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화 〉 275화 : 남쪽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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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을 잘 찾는 로나 덕분에, 길을 헤매는 일 없이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곰을 한 마리 마주치고, 그 다음 곰의 피냄새를 맡고 온 버그베어의 목을 날려버리고, 놈의 고함을 듣고 몰려온 더 많은 버그베어와 싸우지만 않았다면 진작에 숲을 나갔을 텐데.
“아니, 이름 말고는 별 연관도 없는데 왜 튀어나오고 지랄이야?”
투덜거리면서 마지막 버그베어의 목을 벤 후, 나는 고개를 들고 주위를 슥 돌아보았다.
말 세 마리는 위슨의 엘크 덕분에 무사하고, 다른 네 사람도 다친 데 하나 없이 멀쩡하다.
물론 나도 이번에는 찰과상 하나 입지 않고 끝났다.
버그베어들이 모두 한곳만 노리고 몰려들어서, 옆이나 뒤에서 기습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돌아보면 참 희한한 광경이었다.
버그베어들이곰 사체를 지키는 메린에게 죄다 달려들다니.
그것도 단단히 흥분까지 하고서.
꼭 가까운 사람을 해친 원수 놈을 본 기세였다.
설마 진짜로 곰이랑 뭔 관계가 있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그 당사자였던 메린은, 지금 한창 곰 가죽을 벗기는 중이다.
지난번에 얻은 곰 가죽도 그렇고, 마을에 팔려는 건가?
“이야, 메린 님 대단했죠~”
지친 기색이 조금도 없는 목소리로 로나가 말을 걸었다.
“대여섯 마리가 한꺼번에 덤비는데도 제자리에서 끄떡도 하지 않고 죄다 날려버리셨잖아요. 그것도 맨몸으로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로나의 말대로, 메린은 버그베어들을 상대로 검을 쓰지 않았다.
그저 거리만 계속 떨어뜨릴 뿐, 관절을 꺾거나 배를 뚫어버리지도 않았다.
물론 개중에는 그녀의 돌려차기에 턱을 맞고 날아가, 그대로 목이 꺾여 절명한 놈도 있지만……
대부분은 땅바닥을 구르다가 나나 다른 세 녀석의 손에 숨통이 끊어졌다.
“혹시 그거였을까요? ‘네놈들을 상대하기엔 이 검이 아깝다!’ 같은 거요.”
“맨 처음에 튀어나온 버그베어는 목 베어버렸잖아. 애초에 저 녀석이 그렇게 멋 부릴 성격이냐?”
“그렇긴 해요~ 그럼 왜 그러셨을까요?”
어째서 메린이 곰 사체 주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그것도 맨몸으로 놈들을 상대했는가?
그 이유는 무척이나 간단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곰 상할까봐 그랬을걸? 칼 썼다가는 놈들의 피가 가죽에 묻거나 고기에 들어가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거 막으려고 그랬겠지.”
“아하하, 진짜 그런 이유라면 넋이 나갈 거 같아요. 근데 메린 님이니까 납득이 가요! 실제로 저렇게 열심히 작업 중이시고요.”
그 말에, 나는 다시 메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전투할 때보다도 더 집중하면서 열심히 칼을 놀리고 있었다.
뼈에서 발라낸 고기와, 뱃속에 들어있었을 내장에 둘러싸인 채로.
……토끼도 아니고, 다 자란 곰을 아가씨가 도축하고 있으니 위화감 장난 아니군.
보통 저런 건 수염 덥수룩하고 몸집이 우락부락한 아저씨가 하는 일이니까 말야.
그때, 버그베어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위슨이 기지개를 켜면서, 메린에게 다가가는 게 보였다.
“가져갈게요.”
“응~”
대화라 하기 민망할 정도로 짧은 말을 주고받은 후, 위슨은 메린의 주위에 널려 있는 고기와 내장들을 주섬주섬 가져가기 시작했다.
아마 조금 떨어진 곳에서 피를 뺀 다음, 자신의 배낭에 넣으려는 거겠지.
그간 둘이서 같이 신나게 도축한 만큼, 손발이 척척 맞는 것 같았다.
