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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237화 (237/475)

〈 237화 〉 230화 : 해바라기의 소망 (2)

* * *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불태우는 꿈.

모든 사람이 흘리는 피에 젖는 꿈.

그 모든 꿈속에서 ‘이제 머지않았다’고 누군가가 속삭인다.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가 소리를 내어 웃는다.

……그 광경을 몇 번이고 지켜보고, 그 말소리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듣고 있다.

덤덤한 목소리로, 그녀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올해 들어서부터 꾸기 시작했다더라고.”

“그런 것 치고는 굉장히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는데.”

“그야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 녀석은…… 그런 꿈을 꾸면서도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고 했어.”

무섭지도 않고, 슬프거나 불쾌하지도 않다.

놀라운 것도 없고, 신기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건, 기쁘거나 즐거워하지도 않는다는 걸까?

그 꿈 속에서 그녀는 초연했다.

그저 일어날 일이 일어났을 뿐이라는, 담담한 감정만을 느꼈다.

아무튼 그런 꿈을 꾸는 게 다 그 이유 때문이 아니겠느냐며, 메린은 덤덤히 고한 것이었다.

“그래서 카엘 님은 어떻게 하실 거에요?”

“……솔직히 모르겠어.”

메린을 데리고 이곳을 나가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나에겐, 이제 더는 그녀를 설득할 수 있는 논리가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나 한 사람만 쓸 수 있는 성검과 달리, 그녀의 검은 누구든 손에 들고 휘두를 수 있다.

그녀는 신비로운 물약을 만들지도, 기도를 통해 신의 권능을 빌리는 것도 할 수 없다.

땅 위를 힘들이지 않고 빠르게 달리지도, 화살비를 날릴 수도 없다.

­­나는 대체가 가능한 인력이잖아.

……무덤덤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그녀에게, 내가 대체 무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밖에 없는 그 말에 맞설 수 있는 건,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적인 것뿐인데.

“……그래서 의견을 물으러 온 거야. 두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어.”

둘이 무어라 대답하건 속이 시원해지진 않겠지.

그건 나도 알고 있다.

그래도 나 혼자 이 답답함을 안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다른 누군가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대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의견이라……. 저는 메린 님이 있어야 한다고 봐요. 그래야 카엘 님이 확실히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요. 메린 님처럼 카엘 님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심신 양면으로 엄청나게 의지하고 계시잖아요?”

“……”

“저 개인적으로도 메린 님이 있는 게 더 좋아요. 해주시는 음식 맛있고, 대련할 맛도 나고요. 절 어린애 취급하지 않으시는 게 특히 좋아요! 여러모로 귀엽기도 하시고요! 그러니 카엘 님이 꼭 설득하셨으면 좋겠어요.”

환히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로나에게, 나는 힘없이 마주 웃어주었다.

“……그래? 난 반대인데.”

그리고 그와 대조적으로, 블루벨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오해하지 마. 난 그 애를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게 아니야. 뭐, 날 가끔 못마땅한 표정으로 훑어보는 건 좀 싫긴 하지만 이해해.

내 몸매가 좀 완벽해야지. 시샘을 받는 건 익숙하니 괜찮아.”

“…………”

“솔직히 말할게. 난 너희와 같이 다닌 지 얼마 안 됐어. 그래서 그 애가 여기 남더라도 아쉽지 않아. 그러니 너에게 이걸 물을 수 있는 것도 나밖에 없겠지.

……있잖아, 카엘,”

짙은 초록빛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 그 애 죽일 수 있어?”

“……!”

“네가 그 애를 설득한다면, 넌 끝에 가서 메린을 죽여야 해. 세상이 멸망하는 걸 막으려면, 아트라토스라는 존재를 완전히 없애야 하니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나는 메린을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 이후에 대해선,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메린을 데려간다는 건, 아트라토스의 앞에 그녀가 선다는 것.

아트라토스에게 갈아탈 육체를 전해주는 거나 다름없다.

종국에 내가 상대해야 하는 건, 놈의 영혼을 품은 메린이 되는 것이다.

……메린에게 검을 겨누어, 목숨을 빼앗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상상 한 번 한 적 없는 상황일텐데.

왜, 기시감이 드는 거지……?

블루벨은 내 표정을 빤히 보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그 생각은 안 해봤구나.”

“……”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블루벨은 그럴 줄 알았다고 코웃음을 치는 대신, 그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당연히 못했겠지. 좋아하는 사람을 죽인다는 생각을 어떻게 곧바로 떠올릴 수 있겠어? 내가 물어보길 잘했네.

카엘, 메린이 여기에 남으면, 적어도 그 애는 계속 살아있을 수 있어. 그럼 네가 죽는 일도 없을 테니, 서로 좋은 일 아니야? 그래서 내가 반대하는 거야.”

“나……? 거기서 내가 죽는 게 왜 나와?”

의아해하는 나를 향해,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가 사제 꼬맹이한테 하는 말 들었어. 그 애가 죽으면 따라 죽겠다며?”

