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0화 〉 280화 : 하늘이 내린 징조, 바다가 보낸 경고 (2)
* * *
항구마을 걸리프는 멸망한다.
그 무시무시한 예언에 대한 징조는 의외로 상당히 간소했다.
“테이블에 앉는 순간, 접시 위에 쌓여 있던 팬케이크가 무너졌답니다.”
“진짜 사소하네요.”
그래도 팬케이크 탑이 무너진 게 징조인 건 납득이 가.
그 종잇장 같은 걸 층층이 쌓은 게 무너졌다는 거 아냐?
테이블을 일부러 잡고 흔들지 않는 이상 일어나기 힘든 일이지.
피쉬케이크라면 몰라도.
고개를 끄덕이는데, 알스 사제가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왜요?”
“그……, 믿으시는 겁니까?”
조심스럽게 묻는 모습에 머릿속이 퉁 울리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이 설마……!
“농담하셨던 거에요?!”
“아뇨아뇨아뇨, 진담이에요, 진담! 그, 한 번에 믿어주시는 분이 드물어서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은근히 다들 믿음이 약하구나.
사제님들도 고생이 많구만.
“카엘 님은 정말 다정하시거든요~ 어찌나 정이 많으신 지, 돈 없어서 도시에 못 들어가던 사람에게 선뜻 돈을 주시기도 하셨어요~ 여기 오시는 길에도 항아리 사실 뻔했대요!”
“아………”
로나의 말을 들은 알스 사제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째서인지 한층 더 진중한 눈으로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카엘 님, 입장상 이런 말씀드리는 건 좀 그렇지만, 세간엔 다른 사람의 선의를 이용해 사익을 도모하는 교활한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부디 조심하십시오. 특히 종이에 서명할 때는 더더욱.”
“감사한 말씀이지만 조금 울컥 솟는군요.”
아니 믿을 만해서 믿은 거구만, 누굴 호구 취급하는 거야?
하, 진짜 어이가 없네.
그나마 차가 맛있으니 넘어가준다.
속으로 투덜투덜대며 찻잔을 기울였다.
호로록 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낮은 웃음소리.
그 소리를 따라 맞은편을 힐끗 바라보자, 알스 사제가 한결 누그러진 얼굴로 찻잔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미소를 담고 있던 그의 얼굴은, 찻잔이 입에 닿고 떨어지는 순간, 다시 진중한 빛을 띠었다.
“아무튼 그 징조가 발견된 다음날, 인어 한 무리가 이곳 앞바다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선전포고를 한 거군요. 대체 뭣 때문에……?”
“탈타니스의 멸망을 방조한 것에 대한 복수. 그렇게 말하더군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면서요?”
“없었어요. 지고하고 지존하신 분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아무 연락도 못 받았고, 아무 징조도 없었습니다.”
왜 징조까지 없었던 건지는 차치하고, 어쨌든 인어들이 인간에게 복수심을 품는 건 부당하다.
무슨 옆 동네 사는 이웃도 아니고, 바닷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바로 알아?
봉화 같은 거라도 피우던가.
………잠깐, 근데 왜 인간에게 책임을 돌리는 거지?
아니, 왜 인간에게‘만’ 성질을 내는 거야?
인간만 가만히 있던 게 아니잖아.
맹약을 나눈 종족 모두가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을 텐데?
“왜 하필 인간인 거죠? 엘프와 드워프, 마법사들은 내버려두고 왜 인간에게만……?”
“……”
내 질문에, 그는 대답 대신 어깨를 늘어뜨리며 긴 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분명 입에 올리기도 민망할 만큼 하찮고 같잖은 이유일 거야.
틀림없어.
어디 보자……
가장 하찮은 이유………….
“설마 인간 말고는 다들 내륙에 살아서 그런 건 아니죠?”
“2할쯤은 그럴 겁니다.”
그렇기는 하구나. 돌겠네, 진짜.
