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1화 〉 242화 :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4)
* * *
무언가를 받았다면 그만큼 돌려주고, 무언가를 주었다면 그만큼 돌려받는다.
세상 만사의 근간다운, 무척이나 단순하고 명확한 이치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건 그 이치를 따르기 위함이다.
부모님에게 배우고, 메린에게 알려준 것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단지 그것뿐이지, 다른 이유는 없어.
메린이 내 등을 씻겨주었으니까 나도 그렇게 해줄 뿐이야, 그게 전부라고.
그러니까 손 좀 그만 떨어, 등신아, 스펀지 놓칠 뻔했잖아, 빌어먹을!!
아아아, 아니야, 침착해침착해침착침착, 침착! 침착하라고!
침착…… 침착하고, 차분하게, 마음을 비우는 거야.
“후……”
……됐다.
진정됐으니 작업을 재개하자.
스윽, 스윽.
스펀지를 쥔 손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했더라? 아, 그래.
아무튼 지금 이렇게 내가 그녀의 등을 스펀지로 문지르고 있는 건, 정말 순수하게 그녀를 씻겨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위이다.
그 외에는 어떠한 불손한 의도도 담겨있지 않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따금 그녀의 하얀 뒷목이나 허리 곡선, 또는 그녀가 머리를 감느라 두 팔을 들고 있는 탓에 겨드랑이 아래쪽에 드러난 자그마한 언덕에 눈길이 가기도 하지만, 그건 그녀가 머리 감는다고 움직이는 탓에 자연히 시선이 닿았을 뿐, 내 의도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음을 분명히 밝히는 바이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열병으로 며칠씩 앓아 누웠을 때마다 내 몸을 닦아주었다.
물론 그 당시엔 열 때문에 맛이 가 있었으니 정황상 그랬을 거라 짐작만 할 뿐, 기억은 전혀 남아있지 않지만 말이다.
여하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행위는 그저 그동안 쌓인 빚들을 조금이나마 갚기 위한,
“히힛, 간지러.”
“…………”
별안간 그녀가 키득 웃으며 몸을 움찔거렸다.
스펀지를 쥔 손을 바꾸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 했는데, 손이 미끄러지면서 나도 모르게 어깨를 문질러버린 탓이리라.
……그러고보니 아까도 손이 미끌어져서, 그녀의 등 한가운데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내린 꼴이 됐었는데 그때도 그녀가 간지럽다고 했었지?
또 그 전에 허리를 잡았을 때도……
“………”
그리고 그딴 게 지금 뭔 상관이야!!
전혀 중요하지 않잖아!!
마음을, 아니, 머리를 그냥 비워!
아무 생각도 하지 마!
머리를 흔들어 내용물을 탈탈 털어버린 후, 다시 열심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의 일을 마쳐갈 무렵, 메린이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헹군 다음, 다른 스펀지를 집어 자신의 몸 앞쪽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네가 딴 사람이랑 목욕하는 거 이게 처음 아니냐?”
“………그렇지.”
어릴 때는 남녀 신경 안 쓰고 같이 멱을 감는 게 보통이라지?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 알몸을 보이는 게 싫어서 항상 혼자 씻었다.
뭐, 몸이 워낙 비실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넌…… 음, 나 돌볼 때 여러모로 봤을 거 아냐.”
“엉? ……아~ 땀 닦을 때? 그건 목욕이 아니잖아.”
“어쨌든 보긴 본 거 아냐.”
처음 남자랑 밤을 보내면서 하나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말이지.
“응? 왜, 그간 혼자만 알몸 보여서 억울하냐?”
“그래, 임마, 억울해 죽겠…지 않아! 앞에 봐! 개미 눈곱만큼도 안 억울하니까 앞에 보라고!”
몸을 틀려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정면을 보게 했다.
“그래? 아니면 말고.”
다행히 그녀는 어깨를 으쓱인 후, 다시 손을 움직여서 슥슥, 스펀지로 몸을 닦기 시작했다.
아아……, 다행이다. 이 녀석이 덤덤해서 정말 다행이야……!
속으로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으, 방금 전엔 진짜 위험했어.
지금 머리를 끊임없이 탈탈 비우는 걸로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데, 여기서 얼굴을 비롯한 여러 커다란 굴곡을 마주하게 되면 바로 터져버릴 거야.
피로 말고 다른 걸 풀게 될 거라고.
그리고 그게 바로 로나가 노리는 것일 터!
녀석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순 없어!
……사실 그냥 어쩔 수 없는 척하고 좋은 시간 보내도 되겠지만, 안 돼, 참아야 해!
길이 바쁘다고!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도리질을 한 후, 다시 스펀지를 움직이는 것에만 열중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근데 있잖아.”