……근데 고기까지 굳이 챙길 필요가 있나?
오늘은 마을에서 묵을 거고, 그게 아니더라도 요전에 챙긴 그 바르그라는 몬스터 고기가 아직 한참 남았을 텐데.
“확실히 효과 있는 거 같죠?”
“엉?”
“메린 님이요. 아까 보니, 전에 비해 표정이 좀더 잘 보이시는 거 같던데요.”
나를 뺀 네 명은 조금 전, 어제 내가 여자가 됐던 일에 대해 수다를 떨었었다.
아마 그때 메린의 표정을 봤던 거겠지.
나 역시 살짝 엿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여전히 다른 사람에 비해선 엷디 엷은 표정이지만, 예전에 비하면 많이 진해져 있었다.
그 옆얼굴을 머릿속에 다시 그리면서 씁쓸히 웃었다.
“그만큼 어제 내 상태가 웃겼던 거겠지.”
“히히, 웃기긴 했죠! 그래도 조금 달라요. 분위기가 조금 채워졌다고 해야 할까요? 그냥 그림 같던 꽃에 살짝 향기가 감돌기 시작한 느낌이에요.”
“너무 시적인데.”
“인간미가 느껴진다고요. 아주 약하지만요.”
……아, 그런 뜻이구나.
나는 여전히 쓴웃음을 띄운 채 말했다.
“그냥 너희랑 친해져서 그런 걸 수도 있어.”
“그 ‘친해진다’는 것 자체가 큰 진전이죠? 그리고 아까 보셨죠? 메린 님이 어떤지.”
“봤지.”
아주아주 또렷이 봤다.
드물게 메린이 주도적으로 이야기에 끼어들고, 같이 킥킥 웃기까지 하는 것을.
그 때문에, 나는 녀석들이 날 재료로 삼아서 실컷 떠드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다른 동료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내 수치심이 대수인가?
물론 실시간으로 정신이 깎이는 기분이었지만, 그걸 감수할 가치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카엘 님과 교감하면서 주고받은 감정이,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는 거 같아요. 저거 보세요.”
“응?”
로나가 슬쩍 고갯짓한 쪽을 돌아보자, 가죽 벗기기를 마친 메린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위슨이 거북이를 내밀었고, 이내 그녀는 거북이가 내뿜는 물에 손과 얼굴을 씻었다.
그런 뒤, 미소를 지으며 거북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는 게 아닌가!
이삼 일 전까지만 해도 그냥 덤덤하게 물기를 털기만 했는데!
로나는 흡족한 듯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무엇이든, 받은 만큼 남에게 베푸는 법이죠.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 되고 있는 거 같네요.”
“……그래? 진짜 그랬으면 좋겠는데.”
뭐, 직업상 사람을 관찰하는 능력이 뛰어난 로나가 하는 말이니 틀림없겠지.
로나는 다시 나를 향해 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하시면 될 거 같아요. 이야~ 세상 어떤 것이든 장단점을 모두 가진다더니, 대재앙도 예외는 아니네요. 덕분에 임신 걱정 안 하셔도 되잖아요!”
“으.”
‘농담으로라도 그딴 소리하지 마라’고 꾸짖을 수 없었다.
나 자신부터 내심 생각하고 있던 거니까.
……용사나 사제나, 사이좋게 자격미달이구만.
자조하는 내 팔을 툭툭 두드리면서, 로나는 한결 더 환하게 웃었다.
“카엘 님은 참 솔직하시다니까요. 메린 님도 그렇고요. 덕분에 저도 의욕이 마구마구 샘솟아요. 그래서 그런데,”
거기까지 말한 후, 로나가 약간 숨을 들이켜는 게 보였다.
웬 심호흡……?
뭐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나?
잠시 후, 그녀의 입이 열리더니,
“블루벨 씨에겐 언제 요리 가르치실 거에요?”
“?!”
꽤 큰 목소리로 얼토당토않은 소리가 터져나왔다!!
앗, 메린이 바로 반응하고 있어.
곰고기를 들고 엘크에게 가던 걸음이 갑자기 멈췄다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지만, 몰라, 무서워!
