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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271화 (271/475)

〈 271화 〉 262화 : 본의 있는 함정 (3)

* * *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검은 연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야, 메린, 저거 동굴 있는 쪽 맞지?”

“어.”

고개를 끄덕인 후, 이번엔 눈에 힘주고 있는 엘프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블루벨,”

“싫어.”

“…………아니, 불씨라도 보이냐고 물어보려고 한 건데.”

“웃기시네. 먼저 보고 오라고 하려 했잖아. 누가 모를 줄 알고?”

칫, 쓸데없이 눈치는 빨라 가지고…….

어차피 들킨 거 그냥 밀어붙이자!

“저게 불 때문에 나는 건지 아닌지만 보고 와줘. 댁이라면 멀리서 봐도 보일 거 아냐. 적어도 싸워야 되는 건지 아닌지는 알아야지.”

“……”

여전히 표정이 안 좋군. 할 수 없지.

마침 이 방법을 한 번 쓰고 싶었는데 잘됐네.

나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안 되는 거야……? 달리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

“그렇게 싫은 거구나……. 하긴,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했었지……. 알았어, 이제 부탁 안 할게. 자꾸 끈질기게 굴어서 미안해…….”

“……으.”

“이해해, 내가 심한 짓을 많이 했으니까……. 뻔뻔하게 굴어서 미안……. 그냥 내가 갈 테니까 신경 쓰지 마…….”

말을 마친 후, 코를 훌쩍이며 연기가 나는 쪽을 향해 터벅터벅 세 걸음 정도 걷자,

“아, 알았어! 알았다고! 갔다 오면 될 거 아냐!!”

블루벨이 내 팔을 붙잡으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어……? 그치만 블루벨, 방금 가기 싫다고……”

“……생각 바뀌었어.”

후후, 후후후후……!계획대로야……!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면서 블루벨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정말이야? 와, 진짜 고마워, 블루벨! 역시 좋은 사람이구나! 같이 다니기로 하길 잘했어!”

“……흥, 입에 발린 소리하긴.”

이건 진심인데 말이지.

내가 블루벨의 이 약간 어리숙한 성격에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데.

단순히 이 일 말고도, 이 엘프 덕분에 여행이 좀더 재미있어졌는걸.

지금도 눈초리가 살짝 매워져 있는 어떤 아가씨가 더 무서워질 거 같아서, 도저히 말로 할 순 없지만 말야.

블루벨도 성질 부릴 게 뻔하고.

내가 이 성격 이상한 엘프에게 내심 고마워하는 건 이런 거다.

메린을 포함해, 다른 녀석들은 내가 건드릴 만한 게 별로 없다.

기껏해야 잔소리밖에 없지.

그때마다 나도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고.

하지만 이 엘프는 잔소리 말고도 여러모로 건드리는 보람이 있다.

일단 뭘 던지든 반응이 좋으니까 말야.

즉, 놀리는 재미가 있는 것이다……!

덤으로 이렇게 말로 꼬드긴다는 것도 할 수 있고!

이야, 블루벨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술만 좀 덜 먹으면 완벽한데.”

“내가 뭐 얼마나 먹는다고 그래? 아무튼! 심각한 상황이니까 이번만 특별히 해주는 거야! 다음엔 어림도 없어!”

“응응. 물론이지. 잘 다녀와~”

“………뭔가 속은 기분인데.”

볼멘소리로 중얼거리는 걸 마지막으로, 블루벨의 모습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항상 보는 건데, 진짜 빠르단 말야…….

그리고 잠시 후, 조금 심각한 표정이 되어서 돌아온 블루벨은, 무척이나 메마른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새를 못 참고 그러고 있니? 지금 심각한 상황인 거 몰라?”

“아니, 얘가 갑자기 이러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억울해!

블루벨이 떠나자마자, 어째서인지 메린이 뒤에서 나를 껴안고 안 놔주려고 하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냐고!

나는 녀석의 팔을 두드리며 말했다.

“얌마, 메린, 이제 진짜 놔, 블루벨 왔잖아, 얘기 들어야지!”

