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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235화 (235/475)

〈 235화 〉 228화 : 산 위의 용자(子) (4)

* * *

말도 안 돼.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오직 그 한 마디뿐이었다.

“그래, 말도 안 되지. 통상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허나 네놈도 알 것이다.

나는, 통상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천상에서, 추방된 자.”

“그러하다. 나는 본디 하늘 위의 하늘에 있던 자. 전지전능하신 아버지의 뜻을 거스른 죄로 이 지상에 떨어진 자다. 크흐, 인간들은 이를 비유로 여긴다지? 네놈이라도 생각을 바꾸도록.”

“……”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내 반응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 것인지, 키리오스는 낮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추방된 나의 육신은 거대한 드래곤의 형태를 취했다. 이 지상의 생명체 중 가장 강한 것이 드래곤이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나는 새로이 지닌 육신의 능력,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꽃으로 지상을 잿더미로 만드리라 선포했다. 추방된 것에 아주 크게 분이 나 있었거든.”

“근데 혼자 망했고요.”

“하, 네놈, 참으로 쓸데없는 데서 대담하구나.그래, 세상과 함께 멸하려던 나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봉인되었지. 그게 그 놈들의 실책이다.”

실책? 아트라토스를 봉인한 게 실수라는 건가? 왜?

의아함에 눈을 깜빡이는 나를 마주하며, 그는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면서 분통을 토했다.

“놈들은 나를 죽였어야 했다. 어쭙잖은 봉인이 아니라, 나의 영혼을 산산이 부숴, ‘아트라토스’라는 존재를 완전히 말살시켜야 했단 말이다! 허나 놈들은 나를 봉인했어. 그것도 하찮은 동정심 때문에……!”

그의 두 눈은 여전히 굳게 감겨 있는데도, 제3자인 나조차 살짝 긴장할 정도로 맹렬한 분노가 느껴지고 있다.

음…… 모르겠네.

봉인되는 게 죽는 것보다 더 성질나는 건가?

“못 들었나? 놈들이 나를 봉인한 건 동정심 때문이다. 저들 손에 버거워서가 아니라! 이런 치욕이 또 어디에 있겠느냐!”

“아.”

하긴, 그건 ‘불쌍하니 봐준다’는 소리나 다름없지.

열받을 만도 하다.

나는 씩씩대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근데 왜 동정했대요? 쫓겨나서?”

“아니, 사랑을 알지 못하고 고독하게 있기 때문이라 하더군.

“………”

“그래, 그때 내 심정이 바로 네놈과 같았다. 허나 애석하게도, 그 당시 놈들의 우두머리는 검을 든 인간이었지.”

검을 든 인간이라, 그거 우리 왕국의 초대 국왕 아니냐?

후후, 초대 국왕님이 그렇게 낭만 넘치는 분이셨다니 정말 절망스럽군.

아니 싸우기 전날에 연인이 생기기라도 했나?

뭔 사랑 타령을 하고 있대?

돌겠네, 진짜.

아무튼 그렇게 아트라토스는 봉인되었다.

……의식은 계속 깨어 있는 채로.

“계속 깨어 있었다고요? 그럼 지금도……!”

“물론이다. 몸만 움직이지 못할 뿐, 의식은 지금도 또렷이 살아있지. 그리고 의식이 있으면, 권능을 행사할 수 있고.”

추방된 화풀이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같잖은 이유로 봉인까지 당해버렸다.

아트라토스의 분노는 잠잠해지긴커녕 한층 더 커져버렸고, 그는 봉인이 풀리면 반드시 세상을 멸하리라 굳게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심을 이루기 위해,그는 봉인이 풀릴 때를 기약해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봉인이 풀릴 걸 알고 있었나요?”

“언젠가 풀리리라는 약속이 있어야 봉인이 성립된다. 명심해라, 용사. 오직 죽음만이 영원한 봉인을 이룩할 수 있다.

여하간, 북쪽 산에 봉인된 나의 계획은 이것이다. 봉인이 풀리자마자 몸을 갈아타는 것이지.”

“허……?”

벙벙한 내 얼굴을 마주한 채, 키리오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 놀랄 것은 아닐 터. 본연의 영혼과 권능을 가진 내가 패배한 이유는 단 하나, 천사가 놈들에게 합류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균형이 안 맞는다며 끼어들더군.

그렇다면, 나의 승리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나?”