말고삐들을 붙잡고 있던 블루벨 역시, 말들의 몸을 방패 삼아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아앗, 메린에게서 뿜겨 나오는 기운이 점점 강해진다!
가만히 있지 말고 말을 해, 카엘!!
꽉 막히려 드는 말문을 억지로 뚫어버리며 말을 꺼냈다.
“뜨, 뜬금없이 뭔 소리야, 나중에 다시 얘기하기로 했던 거잖아!”
“그러니까 그 나중이 언제에요~ 언제까지 블루벨 씨를, 정찰도 안 하고 밥도 못하고 술만 먹는 엘프로 두실 건데요~ 인재가 썩고 있다고요, 카엘 님~”
“이, 이건 나 혼자 결정 못해! 목숨 걸어야 되잖아, 엄청난 중대사항이라고! 마을 도착하면 다같이 얘기하자! 응?!”
마지막은 사실 메린을 향한 것이었다.
아, 제발, 이걸로 넘어가야 할 텐데……!
조심스럽게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리니, 그녀가 다시 엘크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살았다……!
저절로 큰 한숨이 터져나왔다.
어이씨……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뛰는 가슴을 쓸며, 나는 방실방실 웃고 있는 로나를 흘겨보았다.
“……너 일부러 한 거지?”
“당연하죠.”
“의욕이 샘솟는다더니, 나 괴롭히는 의욕이었냐?”
“설마요. 이건 엄연히 메린 님을 위한 일이라고요.”
그렇게 단언하면서, 로나는 위슨과 둘이서 곰 가죽을 옮기고 있는 메린을 바라보았다.
“기쁘고 즐거운 것만 감정이 아니잖아요? 슬퍼하고 화내는 것도 훌륭한 감정이에요. 그리고 감정은 갈등이 있을수록 더 커지는 법이고요. 메린 님이 격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카엘 님을 빼면 블루벨 씨밖에 없으니 써먹어야죠.”
“그렇다고 일부러 질투하게 만드냐? 그러다 일 터지면 어쩌려고?”
내 말에, 로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봤자 카엘 님을 쥐어짜고 끝일 텐데요, 뭐.”
“……잘못하면 그보다 더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잖아.”
“아하하, 걱정 마세요! 카엘 님을 쥐어짜는 것 이상의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테니까요.”
메린이 벌써 여러 번 본 적이 있는 그 눈을 나에게 들이밀며 마구 쪼아대는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히익.”
싫어! 수명이 팍팍 줄어들 거야!
아니면 그 자리에서 심장이 완전히 쪼그라들거나!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끼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냥 안 하면 안 되냐? 왜 하필 질투야?”
질투가 무엇인가?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람조차 한순간에 돌아버리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감정이잖아.
그런 감정으로 메린을 자꾸 자극하는 게, 정말로 옳은 선택인 걸까?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한 느낌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로나는 그런 나를 향해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야 질투는 애정에서 나오는 거니까요. 즉, 애정의 반동이죠! 카엘 님을 세게 짜면 짤수록, 그만큼 애정이 깊은 거에요! 카엘 님도 솔직히, 메린 님이 질투하는 거 싫지만은 않잖아요?”
“……뭐, 그렇기는 하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독점하고 싶어한다.
그 마음 자체를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만큼 나를 좋아한다는 거니까.
하지만……
“저 녀석 무섭단 말야…….”
“혹시 알아요? 쪼는 대신 마구마구 들러붙을지도 모르죠! 이야~ 기대되네요!”
“돌겠네, 진짜.”
자기 일 아니라고 눈을 반짝이며 파란이 일어나길 기대하는 이 모습, 사제로선 완전히 글러먹은 게 아닐까?
……그러나 꼭 메린 때문이 아니더라도, 블루벨이 던진 제안을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아직 한참이나 같이 다녀야 하는 사이이니, 가급적 앙금은 남기지 않고 푸는 게 좋지.
블루벨의 정찰 능력을 썩힐 수도 없고 말야.
