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화 〉 216화 : 땅 위로 올라갑세 (1)
* * *
다음날 아침, 시계가 정각 아홉 시를 가리키기 무섭게 현관문이 쾅쾅 울렸다.
아마 개발연구소의 연구원들이겠지.
약속대로 지원품들을 들고 온 게 분명했다.
곧바로 현관문을 여니, 역시나 연구소원들로 보이는 길다란 흰 옷을 입은 드워프들이, 커다란 짐수레와 함께 서 있는데……
“……”
짐수레를 보자마자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뭐야, 저거?
수레를 끄는 소가 무심한 얼굴로 되새김질을 하고 있는 건 흔한 풍경인데, 아니, 저 뒤에 불룩 솟은 거 뭐야?
뭔 동산이 하나 솟아 있는데?
거참 희한하네, 분명히 옷가지랑 무기만 지원해준다고 했던 거 같은데 말이지?!
눈을 끔벅거리고 서 있는 나에게, 맨 앞에 선 드워프가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용사님! 요청하신 물품들이 완성되어 가져왔습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아니 저만큼 요청한 적 없는데요!”
“하하하, 신경 쓰지 마세요! 보기에만 그렇지 양은 별로 안 됩니다. 자자, 다들 안으로 들이자고!”
그러자 다른 드워프들이 수레에 덮인 천을 홱 걷어버린 후, 숙소 안으로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현관문에서 비켜서서,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뭘 들고 가는지 한 번 살펴보았다.
나무상자, 나무통, 나무상자, 나무상자, 무언가 천으로 둘둘 말린 것, 무언가 가죽으로 둘둘 싸인 것, 커다란 소쿠리, 커다란 바구니, 항아리………항아리??
“……”
이 사람들, 대체 뭘 준비한 거야……?
더 봤다간 머리가 어지러울 것 같아,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다른 일행들을 부르러 갔다.
잠시 후, 나를 포함한 일행 다섯 명과 연구소원들은, 나무상자와 나무통으로 거의 반절이나 묻혀버린 거실에 한데 모였다.
그나마 상자와 통을 천장에 닿도록 높이 쌓아 올려서 반절만 묻힌 거지, 적당히 바닥에 늘어놓았으면 거실 공간이 가득 차버렸겠지.
……근데 이 거실, 천장까지 높이도 꽤 되는데 말이지?
어떻게 쌓은 거야?
멍하니 상자의 벽을 올려다보는데, 아까 문 앞에서 인사한 드워프가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끌었다.
그는 거실에 모인 우리 일행 각각을 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먼저, ‘바위궁전’의 모든 드워프를 대신해서 여러분의 여정을 지원하는 영광을 선사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짝짝짝.
허리를 굽히는 그를 향해 다른 드워프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해, 우리 역시 덩달아 박수를 쳤다.
……무슨 행사에 참석한 기분인데.
“그럼 바로 확인하도록 하죠! 아, 저희도 상자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열어봐야 압니다. 한두 개가 아니라 기억이 안 나거든요. 그러니 묻지 마세요.”
“……”
“자, 그럼 첫 번째 상자~ 개봉합니다~”
다른 드워프 둘이 상자를 가져와, 우리 앞에 놓고 뚜껑을 열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물통?”
“아, 보온물통이네요. 차가운 물을 담으면 계속해서 차갑게, 뜨거운 물을 담으면 계속해서 뜨겁게 유지시켜주는 물통입니다. 유용할 거에요.”
그 다음 상자 안에는,
“……막대기에 열쇠?”
“아, 파이어스틸이네요. 불 붙일 때 쓰는 겁니다. 쇠막대를 불 붙일 거에 대신 후, 그 열쇠 같이 생긴 걸로 막대를 긁으시면 불똥이 마구 튀죠. 최근에 발견한 합금으로 만든 거랍니다.”
자랑스럽다는 듯이 가슴을 펴며 웃는 드워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상자를 열었다.
그렇게 쭉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했고……
접이식 삽, 접이식 화로, 휴대용 건조기, 휴대용 여과기, 원래 요청했던 옷에 무기들 등등, 거실이 금세 온갖 물건으로 가득 차버렸다!
아니 이걸 어떻게 다 들고 가라고?
그보다 술 효모랑 발효기는 왜 주는 거야?!
어이가 없는 걸 넘어 정신이 아득해져 있는 내 앞에, 드워프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마지막 상자를 놓았다.
“이야, 이건 열어보지 않아도 뭐가 들어 있을지 짐작이 가네요. 왜 아직까지 안 나오나 했습니다.”
“아, 예…….”
“자자! 마지막 상자입니다, 설렘과 기대로 한껏 마음을 부푸시고 열어보시죠!”