그의 패착이 정말 천사 때문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그의 개입을 막아야겠지.

……근데 그 방법이 몸을 갈아타는 거라고?

왜 그게 그렇게 되냐?

이야기의 흐름상, 아트라토스가 그 몸 갈아타기를 위해 준비한 게 키리오스인 건 자명하다.

근데 결국 드래곤이잖아?

드래곤이 드래곤의 몸으로 갈아타봤자 뭐가 달라진다고?

“말했을 텐데. 본래의 나는 그저 드래곤처럼 생겼을 뿐, 드래곤이 아니다. 드래곤을 닮은 다른 생물이라 생각해라.

이 지상의 어떤 생물도 나의 영혼을 온전히 담을 수 없다. 설령 드래곤 중에서 가장 강한 드래곤의 몸으로 옮긴다 하여도, 나는 권능의 일부를 잃겠지.”

아하, 솥에 담긴 물을 수프 그릇에 죄다 쏟아붓는 식이로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즉, 더럽게 약해진다?”

“비교적 약해지는 거다! ……크흠, 여하간 나는 곧 태어날 드래곤의 유체에 나의 정수 일부와 기억을 먼저 옮겨 심었다. 봉인이 풀리기 전에 미리 기반을 다질 셈이었거든. 이 몸은, 그것을 충분히 하고도 남을 만큼 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허 참, 정말 단순하기 그지없었어. 드래곤이라는 생물을 잘 알지 못한 탓에 저지른 우책이야.”

“그게 무슨……?”

고개를 갸웃하는 나를 향해 키리오스는 자조하듯 웃은 후, 긴 한숨을 쉬었다.

“드래곤은 자아가 강한 생물이다. 알 속에서 꿈틀대기 시작한 순간부터 독립체로서 자아를 갖지. 정수와 기억을 심는 것만으로는 몸을 차지할 수 없어.

할 거라면 영혼을 깎아서 집어넣었어야 했다.”

봉인된 상태에선 할 수 없는 신기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덧붙이며, 그는 재차 한숨을 쉬었다.

“내가 노린 것은 ‘키리오스의 몸을 지닌 아트라토스’가 되는 것이었지. 그러나 지금의 나는 ‘아트라토스의 힘과 기억을 가진 키리오스’이다. 이 차이를 알겠느냐?”

“……주체가 다르군요.”

즉, 눈앞에 있는 저 눈 감은 붉은 남자는 아트라토스가 아니다.

그저 그의 힘과 기억을 가지고 있는, 키리오스라는 별개의 드래곤일 뿐.

아트라토스의 장대한 계획은 또 다시 대차게 실패해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나를 적대하지 않는 거였구나.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거야.

“아니 근데 왜 자꾸 아트라토스를 가리켜 본인이라고 해요? 사람 헷갈리게.”

“그게 내 과거인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최근까지도 내 본신과 계속 연결되어 있었지. 내가 키리오스라는 온전한 독립체가 된 건, 열 아홉 해밖에 되지 않았다.”

“열 아홉 해 전이라면……”

……나와 메린이 태어난 해다.

그는 내 얼굴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키리오스라는 실패를 겪은 후, 아트라토스는 계획을 수정했다. 인간을 그릇으로 삼기로 했지.”

“왜죠?”

“인간은 영혼이 크면서도 개체의 힘은 미약하기 그지없다. 한 마디로, 숨어살기 딱 좋지.

허나 영혼이 큰 만큼 자아 역시 강하다. 때문에, 아트라토스는 나의 반신이 아직 어미의 태 안에 있을 때에 영혼을 비웠다.

그 또한 아트라토스가 인간을 택한 이유지. 영혼을 주무르기 쉽거든.”

……말도 안 돼.

저절로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전부 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메린이 태어나기 전부터, 아트라토스의 의식이 그녀에게 수작을 부렸다고?

자신의 정수를 심고, 그녀의 영혼을 일부러 비워버렸다고?

그걸 나보고 지금 믿으라는 거야?!

“반대로 묻겠다, 용사. 왜 믿지 못하지?”

“말이 안 되니까요! 아, 예, 그 녀석이 뱃속에 있을 때 손댈 수 있었다고 쳐요. 그럼 기억은 왜 안 심었는데요? 왜 하필 시골 깡촌에 있는 그 녀석을 고른 거죠? 봉인이 올해 풀릴 건 또 어떻게 알고……!”

