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화 〉 244화 : [여긴 마법사의 덫이에요] (2)
* * *
무엇부터 놀라야 되는 걸까?
우리가 덫, 그것도 마법사가 만든 덫에 걸렸다는 것?
아니면 이미 지나온 두 방뿐 아니라, 지겹도록 뻗어 있던 그 통로와 갈림길까지도 죄다 함정이었다는 것?
다행히 나는 옛 현인들이 대대로 물려준 지혜를 기억하고 있었다.
뒤엉킨 실타래를 풀려면, 먼저 작게 튀어나온 실오라기를 잡아야 한다.
그 지혜를 따라, 나는 과자를 우물거리고 있는 위슨에게 물었다.
“가정을 현실로 만든다는 건 이해했어. 근데 그게 통로…… 이 미로 길에도 적용되는 거였다고?”
[정확하게는, 형의 눈이 닿지 않는 곳 전부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잔칫상이 있던 방부터 시작할까요? 형은 잔걱정이 많으니까, 거기서 나온 다음에 싸웠을 거에요. 그렇죠?]
잔걱정이 많은 게 아니라 신중한 거지!
정정하고 싶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하진 않으니, 그냥 관대히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런 나를 향해 위슨이 빙긋 웃었다.
[나가는 문을 열기 전에 이런 생각하시지 않았어요? ‘밖에 뭐 있는 거 아닐까?’라고.]
“그렇기는 한데, 그건 로나가 괜히 말을 꺼낸 바람에………아, 설마.”
로나 녀석, 설마 다 알고 일부러……?
머릿속이 번뜩이는 느낌과 함께 로나를 돌아보았다.
방실 웃음 짓는 로나의 얼굴을 보자, 의혹이 확신으로 변하며 목 안에서 큰 목소리가 올라왔다.
“너 이 자식, 두 번이나 날 물 먹인 거였구나!”
“네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두 번 다, 그저 말을 걸었을 뿐인데요~?”
“이익!”
젠장, 열 네 살짜리 애한테 두 번이나 농락당하다니……!
게다가 하나는 놀아났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어!
이를 박박 갈며 로나를 노려보는 내 귀에, 블루벨의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물 먹였다니, 그게 뭔 소리야?”
“……거미랑 가고일 떼거리와 싸웠던 거 기억나지?”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면서 말을 이었다.
“그 직전에 이 녀석이 나한테 물었어. ‘만약 이 방이 함정이라면 무슨 일이 일어날 거 같냐’고.”
“응, 들었어. 그래서 나도 좀 그랬는데……어, 그럼 설마?”
“하…… 맞아, 이 녀석이 유도한 거야. 일부러 그 상상을 하도록!”
그와 동시에, 방금 위슨이 했던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적용된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이 방을 포함해, 미로에 있는 방들은 모두 창문이 없다.
방 안에서 바깥 상황을 확인할 방법은 오직 하나, 문을 여는 것뿐.
그리고 이 방 안을 확인하는 방법도 문을 여는 것 말곤 없다.
방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 때, 방 안에 있을 거라 여기는 것들이 실체화되는 것처럼,
길로 나가는 문을 열 때, 길에 있을 거라 생각한 것들이 나타나버리는 것이다.
즉, 방과 바깥 통로 모두,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
“그럼 뭐야, 로나 너, 그때 이미 다 알고 있던 거야? 왜 말 안 했어?”
“그땐 아직 확신이 없었는데요. 말씀드렸잖아요? ‘하나만 더 확인하면 될 것 같다’고요.”
“돌겠네, 진짜.”
그 마지막 하나를 확인하려고 날 실험대로 삼은 거군.
어휴, 선량한 사람을 미끼로 써먹다니, 뭐 이런 사제가 다 있어?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제 덕분에 그나마 쉬운 적이 나온 거니까요!”
“뭐, 임마?”
