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화 〉 270화 : 오후는 평화롭게 보내야 제맛 (1)
* * *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며칠 전부터 거의 밤낮으로 맡고 있는 것과는 다른 향기.
안도와 두근거림이 아닌, 그리움이 한껏 느껴지는 향기이다.
그리고 그에 이끌려, 저 아래 고이 묻어두었던 기억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이제 두 번 다시 눈에 담을 수 없는 풍경이 떠오르며,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손이 닿지도 않았는데, 가슴 속이 죄이면서 눈가가 뜨거워지려 한다.
이대로는 또 볼썽사나운 꼴을 보이게 될 거야.
다 큰 놈이 우냐고 혀를 차시면서도, 언제나 그랬듯이 안아주시겠지.
그래서 그 전에 눈을 떠버렸다.
모처럼 선명하게 떠올린 환상인데, 눈물 때문에 부옇게 흐려지면 제대로 기억할 수 없으니까.
“……”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눈꺼풀이 무거운 것 치고는 초점이 제법 빨리 맞춰졌다.
아마 조금 전에 본 꿈 비슷한 것 때문에, 눈이 아주아주 살짝 촉촉해진 덕분이겠지.
하지만 눈만 떠졌을 뿐, 머리는 아직 깨어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저 앞에 보이는 건 무엇인지 가늠할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냥…… 엄청 나른하다.
꼭 쇳덩어리가 몸을 감싸고 있는 거 같아.
손가락 까딱이는 것도 잘 안 되는데, 이거 괜찮은 건가?
……그건 그렇고, 이 냄새는 어디서 나는 거지?
눈앞에 있는 테이블엔 아무것도 없는데.
“아직 잠이 덜 깼나보네. 야, 정신 차려.”
갑자기 메린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두 뺨에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녀석이 자신의 손으로 내 뺨을 감싼 거겠지.
곳곳에 배긴 굳은살 때문에 살짝 까끌까끌한 느낌이 들었다.
그나저나 뜬금없이 뭐하는 거지?
아니, 뭘 하려는 거지?
녀석에게 물어보려는 순간,
“우으.”
문질문질문질.
녀석이 뺨을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말이 만지작거리는 거지, 느낌은 반쯤 반죽당하는 기분이야!
이거 전에 한 번 당했던 거 같은데!
“와, 역시 저번보다 더 부드러워~ 히히히히…….”
게다가 히죽거리기까지 하고 있고!
그보다 저번보다 부드럽다니, 그게 뭔………
“………”
녀석의 손에 고개가 움직여지다가 살짝 아래로 향했을 때, 그만 보고 말았다.
내 몸에 절대로 붙어 있을 리가 없는 두 봉우리를……!
그 봉긋 솟아오른 두 언덕이 보인 순간, 머릿속이 번뜩이며 여러 기억들이 마구마구 떠올랐다.
장서관, 그 개 같은 관장 새끼, 서고, 배포실.
……그리고 미로 앞과, 그 안에서 있었던 일들까지도.
나는 내 뺨을 가지고 놀고 있는 메린을 뚱하게 쳐다보았다.
나 참, 표정 한 번 밝구만…….
“재밌냐……?”
“응.”
“그만해…….”
“응.”
……의외로 군말없이 손을 떼네.
머리를 쓰다듬거나 하지도 않고, 볼을 콕콕 찌르지도 않는다.
신나게 뺨을 만져대던 걸 보면, 날 만지는 거에 질린 것 같진 않은데.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테이블 앞에 앉아 있다는 것 말고는 잘 모르겠다.
주위를 둘러보면 금방 풀릴 의문이지만, 애석하게도 고개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메린…… 여기 어디야……?”
“식당.”
식당…… 장서관의 식당?
어라, 방금 전까지 미로에 있지 않았나?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눈을 깜빡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나 잤어……?”
“잤는지도 모르냐? 엄청 푹 잤구만? 근데……… 흠, 열은 없는데 기운이 하나도 없는 거 같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메린이 내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아앗, 안 돼, 눈이 도로 감겨버려……!
눈꺼풀이 닫히자마자 고개가 앞으로 숙여졌다.
나에게 그걸 가눌 힘 따위는 없었고, 이내 몸까지 앞쪽으로 기울여지기 시작했다.
“엇차.”
다행히 메린이 곧바로 붙잡아준 덕분에 테이블에 들이받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나를 테이블에 엎드리게 한 후, 머리를 슬슬 쓰다듬어주었다.
……이거 도로 잘 거 같은데.
으으, 그럴 순 없어.
나는 남아있는 힘을 쥐어짜내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바로 맞은편 자리는 텅 비어 있고, 거기서 두 자리 정도 건너뛴 곳에 터크가 앉아 있는 게 얼핏 보였다.