“……”

“아무튼 네 논리를 죄다 쳐버릴 정도로 완강한 걸 보면, 메린도 분명 알고 있는 거야. 널 따라가게 되면 네 손에 죽어야 한다는 걸 말야.

죽기 싫어서인지, 아니면 네가 자신을 못 죽일 것 같아서 거절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굳이 따진다면 아마 후자이겠지.

마을 사람들이 강제로 결혼시키려 한다는 거에 몬스터들과 싸우다 죽으려 했던 녀석이다.

자포자기할 때도 전사답게 싸우다 죽으려는 녀석이, 명분이 충분하게 주어진 일 앞에 목숨을 아낄 거 같진 않아.

솔직히, 그녀가 그런 걱정을 하는 건 타당하긴 해.

……내가 내 손으로 그녀를 죽인다니, 도저히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블루벨은 나에게서 고개를 돌려,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으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카엘, 네가 그 애를 좋아한다면, 여기서 놓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그 애가 여기서 행복하게 살지도 모르잖아.

네가 그 마이라라는 여자에게 말했던 것처럼…… 어차피 그른 거, 희망을 품는 게 어때?”

“………좋아하니까, 놓아주라고?”

“그걸로 그 애가 행복해진다면 그래야 하는 거 아닐까? 좋아한다면, 더더욱 그 사람이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법이잖아.

………블루스타도, 그래서 날 떠나보낸 거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블루벨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는데, 이 엘프, 지금 좀 많이 비관적인 것 같은데.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잠깐 떨어진 거잖아. 여행 끝나면 숲에 돌아갈 건데, 뭘 영영 헤어진 것처럼 그러는 건데?”

“지금은 예행연습 같은 거지. 결국은 날 떠나보낼 거야. 그 사람은 한 번 결심하면 바꾸지 않는걸.”

후우, 심호흡을 하듯 크게 숨을 내쉰 후, 블루벨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무튼 네 손으로 그 애를 죽일 수 있을지 생각해봐. 물론 나나 두 꼬맹이도 그 애를 상대할 거야. 너 대신 그 애를 죽일 수도 있고. 하지만 넌 그런 걸 남의 손에 떠맡기는 사람이 아니잖아?”

“………하…….”

……점점 더 모르겠어.

나는 대체 어쩌면 좋은 거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카엘 님,”

그런 나를 향해, 로나는 조용조용한 말투로 말했다.

“당신은 하기로 결정한 건 반드시 하는 사람이에요. 메린 님을 죽이기로 한다면 반드시 죽일 거고, 살리기로 결심한다면 전력을 다해 지키겠죠.”

“……로나.”

“지난번에 말씀드렸지요? 당신의 선택이 세상의 멸망일지라도 받아들여질 것이라고요. 그건 한 줌의 과장도 없는 진실이랍니다.”

이 여행이 창조주의 각본이 아닌가 하는 내 의혹을, 창조주를 섬기는 사제인 로나는 전면으로 부정했다.

그와 함께, 그녀는 또렷이 말했다.

이 여정을 매듭짓는 건 나라고.

“카엘 님, 당신은 세계멸망을 막기 위한 여정을 밟고 있어요. 하지만 솔직히 별로 그런 생각은 안 하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여기까지 오는 중에 겪은 그 일들을, 당신은 용사가 아닌 카엘 에스트렐이라는 사람으로서 대처해왔고요.”

“……”

“당신은 메린 님을 고향에서 데리고 나왔어요. 그곳에 두고 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죠?

당신은 메린 님이 평범한 감정을 갖도록 하겠다는 일생의 목표를 가지고 있어요. 그 기저에 있는 것은 뭐죠?

메린 님이 여기에 남겠다는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죠?”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을 가만히 떼었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그랬는가?

그렇게 묻는 두 잿빛 눈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자, 부드러운 미소가 되돌아왔다.

“당신이 그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이죠?”

“나는………”

“그 말을 전하세요, 카엘 님. 그 소망을 추구하세요. 뒷일은 그 다음에 생각하면 되는 거에요.”

“……너무 무책임한 거 아냐?”

볼멘 소리로 튀어나온 블루벨의 말에, 로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그게 사람인걸요? 소망을 품고, 그를 이루기 위해 온갖 이성과 합리를 짜맞추는 존재요.

그리고 무책임한 게 아닌데요? 카엘 님은 할 땐 하시는 분이라니까요? 블루벨 씨도 경험하셨잖아요.”

“……흥.”

고개를 홱 돌리는 엘프를 보며 좀더 키득댄 후, 로나는 나를 향해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을 마주하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걸로 설득이 될까? 메린에게 가장 안 통하는 쪽이잖아.”

“안 되면 어때요? 붙잡아 두고 계속 설득하면 되죠.”

“야.”

“히히히! 걱정 마세요. 여기 떠나기 전에, 메린 님과 한 번 이야기할 생각이었거든요. 그때까지도 메린 님이 고집을 부리고 있다면, 제가 설득해볼게요.

그러니 카엘 님은 당신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전하시기만 하세요.”

내 마음. 그녀에게 몇 번이나 전했지만, 아직도 닿지 않고 있는 마음.