“그렇잖아요. 제가 그렇게 운을 띄웠으니 거미랑 가고일이었던 거지, 카엘 님이 그냥 문 열었으면 훨씬 더 무시무시한 게 나왔을걸요? 카엘 님은 겁이 많으신 데다 무시무시한 몬스터들을 많이 알고 계시니까요.”
“……”
제길, 맞는 말만 골라서 하고 말야.
활을 쏠 수 있는 블루벨이 있는 만큼, 거미랑 가고일은 상대하기 쉬운 축에 속했다.
그러니 그렇게 많이 튀어나왔는데도 부상 하나 없이 물리칠 수 있었지.
그래, 그건 인정할 수 있다.
“그럼 그 다음엔 왜 말 안 했냐?”
“의식하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
하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면, 그게 일종의 마중물이 되어서 오히려 더 생각이 나는 법이지.
아마 로나는 혼자만 진실을 알고 있는 채, 우리가 위험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유도할 작정이었을 거다.
어휴, 냉정한 녀석 같으니.
“즉,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대해서 생각한 대로 이루어진다는 거지? 그 방 말고, 우리가 지나온 길들도 그런 식이었던 거고.”
그렇게 한 번 정리한 뒤, 블루벨은 한층 더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 길의 천장에서도 뭐가 일어났어야 되는 거 아냐? 박쥐가 나타나는 일도, 슬라임이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일도 없었다고.”
“그야 제가 보고 있었으니까요.”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로나가 말했다.
“입구에서부터 내~내 천장을 보고 있었거든요. 어차피 저는 뒷줄에 있으니 그렇게 앞을 살필 필요도 없었고요.”
“그럼 몬스터가 벽 속에서 튀어나오지 않은 건?”
[아마 벽을 제외한 공간으로 한정시켰을 거에요. 안 그러면 미로가 무너질 테니까요.]
……그렇구나.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곳.
그것은 단순히 시야가 닿지 않는 곳만 가리키지 않는다.
빛이 비추지 않아 어둠 속에 잠겨버린 곳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그 한 번의 전투 외에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우리 일행이 특이하기 때문이었어.
나를 제외한 셋은 모두 밤눈이 좋다.
그리고 내 옆에서 과자를 우물거리고 있는 메린은 세상에서 가장 태평한 녀석이고.
즉, 이렇게 된 거다.
천장은 로나의 눈이 계속 닿았던 탓에 무언가 생겨날 틈이 없었다.
그리고 앞쪽은, 세상 태평한 메린이 ‘뭐가 있을 거다’는 생각을 아예 안 해서 아무것도 안 나온 것이다.
내 염려가 무언가를 만들려 해도, 이 녀석들이 내가 보는 곳을 포함해 한참 앞을 내다보고 있는 탓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메린? 너, 아까 길 갈 때 저 앞에서 뭐가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 안 했지?”
“굳이 뭐하러 해? 또, 뭐가 나오든 무슨 상관이냐? 그냥 없애면 되는데.”
“너의 그 여유로움이 정말 부럽다.”
이게 바로 강자의 여유인가……!
역시 나 같은 일반인과는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다.
물론 메린의 뒤에 있던 블루벨이 저 너머의 어둠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겠지.
이 엘프는 그래도 비교적 평범한 감성을 지녔으니까.
하지만 아무것도 안 나온 걸 보면, 밤눈은 둘이 비슷한 수준인 듯했다.
“근데 뒤에선 왜 안 나온 거지? 모퉁이도 그렇고.”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꺼내자, 블루벨이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모퉁이에 뭐가 숨어있거나 뒤에서 뭐가 다가오면, 내 귀가 그걸 놓칠 리가 없잖아? 아무것도 안 들렸으니,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지.”
“이야, 우리 완전 무적이었네.”
천장에 대한 걱정은 로나가 훤히 꿰뚫어보며 없애버리고, 앞길에 대한 경계심은 메린이 흘려버렸고, 모퉁이나 뒤통수에 대한 두려움은 블루벨이 차단했다.
첫 번째 방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밥이나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도, 블루벨과 로나가 안에 아무 위험도 없다고 확실히 확인시켜준 덕분이었다.
