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7화 〉 268화 : 위법의 값 (5)
* * *
다시금 주위가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즉시 일이 터질 것 같은 긴박함이 한껏 느껴지고 있는데, 셰인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이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이 상황에서 점심 메뉴를 정해? 내가 꽤 우습게 보이나보네.”
……헉, 고개 끄덕일 뻔했다.
근데 솔직히 좀 우습게 보이긴 해.
안경테가 두꺼워서 그런가?
내 표정에서 무언가 읽은 걸까?
셰인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헛웃음을 켜며 말을 이었다.
“내가 잡일이나 하는 놈이라고 얕보는 모양인데, 당신 같은 여자는 간단히 깔아 눕힐 수 있다고. ……그러고보니 아까 못 봤던 것 같은데, 늦게 들어왔었나?”
“……”
주변을 둘러싼 셰인 글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으, 저 놈, 우리 일행을 기억하고 있었군.
안 그래도 거북한 속이 뒤집어지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놈의 시선을 피하려 눈을 내리깔았다.
“……?”
그때, 바닥에 작은 글자가 적혀 있는 게 보였다.
클라이드가 바로 그 옆에 있긴 한데, 무슨 작전이라도 있나?
시선을 집중해서 읽어보았다.
………<사서 둘,="" 별의="" 지시를="" 기다린다="">?
이게 뭔 소리야?
별…… 밤하늘에 뜨는 그 별?
별점 치고 있다는 뜻은 아닐 테고…….
자연히 클라이드를 향해 눈이 갔다.
살짝 고개를 돌리고 있는 그의 눈이 나를 보고 있는 게 보였다.
이내, 그가 눈을 약간 가늘게 뜨면서 고개를 위아래로 살짝 끄덕였다.
………혹시 별이라는 거, 나를 말하는 건가?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가명, ‘에스트레야’는 별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니까.
클라이드는 그걸 알고서 저런 말을 쓴 게 아닐까?
……그럼 지금 내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되잖아.
클라이드는 어쨌든, 나이만큼 경험이 풍부한 터크까지도.
“………”
속에 돌이 내려앉은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기대하고 있다는 부담감.
그 기대에 제대로 부응해야 한다는 중압감.
내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불안감.
그 감정들이 한데 뭉쳐서 가슴 속을 짓누르는 듯했다.
……근데 신기해.
압박감은 느껴지는데, 뱃속이 울렁거리진 않아.
긴장 때문에 손끝이 차갑고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는데, 눈앞이 어지럽거나 하지도 않고 말야.
무엇보다도, ‘나에게 지휘권을 넘긴다’는 뜻을 깨닫자마자 머릿속이 마구 돌아가고 있다.
그것도 입꼬리를 슬며시 올린 채.
……나도 조금은 담력이 생긴 걸까?
작은 의문을 품으며, 남몰래 크게 숨을 들이켰다.
“뭐, 어때. 손님에겐 미안하지만 같이,”
“터크 씨! 앞쪽 기계장치들을 처치해주세요!”
“?!”
통로를 쩌렁쩌렁 울리는 내 목소리에 놈이 흠칫 놀라는 게 보였다.
정말 고맙기도 하지!
“블루벨! 뒤쪽에서 놈들에게 활을 쏴줘!”
“큭, 비겁하게 갑자기…… 커헉!”
화살촉이 얼굴을 찡그리며 비난하던 놈의 이마를 뚫고 나온 게 보였다.
그와 동시에, 앞쪽에 서 있던 기계장치들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티디디디딩!
……물론, 단 한 알도 로나의 보호막을 뚫지 못했다.
“뭐야, 웬 보호막이야?!”
“아아, 모르셨나요? 이건 권능이라고 하는 거랍니다!”
“뭐? 너 사제였어?! 무기 들고 다니는 사제가 어디 있다고!!”
아무래도 전투사제라는 존재 자체를 몰랐던 모양이다.
놈의 당황한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AMG가 쏴 대는 주황색 알갱이들이 보호막에 튕겨 여기저기 튀기는 게 보였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셰인 몇 놈은 그 눈먼 공격에 맞아 쓰러져버렸다.
