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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267화 (267/475)

〈 267화 〉 258화 : 본의 아닌 함정 (1)

* * *

휴식실에서 나온 후, 우리는 장서관의 조금 더 안쪽…… 우리가 머물 방이 있는 별관으로 향했다.

책보다는 사람을 위한 곳이라는 클라이드의 말처럼, 정말 별의별 시설이 한가득 꾸려져 있었다.

옷을 얻을 수 있는 의상실부터 시작해, 미용실에 기도실, 오락실, 대목욕탕……

직원용이라서 안을 세세하게 살펴볼 순 없었지만, 문에 달린 투명창으로 슬쩍 보이는 모습만 봐도 제법 흥미로웠다.

“근데 의료실 같은 건 없네요.”

“그야 저희 스스로 고칠 수 있으니까요. 기록자들은 애초에 병에 걸리지 않고요.”

“아~ 그렇겠네요.”

고개를 끄덕이는 로나에 이어서 묻고 싶었지만, 메린이 이제는 팔짱을 끼면서 내 손을 깍지 끼기까지 하고 있는 탓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더 찬찬히 구경하고 싶다는 마음과, 이게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서로 맹렬하게 부딪치며 말문을 막아버린 탓이다.

……녀석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사이에 껴서 꼼지락거리는 탓에 간지러운 거나, 평소엔 내 손바닥에 폭 싸이던 그녀의 손을 거의 동등하게 맞붙잡고 있다는 거에 또 두근거리는 건 덤이고.

그런 면에서는, 휴게실에서 가진 그 정신 나갈 거 같던 티타임도 유익하긴 했다.

이 녀석이 팔짱에 손깍지까지 끼고 있는데도 내가 멀쩡히 걸을 수 있는 건, 거기서 더한 것들을 당했기 때문이니까.

즉, 존나 센 독을 먹은 덕분에 내성이 좀 생긴 거다.

다행으로 여겨야겠지.

“………”

……아니, 독을 먹은 시점에서 지독하게 불행한 거잖아.

다행은 개뿔!

작게 한숨을 쉬자, 메린이 방긋방긋 웃으며 남은 손으로 내 머리를 또 쓰다듬었다.

……메린은 조금 전에, 자신이 나를 귀엽게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음, 이거 내가 보기엔 그냥 애 취급하고 있는 것 같아. 망할.

여러모로 복잡한 심정으로 복도를 걷다가, 클라이드를 따라 어느 양문 근처에 멈춰 섰다.

작은 창 하나도 달리지 않아 안이 보이지 않았지만, 마침 기록자 두 사람이 안에 들어가느라 문을 연 덕분에, 문틈으로 아주아주 약간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또 다른 복도가 있던 것 같은데.

눈으로 안내인에게 설명을 요청했다.

“이 안엔 대목욕탕과 여러 오락시설들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직원용이라서 안을 보여드릴 순 없네요. 특히나 목욕탕은 더더욱 어렵고요.”

클라이드는 하하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여러분이 묵으실 방에는 따로 목욕통이 놓여 있습니다. 뭐, 이미 보셨겠지만요.”

“물통 같은 건 안 보이던데, 목욕물은 어떻게 구하죠?”

여기까지 와서야 처음으로 질문을 던진 메린에게 흠칫 놀란 것도 잠시, 클라이드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세숫대야 근처에 물병이 있죠? 물의 정령이 깃들어 있으니 필요하신 양이 채워질 때까지 통에 부으시면 됩니다. 목욕통 가장자리를 두 번 두드리면, 적당히 물이 데워질 거고요. 방에 안내책자를 두었으니 이따 읽어보세요.”

오, 잘됐네. 오늘은 그걸로 공부하면 되겠군.

그 생각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메린 녀석이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훗훗훗.”

“으……”

그녀를 마주하며 보란 듯이 웃자, 그녀가 한층 더 얼굴을 구기는 게 보였다.

음음, 안 되지. 예쁜 얼굴에 주름 생길 거 아냐!

킥킥 웃으며 녀석의 얼굴을 손으로 문질러주었다.

“아으, 뭐하는 거냐?”

“얼굴 펴라고.”

핫하, 복수다, 이 자식아.

“그나저나……”

그리고 클라이드는 그런 나와 메린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고 계시니 사이좋은 자매 같군요. 음…… 에스트레야 씨에겐 정말 죄송하지만, 저도 일부러 되새겨야만 당신이 본래 남성분이라는 걸 떠올리게 되네요. 이거 원, 역시 관장님이라고 해야 하나…….”

“………어, 진짜요?”

그거 위험한 거 아냐?!