찰랑, 물소리와 함께 그녀가 말을 걸었다.
“너 왜 그렇게 쪽팔려 하는 거냐?”
“……뭐?”
단숨에 깔끔하게 비워진 머리로 멍하니 되묻자, 그녀가 고개만 살짝 돌린 채 대답했다.
“너나 나나 서로 알몸 실컷 본 사이잖아. 근데 뭘 그렇게 쪽팔려 하냐?”
“시, 시시, 실컷 본 건 너지! 난 한 번밖에 안 봤구만, 뭔 말도 안 되는 소릴……!”
“손댄 강도가 다르잖아. 난 너 닦는 것만 했었어. 근데 넌 나 만지고 주무르고 할 거 다 했잖아.”
“윽……!”
슥슥슥슥슥슥슥.
민망한 탓인지, 스펀지를 움직이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졌고, 이내 ‘그녀의 등을 닦는다’는 대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흑흑, 끝났어. 드디어 끝났다고!
무사히 목욕을 마쳤어!
……뭐, 그녀가 아직 덜 씻어서 탕을 나갈 수는 없었지만.
슥슥, 여전히 느긋한 손길로 스펀지를 움직이며, 그녀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도 그렇고, 쪽팔리면 되게 빨리 움직이는구나.”
“시끄러, 빨리 씻기나 해! 그리고 나가!”
“그래서 뭐가 쪽팔린 거냐? 한 번 봤으니 익숙해졌을 거 아니야.”
아니 이걸 꼭 말로 해야 돼?
아까부터 온 몸으로 답을 보여주고 있었구만……!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후, 나는 더듬더듬 그녀에게 대답했다.
“익숙…해질리가 없잖아. 좋아하는…여자의, 몸인데…….”
“흠, 나는 네 몸 익숙한데, 그럼 난 널 좋아하고 있는 게 아닌 건가?”
“넌 여자잖아, 나랑 같겠냐? 나는, 그, 네가 너무 예뻐서, 쳐다보기도 힘들다고…….”
“그래?”
무던한 목소리에 섞여, 찰박찰박, 손으로 물을 끼얹는 소리가 울렸다.
아마 몸에 묻은 거품을 씻어내는 거겠지.
……이제 진짜 끝났구나.
심호흡을 할 겸, 어쩌면 흘렸을지도 모르는 땀을 닦을 겸, 얼굴을 쓸어내리고 다시 눈을 뜬 순간,
차륵.
가벼운 물소리가 들리며,
“……!”
시야 한가득, 그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가느다란 두 팔이 느릿하게 내 목을 휘감으며, 물기 어린 주홍빛 눈동자가 다가왔다.
……아무리 나라도 충분히 피할 수 있을 만큼 느린 움직임이었는데, 어째서 가만히붙잡힌 것일까?
그녀의 팔에선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는데, 어째서 내 팔은 그걸 뿌리치긴커녕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걸까?
희미하게 미소 지은 그녀의 얼굴이, 어째서 이렇게 아름다워 보이는 걸까?
아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흐음…… 고간 때문에 쪽팔린 게 아니고? 내가 왔을 때 이미 서 있었잖아.”
“……돌겠네, 그걸 또 봤냐?”
“보이는 걸 어쩌냐? 그 여자들이 달라붙었을 때 반응한 거지? 되게 오래 가네.”
“……”
……결론이 왜 그렇게 되는 거지?
진짜 어이가 없네.
“……이거 너 때문에 안 가라앉는 건데.”
“나? 내가 뭐 했다고?”
“내 앞에 있잖아. 알몸으로.”
“너 내 등 말고는 제대로 안 봤잖아. 만지지도 않았고. 그런데도 그래?”
모르는 척하고 묻는 거라면 후련하게 딱밤 먹여줄 수 있었을 텐데.
이 녀석이 나를 보는 눈에는 순수한 의문만 떠올라 있다.
돌겠네, 진짜.
“여자가 이러고 있는데 안 서면 남자로서 엄청난 문제가 있는 거거든?! 하다 못해, 좋아하는 여자이니까, 더더욱 반응하지!”
“아, 그런 거냐?”
“그래, 임마! 알았으면 얼른 나가, 짜샤!”
“왜?”
“…………”
여전히 의아해하는 눈빛으로 나를 마주보며,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냐니……, 그야……”
“아, 그거냐? 욕구? 뭐, 그러려고 왔던 건 아니지만, 안 될 거 없지 않냐?”
나는 상관없어.
……그렇게 속삭이는 그녀의 미소엔, 무척이나 달콤한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여유 부릴 순…….”
마지막 이성을 짜내어 열심히 핑계를 대본다.
