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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236화 (236/475)

〈 236화 〉 229화 : 해바라기의 소망 (1)

* * *

메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그러나 시선만은 여전히 아래를 향한 채 입을 열었다.

“…………생각해볼게요.”

“뭐……?”

말도 안 돼.

오늘만해도 벌써 다섯 번은 더 넘게 되뇐 것 같지만, 이건 진짜 말도 안 돼.

곧바로 거절할 줄 알았는데……!

“메린, 임마, 그게 뭔 소리야?! 생각할 게 있긴 어디 있다고!”

“……”

“너 설마 이 말 다 믿는 거야? 네가 그 아트라토스의 그릇이라는 걸 진짜 믿는 거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게 뻔하잖아!

……아, 맞다. 너 아직 기운 다 못 차렸지. 그래, 이해해. 그럴 수 있어. 기운이 없으면 별 해괴망측한 소리도 다 진짜처럼 믿기기 마련이야. 일단은, 응, 잊어버리고 쉬자. 일단 몸 추스르고 다시 생각하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중얼거렸다.

……메린은 아직 몸이 안 좋아.

독은 치료했지만 아직 기운이 없어. 그래서 그런 거야.

평상시였다면 코웃음칠 텐데, 몸이 약해진 게 불안해서 저 빨간 놈 말에 혹해버린 거지.

그래, 맞아.

그런 게 틀림없어.

그게 아니면,

그녀가,

여기에 남는 걸,

생각해보겠다고 할 리가 없어……!!

“이러고 있지 않아도 내 대답은 똑같아. ……생각해볼 거야.”

딱딱한 그녀의 목소리가, 그런 내 생각을 여지없이 마구 깨부숴버렸다.

치밀어오르는 격정을 가까스로 삼킨 후, 나는 조용히 말했다.

“……넌 아직 덜 나았어. 냉정하게 판단할 수 없는 상태야. 그러니까,”

“냉정하지 않은 건 너지. 네가 그 모양이니까 생각해보겠다고 하는 거 아냐.”

“뭐? 그게 뭔……, 너 설마……!!”

“그래.”

침대 위를 내려다보던 그녀의 시선이 서서히 위로 올라왔다.

나를 똑바로 마주보는 두 주홍빛 눈동자엔, 아무런 감정도 비추고 있지 않다.

그 덤덤한 눈빛처럼, 무감정한 목소리가 나에게 뜻을 전했다.

“나 여기 남을 거야.”

“……!!”

……말도 안 돼.

이미 주저앉아 있는데, 왠지 더 깊은 땅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 내 머리 위를, 크나큰 웃음소리가시체 위를 맴도는 까마귀처럼떠돌았다.

만족함, 유쾌함, 즐거움, 기쁨.

그 모든 감정이 담뿍 들어있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듯한, 그런 밝은 감정들이 사정없이 부딪쳐왔다.

“크하하하하! 이거, 이거 정말 꼴사납구나! 용사라는 자가! 하찮은 연정 때문에 절망하는가! 크흐흐, 오늘은 실로 즐겁구나. 본신과의 연결이 끊어진 게 아쉬울 정도야!”

말소리가 귀로 흘러 들어와, 그대로 다른 귀로 허망하게 빠져나간다.

그의 말을 이해할 여유 따위 없다.

내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건, 오로지 그녀의 말 한 마디뿐.

그게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기에 남겠다.

여기, 이제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못하는 곳,두 번 다시 나갈 수 없는 곳에 남겠다.

……자신을 버리고 가라는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 그리 결정되었으니, 곧바로,”

“그건 아니지, 도마뱀 대가리.”

벌컥 문이 열리며, 위슨이 방 안으로 터덜터덜 들어왔다.

여전히 피곤한 기색이 만연한 그의 얼굴엔 잔잔한 분노가 서려 있다.

그 섬에서처럼 살기등등한 빛을 띤 채, 두 검은 눈동자는 붉은 드래곤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반동자 시절의 버릇을 아직 못 고쳤나봐?감히 약속을 어길 셈이냐!”

“……감히? 고작 정령 따위의 가호를 받는 자가, 지금 나에게 ‘감히’라 읊은 것이냐?”

키리오스의 목소리가 험악해진 순간, 위슨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파랑새가 날개를 파닥이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파랑새가 그의 주위를 한 바퀴 돌자, 동그란 공 같던 몸체가 커지면서 늘씬한 모습으로 변했다.

그 상태로 키리오스를 매서운 눈초리로 내려다보며, 파랑새가 입을 열었다.

“지상에 속한 자가 우리를 가리켜 ‘고작’이라 하느냐? 오만방자도 정도껏 해라, 드래곤. 추방된 붉은 별의 기억을 품은 채 흙으로 돌아가고 싶으냐? 네놈의 고동소리가 불쾌해지려 하는구나!”