“크흐흐흐……!!”

흥분해서 외치는 내 모습이 퍽이나 재미있는지, 빨간 드래곤 새끼는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후, 이제는 나와 무관한데도 역시 통쾌하군. 답례로 대답해주마.

왜 기억을 심지 않았느냐고? 아무 권능도 없는 몸에 기억을 심어봤자 하등 쓸모없기 때문이다.

봉인이 올해 풀릴지는 어떻게 알았느냐고? 당연히 위에서 미리 알려주었지.

왜 하필 그 인간이냐고? 크흐, 하나 알려주마. 몸을 갈아탈 때엔, 그에 자리한 영혼과 합의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이다.”

힘을 낭비하지 않고 고스란히 몸을 차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그것은 이미 자리하고 있는 영혼에게서 소유권을 넘겨받는 것이다.

그럴싸한 소리이긴 한데, 그게 지금 이거랑 뭔 상관이래?

눈살을 찌푸리고 있자, 그런 나를 보는 키리오스의 미소가 한층 더 깊어졌다.

굉장히 즐거워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오, 짜증나.

“이 대륙의 북쪽에는 작디 작은 마을이 하나 있다. ‘신비’에 온통 둘러싸인 채, 그 속에서 아득바득 삶을 이어가는 인간 마을이 하나 있지. 나의 반신은 그곳에서 태어났다. 알고 있느냐?”

“이웃이었는데요.”

“크흐,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지. 나의 반신은 다른 인간보다 가볍고 가벼운 영혼을 지녔다. 어찌 보면 짐승이나 다름없지. 그런 와중에 아트라토스의 정수를 받았으니,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웠을 터.

그렇지 않은가? 네놈은 보았을 것이다, 용사. 나의 반신이 어찌 살았는지.”

“그건……”

영혼이 부족하기 때문에 감정이 부족하다.

그에 더해, 누구도 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 탓에, 사물을 보는 시각이 다분히 다른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냐, 그래도……

그래도 아니야……!

“그건 메린이 부모를 잃어서, 혼자 자란 탓에……!”

“크흐흐흐! 그래, 그랬겠지! 그 마을은 부모나 자식을 잃기 딱 좋은 곳이 아닌가! 나의 반신의 혈육을 노리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을 터! 게다가 그 마을엔……, 타락한 사제가 하나 있었지?”

“……!!”

“크크크크! 알겠는가? 네놈은 전제부터 틀렸다. 아트라토스는 그 인간을 택한 것이 아니야.그 마을을 택한 것이지!그 마을에 사는 인간은, 누구든 상관없었다!”

……또 다시 숨이 막혀오는 듯했다.

어느새 나는 제자리에 엎드린 채, 몸을 부들부들 떨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메린이 그런 삶을 산 게……

그녀의 삶 자체가,

전부 다,

계획하에 꾸며진 거라고?

세상을 멸할,

대재앙이 되기 위해……?!

“묻겠다, 용사. 그 인간이 아트라토스의 권유를 거절할 것 같으냐? 거부당해온 울분을 풀자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있을까?”

“큭……!”

“설령 나의 반신이 거절한다 하여도, 아트라토스는 쉬이 그 몸을 차지할 것이다. 그를 위해 영혼을 비운 것이니까. 자투리 영혼에 생겨난 자아 따위, 반항할 새도 없이 짓눌려 사라지겠지.”

……그렇게 아트라토스는 메린의 몸을 차지할 것이다.

그 영혼에게 남은 권능을 써서 세상을 한껏 불태우고, 그리고 이 세상이 멸망할 때 함께 스러지겠지.

그것이 그의 소망.북쪽의 대재앙 아트라토스의계획이다.

그의 분신, 키리오스가 밝힌 말을 들으며, 나는 여전히 엎드린 채 물었다.

“……그걸 막을 방법이 없는 건가요?”

“그릇을 죽여라. 그게 가장 확실할 것이다.”

“덜 확실한 방법도 있군요. 그게 뭐죠?”

고개를 쳐든 나를 향해, 그는 또 다시 빙긋 웃으며 손바닥 하나를 펴고 앞으로 내밀었다.

이내 그 손바닥 위에 건물 몇 개가 놓인 평원의 모습이 작게 떠올랐다.

꼭 모형을 보는 것 같았다.