그는 팔꿈치로 턱을 괸 채 나를 보고 있었는데, 눈이 마주친 걸 알아차렸는지 돌연 빙긋 웃었다.
“주무시면 안 됩니다. 조금 있으면 굉장히 맛있는 음식들이 올 거에요. 잠결에 드시면 체할 수도 있으니 조금만 더 견디세요.”
“터크 씨……”
“오, 알아보시는군요. 잠드시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시나요?”
“네…….”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밀라 클라운을 잡은 것도, 미로 안에서 메린이 기계장치의 대가리로 공차기를 한 것도.
……그리고 셰인 글렌의 뒤집어진 눈동자와 비명까지도.
하…… 그건 또 며칠이나 꿈에 나오려나?
놈에게 단도를 들이댄 걸 후회하지는 않지만, 딱히 후련하지도 않다.
애초에 비명소리와 부릅뜬 눈동자를 접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게 이상하지.
놈이 가족 등의 소중한 존재를 빼앗아간 철천지원수였으면 또 몰라.
“그러고보니……”
나는 미로와 셰인 글렌을 떠올리면서 생겨난 의문을 입에 담았다.
“네이선 씨는……?”
“네이선? 아아, 네이트요? 사제님의 치료를 받고 요양 중입니다.”
“괜찮은 건가요……?”
터크는 내 질문에 눈을 살짝 크게 뜨고 깜빡였다.
무슨 뜻으로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 같았다.
으, 다시 말해야 하나?
길게 말하기엔 기운이 모자란 거 같은데.
그러나 내가 재차 입을 열기 전에, 터크가 어깨를 으쓱이며 먼저 말을 꺼냈다.
“숫자가 불어난 거에 대해 괜찮은 거냐고 물으신다면, 예에, 문제없습니다. 하나 빼고 전부 없앴거든요. 녀석은 미로에 있었던 것 자체를 모르는 눈치이고요. 쇠스랑에 찔린 채 건초에 쓰러진 것 까지만 기억난답니다.”
“어…… 보통 죽지 않나요……?”
사실 그게 가장 큰 의문이었다.
우리가 마구간에서 발견한 핏자국의 양은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네이트는 우리가 셰인 글렌과 조우했을 때까지도 계속 피를 흘렸을 터.
어떻게 살아있던 거지?
그 의문에, 터크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마력을 이 손 안에 담는 순간부터, 저희는 일반 사람의 영역에서 벗어납니다. 심장이나 머리가 터지는 거 아니면 잘 죽지 않아요.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마법으로 치료하거든요.”
생물이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본능.
살고자 하는 욕구가 마법이 되어 생명을 유지시킨다.
피를 잃는 만큼 다시 만들기 때문에, 피가 없어져서 죽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본래라면, 네이트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셰인 그 놈이 네이트의 힘을 빼앗고 있지 않았다면 말이죠.”
셰인 글렌의 마법 실력은 비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론만큼은 전부 머리에 담아두고 있었다.
놈은 자신이 가진 지식들을 활용해, 네이트의 마법 능력을 빼앗아 자신의 힘으로 써먹었다.
그 때문에 네이트는 목숨을 유지시키는 게 고작이었고, 셰인 그 놈은 산 사람의 영혼까지 그대로 복제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뭐, 덕분에 네이트는 끔찍한 기억을 얻지 않았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죠.”
“그렇네요…….”
“덤으로, 에스트레야 씨가 고생해주신 덕에 클라이드 녀석도 멀쩡하고요.”
“……?”
뭔 소리이지?
머릿속에 물음표를 가득 띄우며 터크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그가 한층 더 큰 미소를 돌려주며 말했다.
“……네이트는 클라이드의 제자 중 하나에요. 관장님이 대형사고를 친 순간부터, 여기가 ‘장서관’으로 바뀌기까지의 한나절…… 그 악몽에서 함께 살아남은 녀석이기도 하고요.
그때 절반 정도의 관원을 잃었는데, 클라이드의 제자 대부분이 거기 포함되어 있었어요. 그러니 녀석이 네이트를 아끼는 것도 당연하죠.”
잠기운이 확 달아날 만큼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하루도 아닌 한나절만에, 본래 여기 있던 마법사의 절반이나 죽었다고?
대체 관장 놈이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그러나 터크는 그에 대해 자세히 말할 생각은 없는지, 짧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버렸다.
“그런 녀석에게 셰인 놈이 그 지랄을 떨었으니……. 에스트레야 씨가 나서지 않았다면, 클라이드는 완전히 엇나갔을 겁니다. 녀석의 선배로서, 당신에게 감사하단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어어, 사람 같이 생긴 인간 하나 난도질한 거에 감사 인사를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지나치게 참견했다고 불쾌해할 줄 알았는데.
