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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293화 (293/475)

〈 293화 〉 283화 : 폭풍전야 (3)

* * *

시장 근처로 돌아온 후, 무두장이의 집에서 풍기던 냄새도 뺄 겸, 잠시 나무 그늘에서 쉬기로 했다.

“이 다음엔 시장 돌아볼 거지?”

“어.”

또 언제 사람 사는 마을에 들를 수 있을지 모르니, 비축할 수 있는 물품은 비축해두어야 한다.

그 다음은…… 역시 마을을 돌아보아야겠지?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없어지기 전에 관광하려고요?”

“길 기억해두려고 그런다, 임마.”

“하긴, 누나는 길 잘 외우시니까 한 번 돌아보는 게 좋겠네요.”

“……”

어차피 나는 길 못 외울 게 뻔하다는 말투로군.

비겁한 자식, 느닷없이 사실(fact)로 공격해대고 있어.

대꾸할 말이 없어 속으로 툴툴대고 있는데, 위슨이 재차 입을 열더니 자신은 따로 다니겠다고 말을 꺼냈다.

“어디 가려고?”

“바다랑 주변 벼랑이요. 내일에 대비하려고요.”

뭔가 마법적인 장치를 해두려는 건가?

뭐, 그냥 주변 지형을 확인하려는 걸지도 모르지.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녀석이 돌연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두 분이 데이트하는 거 방해하기도 싫고.”

“?!”

“먼저 갈게요! 이따 저녁에 봐요!”

뜬금없는 말에 놀라서 굳어 있는 새에, 녀석은 손을 흔들고서 인파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으으, 위슨 저 자식, 나중에 두고 보자……!

속으로 이를 박박 가는 와중에, 옆에 서 있던 메린이 내 어깨를 두드리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데이트?”

“……아니야!”

그냥 시장 돌면서 살 물건 사고, 겸사겸사 내일을 대비해서 마을을 돌아보는 건데, 뭔 데이트야,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어!

그렇게 여유자적하게 놀러 다닐 상황이 아니라고!

……그러니 들뜨지 마라, 카엘, 이 얼빠진 놈아!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잡생각을 털어버리고, 심호흡을 해서 마음을 가라앉힌 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메린에게 물었다.

“시장에서 뭐 또 사야 할 거 있어?”

“제,”

“젤리 말고.”

“없어.”

로나나 블루벨에게 사다 달라고 부탁받은 것도 없었지?

그럼 내 것만 챙기면 되겠군.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게는 일단 다 돌아보는 게 좋겠지.

그대로 잠시 바람을 쐰 후, 나는 겉옷 여기저기를 킁킁 맡아보았다.

냄새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지나치는 사람들이 구역질을 할 것 같진 않다.

슬슬 시장에 가도 되겠지.

홀로 고개를 끄덕인 후, 나는 메린의 손을 잡았다.

의아한 듯이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어쩐지 쑥스러워져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그, 사람 많잖아. 잘못하면 떨어질 수도 있고……”

……돌겠네, 진짜. 나 왜 변명하고 있냐?

그냥 솔직하게 잡고 싶다고 하면 되는 걸!

아으, 근데 그 말을 어떻게 곧이곧대로 하냐, 난 절대 못해!

“그래? 그럼 이 편이 더 확실하지 않냐?”

메린은 덤덤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떼어내더니,

“……?!”

내 팔에 매달리듯이 두 팔로 휘감으며 찰싹 들러붙었다!

이, 이거는, 그냥 팔짱을 낀다는 수준이 아니잖아!

내가 여자일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으, 팔 뒤쪽에 푹 닿고 있는 거, 이건 그……!

“이러면 절대 안 떨어지겠지. 안 그러냐?”

“그, 그렇기는 하지만……!”

너무 가까워!

뭔가 든든하고 물컹한 느낌에 더해, 은은한 라벤더 향기까지 느껴지고 있다!

아아아, 머리가 잘 안 돌아가!

“왜? 싫어? ……아, 걷기 힘들겠구나. 그럼 안 되겠네.”

“……”

안 되겠네.

그 말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의아해하는 눈으로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던 메린이,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서 휘감았던 팔을 풀었다.

……옴짝달싹 못할 정도로 얽고 있던 그녀의 팔이 멀어지고, 손가락이 하나씩 떼어진다.

내 팔을 감싸던 온기가 식어가고, 그녀의 손가락이 닿았던 감촉이 점차 사라져간다.

……멀어지고 있다.

나를 바짝 올려다보던 덤덤한 눈동자는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다.

그녀의 옆모습을 비추던 내 눈은, 이제 그녀의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

다 끝났어.

극심한 낭패감이 마음속에 쿵 내려앉았다.

……이제 그녀는 두 번 다시 나에게 가까이 오지 않을 거야.

아니, 이대로 없어져버리겠지.

눈앞에서 사라지는 거다.

그때처럼.

­­혼자선 아무것도 아닌 놈이 잘난 척하니까 질린 거겠지.

꿈에서도 듣기 싫은 놈의 목소리가 울려온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놈의 목소리가 들릴 리도 없고, 그녀가 질려서 떠날 리도 없잖아.

또 혼자 지랄하는 거냐, 카엘 에스트렐?

미친놈이라고 불린다고 진짜 미친놈이 될 셈이야?

하지만……,

메린은 지금 저렇게 멀리 있다.

어렸을 때의 모습처럼 작게 보일 만큼 떨어져 있다고.

내 잔소리에 심통이 나서 홱 가버렸을 때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가고 있잖아!

메린이 나를 떠나가버린다.

메린마저, 나를……!

“메린……!”

허황된 두려움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며 가슴을 내리눌렀다.

실현될 리 없는 불안함에 목 안이 막히는 걸 느끼며, 황급히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덥썩.