원래는 블루벨도 위험하겠지만, 그녀는 보호막 뒤쪽에서 활을 쏘고 있는 중이라 전혀 문제없었다.
보호막을 뚫고 나간 공격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윽?!”
갑자기 셰인 중 하나의 몸이 바위벽 쪽으로 튕겨나갔다.
놈은 벽에 부딪친 머리를 문지르면서 경악에 찬 얼굴로 소리쳤다.
“왜, 왜 들어갈 수 없는 거야?!”
“적을 들일 리가 없잖아요.”
심드렁한 목소리로 로나가 대꾸했다.
아, 설마 셰인 저 놈, 지금 이동마법으로 보호막 안에 들어오려고 했던 건가?
우리에겐 꽤나 위험한 발상이었지만, 신의 권능은 그리 허술하게 짜여 있지 않은 듯했다.
정말 다행이군.
“블루벨 씨! 가짜를 먼저 처리하세요!”
그때, 클라이드가 크게 외치면서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우리 머리 위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셰인 글렌들의 몸 주변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저게 주변에 빛나고 있는 게 가짜입니다!”
“알았어요!”
“뭐……?! 으억!”
블루벨이 힘차게 대답하며, 반짝임에 감싸인 놈들에게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내 눈에는 한 놈도 빠지지 않고 전부 빛나고 있는 걸로 보이는데, 진짜는 저 방 안에 있나?
“웃기지 마! 내가 가짜일 리가 없잖아! 나는 진짜, 억!”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진짜라고!”
……어라?
셰인 글렌들이 굉장히 당황해하며 서로 자신이 진짜라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럴 시간에 공격마법을 부리는 게 훨씬 나을 텐데?
“이익!”
“큭?!”
그때, 반짝임이 없는 셰인 글렌 하나가 블루벨의 뒤에 나타나더니 그녀를 붙잡았다!
저 놈이 진짜인가?!
그보다 젠장, 저거 기계장치 앞쪽으로 이동하려는 거 같은데!
아직 터크의 마법이 준비되지 않았어.
블루벨이 위험해……!
“어림없지!”
그 순간, 클라이드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블루벨을 붙잡은 셰인 글렌의 뒤에 나타나, 손에 쥔 무언가를 놈의 머리에 내리쳤다!
“크헉!”
외마디 비명과 함께 놈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블루벨을 붙잡고 있던 팔이 전부 풀어졌다.
“이 더러운 새끼가, 어딜 함부로 만져?!”
그녀는 자유를 되찾자마자 곧바로 욕설을 내뱉으며 놈의 목에 화살을 손수 꽂아주었다.
붉은 피를 뿜으며 풀썩 쓰러진 놈의 몸뚱이를 걷어차버린 후, 그녀는 다른 셰인 글렌들을 향해 다시 활을 쏘기 시작했다.
클라이드는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손에 쥔 무언가를 또 다른 셰인 글렌에게 던지며 외쳤다.
“쫓아 꿰뚫어라!”
피잉—!
화살보다도 더 가느다란 소리가 들리자마자, 우리 옆쪽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던 셰인 글렌 셋이 피를 토하며 바닥에 엎어졌다.
시체 세 구의 가슴팍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고, 그 근처에 손바닥만 한 돌멩이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다.
붉은 물방울 하나 묻어 있지 않았지만, 그 돌멩이가 놈들을 처치한 게 분명했다.
“흙으로 돌아가라!”
마침내 터크가 크게 외치고, 땅이 울리기 시작한 순간,
“순리와 이치여, 자리하라!”
방 안쪽에서 똑같은 목소리가 여럿 들리더니 땅울림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뭔지는 잘 몰라도 틀림없어, 놈들이 문 안쪽에서 방해하고 있는 거야!
제길, 저 기계장치들이 있으면 돌입할 수 없는데……!
클라이드나 블루벨이 혼자 저기 들어가는 건 너무 위험해.
그렇다고 둘 다 보냈다간 여기가 위험해질지도 몰라!
정신을 흐트러뜨릴 게 필요해………, 아, 맞아.
그거라면……!
나는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메린에게 물었다.
