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화 〉 227화 : 산 위의 용자(子) (3)
* * *
멀거니 창 밖을 올려다본다.
너른 하늘에 여러 점들이 원을 그리며 빙빙 돌고 있는 게 보인다.
날짐승이 저렇게 날아다니는 걸 본 건 이번이 세 번째로군.
하나는 까마귀, 또 하나는 대머리 수리였지?
이번엔 무려 드래곤이다, 드래곤.
갑자기 대륙에서 모습을 죄다 감춰버린 그 드래곤!
“나 참…….”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아무리 드래곤이 개체수가 적은 생물이라 해도 말야.
이 산꼭대기에 죄다 모여 살고 있다는 게 말이 돼?
물론 이 꼭대기가 거의 평원 수준으로 넓긴 하지만, 드래곤도 덩치 더럽게 크잖아.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습니다. 이곳에 있는 드래곤은 저를 포함해 42마리뿐. 로드를 따라 인간의 형체를 취하고 있으니 공간은 넘치지요.”
“……당신도 드래곤이었지요?”
“그렇습니다.”
내 시중을 들도록 명령받은 하녀…… 아니, 시녀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마티나는 딱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빛 드레스에 흰 앞치마를 두른 그녀는, 은빛 머리카락을 정갈하게 올려 묶고 그 위에 흰 머리수건을 쓰고 있다.
……차림새도 그렇고, 진짜로 귀족 저택에 일하는 사용인 같아.
근데 또 드래곤이 그걸 흉내내고 있다는 게 이상해.
아니, 인간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
애초에 여기 숨어 살고 있는 것부터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한숨을 쉬며, 허리를 편 채 꼿꼿이 서 있는 마티나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여기서 산 거죠? 대체 왜 이런 곳에 다 모여 살고 있는 겁니까?”
“이번이 439번째 맞는 여름이니, 439년 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는 것이 되겠군요. 우리가 이곳에 있는 건 로드가 그리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드…… 키리오스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분을 지칭하실 때엔 로드, 혹은 키리오스 님이라 부르십시오. 다른 자들의 반발이 우려됩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후, 창문에서 고개를 돌려 다시 침대 위를 보았다.
실내복으로 갈아입혀진 메린이, 이틀 전에 비하면 다분히 혈색이 좋아진 얼굴로 곤히 잠들어 있다.
여전히 뺨은 수척하지만.
빌어먹을 로드 새끼, 생각하면 할수록 열받네.
어디 함부로 독을 먹이고 지랄이야?
로나는 독을 치유할 순 있어도, 쇠락한 기력을 회복시킬 순 없는데.
어쩌면 예전의 몸 상태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물론 위슨 녀석은 걱정 말라고 했지만…….
하, 어떻게 안 할 수가 있겠냐고.
그러고보니 그 녀석, 이틀 전에 종일 뻗어 놓고, 오늘 꼭두새벽부터 부엌에서 물약 끓이고 있던 거 같은데.
또 밤샌 건 아냐?
“……”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며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역시 열은 없군. 이틀 전처럼 싸늘하지도 않다.
이미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도 자꾸 열을 재고, 그때마다 안심하고 있다.
……그러고보니 네가 나한테 그랬었지.
쓸데없이 걱정한다고.
근데 이건 어쩔 수 없지 않냐?
그간 감기 한 번 안 걸린 네가 드러누워 있잖아.
그래도 역시 나보다 낫구나.
쇠약해져도 열은 안 나다니 말야.
근데 진짜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지 않냐?
세상에, 내가 네 병간호를 다 하다니.
뭐, 그래봤자 약을 먹이거나 이렇게 네 머리 쓰다듬으면서 자는 얼굴 보는 게 다이지만.
나머지는 마티나가 해주고 있으니, 다 나으면 고맙다고 꼭 인사해.
“……푹 쉬어.”
중얼거리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머리를 쓰다듬은 후, 나는 마티나에게 메린을 맡기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그리고 어느 방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린 다음,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 카엘 님.”