“저는…… 그냥 놈이 단번에 죽으면 안 되니까……”
“하하, 그럼요. 그러니 감사하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마법엔 불가능이 없죠. 특히나 격한 감정 때문에 이성이 날아가버릴수록, 마법은 굉장히 큰 결과를 이끌어냅니다.
……한 번 죽이는 걸로 아까운 놈을, 두 번 세 번, 백 번도 더 죽이는 것도 가능하죠.”
살의를 품으면 품을수록, 그 손에 피를 묻히면 묻힐수록 영혼은 검게 뒤틀려간다.
샘의 바닥에서 물이 끝없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마음에 쌓인 분노는 바깥으로 쏟아내면 낼수록 더더욱 크고 깊어진다.
……이윽고 그 복수가 끝났을 때, 분노로 가득 차 있던 자리엔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은 공허감만이 감돈다.
놈과 똑같은 짓, 어쩌면 그보다 더한 짓을 저질렀다는 자괴감이 찾아온다.
함께 생사를 넘나들었던 동지를 처치했다는 사실이, 묵직한 추가 되어 마음을 저 아래로 가라앉힌다.
“어쨌든 백 년 넘게 같이 산 사이이니, 속이 무거워지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사람이 아니죠. 생판 남인 당신도 그렇게 지쳐버렸는데, 저 녀석은 오죽하겠습니까?”
“터크 씨는……”
“제가 이전에 맡은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시죠? 일일이 크게 반응해선 탈주자 못 잡아요. 뭐, 저도 놈이 그렇게 된 게 마음 편하진 않습니다.”
터크는 기나긴 한숨과 함께 그렇게 말한 후, 또 다른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장서관을 무너뜨리려 한 밀라 클라운은, 형기가 오십 년 연장되었다.
그에 더해, 일주일에 한 번, 오이스 관장의 직속 제자를 찾아가게 되었다.
형기는 어쨌든, 직속 제자를 찾아가는 게 왜 벌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보면서, 터크가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놈들은 관장님처럼 사람의 영역에서 아래쪽으로 떨어졌어요. 관장님과 달리, 사람의 형태도 잃어버렸죠. 지금 놈들은 그저 생명력을 빨아먹고 싶어하는 존재일 뿐이에요.”
아무튼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될 겁니다.
터크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툭 내뱉듯이 말한 후, 계속 말을 이었다.
“그 광대 아가씨와 셰인 놈 때문에 미로의 위험성이 높아져서, 다른 방법으로 식량보급을 하기로 했어요. 미로는 일단 폐쇄했고, 이번 주 안에 없어질 겁니다.”
“음…… 그럼 저희는 어떻게 여기서 나가야 되는 거죠……?”
여기 왔을 때처럼 그 미로를 통해 나가게 될 줄 알았는데.
뭐, 우리가 들어왔던 문을 ‘정문’이라고 했으니, 어딘가에 ‘후문’이 있겠지.
문제는 그 후문이 어디로 이어질 것인가이다.
이곳을 나가면, 교단의 알스 사제를 만나러 바닷가 마을로 가야 한다.
그러니 가능한 동쪽 길로 나가야 시간을 아낄 수 있을 텐데.
“걱정 마세요. 저희가 보내 드릴 예정입니다.”
내 의문에 답하는 클라이드의 목소리가 들리며, 크기가 좀 되는 오목한 그릇이 눈앞에 툭 놓였다.
막 완성한 것인지, 그릇을 덮은 하얀 천을 뚫고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아, 이 냄새.
아까 눈을 떴을 때부터 계속 풍기던 그 향기이다.
그 오목한 그릇 외에도, 로나와 블루벨이 각각 솥과 여러 접시들을 테이블에 놓고 있었다.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아뇨…….”
“저런, 도와드리죠.”
서슴없이 손을 뻗어 나를 일으켜 앉히는 클라이드를 보며, 터크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혀를 찼다.
“저, 저, 거침없이 손대는 모습 봐라. 저러면서 여자 안 후렸다고? 하하, 지랄하고 있네, 하하.”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애초에 에스트레야 씨는……!”
“엉? 뭐, 여기 메린 씨의 연인이라고? 그건 그거이고, 임마, 남녀,”
“………아뇨.”
내가 불쑥 끼어들 줄은 몰랐는지, 말이 끊긴 터크의 눈이 살짝 동그래졌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그리운 향기를 풍기는 그릇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저 원래 남자에요.”
“…………예?”
하하하, 저 산전수전 다 겪은 아저씨도 저렇게 얼빠진 소리를 낼 수 있구나.
하하하, 그만큼 내 상황이 아주아주 엿 같다는 거지. 염병.
힐끔, 터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늘 여러 일을 겪으면서 단 한 번도 당황하지 않았던 그가,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관장이 뭔 짓을 했는지 알려주기로 약속했으니 지켜야지.
저절로 푹푹 한숨이 새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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