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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272화 (272/475)

〈 272화 〉 263화 : 본의 있는 함정 (4)

* * *

살아있는 게 불쾌하다는 듯이 표정을 찡그리면서, 밀라 클라운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거 웬만한 벙커도 걸레짝으로 만드는 물건인데, 그걸 막고서도 멀쩡해? 하, 이래서 판타지가 싫다니까. 뜬금없이 땅에서 뭐가 튀어나오질 않나, 아무것도 없는 데서 목을 조르질 않나…….”

그러더니, 별안간 모자의 챙을 옆으로 홱 돌리며 씨익 웃었다.

“그래도 이번엔 고마워해야지. 덕분에 기막힌 쇼를 하나 펼칠 수 있으니까 말야.”

“셰인은 어디 있죠? 그 안에 있나요?”

클라이드가 딱딱한 목소리로 묻자,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지더니 벌레라도 씹은 것처럼 인상을 구겼다.

“셰인……? 아아~ 그 어리버리 안경잡이? 푸흐흣! 그 새끼 진짜 최고였어! 걔도 혹시 성씨가 클라운인 거 아냐?”

어지간히 우스운지, 눈물까지 글썽거리면서 배를 잡고 낄낄거렸다.

당연히 우리 중에 누구 한 사람도 그녀를 따라 웃지 않았다.

꺄하하하 하는 천박한 웃음소리만 평원에 허망히 울려퍼질 뿐이었다.

“진짜 웃겨! 한 번 자줬다고 내 남친이라도 된 것처럼 날 모욕하지 말라느니 나서는 거 있지! 하~ 이래서 동정이 좋아. 머리 별로 안 써도 훌렁훌렁 넘어오잖아. 후후, 덕분에 일이 아주아주 잘 풀렸지 뭐야.”

“……대답해요. 셰인은 그 안에 있는 겁니까?”

“명령하지 마, 씹새끼야.”

철컥.

AMG들, 그리고 대포 같은 걸 짊어지고 있는 또 다른 기계장치들이 일제히 클라이드를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그 어리버리한테 들었어. 형치를 채워도 다시 못 풀려난다며? 그러면서 날 있는 대로 부려먹어?! 이거 사기계약이야, 이 개새끼들아!!”

“거참 희한하네.”

울분을 토하는 그녀를 무심히 쳐다보며, 터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계약을 맺지도 않았을 텐데? 광대 아가씨, 아가씨는 징집이야. 고용이 아니라 징집이라고. 징집이 뭔지 몰라? 강제노동이라는 뜻이야. 뭔 사기를 쳤다고 그래?”

“시끄러, 난 듣지 못했어!!”

그녀의 고함소리에 응하듯이 기계장치들의 붉은 빛이 한순간 번뜩였다.

공격하려는 건가?!

바로 그때,

콰직!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 AMG의 검은 창에 화살이 하나 박혔다.

붉은 빛을 뿜어내는 대신 화살이 솟아나버린 AMG는 그대로 힘없이 푹 쓰러져버렸다.

밀라 클라운은 경악에 찬 표정으로 쓰러진 AMG를 쳐다보았고,

“어라, 뚫리네?!”

나는 본인이 쐈으면서 더 놀라고 있는 화살의 주인, 블루벨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아니, 놀랄 거면 왜 쏜 거야?

“말도 안 돼, 이거 방탄유리라고!! 어떻게 화살 따위에……?!”

“따위? 인간 주제에 감히 엘프의 화살을 무시해?! 그 쇳덩어리 전부 깨부숴주마!!”

“누구 맘대로……! 쏴 버,”

파앙! 파지직!

새된 목소리가 채 말을 맺기도 전에, 기계장치들이 차례차례로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정면에서 날아온 화살에 한 대가 쓰러진 후엔 측면에서, 그리고 또 그 다음엔 공중에서 화살이 날아온다.

이따금 블루벨이 직접 창에 달라붙어서 화살로 부숴버리기도 했다.

그 노골적인 도발에도, 기계장치들은 각자 쥔 무기들을 이곳저곳으로 겨누다가 허망하게 쓰러질 뿐이었다.

“크윽……!”

일개 개인에게 완전히 농락당하고 있는 하얀 군단의 모습에, 밀라 클라운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날카롭게 고함쳤다.

“조준이 안 되면 그냥 쏴 버려! 유도탄 해지! 일반탄으로 전환해서 사살해!!”

“명령 확인. 즉시 이행.”

평탄한 목소리가 흘러나온 뒤, 아직 남아있는 기계장치들이 일제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드르르륵 하는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AMG의 팔이 돌아가면서 발사되는 주황색 알갱이가 풀밭을 헤집는다.