아무리 위슨이 무사하다고 해도, 길을 서둘러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로나의 깜찍한 계략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도 마뜩잖고.
그러니, 굉장히 아쉽고 안타깝지만, 당초 계획대로 씻기만 하고 가야 한다.
그리고 이제 그녀와 나, 둘 다 목욕을 마쳤으니 여기를 떠나야 한다.
……그렇게 애써 변명하는 한편, 나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내 목을 감싼 그녀의 팔을 떼지 않고,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시점에서, 이미 넘어간 거나 다름없다는 것을.
내가 이 녀석의 유혹을 뿌리치는 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빨리빨리 끝내면 되지?”
“……말은 쉽지, 임마.”
완전히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밀었다.
그녀 역시 살며시 눈을 감고, 나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먼저 입술을 포갠 건, 달콤한 속삭임을 흘린 그녀일까?
아니면 진작에 그에 취해버린 나일까?
탕의 열기 때문에 말라오던 목을, 그녀의 타액으로 축인다.
그럼에도 점점 더 갈증이 느껴지는 건, 아마 그게 너무 감미로워서 그런 거겠지.
그리고 혀와 입술로 느끼다가 잠시 떨어진 그녀의 혀가 그리워, 애가 타는 것이리라.
“하…… 메린…….”
조금 더……
조금 더 너를 원해.
나 되게 열심히 참았잖아……?
이틀간 밤마다 널 껴안고 자면서도, 사흘간 네가 무의식적으로 걸어오는 갖가지 유혹에도 안 넘어가고 참았다고.
그러니 더욱 더, 너를 느끼게 해줘.
애달팠던 이 마음을 달래줘.
너의 사랑으로 채워줘.
메린.
“하읍…… 으응…… 흣……!”
찰랑이던 물이 철렁거리기 시작한다.
점점 더 자주 울리는 물소리에 맞추듯이, 물결이 더 세차게 넘실거린다.
물에 감싸인 몸 안에 다른 열기가 더해진다.
물 위로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한가득 들이마신 탓일까?
머릿속이 점점 더 뿌옇게 흐려져 간다.
“아…… 하앗……!”
“메린…… 사랑해…… 사랑해, 메린…….”
되뇌듯이 그녀를 부르며, 새기듯이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이며, 멍해지는 머릿속을 오로지 그녀로 가득 채워간다.
……가까이에서 물이 계속 콸콸 쏟아지고 있으니, 다른 소리가 밖에 새어나가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물보다도 뜨거워진 그녀를 한껏, 깊이 끌어안았다.
여러모로 뜨거웠던 목욕 후, 나는 목욕탕 바깥의 의자에 앉아 열을 식히며, 메린이 나오길 기다렸다.
조금 전의 짧고도 깊은 열락으로, 나나 그녀 둘 다 추가로 씻을 데가 생겨버렸는데, 내 쪽이 일찍 끝나서 먼저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계속 있다간 현기증 날 것 같아서 도망 나왔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으, 출발하기 전에 열을 식혀야 하는데.
아직도 뜨뜻한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는 내 위에, 별안간 그늘이 지며 쾌활한 목소리가 울렸다.
“여기요, 손님~ 한 잔 쭉 드세요~”
“네? 아, 예. 감사합니다…….”
아까 나에게 들러붙었던 네 명의 여종업원 중 한 사람이 잔을 건넸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저편에서 로나와 블루벨도 종업원에게 각각 잔을 받고 있는 게 보였다.
곧이어 잔을 입가에 가져가던 로나와 일순 눈이 마주쳤는데……
히죽 웃으며 손을 살짝 까닥거리는 게 엄청나게 얄미웠다.
큭, 두고 보자……!
“……”
……사실 이를 박박 갈며 복수를 다짐할 게 전혀 아니다.
피해를 입긴커녕, 오히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행복을 느꼈다.
그렇다고 고맙다고 하지도 않을 거다.
녀석의 깜찍한 흉계 때문에, 안 해도 되는 고생을 한 것도 사실이니까!
나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종업원이 준 잔을 들여다보았다.
잔 속엔 색이 없는 투명한 액체가 넘실거리고 있다.
잔을 가까이 대고 킁킁 냄새를 맡으니, 살짝 달큰한 향이 느껴진 것 같았다.
흠, 꿀물인가?
한 모금 마시자, 잔잔한 단맛을 머금은 물이, 탕의 열기로 갈라진 목을 적시는 게 느껴졌다.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켠 후, 나도 모르게 긴 숨을 내쉬었다.
아, 살 것 같아…….
“후후, 맘에 들어하셔서 다행이네요~”
“아, 그……”
“걱정 마세요~ 요금은 없으니까요~”
……목욕도 세탁도, 심지어 이 꿀물조차도 요금이 없다니.