“산 아래의 인간들은 이곳에 자신들을 지키는 ‘위대한 영’이 살고 있다고 믿는다. 이곳은 그들의 사원이지. 그들의 믿음이 이 산꼭대기에 ‘신비’를 불어넣었고, 그것이 이 풍경에 어우러지며 거대한 ‘신비’를 만들어냈다. 내 자랑스러운 위업이지.”

사원.

그러고보니, 그때 그 천사가 그랬었지.

용사를 위한 진실과, 내 평생의 과업을 위한 시련이 산꼭대기의 사원에 있다고.

……그게 여기였던 건가?

허, 정말 기가 막히는군.

“그게 뭐 어쨌다는……”

“이곳의 ‘신비’는 아트라토스의 영향력을 끊어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영향력을 끊는다고?

그 말은……

“여기에 있는 한, 아트라토스의 손은 닿지 않아. 그러니 나의 반신을 이곳에 두고 가라, 용사.”

표정이 절로 일그러진 나를 향해 미소를 띤 채, 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

그 말을 듣고,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대로 몇 번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쉰 후, 복장 터지게 빙긋 웃고 있는 드래곤 로드를 올려다보았다.

입 밖으로 나온 내 목소리는 그새 꽤나 갈라져 있었다.

“……그걸 제가 승낙할 것 같습니까?”

“거절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죽이는 것도 아니고, 단지 이곳에 놓고 가라는 것인데.”

“아트라토스를 죽인 뒤에 다시 오면 데려가게 해줄 거에요?”

“당치도 않은 소리. 내 권역에 발을 들이는 즉시 네놈을 죽일 것이다. 아, 원한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니 오해 마라. 인간이 자유로이 다니면 ‘신비’가 벗겨지기에 취하는 조치일 뿐이다.”

“그럼 메린이 산에서 내려가는 건요?”

“그 또한 안 될 말이지. 내 따로 계획이 있거든.”

……그럼 결국 메린과 영영 헤어지게 되는 거잖아.

이 등신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걸 지금 제안이라고 던지는 건가?

어림도 없는 소리!

곧바로 고개를 저으려는 순간, 키리오스가 낮게 웃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크흐, 이런 일은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게 도리 아닌가? 가서 묻도록 하지. 이미 다 들었을 터이니.”

“뭐……!”

“크흐흐흐! 내가 설마 네놈 한 사람에게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 전능자의 검이 그랬지. 시간을 아껴야 한다고. 나 역시 그리 생각하기에, 네놈의 동료 모두가 듣도록 하였다.

물론, 나의 반신을 포함해서……!”

따악, 손가락이 퉁기는 소리와 함께, 또 다시 눈앞 공간이 일렁이더니 메린의 방으로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곤히 자고 있던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앉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진짜, 전부 다 듣고 있던 거야……?

“로드.”

그리고 침대 옆에 서 있던 마티나가 키리오스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그래, 수고했다.”

“황송합니다.”

이 드래곤 새끼들이……!

울컥 솟아오른 화를 억누르려 주먹을 꽉 쥐었다.

파랑새 녀석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죽이지 못해도, 아예 손을 못 대는 것은 아니라는 그 말.

그 경고 아닌 경고 덕분에, 턱까지 올라온 화를 가까스로 억누를 수 있었다.

“……잘 자는 애를 깨워서 그런 이야기를 듣게 해요? 너무한 것 아닙니까?”

“오해이십니다. 약 드실 시간이기에 깨워드렸을 뿐이니 노를 거두십시오.”

“그럼 약만 먹이면 되지, 왜 이야기를 듣게 해요?!”

“로드의 명이었습니다.”

“큭……!”

빌어먹을, 드래곤만 아니었으면 멱살이라도 잡고 흔드는 건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유쾌히 웃는 빨간 놈을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그런 내 모습에 한결 더 큰 미소를 띠며, 키리오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메린에게 물었다.

“그래, 그대는 이미 반쯤 결정한 듯하군? 크흐, 용사가 들을 수 있도록 그대의 입으로 고하거라.

나의 반신, 아트라토스의 그릇이여. 이곳에 남겠는가?”

……수락할 리 없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일 리가 없다.

나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줄곧 되뇌었다.

아니라고 할 거지?

너만 여기에 남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제발, 고개를 저어줘……!

간절히 바라는 내 눈에,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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