이리저리 튀는 흙알갱이 가운데에, 붉은 핏방울은 조금도 섞여 있지 않다.

기관총이 쏘아대는 알갱이는 딱 봐도 화살보다 월등히 빠르지만, 다행히 블루벨의 발을 따라잡지는 못하는 듯했다.

덕분에 빈도수는 줄긴 해도 간간이 기계장치가 하나씩 쓰러지긴 했지만……

나는 열심히 땅을 파헤치고 있는 AMG들의 옆에서, 붉은 빛줄기만 쏘고 있는 기계장치를 쳐다보았다.

……아까 로나가 막았던 그 엄청난 공격은, 필시 저 놈이 짊어진 포대에서 나온 것일 터.

놈이 무언가 가늠하고 있는 틈에 빨리 저걸 부숴야 돼!

“이런 쓰레기 같은 깡통 새끼들! 왜 맞추질 못하는 거야?!”

“쓰레기니까!”

“입 닥쳐, 절벽 꼬맹이! 네년한테 말한 거 아냐!”

“혼잣말은 아가리 다물고 하는 거란다, 꽃뱀 년아! 밤꽃 냄새 나니까 입 좀 다물어줄래?!”

“이 개씨발년이……!!”

………저 대화 뭐야,무서워.

블루벨이 일부러 저 여자의 주의를 끌려고 저러는 거라면 대성공이긴 했다.

놈들의 지휘관인 밀라 클라운이 그녀에게만 온 신경을 쏟고 있는 탓에, 기계장치들이 우리는 안중에도 없으니까.

이건 기회야!

“……메린, 로나, 블루벨의 정반대쪽, 칠 수 있어?”

“음…… 칠 수야 있지만, 저거 한 방에 부숴지지 않을 거 같단 말이죠…….”

놈들은 조금의 틈도 없이 원거리 무기를 마구 쏴댄다.

단 한순간의 틈으로 벌집이 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로나는 블루벨이 딛었던 풀밭이 실시간으로 제거되고 있는 모습을 빤히 보면서 말을 이었다.

“블루벨 씨는 화살 한 발로 확실하게 끝장낼 수 있지만, 저나 메린 님의 경우, 잘못하면 에스트레야 님과 다른 분들이 맞을 수도 있어요. 눈먼 화살 비슷한 걸로요.”

“그럼 나 혼자 가면 되겠네.”

그렇게 말하며, 메린은 검자루를 꽉 쥐었다.

“화살이 통하는데 칼날이 안 통할 리가 없지. 반대쪽은 내가 처리할게. 로나 너는 방어에 전념해.”

“네, 그게 제일 좋겠네요!”

“아, 잠깐!”

곧바로 자리를 뜨려는 메린의 팔을 붙잡았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그녀가 다른 세계에서 온 물건,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계장치를 상대해야 한다는 게 불안했던 걸까?

불안해할 게 뭐가 있다고?

메린이 질 리가 없잖아.

그건백 번이고 천 번이고 자신 있게 호언할 수 있다.

하지만 저건 화살이 아니잖아.

그녀는 날아오는 화살도 슥삭 잘라버릴 수 있지만, 저 총알은……?

살짝 스쳐서 주춤거리는 즉시 끝장날 거고, 그게 아니라도 큰 부상을 입을 터.

………그렇구나.

나는 메린이 다칠까봐 걱정하고 있다.

같잖은 생각이란 것도 알고, 싸움에는 부상이 동반되기 마련이란 것도 안다.

잘려나가지만 않으면 로나가 말끔히 고칠 수 있다는 것도 알아.

그래도 역시 걱정이 되는 건, 내가 직접 나설 수 없어서 더 그런 거겠지.

……남자가 되어서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긴커녕 위험에 내몰고 있다.

그 무력감과 함께 몰려드는 자괴감에 잠긴 채, 나는 의아해하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저거…… 벨 수 있겠어? 찌르는 건 위험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야, 네 싸움 실력이 좀 나아지긴 했는데, 나한테 조언할 수준은 아니다. 넌 네 걱정이나 해.”

“……”

저절로 내려가던 시선이, 머리에 무언가 얹히는 느낌에 다시 앞으로 향했다.

내 머리에 손을 얹은 메린이, 그대로 슬슬 쓰다듬으며 씨익 웃었다.

……그녀가 무언가를 박살내기 직전에 짓곤 하던 그 웃음이다.

간만에 보는 탓일까?

그 서늘한 웃음에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동시에, 몸이 바짝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는 당당하게 선언했다.

“내가 못 베는 건 없어.”

“………”

“간다.”

손을 살짝 흔든 뒤, 그녀는 옆으로 빙 돌아서 놈들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길게 땋아 내린 머리를 휘날리며 순식간에 멀어져가는 그 모습을, 나는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가 기계장치들에게 다다른 순간, 푸른빛 일섬이 번쩍였다.