“이대로 들으면 되잖아.”

작게 중얼거리면서, 녀석은 팔을 풀기는커녕 오히려 더 힘을 주고 있었다!

돌겠네, 진짜.

한두 번 더 말했다가는 이대로 어깨랑 허리가 짜부라질 것 같아, 그냥 포기하고 블루벨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땠어?”

“……포기가 빠르구나. 어쨌든 저 연기는 불 때문에 나는 게 아니야. 쇳덩어리들이 바닥에 막 널려 있는데, 거기서 나오고 있었어. 아까 식당에서 봤던 남자가 근처에 서서 머리 긁적이고 있고.”

“그 포대자루 들고 있던……?”

“맞아.”

터크라는 사람이군.

보급하러 간다던 사람이 왜 거기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싸워야 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곧바로 이동하도록 하죠.”

클라이드는 굳은 표정으로 로나의 손을 잡은 채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메린의 팔에 묶여버린 내 상태로는 움직이기 힘들 거라 생각한 거겠지.

예리하군.

블루벨도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우리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고, 이내 풀이 짓밟히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살짝 흔들렸다.

“으……”

나도 모르게 등 뒤의 메린에게 기대듯이 몸을 뒤로 젖혔다.

그러자 그녀가 한층 더 깊이 팔을 두르며 나를 껴안아왔다!

아으, 또 목에……!

“야야야, 자중하라니까!”

“……”

“방이면 몰라도 밖에서 이러면 안 된다고! 손을 잡든 팔짱을 끼든 상관없으니까 껴안는 건 제발 좀 참아줘……!”

“……방에선 된다는 거지? 알았어.”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메린은 의외로 시원스럽게 나를 놓아주었다.

그런 뒤, 몸부림치느라 흐트러진 내 머리를 살살 정리해주더니 어깨를 부축해주며 손을 맞잡았다.

뭐지……? 왠지 좀 싸한데.

바로 직전까지 빼앗기기 싫다는 듯이 나를 붙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태도를 싹 바꾼다고?

살짝 흔들리는 것 같던 주홍빛 눈동자도, 지금은 아무런 동요 없이 덤덤하게 깜빡이고 있다.

……어이씨, 괜히 불안해지는데.

나 또 뭔 자폭이라도 한 건 아니겠지?

그렇게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뒤숭숭해진 내 귀에, 아쉬움이 한껏 담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저런, 끝났네. 좋은 구경은 항상 너무 빨리 끝난다니까.”

“손님에게 무슨 소리하시는 거에요.”

“왜? 보기 좋으니까 좋다고 하는 건데. 하, 클라이드, 고상한 척해도 소용없어. 네가 일부러 저 아가씨의 착지 설정만 불안정하게 짠 거 다 알아.”

일부러……?

자연히 내 고개가 클라이드를 향하는 동시에, 그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돌아가는 게 보였다.

클라이드 이 양반, 설마 진짜로……?

그는 내가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질 것임에도, 꿋꿋하게 다른 곳을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닌데요. 급하게 움직이느라 그런 겁니다.”

“하하하, 내가 네 실력을 모를 줄 알고? 속일 걸 속여라, 임마. 아무튼 능청거리는 건 알아줘야 돼. 아무튼 여긴 웬일이냐?”

“제가 경보 건 거 못 들으셨어요? 셰인 놈이 네이트를 데리고 어디 사라져서 찾는 중이에요. 그러다 여기 연기 나길래 온 건데……”

클라이드는 잠시 말을 끊고, 터크의 뒤쪽에 벌어져 있는 생난리를 슬쩍 보았다.

나 역시 그의 시선을 따라, 시커먼 연기가 풀풀 나고 있는 현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무언가 검은 창문 같은 게 달린 하얀 쇳덩어리들이, 완전히 구겨진 채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다.

둥그렇게 생긴 쇳덩어리는 꼭 사람 머리처럼 보이는데, 색색의 가는 줄이 바깥으로 늘어진 채 불꽃을 튀기고 있다.

