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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231화 (231/475)

〈 231화 〉 224화 : 흔하다면 흔한 일 (3)

* * *

한바탕 소란이 가라앉은 후, 블루벨은 예정대로 지도를 들고 산봉우리 위치를 확인하러 떠났다.

걸음걸이가 좀 불안정했지만……

음, 엘프이니 괜찮겠지.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이 주변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마이라를 들쳐업고,

“영차.”

그대로 위슨의 배낭에 넣어버렸다.

그녀의 발바닥까지 전부 배낭 안에 쏙 들어가버린 걸 보고서야,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휴우…… 이걸로 안심이군. 고마워, 위슨.”

“근데 솔직히 또 배낭에 넣자고 제안할 줄은 몰랐다. 저래도 일단은 사람인데.”

“그치만 엄청 무서운걸! 갑자기 너나 내 뒤통수를 후려치고 이런저런 짓할 수도 있잖아! 절대 같이 길 못 다녀!”

유령이나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게 바로 미친 사람이다.

뭔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위슨의 물약을 훔치거나, 길 가다가 독초를 뜯어서 내 입에 쑤셔넣을지도 몰라.

아니면 밤중에 몰래 천막에 숨어들어오거나!

으으,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절로 쳐진다.

로나 역시 살짝 넌더리가 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충분히 저지르실 거 같아요. 이야, 그렇게 정열적인 분일 줄은 몰랐네요.”

“근데 처녀로 죽는 게 그렇게 억울한가? 야, 카엘, 너 동정인 채로 죽으면 억울할 거 같냐?”

“그딴 거 일일이 따질 시간이 있으면 로나한테 치유받고도 남을 거 같은데.”

우리가 이 여정 중에 죽는다면, 그런 사소한 거 하나하나 따져가며 억울해할 시간 따위 없이 콱 죽겠지.

뭐, 아마 많은 사람이 이미 그러고 있을 거다.

“만약 서서히 죽는 게 확실하다면?”

“글쎄…… 그거보단 다른 걸로 미련이 남을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문득 다 정리된 바닥에 앉아 하품하고 있는 메린을 보았다.

저 속 편한 녀석을 혼자 두고 죽는다는 것 자체가 미련덩어리일 거다.

만약 메린이 혼자가 아니라면……

음, 그래도 역시 미련이 남을 것 같아.

그녀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더 보지 못하는 걸 아쉬워하지 않을까?

“위슨 너도 이대로 죽으면, 동정인 것보다 목을 못 고친 걸 더 아쉬워하지 않겠냐?”

“그렇겠지. 흠……, 그럼 그 여자는 결혼하는 게 꿈이라서 그런 건가?”

“그렇지 않을까?”

사랑하는 낭군님에게 순결을 바칠 생각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받는 아내가 되고 싶었던 거겠지.

굉장히 소박하고 순수한 꿈이긴 하다.

아마 되고 싶어서 드래곤의 신부가 된 게 아닌 걸 거야.

그 때문에 자포자기해서 막 나가려 한 건지도 모른다.

……그 탓에 여러 사람의 정신이 나갈 뻔했지만.

근데 진짜 대단하긴 해.

웬만한 일엔 끄떡도 않는 로나까지 완전히 얼이 나갔었잖아.

역시 인간, 사람이 가진 마음의 힘은 굉장한 것이다……!

내심 감탄하고 있는데, 블루벨이 눈 깜짝할 새에 나타나더니 터덜터덜 다가왔다.

“다녀왔어……. 여기…….”

“어, 응. 고마워.”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과 달리, 지도에는 산봉우리 위치가 또렷이 표시되어 있다.

흠흠, ‘끝없는 장서관’보다 더 앞쪽에 있군.

진짜 가는 길이네.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를 품속에 넣고 앞을 보니, 블루벨이 얼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 손을 휘휘 저어보아도 아무 반응이 없을 정도로 완전히 얼이 나간 상태였다.

우와, 엄청 충격받았나봐…….

“블루벨, 괜찮아? 어째 직접 당한 나보다 댁이 더 타격이 큰 거 같다?”

“상상도 못했어……. 대낮에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자신을 범해달라고 소리치는 사람이 있다니……! 히으…… 인간 무서워……!”

“……”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고 바들바들 떠는 블루벨.

아무래도 오늘밤엔 술 네 잔까지 허락해줘야 할 듯했다.

덤으로 나도 반 잔 정도 마시고.

“아무튼 대강 위치 알았으니 출발하자.”

정오가 지난 만큼 그리 오래 가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한 걸음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야지.

새신부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을, 산꼭대기에 사는 신랑을 위해서……!

머리 위의 하늘처럼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굳게 다짐하며, 내 앞을 걷고 있는 다른 일행들을 보았다.