황당함과 걱정으로 한숨을 푹 쉬며 상자를 여니, 배낭 네 개가 들어 있는 게 보였다.
꽤 두툼한 가죽으로 돼있는데도 그리 무겁지 않았다.
근데 배낭 있는데 왜……?
의문이 담긴 시선으로 드워프를 보자, 그가 씨익 웃었다.
“저희 연구소의 대표 작품입니다. 공간확대 마법이 걸려 있죠.”
“……고, 공간확대 마법? 어, 그거……”
그거 위슨이 들고 다니는 배낭에 걸려 있는 거잖아!
나도 모르게 위슨에게 눈길이 갔고, 그는 무던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위슨은 이틀 전에 봐서 알고 있었어. 위슨 것보단 조잡하지만 쓸 만은 할 거다.”
“하하하, 그야 현자…가 아니라 마법사님이 쓰시는 건 ‘신비’의 결정체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그 오랜 세월을 들였는데도 아직 배낭의 용량을 두 배로 넓히는 것과 무게를 가볍게 하는 것. 이 두 가지만 구현할 수 있답니다. 정말이지, 마법사님들이 존경스럽다니까요.”
위슨의 배낭과 달리, 드워프가 만든 배낭은 수납용량에 한계가 있고, 음식을 오래 넣어두면 상하며, 아무나 안에서 물건을 꺼낼 수 있다.
그래도 본래 담을 수 있는 용량의 두 배나 들어가면서도 무게가 가벼운 거다.
평범한 인간인 내 눈엔, 이것도 충분히 위대하고 대단한 물건이었다.
이야, 위슨처럼 특별한 힘을 다루지 못해도 마법이 담긴 물건을 쓸 수 있다니!드워프 굉장해!
나는 드워프의 손을 잡고 크게 흔들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될 거에요! 우와, 드워프 진짜 대단하네요!”
“하하하! 이렇게 기뻐하시니 저희도 보람이 있군요! 자자, 이제 옷 입어 보시지요. 치수가 안 맞거나 하면 고쳐야 하니까요.”
그 말에, 로나와 위슨을 제외하고 각자 지급받은 옷을 들고 방으로 올라갔다.
로나는 사제복만 입어야 하기 때문에 망토만 요청했고, 위슨 역시 코트랑 모자만 있으면 된다고 전달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순식간에 확인이 끝난 두 사람은, 우리가 옷을 갈아입고 오는 동안 물품들의 사용법을 듣고 있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어디 보자…….”
내 몫은 망토에 두툼한 더블릿, 그리고 허벅지 부분에 두툼한 가죽을 덧댄 바지에 벨트가 달린 부츠였다.
좀더 든든하게 입고 다니게 하겠다더니, 거의 갑옷 수준인데?
일단 더블릿 두께가 원래 입고 있던 것의 두 배는 족히 되는 거 같다.
이렇게 두껍다면 다른 겉옷은 필요 없겠군.
근데 바지도 그렇고, 밖은 한창 여름인데 덥지 않을까 모르겠네.
“흠……”
옷을 갈아입고 끈을 여민 후, 이리저리 몸을 돌려보았다.
품 자체는 전부 딱 맞는 것 같다.
생각보다 무겁지도 않고.
다시 거실로 내려가자, 다른 두 명이 먼저 와서 옷매무새를 살피고 있었다.
메린은 튜닉에 조끼를 입은 채, 반소매가 달린 서코트를 팔에 걸고 있고, 블루벨은 셔츠 위에 가슴과 어깨 쪽만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밑은…… 하, 돌겠네, 진짜.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살짝 느끼며 이 웃긴 엘프에게 물었다.
“……근데 블루벨, 위쪽은 든든하게 입었으면서 아래는 왜 그래?”
“아래? 아래가 뭐 어때서?”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다.
정말 어이가 없군.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면서, 다른 손으로 그녀의 다리를 가리켰다.
“옷차림이 굉장히 달라지셨네요, 블루벨 씨. 산과 숲과 길을 쏘다닐 건데 말이죠, 블루벨 씨.
근데 허벅지까지만 오는 바지는 너무 짧지 않습니까, 블루벨 씨? 호즈인지 양말인지로 다리를 완전히 덮지도 않고 말이죠, 블루벨 씨? 신발도 뭔 실내화마냥 너무 짧은 거 아닙니까, 블루벨 씨?
예? 어떻게 생각하세요, 블루벨 씨?”
“미친놈아, 말끝마다 내 이름 부르지 마, 뭔가 이상하잖아! 그리고 나 원래 숲에서 이러고 다녔거든?! 인간 마을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이러고 다녔고!”