그러자 기계장치가 깔끔하게 세로로 쪼개져, 각각 다른 방향으로 풀썩 쓰러진다.

이상을 감지한 주변 기계장치가 그녀를 향해 몸을 틀었을 때는, 이미 양팔과 어깨에 달린 무기를 잃은 뒤였다.

그러한 병사에게 기다리는 건 죽음뿐.

심장이 뛰지 않는 기계장치 역시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순 없다.

단말마 하나 없이 고요하게, 검은 창에 켜져 있던 붉은 빛이 하나 둘 꺼져간다.

지휘관은 물론이고, 제 동족에게도 위험을 알리지 못한 채,피 대신 불꽃을 흩뿌리며 하나씩 쓰러져갔다.

“아하하하! 촐싹촐싹대긴!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씨발년아!”

투다다다다다—!

……한쪽엔 기관총 소리와 광소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정반대편에선 거의 무음이나 마찬가지인 상태로 일방적인 파괴가 벌어지고 있다.

동전의 양면 같은 그 기이한 모습은, 내가 머릿속에 그렸던 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계획대로 된 것에 여러 감정이 뒤섞인 한숨을 내쉬며,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다.

“………메린 녀석, 쓸데없이 멋있는 대사나 치고 말야.”

‘내가 못 베는 건 없어’라니, 젠장, 나는 평생 걸려도 그런 말 못하겠지.

역시……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그건 그렇고, 아무리 소리가 커도 그렇지, 기계장치들이 앞뒤로 픽픽 쓰러지고 있는데도 저렇게까지 눈치를 못 챌 수 있나?

성씨가 클라운이라고 진짜 광대 짓하는 건가 했는데, 의외로 그 의문은 금방 풀렸다.

“저 문으로 계속 나오고 있네요.”

“……”

로나의 말대로, 미로로 이어지는 문에서 기계장치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물론 메린과 블루벨이 부수는 속도가 더 빠르니, 조만간 저 광대도 숫자가 줄었다는 걸 눈치채겠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무언가 더 손을 써야 해.

나는 팔짱을 끼며 두 사서를 돌아보았다.

터크는 눈을 감고 무언가 홀로 중얼거리고 있고, 클라이드는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겨 있다.

자연히 내 질문은 클라이드에게 향했다.

“클라이드 씨, 저 미로를 멈출 수 없나요? 그러니까, 저 안에서 자꾸 놈들이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안 그래도 지금 터크 씨가 그걸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저 광대를 이쪽으로 끌고 와야 해요. 저 여자만 아니었더라도 두 분이 고생하실 일은 없을 텐데…….”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아야 하니, 광대를 지금 죽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냉큼 달려들기엔 너무 위험하다.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찡그리는 그에게 재차 물었다.

“지난번처럼 마법으로 당겨오면 되지 않아요?”

“거리가 멀어요. 잘못하면 저 여자가 기계들을 몽땅 자폭시킬지도 모르고요. 정말 골치 아프게, 저희와 달리 기록자는 죽지 않아요. 몸이 산산조각이 나도, 다시 멀쩡하게 장서관에 나타나죠.

물론 자폭한다 해도 피하면 그만이지만, 저 동굴은 완전히 날아갈 겁니다. 네이트가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만들 순 없어요.”

……역시 아직 네이트가 살아있을 거라 믿고 있구나.

우리가 마구간에서 한 이야기를 다 들었을 텐데.

물론 그걸 비웃거나 안타까워할 생각은 없다.

한두 해 같이 일한 사이가 아닐 텐데, 시체를 보기 전까지는 당연히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마법사이기 전에 사람이니까 말야.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리 부질없는 희망일지라도 품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그 상대의 결말을 보지 못했다면 더더욱 버리지 못한다.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더라도, 얇아질 대로 얇아진 그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검게 늘어붙을 때까지 버리지 못하는 희망은 미련이 되고, 끊임없이 후회를 뿜어낸다.

잊을 만하면 꿈으로 나타나고, 저 아래로 가라앉으려던 기억을 억지로 끌어올린다.

……그거 정말 죽을 맛이란 말이지.

요전에도 숲을 헤매는 꿈을 꾸다 깬 걸 보면, 메린의 온기로도 그 악몽은 덮지 못하는 듯했다.

어쩌면, 그때 메린도 같이 있었기 때문에 더 떠오른 건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 기분이 어떨지 아는 나로선, 그에게 포기하라고 설득할 수 없었다.

“클라이드 씨,”

그래서 그 대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납치 한 번 해보실래요?”

“네? 납치라뇨?”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대답하려는 순간, 터크가 한숨을 푹 쉬면서 혀를 찼다.