“메린, 쓴 가루 있어?”
“쓴 가루? ……아, 늑대 쫓을 때 쓰는 거? 왜? 필요하냐? 자.”
메린은 어디 쓰려는 거냐고 묻지도 않고, 허리의 가방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어 나에게 주었다.
나는 그걸 받자마자 블루벨을 불렀고, 눈 깜짝할 새에 나타난 그녀에게 주머니를 건넸다.
“이거 안에 가루가 들어 있는 거야. 저 문 안에 터뜨려버려.”
“이걸? 흐음, 알았어.”
“서둘러!”
블루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보호막 바깥으로 나간 후, 주머니를 든 채 잠시 문 안을 쏘아보았다.
그러다 그녀의 모습이 삭 사라지더니, 곧이어 활짝 열린 문 바로 위의 벽에 쪼그려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그 자세 그대로 빙긋 웃으며, 문 안으로 주머니를 휙 던져 넣었다.
그 다음 순간, 블루벨은 옆쪽 바위벽에 서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그녀가 안에 던져 넣은 주머니는, 채 바닥에 닿기도 전에 화살을 맞고 펑 터져버렸다!
“으아악, 뭐야, 이거!”
“콜록콜록콜록!!”
곧바로 고통에 찬 고함과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핫하, 눈이랑 코가 좀 많이 매울 거다, 짜샤!
그리고 다시 땅이 거세게 울리기 시작했고,
콰아아아앙!
아까 봤던 것처럼 땅이 큰 입을 벌리며 기계장치들을 모조리 삼켜버렸다.
……문 근처 벽에 앉혀져 있던 네이트들의 다리까지도.
“……”
……역시 휘말려버렸구나.
안 그래도 출혈이 심한 상태였는데, 전부 다 죽었겠지.
바닥에 힘없이 널부러진 몸뚱이들을 보자, 가슴 한 구석이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에스트레야 씨,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 나를 향해, 터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복제가 죽었을 뿐…이란 말은 별 의미 없을 테니, 이렇게 말씀드리지요. 제가 저지른 거니, 당신은 아무 책임도 없습니다.”
“터크 씨……”
“이 난리를 정리하는 게 먼저에요. 안 그런가요?”
“……네, 그렇죠.”
……나중에 하자.
나 스스로 메린에게 말했던 것처럼, 감상적인 건 나중에나 할 일이야.
고개를 세차게 흔든 후, 나는 활짝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이제 길을 막는 건 없다.
문 안쪽에 있는 놈들은 쓴 가루 때문에 아직 정신이 없을 테니, 굳이 이동마법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을 터.
나는 철퇴의 자루를 꼭 쥐고 있는 로나에게 말했다.
“로나, 네 차례야. 마법을 못 쓰게 해줘!”
“네! 기꺼이 끊어버리지요!”
로나는 소리 높이 외치며, 철퇴를 들고 바닥을 힘차게 내리찍었다.
“악한 계교(??)는 무너지리라!”
쿠우웅!
큰 북을 두드린 것 같은 묵직한 진동이 몸 깊숙한 데까지 들어와, 몸이 바짝 쪼그라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곧이어, 나 자신의 몸엔 아무 이상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안도하는 순간,
“우와?”
“어이쿠.”
“말도 안 돼!!”
세 마법사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각자 다른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중에 가장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는 건, 역시나 셰인 글렌이다.
놈은 눈이 튀어나오기 직전까지 크게 뜨고 있는 걸로 모자라, 아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야 그렇겠지.
우리와 달리, 놈에겐 마법 말곤 다른 대항수단이 없으니까.
그게 끊겨버린 순간, 놈의 생명줄도 끊어진 거나 다름없다.
나는 로나와 블루벨을 번갈아 보면서 외쳤다.
“둘 다 여길 부탁해! ……메린, 들어가자!”
“그래.”
메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뽑는 와중에, 터크가 셰인 글렌 하나를 바닥에 메쳐버리면서 소리쳤다.
“클라이드를 데려가세요! 클라이드, 너도 가!”
“네? 아, 네!”
그렇게 메린, 클라이드와 함께 문을 향해 질주했다.