언젠가 닿으리라는 확신조차 가질 수 없는 마음을, 그녀에게 다시 전하라고 사제는 말하고 있었다.

“어차피 논리도 다 썼잖아요? 끝까지 힘껏 부딪쳐봐야죠.”

“……그래. 고마워.”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 참, 이런 열 네 살짜리 애는 세상에 또 없을 거야.

역시 사제님은 사제님이구나.

좀 맛이 가긴 했지만.

하지만 그녀가 평범한 사제가 아니니까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는 거겠지.

나는 씁쓸히 웃으며, 바닥에 앉아 있는 블루벨을 돌아보았다.

“댁도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덕분에 내 각오가 모자랐다는 걸 알았어.”

“……그냥 묻는 말에 대답해줬을 뿐이야.”

감사 인사는 도통 솔직하게 받아주지 않는 괴상한 엘프에게 피식 웃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이만 방으로 돌아갈게. 둘 다 고마워. 잘 자.”

“네!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내일 봐.”

손을 흔드는 로나에게 손인사를 돌려주며, 나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그 다음날, 나는 좀처럼 메린의 방에 들어서지 못하고, 문 앞에서 다시 발걸음을 돌리는 걸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런 건 아니다.

마음을 전하는 것 자체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가장 하기 힘든 ‘좋아한다’는 말도 했는데, 뭔 말을 더 못할까?

그저…… 자신이 없다.

로나는 나를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했지만, 정말로 그럴까?

정말로 내가 세상이 아닌 메린을 택한다 해도, 그 선택이 받아들여질까?

그녀를 여기 두고 간다면……

분명 내 마음은 그 시점에서 죽어버릴 거다.

그녀를 설득해서 데려간다면, 종국에는 그녀를 눈앞에서 잃게 되겠지.

결국, 뭘 고르든 파멸밖에 없는 거 아니야……?

“어째서……?”

어째서 이런 선택만 주어지는 거야?

나는 그저 그녀의 가까이에 있고 싶을 뿐인데.

그저 눈이 닿는 곳에 항상 있어주었으면 하는 것뿐인데.

어째서, 그 작은 소망조차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거냐고…….

‘이루지 못하는 건 아니지.’

……마음속 한편에서 속삭임이 들려온다.

어쨌든 가까이에 있는 거 아니냐고, 한시적이더라도 함께 있는 건 맞지 않냐고 속삭여온다.

인간은 어차피 영원히 살지 못한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변함없지 않은가?

‘그냥 좀더 짧을 뿐인 거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너무 짧잖아!

그녀를 설득해봤자,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열 달도 채 되지 않아.

빨리빨리 길을 나아간다면, 두세 달 안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고!

그렇게 짧은 시간만 함께 한다면 무슨 의미가…………

­­네가 허약해서 오래 못 사니 누굴 품으면 안 된다고?

“……아.”

불현듯, 한 달여 전에 내 뒤통수를 후려쳤던 수염 난 애아버지의 일갈이 떠올랐다.

­­네 말마따나 몇 년 못 사는 게 정을 통할 자격이 없는 거면, 이 왕국엔 전부 자격 없는 놈밖에 없어! 지금 이 시대에 늙어 죽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그딴 소리를 지껄여?!

오늘을 살아도 내일엔 죽을지도 모르는 시대인데.

일 년은 고사하고, 태어난 지 일주일만에 죽는 아이도 있는데.

두세 달이 짧다니, 뭔 복에 터진 소리를 하고 있냐?

……그 귀족 친구가 여기 있었다면, 또 내 뒤통수를 후려치면서 그렇게 호통쳤겠지.

“……”

……그래, 짧지 않아.

설령 짧다고 해도 의미 없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요즘 몸이 멀쩡한 탓에, 그만 큰 착각을 한 것 같다.

애초에 오래 살 놈이 아닌 주제에, 뭘 몇 달밖에 같이 못 있는다고 한탄하고 있어?

그리고…… 조금 좋지 않은 방향이긴 하지만,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거나 다름없잖아?

그 생각에 미치자, 어느덧 내 발걸음은 자연히 방을 나서고 있었다.

붉은빛 노을이 새어들어오는 복도를 지나, 그녀의 방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끼익, 문이 작게 열리며 마티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살짝 인사한 후, 그녀는 문을 활짝 열고 나를 들여보냈다.

이제 막 저녁 식사를 하려던 참인지, 메린은 작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왔냐.”

“걸을 수 있으면 다른 애들이랑 같이 먹지, 왜?”

“……혼자 먹고 싶어서.”

행여나 다른 녀석들이 설득할까 싶었던 거겠지.

어쨌든 그녀 역시 그다지 마음이 편하지 않은 모양이다.

테이블 위의 음식들이 아직 정갈한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데다, 그녀 앞에 놓인 접시에는 빵 부스러기 하나 떨어져 있지 않으니까.

식기를 쥐지도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나는 빈 의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도 아직 안 먹었는데, 앉아도 되냐?”

“…………그러든가.”

긴 틈을 두고 떨어진 그녀의 허락에, 작게 안도하며 자리에 앉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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