마법에 걸린 지 대강 서너 시간만에, 다른 사람들의 인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는 거잖아!

그러고보니 블루벨도 아까 비슷한 말을 했던 거 같고!

클라이드는 팔짱을 끼고 턱을 문지르며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지나가던 기록자 한 명을 불러세웠다.

양갈래로 땋은 머리를 동그랗게 말아서 묶은 여자 기록자는, 의아함에 눈을 멀뚱거리면서도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예, 클라이드 씨! 부르셨어요?”

“죄송한데 쪽지용 종이 한 장이랑 펜 좀 잠깐 빌려주시겠어요?”

“엥? 네에, 뭐……. 여기요.”

그는 건네받은 작은 종이와 깃펜을 각각 한 손에 들더니, 무어라 입을 달싹이면서 종이에 알 수 없는 문자들을 가득 적었다.

그런 뒤, 펜을 기록자에게 다시 돌려주고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준 씨. 수고하세요.”

“아니에요! 클라이드 씨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제가 더 기쁜걸요! 헤헤, 또 봬요!”

기록자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떠나갔다.

그냥 종이랑 펜 빌린 것뿐인데, 무슨 악수라도 한 것처럼 되게 좋아하네.

클라이드 이 양반, 그냥 유명인사가 아니라 엄청나게 인기 많은 사람이구나.

생일 같은 특별한 날엔 선물 엄청나게 받고 그런 거 아냐?

툭하면 고백편지도 받고…….

“……”

……갑자기 고향에 있는 어떤 새끼의 모습이 스친 것 같아, 재빨리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털어버렸다.

세상에, 비교할 게 따로 있지!

그 염병할 새끼는 대놓고 여자를 후렸지만, 이 사람은 그냥 평범하게 대하고 있었잖아.

아까 우리 때문에 추궁 비슷한 걸 당하는 것도 그렇고, 그냥 인망이 좋은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클라이드를 바라보자,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달싹이며 쪽지를 작게 접고 있었다.

“……”

뭐, 인기가 좋을 만도 해.

붙임성이 엄청 좋은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친절한 편이고 성격도 점잖으니까.

머리가 좀 덥수룩해서 그렇지 얼굴 자체는 썩 나쁜 편은 아니고, 키도 그럭저럭 큰 편이지?

또……

“……?”

근데 잠깐……, 왜 내가 이딴 생각을 하는 거지?

그냥 저 사람 성격이 좋다는 걸로 끝나면 되잖아.

왜 얼굴을 뜯어보고 있어?

같은 남자 걸 뜯어봐서 뭐 좋을 게 있다고?

시선을 다시 클라우드에게 향했다.

어째서인지, 그가 감은 두 눈과 달싹거리는 입술에 자꾸 눈이 가고 있었다!

이런 썅, 내가 미쳤나?!

아무리 몸이 여자가 됐다고 해도 그렇지, 왜 남자 입을……!

…………설마.

“왜 그래? 갑자기 얼굴이 파래졌는데?”

“어?! 아, 아무것도 아냐…….”

내 뺨을 콕콕 찌르며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메린의 눈을 피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몸 안에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느낌이 든다.

머릿속에 생각 하나를 떠올리는 데에 몸의 온기를 죄다 써버린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하지.

떠올리자마자 지워버리고 싶은 생각이니까.

그리고 그건 부정하고 싶은 가능성이기도 하고,지금 눈앞에 들이밀어진 사실이기도 했다.

부르는 이름만 다를 뿐인 그 세 개가 가리키는 건, 단 하나.

내 감성……

정신이, 몸을 따라서 여자로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틀림없어, 주변 사람의 인식만 빠르게 변하고 있는 게 아니야.

나 자신도 같이 변하고 있어.

이 몸과 목소리에서 느끼고 있던 위화감도 꽤 줄어든 상태잖아.

처음엔 정신 나갈 거 같았는데, 지금은 그냥 얼굴만 좀 찌푸려지는 수준이다!

제기랄, 오늘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는데 어떡해야 하지?

나는 남자라고 계속 되뇌기라도 해야 하나?

나는 남자야.몸은 지금 이렇지만 남자라고.

몇 시간 전에만 해도 심신 둘 다 완전한 남자였지.

지금은 여자가 되었지만.

남자에서 여자가 된 에스트레야.

“……!”

불현듯 끼어든 속삭임에 가슴이 철렁했다.

아냐……, 아냐아냐, 지금도 나는 남자야!

열 아홉 먹은 남자 카………

“………어라.”

내 이름, 뭐였지?

에스트레야……는 가명이잖아.

원래 내 이름은 남자에게나 붙는 이름이니까, 여자가 된 지금은 어울리지 않아서…….