방 안을 웅웅 울리는 파랑새의 목소리에 맞서, 키리오스가 날카로운 말투로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방자한 건 네놈의 계약자이다. 현자의 자질이 있다 하여도 결국은 인간. 네놈들의 가호와 총애를 받는다 하여 결국은 인간이다! 인간 따위가 어찌 드래곤을 하대하느냐!

네놈이 계약자를 그리 애지중지 아낀다면, 허투루 그 목숨을 잃지 않도록 말버릇을 훈육하는 게 좋을 것이다!”

“계약자의 분노는 정당하며 지당하니라. 내 앞에서 다른 소리를 할 셈이냐?”

“내가 무슨 약속을 어겼다는 것이냐! 나는 약속대로 용사에게 제안을 했다. 허나,”

“계약자의 요구는 두 가지였지.”

억울하다는 듯한 그의 말을, 파랑새가 싹둑 잘라버렸다.

“하나는 네놈이 말한대로 용사에게 제안을 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용사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었다.”

……내 결정에 따른다고?

자연히 올려다본 키리오스는 표정을 찡그리며 혀를 차고 있었다.

“그러니 그 인간의 의사는 무관하다. 약조를 지켜라, 드래곤. 한 발 앞서 멸망하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 정말이지 번거롭군. 내기를 하는 게 아니었어.”

툴툴대며 그렇게 말한 후, 그는 나를 뚱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일까지 시간을 주겠다, 용사. 그때 즈음엔 네놈들 모두 회복하고도 남을 터. 모레, 나에게 답을 하고 이곳을 떠나라.”

“……”

내 대답은 이미 나와있다.

그럼에도 굳이 시간을 주는 건, 이틀 안에 내 생각이 바뀔 거라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어림도 없는 소리.

고개를 숙이고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나는 일어서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부탁이 있습니다.”

가능한 단호하게 들리도록, 그에게 힘주어 말했다.

“……내일까지 이 별채에 오지 마세요. 엿보지도, 엿듣지도 마세요. 마티나를 통해서도 마시고요.

저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무엇을 하든, 관심을 끊어주십시오.”

“흥, 좋다. 네놈들의 지리멸렬한 토론 따위 지루할 뿐이지. 어디 한 번 마음껏 논의해보거라. 세계를 구할 용사여.”

“……”

빈정거리듯이 ‘용사’를 강조하며 말한 후, 키리오스는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를 따라, 마티나도 말없이 몸을 살짝 굽혀 인사하고서 방을 떠났다.

그렇게 온전히 인간만이 남은 방 안.

먼저 침묵을 깬 건, 다시 땅딸막한 모습으로 돌아간 파랑새의 입을 빌린 위슨이었다.

“그리 됐으니 메린, 여기 남고 싶거든 카엘을 설득해라. 카엘, 넌 잠깐 나와서 대가리 식혀.”

“아.”

무어라 대답도 하기 전에, 위슨은 내 팔을 붙잡고 쭉 끌고가기 시작했다.

복도로 나와서 방 문을 닫은 후에야, 녀석은 나를 풀어주고 어깨를 으쓱였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일날 뻔했구만. 위슨이 때를 제대로 맞춰서 망정이지.”

“………고맙다.”

“고마워하긴 아직 일러. 위슨은 어디까지나 유예를 만들었을 뿐이다. 메린을 설득하는 건 네 몫이야.”

“설득…….”

“하는 게 좋을걸?”

“……”

자연히 발걸음이 벽 쪽으로 향하며, 매끈하게 깎인 돌벽에 기대어 섰다.

벽이 품은 서늘함이 등을 타고 올라와, 분노와 당혹감으로 끓어오른 머리를 조금 식혀주는 것 같았다.

……메린을 여기 두고 갈 것인가? 아니면 같이 내려갈 것인가?

그건 오로지 내 의사에 달려 있다.

당사자인 그녀가 무엇을 원하건, 이 결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메린을 설득하라’는 위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까지 그녀의 마음을 돌려야 한다.

억지로 그녀를 데리고 내려가봤자, 적당한 틈을 타서 말없이 사라져버릴 게 뻔하니까.

“근데 메린 녀석, 고집 엄청 세단 말이지…….”

“남말하고 있네. 너도 만만치 않거든?”

“뭔 소리야, 내가 얼마나 양보를 잘하는데.”

“그럼 쟤한테도 양보하든가. 할 거냐? 안 할 거잖아, 미친놈아.”

“……”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그녀를 설득할 자신도 없어.

절로 새어나온 한숨과 함께, 그대로 미끄러지듯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나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위슨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미리 말해두는데, 위슨은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그러니 위슨 핑계는 대지 마라.”

“……삭막하구만.”

“반대야. 위슨은 메린이 왜 여기 남겠다고 하는지 알거든. 물론 네가 그걸 반대하는 이유도 알지. 그러니 어떤 결과이든 납득할 수 있어.”

