 깊은 곡선을 그렸다.
“넌 늘 그랬어.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려고 애쓰고, 내가 이해할 때까지 상대해주고…….”
“어……?”
“내가 문제 일으킬 때마다 나서서 수습해주고, 잘은 모르겠지만 나 대신 화 내주고……. 넌 늘 그래줬지.”
이 녀석이 오늘따라 왜 이런대……?
별안간 쏟아지는 말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먼저 옛 일을, 그것도 내 수고를 이야기하는 게 무척 당황스럽다.
여태껏 이런 적 한 번도 없었는데.
……그래서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껴안았다는 사실을, 그녀가 팔을 두른 지 몇 초 지나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메린……?”
“고마워……. 나를 위해줘서 고마워, 카엘.”
그렇게 속삭이며, 그녀는 나를 힘있게 끌어안았다.
억세면서도 부드러운 손길과 함께, 그녀의 손을 잡고 깃펜 쓰는 시범을 보였을 때도 느끼지 않았던 라벤더 향이 한껏 풍겨져 왔다.
당황하고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녀가 나에게 딱 달라붙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 고맙다니 새삼스럽게…… 가, 갑자기 왜 안 하던 소리를 다하고 그러냐? 사람 민망하게.”
“……너도 저번에 했잖아.”
“……그리고 너한테 ‘새삼스럽게 뭘 그러냐’는 소리 들었지.”
굉장히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는 말투로, 그녀는 무던하게 그런 대답을 했었다.
내가 여태껏 살아있을 수 있도록 해줬으면서 말야.
그거에 비하면, 내가 그녀에게 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당연한 일을 한 건 오히려 나인 것이다.
나는 그녀의 등을 감싸 안으며 그 마음을 전했다.
“신경 쓰지 마. 네가 나한테 해준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너에게 고맙다는 소릴 듣기엔 아직 한참 모자라.”
그녀에게 예전부터 목숨을 빚지고 있고, 그 빚은 지금도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앞으로도 더 커질 게 분명하고.
그러니 그녀는 나에게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저 은혜를 갚고 있을 뿐이니까.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야 하는 법이다.
“그래도…… 음,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기쁘긴 하네.”
그녀가 먼저 나를 포옹한 것도 기쁘지만, 쑥스러우니까 이 말은 그냥 삼켜버렸다.
“……카엘.”
“응?”
“여행하다 보면…… 축제가 열리는 마을에도 가겠지?”
“시기가 맞는다면 그렇겠지.”
지금이 7월이니, 9월에 열리는 수확제를 만날 가능성이 가장 크다.
농작물이 그 꼬라지가 났는데 수확제가 열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런 왕국 공통 축제가 아닌, 가면축제나 음악축제처럼 그 마을에서만 열리는 고유 축제를 만날 수도 있다.
물론 아슬아슬하게 죄다 비껴갈 수도 있고.
만약에 있잖아.
그렇게 운을 떼며, 그녀가 또 다시 가만히 속삭였다.
“만약 어느 마을에 묵으러 갔을 때, 축제가 열리고 있다면…… 같이 가자.”
“……뭐?”
“축제, 같이 가자고. 약속…했었잖아……?”
어라? 다짐인가 하는 거 때문에 축제에 안 가기로 하고 있던 거 아니었나?
갑자기 무슨 바람이지……?
“너 뭐 다짐했다고 하지 않았어?”
“……새로 했어. 그러니 가도 돼. 가고 싶어.”
다짐을 새로 했다……?
그러니 이제 축제에 가도 된다……?
이게 다 뭔 소리야?
대체 무슨 다짐을 했길래…….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에, 나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괜찮은 거지?”
“어.”
“갑자기 튀고 그러려는 거 아니지? 그래서 갑자기 글공부 봐달라고 한 거…… 아니지?”
“뭔 소리야. 내가 왜 그런 짓을 하냐?”
평소처럼 툭 내뱉는 말을 들어도, 어째서인지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밀착되어 있던 몸을 떼고,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듯이 뺨을 어루만졌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온기에 더해, 그녀가 내 손등을 감싸 쥐면서 손이 그녀의 따스함에 푹 잠겨버렸다.
“도망 안 가. 절대로.”
웃으며 그렇게 대답하는 그녀를 다시 힘껏 끌어안았다.
진정하라는 듯이 내 등을 토닥이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메린은 여기에 있어.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그녀 스스로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
……그렇게 속으로 끊임없이 계속 되뇌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