“뭐라는 거야, 여기 올 때도 평범하게 케이프에 튜닉 입고 있었잖아.”
“그거 인간들이 하도 쳐다봐서 일부러 입었던 거야! 드워프들도 그럴까 싶어서 입고 있던 거고! 답답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블루벨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투덜거리더니,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뭐, 이 정도면 그럭저럭 입고 다닐 수 있겠어. 드워프들 솜씨도 제법인걸?”
“당연하죠, 귀재, 아니 엘프 씨. 당신들처럼 숲에 처박혀서 풀떼기나 만지작거리는 촌뜨기가 아니거든요.”
“귀쟁이보다 더 심한 말하고 있지 않아?! 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억하심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외치는 블루벨.
그러나 흰 옷을 입은 드워프는 그녀를 무시한 채, 나를 이리저리 살필 뿐이었다.
가엾기도 하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드워프에게 말했다.
“심정은 이해하는데, 블루벨한테 너무 그러지 마세요. 숲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이에요.”
“그래도 엘프인 건 마찬가지죠. 저 치솟은 귀를 보면 울화가 터지는 걸 어쩌겠어요? 놈들 때문에 몇 달 동안 내내 집에도 못 가고 계속 야근하고 있는데……!”
“……”
여러모로 원한이 두텁게 쌓여 있는 듯했다.
이를 박박 갈며 나를 살펴보던 드워프는, 곧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불편하진 않으시죠? ……좋습니다. 그럼 무기를 확인하시죠.
이게 용사님이 쓰실 검입니다. 순수 심층 은으로만 되어 있으니 그리 무겁지 않으실 거에요.”
그가 건네는 검을 받아서 천천히 뽑아보았다.
스으으, 하는 소리와 함께 곧게 뻗은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강 봐도 바짝 서 있는 양날엔 감히 손가락을 대어볼 염두도 나지 않는다.
검신의 중앙엔 무언가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성검에 새겨져 있는 것과는 다른 종류인 것 같았다.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룬이네.”
위슨이 옆에서 말을 툭 던졌다.
“룬? 마녀……가 아니라 마법사들이 쓰던 그 문자?”
“어. 강건과 수호가 적혀 있어.”
“……?”
“검이 튼튼하고, 주인을 제대로 지키길 바란다고.”
아아, 그런 의미구나. 나는 몇 번 허공에 칼을 휘둘러본 후, 다시 검집에 꽂았다.
검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내가 보기에도 좋은 검 같았다.
성검보다는 무겁지만, 내가 원래 쓰던 것보다도 가볍고.
무엇보다도 칼자루가 화려하지 않은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진짜 용사가 쓸 검이라고 장식에 힘을 주지 않아서 다행이야.
어느 보검처럼 금장식이 달려 있거나 보석이 막 박혀 있다면 부담스러워서 못 써.
내 평가를 들은 드워프는 크게 웃었다.
“하하, 정말 소박한 감성이시군요. 그리고 이게 아가씨가 쓰실 검이고…… 여기, 단검 두 자루입니다.”
메린 역시 드워프에게 검을 받자마자 천천히 뽑았고, 곧 엷은 푸른빛 칼날이 드러나며 불빛에 반짝였다.
“아다만트……라고 했었죠? 좀 묵직하네요.”
“예, 아가씨. 가장 단단한 광물인 만큼 무게가 좀 나갑니다. 그래서 통짜로 하는 대신 오리할콘을 조금 섞었습니다. 그래도 순수 아다만트 검보다 성능은 훨씬 좋을 겁니다. 유니콘의 뿔이 들어갔으니까요.”
드워프는 북실북실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유니콘의 뿔은 무엇이든 뚫고, 무엇이든 베어버리죠. 그 성질이 들어갔으니 절삭력은 세계 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근데 검집엔 어떻게 들어가 있는 거죠?”
“그야 처치를 해놨으니까요. 아, 다른 검집은 그 검의 절삭력을 버티지 못하니 절대 잃어버리지 마세요.”
전용 검집에, 뭐든 벨 수 있는 무기라…….
그야말로 이야기 속에 나오는 전설의 검 같군.
메린은 검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갑자기 빈 나무상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거 부숴도 되죠?”
“아, 예. 물론이죠.”
“흠.”
시험해보려는 건가……?
메린은 새 검을 쥐고 자세를 잡더니, 나무상자를 향해 크게 휘둘렀다.
퉁!
칼날이 상자 측면을 때렸는데, 아무 흠집도 나지 않았다.
“……”
……어라? 적어도 박혀야 되는 거 아닌가?
날이 전혀 안 서 있을 거 같진 않은데……!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심지어는 드워프들조차 눈을 휘둥그레 뜨고 술렁거렸다.