하하, 이 구성이 아니었으면, 십중팔구 첫 번째 방에 도착도 못하고 죽었을 거야.
아니면 첫 번째 방 안에서 몬스터 떼를 만나서 싸우다 죽거나.
“흠…… 근데 이 미로 말고도 일대 전체가 그렇다고? 어디부터 시작되는 거야?”
[글쎄요. 일단 우리가 들어온 동굴 주변은 해당될 거에요.]
동굴 안쪽에서 유령버섯을 잔뜩 캤을 때, 그는 기뻐하는 한편, 이 공간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이게 되게 귀하거든요. 애초에 한 무더기나 모여서 자라는 버섯도 아니고요. 게다가 이 일대에는 꽤 짙은 마력이 깔려 있었어요. 그래서 혹시 싶은 순간, 테라가 미로가 있다는 걸 알려줬죠.]
그래서 그는 동굴 안쪽으로 향했고, 자신의 의심이 들어맞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길로 다시 돌아올까 고민했지만, 그는 자신이 선발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게 더 빠르니까요.]
“어휴, 잘났다, 나쁜 새끼야.”
[어쩔 수 없었다니까요? 계속 거기 있었다면 분명 동굴 안으로 뭐가 쳐들어왔을 거라고요.]
동굴 바깥은 비가 억세게 쏟아지는 숲이다.
세상에서 가장 속 편한 메린조차도, 숲에서 갑자기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생각 정도는 한다.
늑대나 곰 같은 짐승일 수도 있고, 또는 몬스터가 갑자기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날이 저물고 있었으니, 어쩌면 유령이나 움직이는 시체가 튀어나올 수도 있었다.
위슨은 그렇게 말을 띄우며 차를 들이켰다.
“그럼 우리가 숲 슬라임이랑 싸운 것도……?”
내가 로나와 함께 동굴 맨 안쪽을 보고 오는 동안, 메린과 블루벨은 두 마리의 숲 슬라임…… 리캠쉬와 싸우고 있었다.
둘 중 누군가가 놈들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이다!
“아, 그때? 블루벨이 옛날 얘기가 생각난다면서 진흙귀신 얘기 들려줬어.”
“이 술꾼이 진짜!!”
알고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괜히 이 엘프 때문에 안 해도 될 싸움을 했던 거 아냐!
나는 몹쓸 엘프의 양 볼을 잡고 쫙 늘려버렸다.
“아으아아아! 으, 으이만……!”
있는 힘껏 쭉 잡아당기고 놓아주니, 블루벨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빨갛게 부어오른 볼을 제 손으로 감쌌다.
“그, 그치만! 분위기가 그 옛날 얘기랑 똑같았는걸! 비 오는 숲을 혼자 헤매던 어린애가 진창이 된 바닥에게 잡아먹히면서 진흙귀신이 생겨났다는 이야기였단 말야!”
“아하, 아이들이 숲에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이야기이군요. 위슨 씨는 불편하시겠지만, 왕국에는 마녀들이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말이죠.”
참고로 나와 메린의 자랑스러운 고향, 놋지빌엔 그런 이야기가 없다.
대놓고 몬스터가 돌아다니니, 굳이 이야기로 겁을 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위슨이 서두른 이유도, 녀석의 행동들도 전부 납득이 됐다.
동굴 입구에서 한 번 전투가 벌어지면 연쇄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높으니, 그의 말대로 탈진해서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서둘렀겠지.
엘크와의 연결을 끊은 것도, 우리가 그를 찾아야 한다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문을 열어둔 건, 우리 때문에 방을 바뀔까봐 그랬던 거고. 맞냐?”
[맞아요. 기껏 멋들어지게 준비했는데 없어지면 아깝잖아요. 여러분이 여기까지 오는 길이 힘들었다면, 이 안에도 어떤 위험이 있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고요.]
참 잘났다, 그래.
찻잔을 가볍게 흔들며 투덜거렸다.