그 주변에는 중간이 구부러진 쇳덩어리에, 지난번 드워프네 연구소에서 봤던 소총의 대가리 부분이 여럿 달린 것도 떨어져 있다.

저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저게 다 웬 거죠?”

그가 묻지 않았으면 내가 던졌을 질문에, 터크는 입에 물고 있는 나무조각의 방향을 바꾼 후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

말없이 그에게 건조한 눈빛을 쏘아대는 클라이드를 대신해 내가 물었다.

“보급 일을 하러 가신다고 들었는데, 왜 여기 계세요? 저 쇳덩어리들은 이미 부숴져 있었던 건가요?”

“보급 일을 해야 하니 여기 왔죠. 이 안에 미로가 있는데, 머릿속에 떠올리는 건 거의 대부분 구현해내는 마법이 걸려 있어요. 식재료 보급하기엔 딱이죠. 도축도, 도정도 안 해도 되거든요.”

……어라?저거 침입자를 막기 위한 방어마법 아니었나?

근데 그걸 식량보급으로 써먹고 있네.정말 참신한 응용법인걸?

내가 설계자라면 무덤 속에서 돌멩이를 던져서 항의할 거다.

“그래도 되는 거에요? 그러다 마력이 모자라게 되면 어쩌려고…….”

“하하, 걱정 마세요, 엘프 아가씨. 이 일대가 워낙 외진 곳이라서 ‘신비’가 아주 그냥 흘러 넘치거든요.

아무튼 그래서 보급 일을 하러 왔더니, 미로 문이 열려 있더군요. 그리고 안에서 저 쇳덩어리들이 나왔어요.”

터크는 손바닥 위에 손가락 두 개를 세워서 걷는 시늉을 보인 후,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곤 나오자마자, 다짜고짜 저 막대기 뭉치를 저에게 겨누는 게 아니겠습니까? 예감이 좋지 않길래 전부 부쉈죠. 그 뒤로 두 번 정도 더 나오더군요.”

그리고 그가 막 세 번째로 몰려나온 쇳덩어리들을 부쉈을 때에 우리가 온 것이라는 듯했다.

클라이드는 널부러져 있는 쇳덩어리 중 하나를 살피더니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건…… 설마 AMG?”

“아세요? 그게 뭔데요?”

내 질문을 들은 그의 표정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자동형 기관총 사수(Automatic Machine Gunner). 다른 세계의 기계장치에요. 터크 씨, 이게 저 안에서 나왔다는 거죠?”

“그렇다니까. 왜, 짐작가는 거라도 있어?”

“……기계장치와 사람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 세계가 있어요. 그곳에선 기계장치들이 사람을 잡아가서는 또 다른 기계장치의 동력원으로 만들죠.

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 기계를 두려워한다고 해요. 자신들의 이웃이나 가족의 일부가 들어갔을지도 모르니까요.”

클라이드는 고개를 들고, 빼꼼 열려 있는 미로의 문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기계장치들이 저 문을 열고 나왔다는 건, 누군가가 미로 속에서 그것들을 떠올렸기 때문일 터.

그리고 그게 가능한 건, 그 세계에서 살다가 온 기록자 외엔 없다.

달리 말하면, 지금 미로 안에 기록자가 들어가 있다!

“누가 그런 데에서 왔죠?”

조심스럽게 묻는 나에게 대답하듯, 돌연 미로로 이어지는 문이 활짝 열렸다.

차각, 차각, 차각.

그리고 기묘한 소리와 함께, 하얀색 사람들이 문 밖으로 한 무더기 걸어나와 여름풀을 짓밟았다.

얼굴 대신 달린 검은 창에선 붉은 빛 하나가 번뜩이고 있고, 팔꿈치 아래는 손 대신 구멍이 뚫린 막대기 여럿만 달려 있다.

아마 저게 그 기관총이라는 거겠지.

터크가 혀를 차며 손을 들려는 순간, 하얀색 사람들…… AMG가 불린 기계장치들의 고개가 두 군데로 나뉘어서 집중되는 게 보였다.