아니, 같잖은 이유가 2할밖에 안 된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나머지 8할은 굉장히 무겁고 중요한 이유라는 거니까.
“그럼 나머지는 뭐죠?”
“자세한 건 모르지만, 여왕이 위중한 게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왕녀가 나서서 선전포고를 했거든요. 여왕의 이름을 빌리던 걸 보면, 여왕은 아직 살아있을 겁니다. 그리고……”
알스 사제는 한층 더 목소리를 낮추어서 거의 속삭이듯이 말을 이었다.
“……인어들은 우리만 치려는 게 아니에요. 맹약을 나눈 네 종족 모두에게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아마 이 마을을 바닷속에 가라앉힌 후, 그걸 발판 삼아 내륙으로 진격할 생각이겠죠.”
뭍으로 나올 수 있는데도 굳이 그런 수고를 들이는 건가?
뭐, 바닷물이 닿아야 본연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든가 하는 이야기이겠지.
땅을 바닷속에 가라앉혀서 진격한다.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결국 땅을 깎고 깎아서 침입한다는 소리 아니야?
어느 세월에 그걸 해? 어느 멍청이가 그러는 걸 그냥 보고만 있겠어?
“저는 잘 모르겠네요……. 그 작전이 정말 위협이 되는 건가요?”
“되죠. 그것도 상당히 큰 위협입니다, 카엘 님. 물이 섞일 거에요.”
“물……?”
물이 섞인다……?
그냥 허투루 하는 소리는 아닐 거 같은데.
나는 가만히 테이블을 두드리면서 생각해보았다.
파도가 마을을 덮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되면…… 사람과 집이 쓸려가겠지.
여기저기 바닷물이 마구마구 휘몰아칠 거고.
그럴 때에 물이 섞인다고 한다면……
우물에 바닷물이 들어가는 것 말고는 없을 거 같은데.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여기 사람들은 우물을 새로 파야 할 거다.
자리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왜냐하면, 바닷물로는 갈증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이 아닌 모험일지에 있던 이야기이니 아마 사실일 거야.
그 이야기는 이렇다.
한 모험가가 동료들과 함께 보물섬으로 가려고 배를 띄웠는데, 가는 도중에 식수가 다 떨어지고 말았다.
그의 동료 중 하나가 갈증을 참지 못하고 바닷물을 마셨는데, 목마름이 해결되긴커녕 오히려 탈수가 되어서 죽어버렸다.
그 비참한 말로에 나머지 사람들도 절망할 무렵,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덕분에 모두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가 먼저 천상으로 올라가, 우릴 위해 비를 뿌려달라고 탄원했던 것이리라.’
그렇게 적혀 있었던 게 기억이 난다.
아무튼 인간은 바닷물로 목을 축일 수 없다.
그러니 파도에 쓸려간 그 마을은, 다른 수원지를 찾지 않는 한 완전히 망했다고…………
…………수원지? 잠깐.
아, 잠깐 기다려봐.
우물물은 어떻게 얻지?
땅 속에 흐르는 물줄기가 위로 솟아오르도록 구멍을 내서 얻잖아.
그 물줄기들의 일부는 호수가 되고, 호수는 작은 냇물이 되고……!
바닷물이 우물로 들어가면, 자연히 땅 속의 물줄기에 바닷물이 섞이게 된다.
만약, 정말 만약이지만, 인어들이 물고기를 조종하듯이 바닷물을 맘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다면?
물이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게 만들 수 있다면……?!
“……아냐, 설령 안 되더라도 상관없어. 가득 찰 때까지 퍼붓고 담그면 그만이야. 그렇죠?”
“혹은, 물이 솟아오르는 지점을 공략하면 되겠죠.”
“세상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경악에 찬 나와 달리, 로나는 여전히 방실 웃는 얼굴로 차를 홀짝이고 있다.
이 녀석이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진 않을 거 같아.