여자에게 어울리는 이름으로 바꾸었지.

그래야 자연스러우니까.

아냐, 아냐아냐, 아니야!

용사인 걸 숨기려고 한 게 주 목적이었잖아, 정신 차려!

……그래서, 내 원래 이름이 뭐였지?

카…… 젠장, 기억이 안 나!

어째서 떠오르지 않는 거지?!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왜?!

나는……

내 이름은………!

“……”

………됐어.

빌어먹을, 지금은 내가 남자인 것만 생각하자.

그게 제일 중요하니까!

그때, 갑자기 얼굴이 잡아당겨지며 시야가 흔들렸다.

메린이 내 목을 바짝 끌어안았다는 걸 깨닫기 전에, 그녀의 속삭임이 먼저 내 귀를 타고 들어왔다.

“야, 카엘, 대체 왜 그래? 뭐에 겁먹은 거야? 유령이라도 봤냐?”

“카엘……? 나……? 그거 나 부른 거야……?”

“그럼 너지, 누구냐? 네 이름이잖아. 가명 쓰다가 까먹었냐?”

“………”

……카엘. 맞아, 그거였어.

카엘. 카엘 에스…… 에스트…르, 아냐, 에스트…렐.

카엘 에스트렐.

맞아, 나는 열 아홉 먹은 남자, 카엘 에스트렐이야……!

속으로 외치는 순간, 뒤죽박죽이 되었던 머리가 단번에 맑아지는 것 같았다.

깊은 안도감이 솟아오르며, 기억이 멋대로 비틀려졌다는 공포가 씻겨져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메린……, 기억하지? 내가 원래 뭔 성별이었는지, 너는 계속 기억하고 있는 거지? 말해줘, 메린. 나 원래 여자였냐?”

“허? 뭔 소리야, 너 원래 남자잖아. 오늘 하루는 여자이지만. 너 혹시 아까 술 들어간 과자 먹고 취했냐?”

“아냐……, 그런 거 아냐……. 내 이름, 성씨까지 쭉 말해줘. 메린, 기억하지?”

“카엘 에스트렐, 너 취했지? 으응, 술냄새는 안 나는데…….”

……기억하고 있어.

메린은 전부 기억하고 있다.

나 자신조차 잊어버린 ‘나’를, 그녀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기억하고 있었다는 게 감격스럽다.

나를 기억해주고 있다는 게 고맙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메린………”

몸집이 작아지면서 수용량도 같이 줄어든 건지, 곧바로 눈 밖으로 감정이 흘러 넘쳐나왔다.

그대로 팔을 둘러 그녀를 꽉 껴안으며 중얼거렸다.

“고마워, 메린…… 진짜…… 진짜 고마워……!”

“엉? 야, 진짜 왜 그러는데? 우와, 너 우냐?! 아니 갑자기 왜……?”

……당혹해하는 시선들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미 터져나온 눈물을 멈추는 법 따위, 나는 알지 못한다.

혹시 그 방법이 적힌 책도 여기 보관되어 있을까?

설사 있다 해도,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그딴 지식이 아니라 지금 나를 감싸고 있는 온기이니까.

“하, 진짜 울보 다 됐구만. 야, 여자가 된 게 그렇게 힘드냐? 하루도 못 참을 정도로 빡센가보네…….”

……어. 진짜 존나 힘들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내 등을 토닥이는 그녀를 있는 힘껏 안았다.

한차례 눈물을 쏟고 훌쩍거릴 무렵, 어느새 작업을 마친 클라이드는 안뜰로 가는 게 좋겠다고 말을 꺼냈다.

이곳 사정상, 바깥이 아닌 실내에 꾸며진 정원이지만, 그래도 기분전환을 하기엔 제격이라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이 시간엔 아무도 없어요. 조용히 이야기를 하기엔 안성맞춤이죠.”

“네에, 저희는 상관없는데요……. 그렇죠?”

동의를 구하는 듯한 로나의 말이 들린 후,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메린에게 안겨 있는 탓에 보이지 않았지만, 클라이드가 “그럼 가시죠.” 라고 한 걸 보면 다들 고개를 끄덕인 거겠지.

그러나 곧바로 걷기 시작하는 대신, 그는 한차례 또 말을 꺼냈다.

“음, 메린 씨, 죄송하지만 에스트레야 씨를 업어주시겠어요?”

“엥? 왜요?”

“그…… 이대로 가는 건 제가 조금 많이 곤란할 것 같아서요.”

……뭐가 곤란할 거란 건지 잘 알 수 없었지만, 나에겐 그걸 캐물을 기운과 의욕이 남아있지 않았다.