평소보다 확연히 걸음이 빨라져 있는 게, 다들 나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는 게 틀림없다.

짜식들, 은근히 인정이 넘친다니까.

홀로 피식 웃으며, 나 역시 힘찬 잰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나흘 뒤, 우리는 붉은 지대의 경계선에 이르렀다.

악마에게 제물을 바치던 그 동굴에서 여기까지 꽤 거리가 되길래, 솔직히 일주일은 더 넘게 걸릴 줄 알았는데 말야.

내 동료들이 얼마나 간절히 신랑신부의 결합을 이뤄주고 싶었던 건지, 하루라도 더 빨리 가야 한다고 전에 없는 강행군까지 했다!

뭐, 위슨 녀석은 여전히 동굴을 찾아댔지만.

아무튼 이제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붉은 땅을 밟게 된다.

나는 기지개를 켜면서, 꼭 벽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거대한 봉우리를 올려다보았다.

와, 여기서 올려다보니까 끝이 안 보이네.

대체 얼마나 높은 거야?

“그러니까 이제 저기를 올라가야 되는 거지?”

“더럽게 높은데.”

같이 봉우리를 올려다보며 메린이 중얼거렸다.

“길이 있을까 모르겠네요. 블루벨 씨, 뭐가 보이시나요?”

“빨간 돌밖에 안 보여.”

“흠…… 길이 있긴 있는데, 빙빙 돌아서 올라가야 되나본데.”

어느새 늑대를 꺼낸 위슨이,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린 채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길이 있긴 있군.

꼭대기에서 이 아래까지 자주 오가는 모양이다.

“근데 이거 꼭대기까지 가는 것도 며칠 걸리는 거 아냐?”

“그럴걸? 좀 큰 게 아니잖아.”

“돌겠네, 진짜.”

저 산봉우리에서 다시 내려올 때 즈음엔, 다리에 근육이 붙어서 아주 우락부락해져 있을 것 같다.

경사가 그렇게 험하지 않으면 그냥 말 타고 가는 게 낫겠군.

멍하니 봉우리를 올려다보는데, 메린이 내 어깨를 쿡쿡 찔렀다.

“야, 카엘, 저기가 진짜 맞는지 물어보고 가는 게 낫지 않냐?”

“마이라 씨한테? 눈이 안 보이는 사람한테 물어서 뭐해?”

“그 드워프들처럼 입구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잖아. 일단 물어는 봐야지.”

“그것도 그렇네…….”

으, 근데 지금 깨우기 싫은데……!

가능하면 그 위대한 영이 산다는 곳 문 앞에 내려놓고, 후딱 내려오고 싶은데 말이지!

표정이 살짝 찌푸려진 나를 향해, 메린은 고개를 까닥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저기가 아닌데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괜히 시간만 엄청 낭비하는 거잖아. 그 여자가 덮칠까 걱정되면 팔다리 묶든가.”

“아니, 그건 보기 좀 그렇다니까.”

눈가리개 하고 있는 사람의 팔다리를 밧줄로 묶는다?

그거 완전 포로 끌고 가는 꼴이잖아.

안 그래도 새신부라 하기엔 조금 초췌한 몰골을 하고 있는데, 위대한 영이라는 존재에게 괜한 오해를 사긴 싫다.

……그래도 메린 말처럼, 출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긴 하다.

큭, 어쩔 수 없나……!

속으로 성호를 그어 내 정조를 지켜주십사 기도하면서, 나는 위슨에게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이라 씨를 꺼내자.”

“진심이냐……?”

“헛수고하는 것보단 훨씬 나아. 우린 단 하루도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고.”

시간제한인 일 년까지는 아직 많이 남아있긴 하나, 그래도 여유를 부릴 수는 없다.

‘불구덩이’ 속 ‘불의 호수’가 부활했고, 지상의 모든 날고 기는 짐승과 사람의 태가 닫혀버렸다.

밀과 보리, 벼의 알곡도 사라져버렸고.

이 다음에 무엇이 올지 모르는 이상, 휴식이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어떤 험난한 고난이 닥친다 할지라도……!

“야, 그렇게 심각하게 각오할 필요는 없지 않냐? 여자들이 막아주겠지.”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야……!”

하, 좀 진정된 상태로 깨어나면 좋겠는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나는 위슨과 함께 배낭에서 마이라를 꺼내어 바닥에 눕혔다.

그런 뒤, 위슨이 그녀의 입에 각성제를 흘려 넣었고, 잠시 후, 나는 몸을 꼼지락거리며 길게 신음하는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마이라 씨. 정신이 드시나요?”

“이 목소린…… 카엘 씨……?”

음, 기억이 날아가진 않았군.