“안녕, 로나. 아냐아냐, 일어나지 마. 누워 있어.”
몸을 일으키려는 로나를 제지하며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런 뒤, 어째서인지 담요를 뒤집어쓴 채 로나의 침대에 기대어 자고 있는 블루벨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할망구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
“글쎄요. 혼자 있기 심심하다고 와서 수다 떨더니, 저러고 계시네요.”
“네가 걱정됐나보네.”
방으로 보내려 블루벨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나 신음하며 웅얼거리기만 할 뿐, 깨어날 기미는 조금도 없다.
그냥 냅두지, 뭐.
“블루벨 씨가 절 걱정해요? 희한하네요.”
“희한할 게 뭐 있어? 블루벨도 그간 뭔 일이 있었는지 다 들었다던데.”
이틀 전 밤에 혼자 깨어난 블루벨은, 방에 대기하고 있던 마티나에게 자초지종을 쭉 들었다.
자신이 드래곤의 포효 때문에 기절했다는 것, 메린과 로나가 독을 마셨다는 것.
그리고 위슨이 키리오스와 어떤 내기를 해서 이겼다는 것도.
……그게 무슨 내기였는지는 들을 수 없었지만, 아무튼 블루벨은 독을 마신 로나를 걱정하고 있던 게 분명하다.
어쨌든 로나는 열 네 살 밖에 안 된 어린 소녀이니까.
“게다가 어제 깨자마자 메린을 치유하고 도로 쓰러졌잖아. 당연히 걱정하지. 얌마, 너 자신부터 돌봐야지, 왜 메린부터 고치냐?”
“사제니까요. 사제 자신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가장 낮은 법이에요.”
“아, 예, 참 훌륭하기도 하시지.”
서슴없이 대답하는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이 모범적인 사제님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어주었다.
“보기엔 되게 좋아 보이는데, 진짜 괜찮아? 설마 사제 자신의 상처나 독은 치유 못하고 그런 건 아니지?”
“그런 제약은 없어요. 저에게 있던 독은 이미 없어졌으니 걱정 마세요. 음…… 아마 내일이면 다시 팔팔하게 움직일 수 있을걸요?”
오 년이나 더 젊어서 그런가?
왠지 메린보다도 더 회복이 빠른 것 같다.
괜히 최고의 전투사제라는 평가를 받은 게 아닌가보네.
“대단하네. 메린은 아직도 거의 하루종일 잠만 자고 있거든.”
약을 먹거나 몸을 닦는 일 등으로 깨울 때를 제외하면 계속 잠들어 있는 상태이다.
저러다 걷는 법을 까먹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꼭 겨울잠에 든 것 같아. 한여름이지만.”
“아무래도 메린 님이 저보다 더 타격이 크실 테니까요. 저는 독 내성 훈련받았거든요. 공포심도 그렇고요. 또, 창조주의 힘 자체가 보호해주기도 한답니다.”
“……그렇구나.”
훈련이라곤 검술밖에 안 한 메린이, 여러 전문훈련을 받은 사제와 같은 선상에 서 있었다는 거에 감탄해야 하나?
그리고 그런 메린도, 역시 독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 돈독 오른 도시의 창관에서 겪었던 것처럼.
아무리 강하고 튼튼한 몸이라 해도, 겨우 독 한 방울로 끝장날 수 있는 것이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무기일 거야.
말없이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로나가 조용히 물었다.
“카엘 님, 그 로드랑 이야기하셨나요?”
“……아직.”
안 그래도 어제 마티나를 통해, 키리오스가 대화를 요청한다고 전달받았다.
아직은 몸 상태가 좋아지지 않았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거절했는데, 마티나의 반응을 보니 점점 조바심을 내고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메린도 그렇고, 너도 아직 이러고 있잖아. 블루벨도 아직 회복 안 됐고. 이 상황에 뭔 대화야, 대화는.”