설마 불량품……?
어이씨, 나도 검 시험해봐야 하나?
“오, 좋네.”
그러나 메린은 오히려 더 맘에 든다는 듯이 환히 웃었다!
그녀는 검을 거두면서, 나를 포함해 자신을 멀뚱히 보는 시선들을 마주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못 잘랐는데 왜 좋아하나 해서.”
내가 대표로 대답하자, 그녀는 눈을 한층 더 동그랗게 떴다.
“아닌데? 안 자른 건데.”
“뭐……?”
“일부러 안 자른 거라고. 볼래?”
뜻 모를 소리를 하면서 다시 상자 앞에 선 그녀는, 제대로 자세도 잡지 않고 검을 뽑아 휘둘렀다.
마치 도마 위에 올린 순무를 자르는 듯한 움직임.
그러나 그 성의 없는 움직임으로도, 푸른빛 칼날은 나무상자를 똑 쪼개버렸다.
부서지거나 깨진 것이 아닌, 완벽하게 잘라버린 것이다.
“전대 사범님이 그랬어. 주인이 베고 싶어하는 것만 베는 검이 명검이라고. 이야, 진짜 좋은 검이네. 이거라면 창살이든 뭐든 삭삭 썰 수 있겠어!”
“……아, 그래.”
놀랄 점이 너무 많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대강 끄덕인 후, 다른 사람들처럼 벙벙한 얼굴로 메린을 보고 있는 블루벨에게 물었다.
“댁도 단검 시험해보지?”
“됐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정중히 사양하는 블루벨이었다.
그 뒤, 나는 곧바로 의사당에 가서 암피오 의장을 만났다.
물품을 전부 문제없이 전달했다는 확인증과 함께 맹약서를 내밀면서, 그녀에게 깊이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의장님. 숙소에 장비에 무기까지 준비해주신 걸로 모자라, 여러 유용한 물품까지 지원해주시다니……. 덕분에 여러모로 잘 정비하고 떠날 수 있을 듯합니다.”
“하하, 그런 말 말게. 우린 그저 의무를 다했을 뿐이야. 그러니 자네도 자네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게. 가능한 빠르게.”
“빠르게…… 예, 지당하신 요청입니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의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행여나 오해하지 말게. 우리 때문이 아니야. 자네를 위해 하는 말이지.”
“네? 저요?”
고개를 끄덕인 후, 의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삼 년을 버틸 수 있는 비축이 있네. 지하가 폭발해서 용암이 올라오지 않는 이상, 몬스터 외에는 걱정할 게 없어. 그리 고수준은 아니어도 ‘신비’…… 마법을 활용할 수도 있으니, 필요하다면 농작물을 급속으로 성장시킬 수도 있네. 하지만 자네들 인간은 아니지 않나?”
비축이 넉넉하다면 다행이지만, 모든 성과 마을이 풍족한 건 아니다.
그렇다고 드워프들처럼 마법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설사 감자나 순무를 심더라도 그게 다 자랄 때까지 굶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할 터.
“물론 그들이 도움을 요청한다면 응할 의사는 있어.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굶주릴 것이고, 자네는 그걸 보게 되겠지.
우리는 바로 옆 사람이 굶어 죽어도 태연히 있을 수 있네. 바위에서 태어난 존재답게 돌 같은 성미이거든. 하지만 자네나 다른 인간들의 성품은 그 몸처럼 말랑말랑하지. 안 그런가?”
그녀는 맹약서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고, 그 위에 도장을 찍었다.
그러자 인주가 한 번 번쩍이더니, 의장의 이름 밑에 저절로 날짜가 찍혔다.
그런 뒤, 의장은 맹약서를 내밀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니 가능한 서두르시게나. 자네 자신을 위해서.”
“……예.”
종이를 받아 들고, 도장이 찍힌 곳을 바라보았다.
인간, 마법사, 엘프, 그리고 드워프의 인장과 서명이 채워져 있다.
……이제 남은 건 인어뿐.
본거지를 잃은 인어를 찾아 대륙의 남쪽으로 가야 한다.
그 다음엔…… 북쪽으로 가야 하겠지?
북쪽의 산 어딘가에 있을 드래곤을 찾아 그를 물리치기까지, 앞으로 얼마나 걸릴 것인가?
생각에 빠진 나를 꺼내 올리려는 듯이, 의장은 불현듯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건투를 비네. 자네의 개선식을 기대하도록 하지.”
“개선식이라뇨…… 아무튼 감사합니다.”
쓴웃음을 지으며 그 손을 맞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힘내라, 그렇게 말하는 듯한 굳센 손과 눈에 감사의 뜻을 담아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