그는 입에 물고 있던 나무조각을 퉷 뱉어버린 후,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안에 사람이 있으면 초기화가 안 돼. 마법을 해제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아무 일 없어도 하루는 꼬박 걸릴 텐데 저 난리통이잖아. 훨씬 더 오래 걸리겠지.

지금은 동굴째로 무너뜨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그건 절대 안 돼요! 셰인은 어쨌든, 네이트가……!”

“알아. 근데 어쩔 수 없잖아. 지금은 이 손님들 덕분에 막고 있지만, 이 분들도 생물인데 저렇게 끝없이 나와선 한계에 부딪칠 거야. 장서관엔 알리긴 했지만, 너도 알잖아. 우린 싸움에 익숙하지 않아. 여기가 뚫리면 더 큰 피해가 발생할 거라고. 클라이드, 네이트는 포기해.”

포기해라.

그 말을 전하는 터크의 표정도 그리 밝지는 않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서 하나를 구하겠다고 장서관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 터크는 최선의 제안을 한 것이다.

……우리가 없었다면 말야.

나는 클라이드의 눈앞에 손을 흔들어 그의 주의를 끈 후, 절망이 떠오른 그의 눈을 보며 미소지었다.

“포기하지 마세요.”

“……”

“하나만 알려주세요. 미로 어디에 사람이 있는지 알 수 있나요?”

내 질문에, 두 사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예상은 가시죠?”

“예에…… 방에 있을 겁니다. 미로 안에서 저렇게 계속 나오려면, 누군가가 그 생성지를 계속 관측해야 하니까요.”

눈길을 돌린 곳에 무엇이 있었는지 점차 잊어버리는 것처럼, 미로 안의 존재는 관측되지 않으면 곧 어둠에 삼켜지고 만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미로에서 생겨나는 모든 것들은, 세상에 기록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실체를 가진 환상입니다. 영혼 있는 존재의 인식력이 없으면, 얼마 안 가 존재가 흩어져버려요. 미로 바깥으로 나오면 조금 오래 버티긴 하지만, 결국 사라지는 건 마찬가지죠.”

“그럼 보급은 어떻게……?”

내 질문에, 터크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미로에선 소량만 만들어내고, 밖에 가지고 나와서 복제마법으로 양을 불리고 있어요.”

“그럼 식량 떨어지기 전에 복제마법 쓰면 되잖아요. 왜 여기까지 나오는 건데요?”

“그야 재고 확인 안 하니까요! 참 곤란한 녀석들이에요.”

아니 뭔 남 얘기하듯이…….

아무튼 어디에 있는지 예상이 된다면, 남은 건 찾으러 가는 것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클라이드를 향해 다시 물었다.

“다시 여쭐게요. 클라이드 씨, 납치 한 번 하시죠?”

“납치라니,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혹해하는 목소리로 되묻는 그에게 계획을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그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이내 복잡한 심경이 담긴 얼굴로 말을 꺼냈다.

“……손님께 그런 위험을 안겨드릴 순 없어요. 사실 저도,”

“어허, 포기하지 마시라니까요? 사양도 하지 마시고요. 이건 절 도와주신 보답이니까요.”

클라이드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나는 이름을 잊어버릴까 두려워서 전전긍긍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는 관장 놈의 마법이 완전히 적용되어서, 나 자신을 ‘여자인 에스트레야’로 생각하고 있거나.

그러나 그가 도와준 덕분에, 나는 ‘나’를 잃어버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19년 전에 태어난 대로, 나는 계속 ‘남자인 카엘 에스트렐’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걸 보답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사람이 아니지.

“그리고 오늘 장서관 안내도 해주셨고요. 즐거운 구경을 하게 해주셨는데 당연히 보답해야죠. 안 그래, 로나?”

“네! 휴게실의 과자 맛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마침 몸이 근질거리던 참이니 잘됐죠!”

전혀 사제답지 않은 말을 하는 로나를 보며 쓴웃음을 지은 후, 나는 클라이드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한 번 더 말씀드릴게요. 포기하지 마세요, 클라이드 씨. 그러기엔 아직 일러요.

게다가 당신은 마법을 쓰는 사람이잖아요? 마법에 불가능은 없다고 배우신 분이 포기라니, 그거 자기부정 아니에요?”

웃으며 말하는 나를 얼마간 빤히 바라본 후, 그는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가 내민 손을 잡았다.

“……네, 해봅시다. 포기하다니, 당신 말대로 저희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네요.”

“잘 생각하셨어요.”

엷게 웃음 짓는 그와 마주 고개를 끄덕인 후, 나는 기계장치들 사이에서 여전히 악을 바락바락 쓰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공연의 막을 내릴 시간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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