지난번에 발광했던 것도 다 기억하고 있을까 모르겠네.

마이라는 누운 채로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제가 지금 묶여 있는 건가요?”

“아뇨. 그냥 팔다리를 붙잡고 있을 뿐입니다.”

또 다시 날뛰지 않도록, 세 여자가 그녀의 팔다리를 각각 붙잡고 있는 상태였다.

마이라는 의아스러운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별안간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 취향이셨구나. 그래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거부하셨던 거군요.”

“깨자마자 뭔 소리에요, 아니거든요?! 애초에 다들 보는 데서 그런 거 할 리가 없잖아요!”

“네? 그게 무슨…… 아, 맞다. 제 동포가 아니셨죠. 죄송해요, 감정이 치달아서 깜빡했어요. 저희는 그 일을 할 때 다른 사람 눈은 신경 쓰지 않거든요.”

“……”

자연 그대로의 삶이로군.

그래도 사람이자 지성체답게, 조금은 문명인의 감성을 가지는 게 좋지 않을까?

저절로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어쨌든 지금 붉은 땅 바로 앞에 와 있는데요. 저 앞에 엄청나게 큰 봉우리가 있긴 있거든요? 빙빙 돌아서 올라갈 수 있다는 듯한데, 그 키리오스라는 자가 사는 곳이 맞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나요?”

“네……? 벌써 도착했어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던 그녀는, 곧 전부 체념한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로 이게 제 팔자인 거군요. 위대한 영의 발치에선 감히 부정(不?)을 저지를 수 없으니…….”

“……”

“제 양손 팔찌와 목걸이에 붉은 구슬이 달려 있을 거에요. 위대한 영에게 가까이 갈수록, 그 구슬의 빛이 강해진답니다. 어차피 붉은 대지에 솟아 있는 산봉우리는 하나뿐이니, 길을 헤맬 일은 없을 거에요.”

그럼 역시 정면에 보이는 봉우리를 올라가야 하는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로나와 블루벨이 각각 잡고 있는 마이라의 손목을 살폈다.

악마숭배자들이 그녀가 차고 있는 장신구엔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은 건지, 널따란 소매 속 가느다란 손목에 팔찌가 고스란히 채워져 있었다.

“붉은 구슬…… 아, 이거구나.”

손바닥을 보이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고 뒤집자, 팔찌 중앙에 붉은 구슬이 크게 박혀 있는 게 보였다.

그 키리오스에게 가까이 갈수록 이게 더 환히 빛난다는 거군?

……역시 예사로운 존재가 아니야.

정말로 드래곤일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적이 될 수도 있겠는데?

우리는 지금 다른 드래곤을 토벌하는 여행을 하고 있으니까.

“손……, 따뜻하시네요.”

“?!”

갑자기 마이라가 내 손을 감싸 쥐었다!

또 불붙은 건가 싶었지만, 그녀는 지난번처럼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거나 몸부림을 치진 않았다.

……그저 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조용히 입을 열 뿐이었다.

“제 아버지가 좀 거친 분이라서, 저는 항상 따뜻하고 상냥한 남자를 만나고 싶었어요. 그런 사람의 아내로 살면 무척이나 행복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죠.”

“……”

“아까는 죄송해요. 너무 북받쳐서 그만……. 키리오스 님의 신부가 된 거, 제 의지가 아니었거든요.”

“그럴 거 같았어요.”

자신의 의지로 신부가 된 거라면 그렇게 악을 쓰지 않았겠지.

오히려 우리에게 ‘멋대로 몸에 손대지 마라’고 화를 내지 않았을까?

나는 씁쓸히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심각하게 놀라긴 했지만 이해해요. 참고로 나흘 전에 있던 일이에요.”

“……그렇군요.”

또 한 번 체념 섞인 한숨을 푹 쉰 후, 그녀는 내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

“저……, 아직 구해주신 답례를 못 드렸어요. 그 은혜를 제 몸으로 갚으면 안 될까요?”

“죄송한데 그런 답례는 안 받아요. 애초에 제가 구한 것도 아니잖아요. 로나가 구했지.”

“……정말로, 제 소원을 들어주실 수 없는 건가요……?”

굉장히 끈질기군. 어지간히 인외의 존재에게 시집가는 게 싫은 모양이다.

하긴 뭐, 말만 신부이지 그 존재를 옆에서 모시면서 평생 독수공방하는 역할일지 누가 알겠는가?

사랑받는 아내가 되어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걸 꿈꿔온 그녀에겐, 처녀로 죽는 것만큼 한스러운 게 없을 거다.

그녀에게 그것은, 사랑을 알지 못하고 죽는 걸 뜻하는 거나 다름없을 테니까.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 손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죠……?”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설령 단 한순간이라 해도 당신을 사랑할 수 없고요.”

