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3화 〉 274화 : “또 뵙겠습니다.” (2)
* * *
관장실에서 복도로, 그리고 복도에서 커다란 홀로 나오자마자,
“아, 나오셨군요. 음…… 에스트레야 씨…… 맞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클라이드가 곧바로 말을 걸어왔다.
이제 보니 나랑 키가 엇비슷했구나.
거의 비슷한 높이에서 마주보게 된 그는,나를 살짝 동그래진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정말로 남자이셨네요. 다시 원래 몸을 찾으신 것, 축하드립니다.”
“클라이드 씨 덕분이죠. 여러모로 감사했습니다.”
“감사는 제가 해야죠. 여러분 덕분에 저와 터크 씨, 그리고 다른 사서들 모두 무사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럼 가실까요?”
클라이드는 우리 다섯을 가까이 모이게 한 후, 살짝 발을 굴렀다.
몸이 살짝 뜨는 듯한 느낌과 함께, 맨 처음에 들어왔던 그 로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오, 왔군.”
그리고 바깥으로 나가는 문 앞에, 터크가 말들을 데리고 서 있었다.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던 그 역시, 나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스트레야……씨죠? 허, 진짜 남자셨구만. 근데 얼굴은 왜 가리고 계십니까?”
“신비주의라서요.”
“저런, 현상금이 걸려있었군요. 어쩐지 한둘 잡은 거 같지 않더라니…….”
“그런 거 아닌데요! 그냥 사정이 있을 뿐이거든요! 사람을 대체 뭘로 보고……!”
어째서 아저씨들은 이렇게 하나같이 놀리기를 좋아하는 걸까?
속으로 투덜거리는 나를 향해 크게 웃으며, 터크는 우리에게 말고삐를 넘겨주었다.
몇 시간만에 다시 만난 내 말, 조지는 나를 굉장히 간만에 본다는 듯이 얼굴을 마구 들이밀었다.
“어휴, 그만해, 임마. 어제 잠깐 봤었거든? 짜식이, 주인도 몰라보고 말야.”
“푸흥?”
녀석은 뭔 소리냐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까닥였다.
음, 다시 생각해보니 날 못 알아봐서 다행인 거 같다.
냄새라도 맡아서 날 알아봤다면, ‘너 왜 그런 꼴을 하고 있냐?’ 라는 눈으로 날 봤을 거 아냐.
이상한 놈 취급하면서 말을 안 듣게 됐을지도 몰라.
쓴웃음과 함께 녀석의 얼굴을 쓸어주면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문 밖으로 나섰다.
푸르르고 너른 평원 위로, 벌써부터 뜨거운 기운을 품은 햇살이 내리쬐고 있다.
여전히 새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이슬을 머금은 흙과 풀의 향기가 살짝 코를 간지럽혔다.
하늘에 떠 있는 건, 하얀 조각구름과 밝고 환한 여름의 태양.
……어딘가로 떠나기 딱 좋은, 무척이나 화창한 날씨였다.
“흠, 그러니까 가신다던 곳이……”
“아, 걸리프요. 바닷가 마을입니다.”
“어디 보자……,걸리프……”
타인만 이동시키는 마법은 난이도가 꽤 높은지, 터크가 나서서 우리를 마법으로 장서관의 영역 바깥으로 보내주기로 했다.
그가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어 살피는 동안,
“아, 맞다. 깜빡할 뻔했네.”
클라이드가 불쑥 중얼거리더니 나에게 곱게 접은 종이를 하나 건넸다.
이걸 왜……?
눈으로 묻자, 클라이드는 그저 빙긋 웃으며 읽어보라는 듯이 손짓할 뿐이었다.
뭐지?
고개를 갸웃하며 종이를 펼쳐보았다.
……밀가루, 오일, 쇠고기, 양파 둘, 당근 셋, 스타우트 맥주, 설탕, 소금.
응? 이거 식재료잖아.
그리고 그 밑에는, 쇠고기를 구우라는 등의 조리법이 쭉 적혀 있었다.
반죽을 덮어서 구우라는 걸로 끝나는 거 보면, 이거 아무리 봐도 파이 조리법인데.
…………설마.
놀란 눈을 들자, 클라이드가 밝은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파이를 굉장히 맘에 들어하시는 것 같길래, 올렌…… 주방장한테 조리법을 받았습니다.”
“……”
“부끄럽게도 저희가 드릴 수 있는 건 지식뿐이라서요. 별볼일 없지만, 장서관을 방문해주신 기념 겸 저희를 도와주신 답례로 받아주세요.”