아마 그냥 ‘그 전에 막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그런데도 굳이 인간에게 모습을 드러낸 건……”
“오로지 선전포고를 위한 게 아닐까요? 야심을 가진 정복자가 아닌, 정당한 복수자라 알리고 싶은 걸 겁니다.”
“율리아 님은…… 아, 맞다. 구금 중이셨죠. 하, 인어들의 공격을 막을 순 없나요?”
질문을 던지긴 했지만, 무언가 방도가 있을 것 같진 않다.
끊임없이 몰아치는 노도를, 한낱 인간이 어떻게 끝까지 막을 수 있겠는가?
“막을 수 있지요.”
“……?”
달그락, 찻잔이 내려놓아지는 소리에 이어, 로나의 밝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율리아 님이 보내신 특별사제들이 다 모여 있었다면 말이지만요! 굉장히 안타깝게도, 나흘 전에 여길 다 떠났다죠? 회군명령이 내려진 것도 아닐 텐데 다들 멋대로 떠나다니, 정말 별일이라니까요! 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
별안간 고개를 살짝 돌리면서 차를 마시는 알스 사제.
그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로나는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하듯이 하하 웃고 있다.
음음, 정말 희한한 일이야.
밝고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를 듣고 있는데, 한겨울 서리를 맞은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 떨리다니 말야.
아까 그 구르는 벌레 때문에 기가 빠졌나보다.
……어쨌든 상황을 정리하면,
“완전 조, 아니 끝장났군요.”
“그건, 크흠, 그건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상당히 좋지 않은 상황이긴 하지만, 아직 희망이 남아있어요.”
목을 덮은 옷깃을 매만지면서 그가 말했다.
“협상이라도 하나요? 들어준대요?”
“굉장히 자비롭게도, 마지막 변명할 기회를 주겠다고 하더군요. 내일 아침에 공개적으로 대담이 이뤄질 겁니다.”
“그럼 여기 영주님과 사제님이 참석하시겠군요.”
“아니요.”
그는 고개를 저은 후,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저와 카엘 님이 나가셔야 합니다.”
“네?! 아, 저를 지목하신 건 이해해요. 하기 싫지만.”
어쨌든 나는 용사이고, 애초에 인어를 만나러 여기 온 거다.
아마 이 아저씨, 아니 이 사제님은 우리 일행이 여기 도착했다는 걸 듣자마자, 나를 그 대담 자리에 끌고가기로 결심했겠지.
뭔가 마을의 운명을 짊어진 것 같아서 부담되지만, 이미 그보다 더한 걸 메고 다니고 있는 중이니 숨이 막힐 정도로 부담이 되진 않는다.
내일 현장에선 좀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도 지금은 대담 대표가 문제야. 아니, 왜 저 사제님이랑 나만 나가야 돼?
“왜 우리 둘이서 나가야 되죠? 영주는 뭐하고요? 선전포고 듣자마자 피신 갔어요?”
“잡혔습니다.”
“………뭐요?”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그는 한쪽 머리를 짚으면서 끙, 앓는 소리를 낸 후 대답했다.
“선전포고 후, 성의 발코니에서 지켜보고 있던 영주님을 바닷물로 묶어서 끌고 갔어요. 선전포고의 진정성을 더해주겠다면서.”
“그게 언제죠?”
“이틀 전입니다.”
“……살아있을까요?”
“그러기를 바라고 있어요.”
난 전쟁이나 정치 같은 건 잘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이 상당히 좋지 않은 건 알 거 같아.
하필이면 영주가 잡히다니, 시작하기도 전에 지휘관을 잃어버렸구만?
일부러 노리고 한 걸까?
“어어, 다른 가족은 있나요? 부인이나 아들 같은…….”
“부인이 있긴 한데, 열 여섯밖에 안 됐어요. 아들은 열 살밖에 안 됐고요.”
“………열 여섯에 열 살?”
내가 잘못 들었나?