물론 이런 미로 안에 있으니 돈 벌려고 장사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 애초에 이 종업원들은 사람이 아니다.
대체 정체가 뭐지……?
“……저기,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에~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원하시다면, 후훗, 제 속옷 색깔도 알려드릴 수 있는데~”
“윽?!”
동요하지 마!!
그냥 시시덕거리려고 농담하는 거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질문이나 하자고!
“후우…… 그, 여기 계신 분들 전부 정체가 뭔가요?”
“정체요~? 특이한 걸 물으시네요~?”
“이 방에 오기 전에도 좀 특이한 일이 있었거든요.”
그 진수성찬을 떠올렸다.
마치 우리가 오는 것에 맞춘 것처럼 김을 펄펄 뿜고 있던 요리들.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듯 준비된 네 명분의 식기.
심지어 말과 엘크가 먹은 사료도 딱 네 마리 몫이었다.
그리고 이 목욕탕 겸 세탁소도, 어쩐지 우리를 위해 미리 준비된 것 같다는 느낌이 희미하게 들고 있었다.
뭐, 그거와는 별개로, 눈앞에서 사람이 철퇴를 맞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 한 게 위화감이 엄청났지만.
“저희 정체는 별 것 아니랍니다~”
종업원은 사근사근 웃으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목욕탕 종업원이자 옷을 세탁해주는 봉사자이지요~ 지금 저~기 마구간에 있는 사람들은, 짐승들을 돌보기 위한 종업원이고요~”
“어……”
말장난…인가?
눈을 끔벅거리는 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종업원이 재차 입을 열었다.
“바라시던 휴식을 얻으셨지요~? 후훗, 그에 더해……”
그녀는 다른 종업원에게서 넓적한 바구니를 전달받은 후, 나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이렇게, 바라시던 대로 세탁해드렸답니다~”
“……!”
그 바구니에는 메린과 나, 두 사람이 내놓았던 빨랫감이 정갈하게 개켜져 있었다.
얼룩 하나 없이 말끔한 데다, 무엇보다도 바싹 말라 있다.
그것도 햇살을 가득 담은 향기를 풍기면서.
“이게…… 대체……?”
“만족스러우신가요~?”
바구니를 든 채 멍하니 종업원을 올려다보자, 그녀는 환한 웃음꽃을 피우며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후후훗,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손님~”
“……예, 덕분에 푹 쉬었어요. 고맙습니다.”
내 인사를 받은 종업원의 얼굴에는, 한차례 더 깊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종업원들의 활기찬 인사를 받으며 목욕탕을 뒤로 한 후, 갈림길을 두 개 정도 만났을 무렵, 블루벨이 짧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아까 그 목욕탕 대체 뭐였지? 그 짧은 시간에 빨래를 다 말리기까지 하다니.”
“블루벨 씨가 모르시는 건 의외인데요? 뭔가 기운을 느끼시는 거 아니었어요?”
“그래, 느꼈지. 근데 기운을 해석하는 건 내 전문이 아니란 말야. 말투를 보니 넌 뭔가 알았나본데, 뭐, 정 말하고 싶으면 해봐. 들어는 줄게.”
음, 어째서 ‘궁금하니까 알려줘’라는 뜻으로 들리는 걸까?
저런 거들먹거리는 말투에 그런 뜻이 담길 리가 없는데, 참 희한하군.
“됐어요. 안 할게요.”
“……말해! 들어줄 테니까 말하라고!”
“말하고 싶으면 하라면서요? 딱히 하고 싶은 건 아니니 안 할래요.”
“이익……!”
시원스러운 로나의 대답에, 어째서인지 분한 듯이 이를 가는 블루벨이었다.
영문을 모르겠군.
……사실 블루벨이 품은 의문에 대해, 내 나름대로 생각한 답이 있긴 하다.
나에게 꿀물을 건네줬던 그 종업원이 넌지시 건넨 대답을 듣고 떠올린 건데, 블루벨이 나한테 물은 게 아니니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기껏 알려줘 봤자 ‘너한테 안 물어봤는데 왜 끼어드냐’는 둥으로 쏘아붙이며 씩씩댈 게 뻔하니까.
하, 참 귀찮은 성격이야.
……그렇게 성가신 성미의 엘프가 불편한 기색을 팍팍 풍기는 가운데, 우리는 또 다른 한 시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통로를 걷기만 했다.
그리고 또 다시, 우리 앞에 커다란 나무 문이 달린 벽이 나타났다.
벌써 세 번째 마주치는 건데도, 우리 모두 그 문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나온 두 개의 문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맞닥뜨린 문은,
“허……?”
어서 들어오라는 듯이 활짝 열려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