“그래, 참 잘했다. 이렇게 똑똑한 동료를 두다니 난 정말 행운아야.”
[아직도 삐쳤어요? 이 형, 진짜 뒤끝 세다니까. 한 번 맺힌 원한은 절대 안 잊는 성격이야. 그렇죠?]
“그래, 임마. 나 속 좁다, 떫냐?!”
뜬금없이 없어진 데다가, 정령이랑 연결까지 끊어졌다는 소리에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가까이 알고 지내던 사람이 행방불명되는 건 한 번이면 족하다고.
……이 년 전에 겪은 걸로도 신물이 나.
텅 빈 무덤, 가망 없는 수색, 두리뭉실한 원수.
자꾸만 기어올라와서 가슴을 마구 찔러대는 ‘어쩌면’이란 희망.
그걸 또 겪기는 싫다.
물론 이 녀석은 그렇게까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싫어.
그 상황을 겪는 것 자체가, 몸서리 처질만큼 정말로 싫다.
“……”
젠장, 괜히 이것저것 떠올랐네.
마른 세수로 그 기억들을 꽉꽉 눌러버리고, 큰 한숨으로 저 아래 깊은 곳으로 묻어버렸다.
잊어버릴 마음은 없지만, 지금 떠올려서 좋을 거 없는 기억들이니까.
그런 뒤 고개를 다시 들자, 위슨은 살짝 난처한 기색으로 웃고 있었다.
[다음엔 가능한 말하고 갈 테니 그만 화 풀어요. 내가 여기 마련할 때, 형 생각해서 특별히 더 신경 썼으니 그걸로 봐주세요.]
“……뭔 소리야?”
[저기 문 안쪽에 침실들 쫙 있거든요? 드워프들이 마련해준 숙소처럼, 각 방마다 밸브 달려서 물 펑펑 나오는 욕실 붙여놨어요.]
흠, 이미 목욕탕에서 박박 씻긴 했지만, 그래도 있어서 나쁠 건 없지.
산꼭대기의 그 사원을 나온 후에는, 아침마다 가볍게 대련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갑자기 만면에 활짝 웃음꽃을 피우더니, 녀석은 엄지를 척 세우면서 다음 말을 띄웠다.
[모든 침실은 완벽히 방음이 되니까, 아무 걱정없이 좋은 시간 보내실 수 있어요!]
“꺄아~”
“…………”
아오, 빡쳐.
저 한창 사춘기인 두 녀석이 지랄하는 것도 그렇지만, 제길, 저 말을 듣고 바로 혹했다는 사실이 가장 빡친다!
“방음? 그게 뭐냐?”
정작 당사자인 메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단어 뜻을 묻고 있었다.
돌겠네, 진짜.
“……소리가 밖으로 새거나,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는 거. 즉, 침실에서 뭔 소리가 나든 밖에 안 들린다는 거다.”
“흐음…… 소리가 밖에 안 들려야 네가 좋은 시간 보낼 수 있는 게 있는 거냐? ……아, 혹시 자,”
“아니니까 과자나 먹어라. 자, 팍팍 먹어.”
내 손으로 아예 과자를 쑤셔 넣어주었다.
그런 우리 두 사람을 보며, 블루벨은 얼굴 가득 쓴웃음을 지었다.
“너 그간 고생 많았겠다.”
“그간이라니. 현재 진행중이구만.”
“……맞네, 아직 안 끝났지.”
피식 웃더니, 그녀는 나를 부드럽게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같이 한 잔 할래?”
“싫어.”
또 진탕 취하게 만들려고?
어림도 없지!
딱 잘라 거절해주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위슨 녀석은 나와 메린을 같은 침실에 집어넣었다.
이 방의 호화로우면서 아늑한 분위기는 마음에 들었지만……
“와, 침대 엄청 크네.”
“……”
세 명이 누워도 남을 듯한 큰 침대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건 그렇다 치고, 왜 방 한 켠에 새 시트가 개켜져 있는 건데?
여러 장식들도 눈에 거슬린다.