“카엘 님도 죽을 뻔하셨었잖아요. 나 참, 그걸 가장 먼저 언급하셔야죠.”
“나야 뭐, 원래 그런 팔자 아니겠냐.”
“하긴 카엘 님이 팔자가 되게 사납긴 해요.”
이 자식이?
“얌마, 거기선 아니라고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이런 매정한 자식 같으니.”
“꺄아~ 환자 괴롭힌다~”
사제답지 않게 박정한 어린 사제님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주었다.
머리카락이 붕 떠서 아예 산발이 된 그녀의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내 웃음이 옮았는지 로나도 킥킥거렸고, 그렇게 잠시 마주 웃은 후, 로나는 나를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근데 카엘 님, 제대로 쉬고 계세요? 안색 별로 안 좋아 보이시는데. 메린 님이나 다른 사람 문병 순회하시는 것도 좋지만, 일단 카엘 님부터 몸 추스르셔야죠.”
“제대로 쉬고 있으니 걱정 마. 괜찮아.”
마구 흐트러진 로나의 머리를 대강 슥슥 정돈해주며 대꾸하자, 그녀가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로드랑 이야기 나누세요. 저희 기다리지 마시고요.”
“뭐? 아니, 그건……”
“메린 님이 걱정되시는 거죠? 그건 알지만, 독도 치료됐으니 곧 괜찮아지실 거에요. 그러니 먼저 그 자와 이야기를 나눠주세요. 그래야 시간을 아끼죠.”
“시간…….”
……알고 있다. 우리는 시간을 아껴야 한다.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기도 했는데 그걸 모를까?
우린 여기서 벌써 이틀이나 썼고,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또 며칠을 쓸지 모른다.
마침 일행의 대표인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상태이니, 무언가 이야기할 게 있다면 후딱 해야 한다.
그래, 알고 있다고.
알고 있지만……
“……솔직히 혼자 이야기하는 게 좀 그래. 같은 인간이면 몰라도 드래곤이잖아.”
“음, 그건 카엘 님이 분발해주셔야지요.”
“하하…….”
거침없이 내지르는 정론에, 나는 그저 씁쓸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향해, 로나는 빙긋 웃었다.
“아마 굉장히 괜찮으실 거에요. 메린 님과 관련된 일일 게 분명한데, 카엘 님이 긴장 따위에 먹히실 리가 없죠.”
“……”
……키리오스, 그 자는 메린을 자신의 반신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반려자’를 돌려 말하는 건가 했는데, 정작 그가 지칭하는 반려는 메린이 아니라 마이라였다.
그러니 그가 말한 ‘반신’ 또한 문자 그대로 ‘몸의 반쪽’이라는 뜻일 터.
어떻게 인간 여자가 수컷 드래곤의 몸의 반쪽이 될 수 있는 건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내 상태가 괜찮아지면 설명해주겠다고 했으니, 아마 그것 때문에 대화하자고 요청한 것이리라.
산꼭대기 아래에서 그가 메린에게 보인 태도가 다시금 떠올랐다.
그녀가 오길 애타게 기다렸다고 했었지.
……뭔가 꺼림칙해.
“그다지 좋은 이야기는 아닐 거 같아. 그래도……,”
“하실 수 있죠?”
“……당연하지.”
고개를 끄덕이자, 로나는 돌연 헤실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렇다네요. 그럼 잘 다녀오세요~”
“응?”
누구에게 말하는 거지?
고개를 갸웃하며 물으려는 순간, 갑자기 눈앞이 일렁이더니 풍경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거대한 홀, 높디 높은 천장.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의 양 옆에 일렬로 서 있는 거대한 드래곤들.
“참으로 기쁜 대답이었다.”
그리고 홀 맨 안쪽, 거대한 의자 위에 엎드려 앉아 있는 붉은 드래곤이 있었다.
다른 드래곤들보다 확연히 커다란 덩치 때문일까, 왠지 모르게 그 얼굴을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져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숨이 막히고 있었다.