하나는 클라이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

검은 창에 떠올라 있는 붉은 빛들이 나와 클라이드에게 모인 순간, 지직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려나왔다.

“최우선 목표물, 클라이드 밀러를 발견. 최우선 목표물, 개년을 발견. 사살하라. 사살하라.”

“……!”

사살. 쏴 죽여라.

그 말에 무언가 대응하기도 전에, 놈들의 기관총이 먼저 우리를 향했다.

피할 수 없다는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꿰뚫기 직전, 놈들이 서 있는 땅 밑에서 붉은 화염이 솟아올라오더니 단숨에 놈들을 집어삼켜버렸다.

그 뜬금없는 분출이 멈추었을 땐, 그 자리에 남은 건 오로지 검은 잿더미뿐이었다.

이거…… 마법이지?

클라이드 역시 눈을 끔벅거리고 있는 걸 보니, 저 사람이 한 건 아닌 듯했다.

그럼 남은 건……

자연히 이 자리에 있는 또 다른 사서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가 귀에 익숙한 한숨 소리를 흘리며 말했다.

“클라이드…… 네가 드디어 치정싸움을 일으키는구나. 그러게 적당히 꼬시라니까…….”

“구해주신 건 고마운데 무슨 소리하시는 거에요?! 제가 언제 누굴 꼬셨다고!”

“아니라고? 근데 왜 저 놈들이 너랑 이 아가씨를 노리냐? 딱 봐도 여자 문제구만, 뭘 아닌 척을…….”

“진짜 아니라니까요?!”

그러나 클라이드의 외침은 터크에게 개미 더듬이만큼도 닿지 않는 듯했다.

아니, 평소에 기록자들과 대체 어떻게 지내고 있었길래……?

그보다 나도 억울한 건 마찬가지야!

터크가 나를 치정싸움 참가자로 본 건 차치하고,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저 놈들이 날 개년이라고 부르면서 죽이려는 건데?!

“네 악명이 다른 세계로 퍼졌나봐.”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블루벨. 나 이 모습이 된 지 반나절도 안 됐어. 그리고 애초에 악명이 생길 리가 없잖아. 내가 얼마나 법과 도덕을 잘 지키는데.”

“………”

음, 저 얼굴, ‘굉장히 할 말이 많지만 귀찮으니 하지 않겠다’는 뜻인 것 같군.

아무래도 이 엘프는 나를 무법자로 보고 있는 모양이다.

정말 어이가 없군.

“그럼 네가 이러고 있을 때, 널 개년이라고 부른 사람이 만들었겠네.”

“존나 그럴싸하긴 한데, 내가 그걸 듣고 가만히 있었을 것 같진 않은데.”

보통 그런 욕을 할 땐 주먹이 날아오기 마련이니, 최소한 이틀은 아무것도 못하도록 만들었을 거 같은데 말야.

그러나 내 말에, 메린은 눈을 살짝 동그랗게 뜨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 엄청 가만히 있었는데?”

“……엉?”

“생각 안 나냐? 네가 한숨 쉬는 거 듣고 빡쳤던 이상한 년 있었잖아.”

“…………아.”

머릿속에 어떤 여자의 모습이 사삭 떠올랐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옷을 입고 있던 단발머리 여자.

뜬금없이 생트집을 잡으며 시비를 걸던 깡패 년……!

“밀라 클라운……?!”

클라이드의 경악 섞인 중얼거림이 들려오는 순간, 로나가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가더니 철퇴를 바닥에 쿵 꽂았다.

콰앙—!

귀를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엄청난 바람이 불어왔다.

몸이 날려갈 것 같은 세기에 저절로 몸이 바닥에 엎드러졌다.

그런 나를 붙든 채, 메린이 바닥에 검을 꽂아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잠시 후, 바람이 잠잠해지면서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정면에 보이는 건, 철퇴를 땅에 꽂은 채 꼿꼿이 서 있는 로나와, 그녀와 대치하듯 무수히 서 있는 흰색 기계장치들.

“……뭐야, 살아 있네.”

그리고 그 기계장치들의 중앙에 서 있는 미친년, 밀라 클라운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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