“……눈이 멀어서요?”

“아뇨. 제 마음속엔 이미 다른 사람이 있거든요.”

“……”

만약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대답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나도 남자인데, 풍만한 몸매의 여자가 전력으로 유혹해오는 걸 어떻게 버티겠는가?

억지로 새신부가 되어 눈까지 잃은 마이라가 측은하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 내 마음속엔 메린이 자리하고 있다.

심지어 당사자에게 고백까지 했고, 일행 중에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 블루벨도 알고 있겠지.

그런데도 다른 여자를 안는다?

하하하, 난 절대 못해.

애초에 그건 ‘좋아하는 사람과만 함께 밤을 보낸다’는 나 자신의 말을 어기는 거다.

자신이 한 말도 못 지키는 놈이 다른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메린에게, 로나에게, 위슨에게, 그리고 블루벨에게 무어라 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미안하지만 할 수 없어요. 저는 그 사람에게 떳떳하고 싶거든요. 그리고 당신에게도 못할 짓이고요.”

“그럼……”

“제 다른 일행도 안 됩니다. 열 다섯 살밖에 안 됐거든요.”

“상관없는데…… 아니, 오히려 더 좋을지도……?”

“이 사람이 진짜 정신이 나갔나! 당신 진짜 숫처녀 맞아요?! 안 돼, 절대 안 돼!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허락 못하니까 포기해요!”

마이라가 몇 살인지는 안 물어봐서 모른다.

하지만 신부로 간택된 걸 보면, 아무리 어려도 열 아홉 살일 터……!

그런 어른 여자가 미성숙한 소년과……?

으아악, 안 돼!

세상이 끝장나버릴 거야!

순간 이마를 흐른 식은땀을 슥 닦은 후, 나는 한숨을 푹 쉬면서 말을 이었다.

“……그 위대한 영이라는 분이 굉장히 좋은 분일지도 모르잖아요. 당신이 바란 것보다 더 사랑해줄지도 모르고요. 어차피 그른 거, 적어도 그런 희망을 품지 그래요?”

“희망이라……. 후후, 그러고보니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했네요. 눈이 지져지는 순간부터, 인생이 끝장났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거든요.”

그녀는 내 손을 놓고 긴 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한가득 담긴 듯한, 길고 긴 한숨이다.

그런 뒤, 그저 가만히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그녀가 마침내 마음을 바꿨음을 알았다.

나는 세 아가씨에게 손짓해서 그녀의 팔다리를 자유롭게 두도록 한 후, 그녀의 두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주었다.

“고마워요, 카엘 씨. 저, 그냥 이대로 봉우리로 올라갈게요. 당신 말대로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낭군님에게 떳떳해야 하니까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사과할 사람은 저에요. 미안해요, 터무니없는 고집을 부려서. 저는 이제 괜찮아요. 봉우리로 데려다주세요.”

“네. 가죠.”

나는 메린의 도움을 받아 마이라를 내 말에 올려 태웠다.

마치 인사하듯이 푸릉거리는 말의 갈기를 익숙한 손길로 쓰다듬으며, 마이라가 불쑥 중얼거렸다.

“……그 분이 부럽네요.”

“네? 누구요?”

“후후,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요.”

홀로 부드럽게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는 말고삐를 당겨 천천히 말을 끌었다.

그리고 말의 뒷발굽이 붉은 대지를 두드리는 순간,

콰아아앙­­­!!

“……?!”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매캐한 흙먼지가 일었다.

뒤이어 거센 바람이 불더니, 흙먼지를 전부 다 거두어 가면서 묵직한 정적을 퍼뜨렸다.

숨소리마저 시끄럽게 느껴지는 고요 속에, 흙먼지 때문에 숙였던 고개가 들리지 않을 만큼 무거운 엄숙함이 섞여 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일반인인 마이라의 안위부터 확인해야 한다!

말을 향해 고개를 겨우 돌리자, 마이라가 말의 목을 꽉 안은 채 바짝 엎드려 있는 게 보였다.

바들바들 떨고 있긴 해도 일단 무사하군. 다행이다.

“……?”

어쩐지 그녀의 손이 붉어진 거 같아 살며시 소매를 걷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팔찌의 구슬이 환히 빛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거, 그 키리오스라는 자가 가까이 오면 빛난다고 했는데…….

설마 저 자가……!

“이제야 왔는가.”

‘위대한 영’이라는 명칭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무척이나 평범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드니,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남자가 두 눈을 꼭 감은 채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대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런데도 앞이 보이는 건지, 로브 같은 긴 옷을 입은 남자는 그대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향해 한 팔을 뻗었다.

“나의 반신이여.”

“……!”

……마이라가 아닌, 메린을 향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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