까마득한 위에서, 경멸하는 시선들이 마구 쏟아지고 있다……!
“……윽!”
시야가 휘청거린다.
온 몸의 힘이 빠지는 감각과 함께 둔탁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돌바닥의 차갑고 딱딱한 감촉 덕분에, 그나마 간신히 의식의 끈을 붙잡고 있을 수 있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빌어먹을 거대 파충류 새끼들이 왜 쳐다보고 지랄이야……!
“망…할……!”
보지 마. 보지 마.
보지 마, 망할 새끼들아!쳐웃지도 말고!
아냐, 아냐아냐, 아무도 웃지 않고 있어. 안 웃고 있다고.
아, 빌어먹을, 숨 막힌다.
당장,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흠? 아, 여기선 안 되는가?”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울린다 싶더니, 별안간 세찬 바람이 뺨에 닿는 게 느껴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힘겹게 고개를 들자, 키리오스가 붉은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그의 뒤쪽엔 그저 하늘이 펼쳐져 있을 뿐.
위에는 태양이, 아래에는 구름이 이불처럼 고이 깔려 있다.
군데군데 그 구름을 뚫고 뾰족 솟아나와 있는 건 분명 어느 산봉우리일 텐데, 꼭 동산처럼 보였다.
“이 지상에서 가장 하늘에 가까운 곳이지. 네놈들 인간은 먼지보다도 더 작게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처음 봤을 때처럼 두 눈을 굳게 감고 있는데도, 그는 마치 앞이 보이는 것처럼 얼굴을 내게 똑바로 향한 채 말하고 있었다.
그대로 빙긋 웃으며, 그는 재차 입을 열었다.
“그래, 작디 작은 존재인 것이다. 아무리 네놈이 전능자가 택한 용사라 해도, 결국은 인간인 게지. 흐흐, 한낱 미물이 드래곤의 시선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있나!”
“그거 때문에 그런 거 아닌데요…….”
그냥 시선 자체를 여럿 받는 게 문제인 건데.
애초에 같은 인간들의 시선을 받는 것도 힘들구만…….
그러나 키리오스는 내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렸는지, 통쾌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계속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용사가 원초적인 공포에 떠는 걸 보는 건 즐거우나, 네놈이 그 가증스러운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면 나 역시 난처하다. 지상에 내려가거든, 그에 대한 대책을 제대로 세우도록 해라.”
“드래곤 상관없다니까요……. 근데 아트라토스도 일단 드래곤 아닙니까? 동족을 죽이려는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셔도 되는 건가요?”
“네놈이 실패하면 다같이 멸망하기밖에 더하느냐? 게다가 그 존재는 그저 드래곤의 형체를 취했을 뿐, 순전한 드래곤이 아니다.
그렇다고 네놈을 돕지는 않을 것이니 괜한 기대는 말거라.나 자신의 멸망을 기꺼이 도울 만큼, 자기파괴적인 성미는 못 된다.”
자기파괴……? 그게 뭔 소리이지?
나와 일행이 아트라토스를 물리치면, 드래곤들에게 무슨 영향이 간다는 뜻인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자, 키리오스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모르는 모양이군?”
“뭘 모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는데요. 일단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는 확실히 모르겠네요.”
“그들이 일러주지 않더냐?”
“누구 말씀이시죠?”
“네놈에게 검을 쥐어 준 자. 길을 떠나라고 등을 민 자. 나아갈 길의 방향을 알려준 자.그 누구도 네놈에게 이르지 않은 모양이지?
크흐, 이거 걸작이로군! 그야말로 멋모르는 애송이에게 짐만 떠안기고 내보낸 꼴이 아닌가!”
키리오스는 그렇게 외치더니, 정말로 우습다는 듯이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중간중간에 꼴 좋다느니, 이걸 정녕 기꺼워해야 되냐느니 혼자 떠들며 한참을 웃은 후,
“후우…… 뭐, 그게 나의 역할인 것이겠지? 좋지, 좋아, 기꺼이 하고 말고.