기계장치를 만들던 셰인 글렌도 쓴 가루에 같이 당했는지, 갑자기 문 안에서 기계장치가 튀어나오는 일은 전혀 없었다.
나는 문지방을 넘기 직전,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참았다.
그대로 방에 들어서자마자 건너편 문을 홱 열어젖혔다.
참았던 숨을 푸욱 내쉬면서 다시 돌아서자, 메린이 왼팔로 코를 막은 채 셰인 글렌을 하나하나 처치하고 있는 게 보였다.
“으아악! 끄아아아아아!”
콰직! 푸슉! 서걱!
처절한 비명소리 속에서도, 메린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묵묵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발악적으로 내질러오는 손을 잘라버리고, 다리를 짓밟아 뼈를 부순 후 가슴을 양단한다.
뒤에서 붙잡는 놈을 그대로 업어친 다음, 벽을 향해 휙 던져버린다.
머리가 깨졌는지,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리면서 붉은색 선이 굵게 그려지는 게 보였다.
……여전하구만.
나는 고개를 살짝 저은 후, 방 구석에 놓인 커다란 물체……
문틈으로 슬쩍 봤었던,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조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평평한 면에 손잡이와 단추 같은 게 잔뜩 달려 있고, 색유리관 같은 거랑 작은 창 같은 부분이 혼자 빛나고 있다.
구조물 끝엔 사람 키보다도 높은 통이 달려 있고, 무언가 금이 간 것처럼 틈이 좀 나 있는데, 딱 봐도 내 힘으로 열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근데 이거 진짜 어디다 쓰는 거지?
전체를 보면 좀 알 수 있을 거 같았는데, 전혀 모르겠어!
황당한 기분으로 그 구조물을 바라보는데, 클라이드가 내 옆에 다가오더니 그걸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말했다.
“가동 중이긴 한데, 새로 진행 중인 게 없으니 그냥 끄면 되겠네요. 정지 기능이……… 여기 있군.”
그리고는 굉장히 능숙하게 어떤 커다란 단추를 꾹 누른 후, 손잡이를 잡고 아래로 홱 내려버렸다.
그러자 철컥,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구조물 여기저기에 빛나고 있던 빛들이 죄다 꺼져버렸다.
“이거 아시나봐요?”
“무엇인지만 알고, 만져본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이거랑 비슷한 기계를 다뤄보긴 했죠. 아무튼, 혹시 모르니 아예 부숴버리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음………… 아직도 안 되네.”
로나가 땅을 두드린 영향이 아직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험 삼아 검을 뽑아서 내리쳐봤지만, 투웅, 하고 튕겨 나갈 뿐,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심지어 클라이드가 내려쳐도 끄떡없었다!
“아잇, 진짜!”
성질이 뻗쳐서 신발 굽으로 팍 걷어찼다.
탁!
……와, 이래도 흠집 하나 안 나네.
뭘로 만들었기에 이렇게 튼튼하냐?
쇠로 만든 것 같진 않은데…….
할 수 없지.
한숨을 푹 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메린, 이것 좀………”
그리고 말을 맺지 못한 채, 나는 멍하니 눈앞의 광경을 쳐다보았다.
……뭐야, 저거?
저 구석에 널부러져 있는 붉은 조각들, 껍데기들, 머리카락들……!
사방이 완전히 빨개져 있는 저 풍경은 대체 뭐냐고?!
“……에스트레야 씨,”
클라이드가 내 팔을 잡으려는 걸 뿌리치고, 나는 그 붉은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마침 의식을 잃지 않은 마지막 셰인 글렌이 메린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었다.
놈의 목을 붙잡은 채 검을 쳐들고 있는 메린의 팔을, 그 칼날이 놈에게 꽂히기 전에 붙잡았다.
“………놔줘.”
“뭐?”
“놔주라고.”
눈을 크게 뜨고 깜빡이면서도, 메린은 그 이상 묻지 않고 놈을 풀어주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놈의 얼굴에,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고 안도하는 기색이 퍼지고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면서,
퍼억!
곧바로 놈의 멱살을 붙잡고 얼굴에 한 방 갈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