나는 약간 뒤숭숭한 분위기가 남아있는 메린의 뒷모습을 보며, 깊이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 후, 무사히 숲을 빠져나오고서 ‘고래의 무덤’ 중 하나인 바닷가 마을, ‘걸리프’로 향하기 시작했다.
장서관에서 우리를 보내준 숲에서 반나절……
그러니까 세 시간이면 도착할 거리이니, 점심 조금 넘어서 도착할 줄 알았는데.
“……뭔 사람이 이렇게 많아?”
길로 나오자마자 엄청난 인파를 마주하게 되었다.
저마다 짐을 잔뜩 짊어진 채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아무리 봐도 행상인 무리는 아니다.
아이 두세 명을 데리고 있는 남녀도 있고, 짐을 꼭 껴안고 있는 노인과 아이를 실은 수레마차도 있으니까.
고개를 갸웃하는 내 눈에, 그들의 표정이 보였다.
……하나같이 어두컴컴하게 그늘이 져 있다.
뭔가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해.
나는 그 행렬 가까이에 다가간 후, 말에서 내렸다.
그런 뒤, 사람들을 따라 걸으면서 말을 걸었다.
“저기, 말씀 좀 묻겠습니다.”
“응……?”
아싸, 성공이다.
젖먹이 아기를 데리고 있는 젊은 부부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살짝 돌아보았다.
“안녕, 꼬마야.”
가만히 그들에게 다가가, 여자가 안고 있는 아기에게 살짝 손을 흔들었다.
하품을 하면서 어머니에게 엉기는 모습에 피식 웃으며, 나는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에게 말했다.
“사람이 되게 많네요. 어디서 오는 길이세요?”
“아…… 저희는 중부에서 왔어요. 친척이 요 앞에 있는 마을에 살고 있어서, 그리로 가는 중이고요.”
단순한 방문이 아닐 거란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러기엔 부부가 짊어지고 있는 짐이 너무 많아.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혹시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저랑 제 동료들은 반대쪽으로 가야 하는데, 사람이 이리 몰려오니 조금 걱정되어서요.”
“어이구, 위쪽으로 가실 생각은 버리세요. 지금 몬스터들 때문에 난리도 아니에요. 벌써 여러 마을 없어졌어요. 저희가 있던 마을도 곧 위험해진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이렇게 미리 가족들 데리고 나온 겁니다.”
마을들이, 몬스터들의 습격에 무너지고 있다고……?!
놀란 내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뒤를 돌아보자, 약간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인상 쓴 얼굴로 말을 꺼냈다.
“어디로 가쇼?”
“어어…… 몰트요.”
돈독 오른 도시, 말리스로 가던 길에 들렀던 마을 이름을 대니, 남자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저었다.
“글렀어. 거기에 가족이 없길 바라죠.”
“………아, 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가까스로 입을 떼어 인사한 후, 다시 일행들에게 돌아왔다.
의아해하는 세 사람과 달리, 블루벨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다.
아마 내가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를 들은 것이리라.
“난리 났네.”
딱 한 마디로 이 상황을 정리한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다른 세 사람에게 말했다.
“……피난민들이야. 몬스터들이 마을을 덮치고 있대. 아마 성벽 있는 곳 외에는 다 비었거나 부숴졌다고 봐야겠지.”
“아니, 다는 아니야.”
메린은 무척이나 평탄한 말투로 말했다.
“우리 마을은 아직 안 무너졌을걸? 사범님이 계시니까.”
“……메린.”
나 스스로도 아직 깨닫지 못한 불안을 짚은 후,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사범님이 쉽게 죽으실 분도 아니고, 자경단도 그럭저럭 쓸 만해. 그리고 새 사제님은 로나처럼 능력을 쓸 수 있을 거 아냐. 평소보다 조금 더 빡세겠지만, 그럭저럭 버티고 있겠지.”
“……그렇겠지?”
“그래. 그러니 걱정 접고 길이나 가자. 그거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잖아.”
덤덤히 사실을 전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다시 말에 올라, 길에서 약간 떨어져서 달리기 시작했다.
북쪽을 등진 채, 남쪽으로 향하는 긴긴 행렬을 앞서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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