클라이드에게 반문하던 메린은, 내가 터덜터덜 그녀의 뒤로 돌아가서 몸을 기대자, 조금 주춤거리면서도 나를 자신의 등에 업어주었다.

“안뜰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아요. 그러니 에스트레야 씨, 주무시지 마세요.”

온화하면서도 단호한 말투로 당부한 후, 클라이드는 우리를 앞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메린은 그 뒤를 따라가면서 나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들었냐, 카엘? 자면 안 된다.”

“응…….”

“벌써 졸고 있구만?”

“안 자…….”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하자, 메린이 작게 코웃음치며 대꾸했다.

“그런 말하는 놈이 꼭 자더라.”

“안 잔다니까…….”

“너 나한테 업힐 때마다 졸았잖아. 아니다, 나랑 같이 있을 때마다 그랬지? 심지어 훈련 때까지도.”

“훈련 땐 기절한 거고……. 그리고 뭐 나만 그랬냐……? 지도 맨날 자 놓고서…….”

“그야 편하니까. 참 희한하긴 해. 이불 덮고 혼자 자는 것보다, 바깥에서 너한테 기대어 조는 게 더 상쾌하니까 말야. 편해서 그런가?”

쿡쿡 웃으며 맞받아치는 그녀의 목을 한결 더 깊이 안았다.

코에 물씬 풍기는 그녀의 체취에, 마구 뒤흔들렸던 마음이 차츰차츰 잔잔해지는 게 느껴졌다.

“나도……. 이러고 있으니까 엄청 편해…….”

“그러냐? 그래도 잠들면 안 된다.”

“안 잘 거야……. 자면 아깝잖아…….”

모처럼 느끼는 이 안락함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잠기고 싶으니까.

“아깝다니, 별 희한한 소리를 다하네.”

“오늘 아니면 안 업어줄 거 아냐…….”

“당연하지. 나보다 한 뼘 넘게 큰 놈을 어떻게 업냐? 들쳐메는 것도 힘든데. 아, 팔에 안아들 수는 있겠다. 그거라도 가끔 해줄까?”

“싫어, 임마.”

딱 잘라 거절하자,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 웃음이 옮아 내 입꼬리도 슬쩍 올라갈 무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풀내음이 코를 확 찔렀다.

그리고 잠시 후, 메린은 나를 뜰 안의 어느 의자에 앉혔다.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자, 클라이드가 내 눈앞에 손을 흔들어 주의를 끌더니 나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크게 동요하신 것 같던데, 혹시 무언가 알아차리신 건가요? 예를 들면, 본명이 기억이 나지 않거나 뭐, 그런 거요.”

“그걸 어떻게……?”

“아, 역시 그랬군요.”

고개를 끄덕인 다음, 그는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펴서 나에게 내밀었다.

하늘을 향해 펼쳐진 손바닥 위에는 작은 밀알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음…… 혹시 본명이 무엇인지 기억나셨나요? 당신의 본래 성별도 기억하시고요?”

나는 카엘 에스트렐.명실상부한 남자 인간이다.

속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안도하듯 짧게 한숨을 내쉬고 재차 입을 열었다.

“다행이네요.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어요. 자, 이거 받으세요.”

그는 작은 밀알 비슷한 것을 나에게 넘기며 말을 이었다.

“이걸 쥐고서 당신의 본명과 가명, 그리고 원래 성별을 되뇐 다음, 입에 넣고 그냥 삼켜버리세요. 어서요.”

채근하는 그의 말을 따라, 나는 그 작은 물체를 손바닥에 올린 채 주먹을 쥐고 되뇌었다.

……내 본명은 카엘 에스트렐.

지금의 내 가명은 에스트레야.

나는 원래 남자로 태어났다.

그렇게 두 번 정도 되뇐 다음, 손에 쥐여 있던 그 작은 무언가를 입에 털어넣고 삼켜버렸다.

“삼키셨죠?”

“네…….”

“그럼 됐습니다. 이제 안심하셔도 돼요.”

뭘 안심하라는 거야……?

의아함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그저 빙긋 웃으며 허리를 펴고 일어설 뿐이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로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뭘 하신 거에요?”

“에스트레야 씨의 기억을 좀더 단단하게 고정시켰습니다. 관장님이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의 영향으로 기억…… 아니, 인식이 뒤틀리고 있었어요.

혹시 세 분, 에스트레야 씨의 본명을 기억하고 계신가요?”

그는 메린과 로나, 그리고 블루벨을 찬찬히 돌아보며 물음을 던졌다.

……그에 고개를 끄덕인 건 단 한 명.

오직 메린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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