자아, 잘 듣거라, 용사. 내 친히 알려줄 터이니 영광으로 알도록.”
그는 어딘지 자애로워 보이기까지 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나의 이름은 키리오스. 오백 년 전에 태어난 기개 높은 드래곤의 왕, 로드이다. 나의 가신들은 나를 이렇게 부르지. ‘반동자 아트라토스의 아들’이라고.”
“아, 아들?!”
아니, 뭐, 천상에서 추방되었다고 해도 지상에선 생물의 삶을 사는 거잖아?
그야 짝이 있다면 자식도 가졌겠지!
그래도 세상에, 그 북의 대재앙 아트라토스의 자식이라니……!
그리고 그 자식놈이 제 어버이를 죽이려는 놈한테, 준비 철저히 하라고 충고까지 하다니!
오, 주여, 이게 뭔 꼬라지랍니까!
혹시 그거인가?
왕위를 계승 중……
아니, 이미 얻은 왕위를 다시 빼앗길까봐 족치려는 거야?
“우와, 패륜을 저지르는 드래곤이라니……, 불효자, 그것도 진짜 불 속성 효자잖아…….”
“……말을 제대로 들어라, 용사. 아들이라 불린다고 했지, 나 자신이 아들이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네놈, 그런 말은 속으로 해라. 어차피 들리는 건 매한가지이긴 하나, 입 밖으로 내는 걸 들으니 훨씬 더 거슬리는구나.”
“당신 가신들 탓에 그럴 기운이 없어졌거든요. 송구하지만 양해해주십시오.”
“허, 참으로 방약무인하군. 그 놈도 그랬지만, 네놈도 참 기이하구나. 아무리 인간의 형체라 하나, 날파리나 다름없는 미물이 드래곤을 앞에 두고 태연하다니.”
물론 겉이 인간의 모습인 것도 있겠지만, 내가 태연한 건 그에게서 아무런 적의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뭐, 개미 더듬이만큼의 호의도 없는 것 같지만.
키리오스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래도 역시 그 놈이 가장 기묘하다. 네놈처럼 전능자가 택한 것도 아닌데, 그저 잘 벼린 검을 들고 나에게 맞섰으니.
어리석은 놈. 그때에 내 목숨을 거두었다면 이러한 때를 맞지 않았을 것을. 나 역시 이 대지에 호흡할 일 없이 그대로 사라졌을 것을.”
오백 년 된 드래곤이 내뿜고 있는 것은 적의도 불쾌함도 아닌, 단순한 질색이다.
그것도 나뿐 아니라, 눈과 손발이 닿는 세상 모든 것을 향해.
……근데 드래곤들은 엘프보다도 더 오래 사는 종족 아닌가?
그의 나이인 오백 살의 몇 배나 더 긴 수명을 살 텐데, 뭔 세상 다 산 노인네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대?
“다 살았지. 육체를 가진 존재 중, 이 대지에 나보다도 더 오래된 자는 없을 것이다.”
“……맘대로 남의 속마음 읽지 마시죠.”
“크흐흐, 들리는 것을 어찌하겠나? 염려 마라. 드래곤이 아닌, 나이기에 가능한 것이니.”
“당신이 뭔데요? ……말이 좀 이상하네, 다시 여쭈겠습니다. 당신이라서 가능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죠?”
내 물음에, 키리오스는 두 팔을 벌리며 씨익 웃었다.
“……내 소개를 다시 하지. 나는 키리오스라 이름하는 드래곤.반동자 아트라토스의 정수(??)와 기억을 품은 분신이다.”
“허……?”
아트라토스의, 분신……?
그럼…… 그럼 저 자가 메린을 가리켜 반신이라 한 건……
“그래, 말 그대로 나의 반신이다. 아트라토스가 손수 빚은 그릇이지.
네놈이 애지중지 아끼는 그 인간은,대재앙의 영혼을 품을 그릇인 것이다.”
“……!!!”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