숫자가 좀 모자란 거 같은데.특히 부인 쪽이.
알스 사제는 내 표정에 어깨를 으쓱였다.
“성인이 되면 정식 혼례를 올릴 예정이었다고 하네요. 애초에 그러려고 3년 전에 수양딸로 삼았다고 하더군요.”
“히익!”
“흔한 일이에요. 그래도 ‘아버님’이라 부르진 않으니 훨씬 나은 편이죠.”
그래도 여전히 정신 나갈 거 같은데!
3년 전이면 열 셋인데, 이미 그때부터 아내로 삼을 거라 생각했다는 거 아냐.
이미 있는 아들이 열 살이고, 또 이런 영지를 맡은 영주라면 적어도 서른은 넘었을 거고!
우와, 귀족 사회 무서워!
로나가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와, 그럼 그 도련님은 누나 같은 새엄마가 생기는 거네요! 기분이 어떨까요?”
“별로 안 좋을걸…….”
그보다 위험하지 않나?
둘이 나이차가 별로 안 나는 거잖아.
대충 십 년이 지나면……
으, 아니야, 남의 가정사는 신경 쓰지 말자!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은 후,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는 알스 사제에게 물었다.
“그럼 이 마을에선, 대표로 나설 만한 사람이 없는 건가요? 솔직히 저나 사제님이나 외부인이잖아요. 인어들이 적대시하는 게 인간 전체라지만, 일단은 가장 먼저 이 마을이 얻어맞게 되는데, 마을 관련인에게도 발언권이 있어야 하지 않아요?”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적당한 사람이 없어요. 어부들은 바다의 일족이 노했다고 겁을 먹었지, 행정관은 영주가 잡혀간 탓에 얼이 나가 있어요. 위병대장은 치안 유지하는 걸로 벅차고요. 예비마님과 아드님은 어리고, 가신들은 후폭풍이 염려되는지 선뜻 나서지 않네요.”
염병. 진짜 답이 없네.
왠지 나까지 머리가 지끈거려지는 것 같았다.
“……그럼 내일 대담이 망하면, 전부 교단 책임이네요?”
“하하, 맞습니다. 물론 그때는 당신이 용사라는 걸 다 알릴 거에요. 저만 혼자 책임 떠안을 순 없죠.”
“와, 사제님이 그래도 되는 거에요?”
“책임 안 져도 된다는 거에 눈을 반짝인 용사님이 하실 말이 아니네요.”
칫, 너무 티 났나?
물론 내 책임이 아니라고 막말을 하거나 할 생각은 없다.
으, 그래도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면 좀더 편하게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짧게 한숨을 쉬자, 알스 사제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농담이니까요. 당신에게 책임이 돌려질 일은 없을 겁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자책감에 허우적대실 텐데, 공연히 못을 박았다가는 사명에 지장만 생기겠죠.”
“……저를 너무 좋게 보시는 거 같은데요.”
“설마요. 힐데 사제 때문에 성문에서 소란이 일어났을 때, 직접 나서서 중재하셨다면서요? 간접적으로 연관된 일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시는 분이, 직접 엮인 일에 아무 생각도 안 하실 리가 없죠.
여하튼,”
그는 빈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새로 채우지 않는 걸 보면, 더 할 말이 없는 것이리라.
내일 아침 8시에 부두에서 만나자.
그렇게 운을 떼면서, 알스 사제가 말을 이었다.
“모든 건 내일 달렸습니다. 그러니, 내일을 대비해서 푹 쉬세요. 어떤 일이 일어나건 대처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나 역시 나를 따라 나오려는 건지, 티 테이블에 빈 잔을 내려놓고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아, 가실 때 사기 조심하시고요.”
“아잇, 진짜. 안 당한다고요!”
아니, 왜 율리아 공주랑 가까운 사제는 죄다 사람 놀리길 좋아하는 거야?!
싱글싱글 웃는 얼굴에 홱 쏘아붙이면서 문을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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