서랍장 위에 있는 조각상 말야, 횃대 하나에 새 두 마리가 찰싹 붙어 있는 모습인 건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다.
근데 왜 횃대가 하트 모양이야?
테이블의 꽃병도 왜 하필 새빨간 장미꽃들만 한가득 꽂혀 있는 거지?
왜 하필 결혼 잔치를 그린 그림이 벽에 걸려 있는 거고?!
아잇, 위슨 이 자식까지 진짜……!
“왜 혼자 열내고 있냐?”
“……”
그리고 메린은 방 분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옷을 훌훌 벗고 있었다.
전부터 그랬지만, 진짜 개미 발톱만큼도 부끄러워하지 않네…….
물론 이 녀석은 실내복으로 갈아입으려고 벗는 거지, 다른 의도는 전혀 없다.
……만약 있다고 해도 안 할 거야.
아까 목욕탕집에서 한 번이긴 해도 어쨌든 풀 거 풀었고,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나 역시 그녀를 따라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메린에게 등을 돌린 채로.
“먼저 잔다…….”
“어? 아, 응.”
등 뒤에서 들린 메린의 목소리엔 잠기운이 가득 했다.
뭐, 피곤하겠지.
숲 슬라임을 상대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거미랑 가고일 떼도 처리했잖아.
그리고 목욕탕에서도…… 음, 기운 좀 뺐고.
내일은 이곳을 만든 마법사를 만나게 될 가능성이 크니,나나 이 녀석이나 가능한 푹 쉬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칫 내일 활동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고, 그냥 평소처럼 다정하고 포근하게 서로 끌어안고 자는 게 최고인 것이다.
음음, 그렇고 말고.
그렇게 생각하며 옷을 다 갈아입고 뒤를 돌자, 메린이 몸을 일으켜 앉아 있었다.
미간을 살짝 좁히고, 제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뭐해? 잔다며?”
“자려고 했는데…….”
말끝을 흐리는 모습이 어딘지 고민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 뭐 걱정돼?”
옆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조심스럽게 묻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누우니까 갑자기 생각나서…….”
“뭐가?”
“너랑 잤던 거.”
“………아.”
나와 같이 침대에 눕는다는 상황이 그녀의 기억을 건드린 모양이다.
뭐, 여러모로 강렬한 기억일 테니, 음, 그럴 수 있지?
침대에 누운 뒤에야 떠올렸으니, 오히려 조금 둔감한 편이 아닐까?
“생각이야 뭐, 날 수도 있지. 음, 괜찮아, 이상한 거 아냐.”
“그래? 근데 떠올렸더니, 심장이 빨리 뛰면서 잠이 다 깨버렸어.”
“……”
“어쩌지? 자야 하는데…….”
……평소처럼 토닥여준다고 잠들 것 같진 않다.
그녀는 지금 뺨을 살짝 붉힌 채, 뭘 떠올리는 건지 이따금 살살 몸을 꼬고 있으니까.
한손으로 그 뺨을 감싸자, 역시나 평소보다 아주 약간 더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에 느껴졌다.
손가락과 손목에 닿는 그녀의 숨결도 약간 열이 담겨 있다.
가만히 어루만지자, 조금씩 열이 더해지는 게 느껴졌다.
“카엘…….”
“……”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간다.
뭔 생각을 하길래……?
“왠지, 점점 더, 심장이 빨라져…….”
“…………”
……안 하려고 했는데.
진짜로 그냥 자려고 했는데.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자꾸 나를 유혹해대는 걸까?
“메린.”
작게 속삭인 후, 그녀와 입술을 살짝 포개고 떼었다.
멀어져가는 내 입술을 쫓아오는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귓가에 대고 물었다.
“안아도 돼?”
“또……? 되긴 한데, 너 안 피곤,”
실컷 유혹해놓고 걱정해오는 괘씸한 입을 다시 틀어막았다.
그녀의 팔이 내 목을 휘감는 걸 느끼며, 깊이깊이 그녀와 숨결을 나누면서 함께 잠겨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