“………별볼일 없다니, 그럴 리가요.”
다시 곱게 접어 품속에 깊이 넣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삼키면서 말을 꺼냈다.
“더할 나위 없는 보물입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하하, 그리 생각해주시니 다행이네요.”
그의 환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종이를 넣은 품 위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정말로, 생각지도 않은 귀한 선물을 받았다.
“……좋아, 대강 결정했습니다. 걸리프 주변에 숲이 하나 있는데, 그쪽으로 보내드릴게요. 이 부분입니다.”
터크가 지도를 짚으며 위치를 가르쳐주었다.
음, 대충 반나절 정도 걸릴 거 같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모여 서세요. ……크흠, 어제는 여러분께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특히 사제님이 안 계셨다면, 전 아마 병상에 누워 있거나 먼저 천상으로 올라갔겠죠.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다시 한번 감사하단 말씀드립니다. 여러분과 보낸 시간은 무척 즐거웠어요.”
두 사람의 인사에, 세 아가씨가 저마다 작별 인사를 건넸다.
“히히, 덕분에 좋은 구경했어요! 오락시설도 재미있었고요!”
“맥주도 맛있었고.”
“과자도 맛있었고. 이 녀석도 재미있었고.”
“얌마, 메린, 나 가리키지 마라.”
작게 키득거리는 메린 녀석을 흘긋 노려본 다음, 나는 먼저 터크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 다음 클라이드의 손을 맞잡았다.
……터크도 그렇지만, 클라이드에겐 정말 고마운 마음뿐이다.
관장이 시켜서 우릴 안내하게 된 건데,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친절하게 대해줬지.
게다가 관장의 흉계 때문에 곤란에 처한 나를 도와주었고 말야.
관장의 심기를 거스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는데.
무엇보다도, 나에겐 무척이나 귀한 선물을 주었다.
완전히 잃어버린 줄 알았던, 엄마의 손맛이 느껴지는 맥주파이의 조리법.
물론 이게 엄마가 쓰던 조리법 그대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이대로 만든다고 그 맛이 똑같이 난다는 보장도 없고.
……그래도 괜찮아. 똑같은 게 아니라 한없이 비슷한 거라 할지라도 상관없어.
부족한 부분은, 그때의 그 풍경을 떠올리면서 메꾸면 되니까.
나는 꼭꼭 숨겨져 있던 엄마의 유품을 찾은 기분이었다.
그러니 말해야지.
큰 도움과 큰 선물을 준 사람에게, 끝까지 이름을 숨기는 건 도리가 아니니까 말야.
“……클라이드 씨,”
살랑이는 여름바람 속에서, 나는 그의 손을 잡은 채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다시 인사할게요. ……저는 카엘입니다. 카엘 에스트렐.”
“……네? 어어…….”
“하하, 다른 사람에겐 말하지 마세요.”
웃으며 그의 손을 놓았다.
갑자기 본명을 들은 것에 놀랐는지, 클라이드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터크가한 걸음 물러나게 한 후, 우리를 향해 무어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 떠나는구나.
아마 두 번 다시 여기 오진 못하겠지.
신비와 지식으로 가득한 ‘끝없는 장서관’은, 내 발로 직접 찾아오기에는 너무나도 먼 곳에 있으니까.
끔찍한 시간 속에서도 눈길을 빼앗겼던 여러 광경을 되새기는데,
“……카엘 씨,”
문득, 클라이드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또 인사라도 하려는 건가?
시선을 옮겨 그를 마주보자,
“또 뵙겠습니다.”
굉장히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손을 흔들었다.
내가 모르는 어떤 뜻이 담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의문을 채 풀기도 전에, 주문을 다 외운 터크가 힘있게 외쳤다.
“텔레포트!”
눈앞의 공간이 일렁이며 흩어지려는 순간,
“……?”
허름한 오두막의 문간에 서 있는 어떤 남자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한없이 낯선데, 어째서인지 살짝 익숙한 그 얼굴은 금세 사라져버리고,
“아.”
물기 어린 풀내음이 물씬 풍기는 숲이 시야 한가득 들어왔다.
자연히 우리 일행은 멍하니 서로를 둘러보게 되었다.
“진짜로 산을 내려온 건가?”
“일단 이 숲을 나가봐야 알 거 같아요! 터크 씨가 가리킨 지점에 온 거라면…… 저쪽이에요!”
로나는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킨 다음, 먼저 척척 걷기 시작했다.
……참 볼 때마다 신기해.
“어떻게 방향을 바로 아는 거지?”