“그게 아니라…… 넌 정말 메린이 여기 남게 되도 아무렇지도 않아?”

조용히 물으며 올려다본 검은 눈동자는, 아주 약간 어두워진 빛을 띠며 아래를 향했고,

“……당연히 아니지. 같이 여행한 지 두 달이 되어가잖아. 슬슬 표정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고.

하지만,”

곧바로 다시 나를 향하며, 평소처럼 무던히 깜빡였다.

“현실을 무시하기엔 두 달은 너무 짧거든.”

“……”

“그러니 위슨은 누구 편도 들지 않을 거다. 그냥 네 결정을 따를 뿐이야. 생각 잘하고, 설득할 거면 열심히 해라.”

그렇게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나는 그를 불러 세운 후, 나는 그간 미처 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

“키리오스…… 그 로드랑 무슨 내기를 한 거야?”

“메린이 깨어날 때 가장 먼저 보는 게 네 얼굴일지 아닐지 맞추는 내기. 위슨이 하자고 했어. 위슨은 당연히 네 얼굴을 먼저 볼 거라고 걸었고.”

“허? 아니 뭔 그딴 걸로 내기를 다 하냐? 네가 지면 어떻게 됐는데?”

“여기 남아서 평생 도마뱀 대가리 돕기로 했지.”

“……”

세상을 구경하고 싶다.

그게 위슨이 우리를 따라 섬을 나온 이유였을 터.

근데 그걸 나랑 메린 때문에 포기할 생각을 했다고?

……이 녀석, 삭막하긴커녕 아주 그냥 정이 철철 넘쳐 흐르잖아.

나와 메린, 둘 중 누구 편도 들지 않겠다고 한 이유가 조금 알 것 같았다.

“함부로 그런 내기하는 거 아냐, 멍청아. 이겼으니 망정이지…….”

“함부로 한 거 아닌데? 위슨 눈은 옹이구멍이 아니다, 등신아.”

툭 쏘아붙이는 말투와 달리, 위슨의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 계산하고 한 거야. 너네 둘 중에 네가 먼저 깨어날 건 확실했지. 그런 네가 가장 먼저 뭘 할 지 위슨이 모르겠냐? 두 달간 옆에서 지켜봤는데.

왜 그런 내기를 했냐고? 간단해. 질 리가 없으니까 했지.”

“……”

“설득, 잘해봐라.”

살짝 손을 흔든 후, 위슨은 터덜터덜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크게 기지개를 켜면서 점점 더 멀어지는 그 등을 향해 감사를 표한 후,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우………”

……좋아, 해보자. 각오를 다지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로나의 침대 옆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대차게 망하셨군요?”

“……어.”

각오는 했지만, 메린 녀석의 고집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고 갖은 이유를 다 들먹이며 설득했는데, 하나도 통하지 않은 것이다.

그냥 싫다고 떼를 쓰는 거였다면 오히려 쉬웠겠지.

그러나 메린은, 내가 대는 모든 이유에 따박따박 반론을 펼쳐버렸다.

“검술은 실전 경험을 쌓는 단계이니 굳이 자신이 하지 않아도 되고, 요리도 블루벨 빼곤 다 할 수 있으니 아무 문제없고, 전력이 줄어드는 건…… 정 걱정되면 키리오스한테 조건으로 내걸라고 하더라.”

‘돕지 않겠다’고 그 자신이 말하긴 했으나, 자신을 이곳에 두고 가는 조건으로 조력을 구한다면 생각을 달리 할 것이다.

……덤덤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그녀에게,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미리 다 생각하기라도 한 것처럼 매끄럽기 그지없는 말투에, 기세가 꺾인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도망쳐 오신 거고요?”

“……할 말이 떨어졌는데도 계속 있으면 고함치기밖에 더하겠냐? 그랬다간 그 녀석의 결심만 더 굳어지겠지.”

“오오, 놀라워라. 카엘 님이 내지르시지 않고 후퇴하시다니! 한층 더 성장하셨군요!”

“왜 감격하는 거야……?”

진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감탄하는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어, 나는 다른 의미로 크게 한숨을 쉬었다.

“……메린은 그 말을 믿나보네.”

침대에 기댄 채 바닥에 앉아 있던 블루벨이 불쑥 중얼거렸다.

그녀는 내가 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계속 어두운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키리오스가 한 말들을 전부 들은 탓이겠지.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아트라토스의 그릇이라는 거? 어. 믿는대.”

“그런 거 안 믿는 줄 알았는데.”

“맞아. 근거 없는 건 안 믿는 성격이야.”

내 말에, 블루벨이 천천히 시선을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번 건 근거가 있다는 거야?”

“……꿈을 꾼다더라.”

그녀가 덤덤히 고한 말을, 나는 두 사람에게 전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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