“시간이랑 그림자 보면 대충 알 수 있어요. 형이 이상할 정도로 못 찾는 거지.”
“시끄러, 임마…………허?”
어라, 어라라?
목소리는 비슷하긴 한데, 말투가 파랑새가 내는 게 아니었지?
놀란 눈으로 위슨을 보자, 그가 무던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왜요?”
“?!?!”
입술을 움직이면서 목소리를 내었다!
“어, 너, 모, 목……!”
“아, 이거? 아뇨아뇨, 임시에요, 임시. 보다시피…….”
위슨이 늘 그랬던 것처럼 손을 퉁기자, 작은 연기가 펑 터지면서 파랑새가 튀어나왔다.
“내 힘을 활용했을 뿐이야. 아직은 나 없이 소리 못 낸다. 실망했냐?”
“어.”
“존나 솔직하구나, 미친놈아.”
“내 얼마 없는 자랑이야. 미친놈은 아니고.”
대꾸하는 나에게 질색했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떠는 파랑새였다.
아무튼 앞으로는 간간이 직접 목으로 말하게 됐다며, 위슨은 뺨을 긁적이면서 그렇게 전했다.
“그 미친 문어대가리가 그러더라. 이런 식으로 몸에 인지를 박아버려야 한다고. 아직은 잠깐밖에 못하는데, 조금씩 늘 거다.”
“……아, 관장이 네가 스스로 말소리를 내는 걸 몸에 각인시키라고 했구나. 이해했어.”
나도 저 파멸적인 전달방식에 꽤 익숙해졌군.
알아서 말이 걸러지네.
아마 ‘목으로 말하는 게 당연하다’는 사실을 깊이깊이 새기는 걸로, 어떤 마법이 이루어지는 거겠지.
클라이드가 어제 이야기해준 인지력이라는 것과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즉, 위슨 녀석도 큰 수확이 있었던 거다.그럼 됐지, 뭐.
그 사실만으로도, 어제 그 개고생을 한 보람은 충분히 있다.
뿌듯한 마음으로 로나의 뒤를 따라 숲을 걷는데, 별안간 메린이 말을 끌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야, 카엘.”
“엉?”
“아까 오두막에 누구 있지 않았냐?”
“응…… 어떤 남자가 서 있는 거 같았지?”
나만 본 게 아니었군.
진짜로 그 오두막 문간에 어떤 남자가 서 있었던 거야.
……근데 누구이길래 우리를 지켜본 거지?
그보다 얘가 웬일이래?
생판 모르는 사람 얘기를 먼저 꺼내고.
“근데 왜?”
내 물음에, 메린은 고개를 왼쪽, 오른쪽으로 살짝살짝 기웃거리며 대답했다.
“왠지 눈에 익어서.”
“엥? 본 적 있는 사람이야?”
“아니, 처음 보는데……. 생판 모르는 남자 얼굴에 너랑 아저씨 얼굴을 한 줌씩 섞은 느낌이었어.”
“……그거 그냥 낯선 사람이잖아.”
그 남자를 본 건 굉장히 짧은 순간이었다.
나랑 아버지 모두 엄청나게 특이하게 생긴 것도 아니니, 그냥 잠시 착각한 거겠지.
“그런가?”
“그럴 거야. 됐으니까 길이나 가자. 로나 놓치겠다.”
약간 미간을 좁힌 그녀의 손을 잡고 살짝 당기자, 그녀가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클라이드의 그 말은 대체 뭐였을까?
또 뵙겠습니다.
손님에게 으레 전하는 인사라 하기엔, 어딘지 확신이 담겨 있는 것 같았는데.
뭐……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한 거겠지.
인사라는 게 그런 거니까.
기지개를 켜며, 긴긴 날숨과 함께 그 작은 의문을 바깥으로 흘려버렸다.
……이 앞에는 잠깐 뒤로 밀어놓았던 사명이 있으니까 말야.
상황도 상황이니, 이전보다는 좀더 진지하게 임해야겠지.
약간 무거워지려는 어깨에 짧은 한숨을 쉬었다.
“아, 근데 카엘 저 놈, 어제 하루 동안 여자였지? 어땠냐?”
“아~ 그거…….”
“아하하, 그게 있잖아요~”
“와아아악!! 말하지 마!!”
내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로나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장대하게 떠벌리기 시작했다.
왁자지껄, 시끌벅적.
메린조차 킥킥 웃으며 그 수다에 끼어들고 있었다.
……이 놈들을 데리고 뭔 진지야, 진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속으로 투덜거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