“응?”

내 손에 붙잡힌 가느다란 오른손목.

그를 힐끗 쳐다본 후, 나를 마주보며 갸웃거리는 고개.

일 분 전에도 보고 있던 메린의 얼굴이 눈에 비추고 있었다.

어라, 분명 작아져 있었는데……?

“카엘? 왜?”

“아…… 그……,”

여름햇살이 너무 뜨거워서 헛것을 본 걸까?

혼란스러운 나머지, 나는 좀처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거리기만 했다.

그러자 의아해하던 주홍빛 눈동자가, 별안간 살짝 가늘어지며 가까이 다가왔다.

단 한 걸음.

그 짧은 걸음만으로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해졌다.

……훨씬 가까이에 있었구나.

그녀의 손목을 잡을 때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실을 여실히 깨달았다.

“카엘,”

“어, 아니야. 아냐, 메린, 아니야…….”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또 혼자 감정에 치닫아서 정신 놓은 거 같지만, 아무튼 아니야.

“……”

“그…… 정말, 아니야.”

한층 더 가늘어진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나는 재차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심호흡을 한 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동자에 웃음을 보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괜찮아. 그냥 그………혼자 가지 마.”

“내가 혼자 왜 가냐?”

음, 그러게.

왜 나는 네가 혼자 가버린다고 생각했을까?

네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왜 그런 쓸데없는 불안을 품는 걸까?

어릴 때나 지금이나, 네가 일부러 날 찾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말야.

“……”

평정을 되찾은 마음속에, 이번에는 깊은 자괴감이 몰려들어왔다.

하……, 진짜 이게 뭔 한심한 꼴이야?

무슨 갓 태어난 강아지도 아니고, 그녀가 바짝 붙어 있다가 떨어진 정도로 낑낑대다니.

그래도 이번엔 빨리 정신을 차려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보는 눈 많은 데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뻔했다.

으으…… 역시 의존하고 있는 걸까?그러면 안 되는데.

의지하고 기대어야지, 의존하고 매달려서는 안 된다.

메린에게 큰 부담이 될 뿐 아니라, 앞일을 그르치게 될 거야.

맹세를 생각해야지.

정신 차려, 임마.

그렇게 나 자신에게 다그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내 머리를 정돈하듯이 슬슬 쓰다듬으며, 메린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땀난 거 같은데 괜찮다고?”

“아까 땡볕 걸어서 그래.”

“손도 떨고 있고.”

“사람 많잖아.”

“안색도 안 좋은데.”

“……아까 그 구린내 맡아서 그런 거겠지.”

그래서 그런 걸 거야.

현기증이 날 정도로 지독한 악취 맡았지, 날씨는 덥지, 여기 주변엔 사람으로 가득하지…….

사람 지치게 만드는 요소가 연속으로 들이밀어진 거다.

그 탓에 조금 예민해진 거겠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펼칠 만큼.

“그래서 좀 휘청거린 거 같아.”

“……그래?”

씁쓸히 웃는 나를 보며 눈을 깜빡이던 메린의 얼굴에, 돌연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나름 좋은 생각을 떠올렸을 때에 짓곤 하는 표정.

나에게는 살짝 불길한 웃음이다.

그녀는 보일락말락한 미소를 지으면서, 왼팔을 뻗어 내 오른쪽 팔꿈치를 살짝 감았다.

장서관에서 돌아다닐 때에 하던, 지극히 가벼운 팔짱이다.

……하지만 여전히 팔 외에도 느껴지는 폭신한 느낌에, 살짝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또 휘청거릴 수 있으니 이래야겠네. 이 정도는 괜찮지?”

“………아니.”

부족해.

그녀의 왼손을 잡고 아래로 내렸다.

의아해하는 시선을 느끼며, 나는 오른손바닥을 그녀의 왼손바닥에 맞대었다.

그리고 그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사이에 하나씩 하나씩, 내 손가락을 끼워넣었다.

그게 간지러웠는지, 그녀가 살짝 어깨를 움츠리며 키득거렸다.

그 웃음소리가 귀로 흘러 들어와, 가슴 속을 간지럽혔다.

……그 탓에, 나는 깍지를 다 끼고도 조금 지나서야 겨우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사람 많잖아. 이래야, 안 놓치지.”

충분히 지나다닐 공간이 있긴 해도, 역시나 시장인 만큼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다.

이따금 수레도 지나다니고 있고.

그러니 팔만 얽는 걸로는 부족해.

본의 아니게 밀쳐져서 풀릴지도 모르니까.

……그녀가 놓고 가버릴지도 모르니까.

그건 그렇고, 햇볕을 너무 쬔 거 같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이 뜨거워.

금방이라도 익어버릴 거 같아.

“히히, 너 얼굴 엄청 빨갛다.”

“해, 햇볕, 햇볕 때문이야. 더워서……!”

“여기 그늘인데?”

“으……!”

“히히힛.”

재미있다는 듯이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억울한데.

왜 나만 맨날 이래?

왜 항상 나만 창피해서 죽을 것 같냐고.

자꾸만 키득거리는 그녀가 왠지 얄미워, 그녀의 뺨을 쭉 잡아당겼다.

그러자 메린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똑같이 내 뺨을 집고 바깥쪽으로 당겼다.

“아프잖아, 뭐하는 거야.”

“내가 할 소리다, 임마. 갑자기 뭐하는 거냐?”

“네가 자꾸 웃으니까 고장난 거 같아서 고쳐주려는 건데.”

“뭔 개소리야, 더위 먹었냐? 아무튼 놔. 아프단 말야.”

“너부터 놔, 임마.”

“네가 먼저 했잖아. 왜 나부터 놓냐?!”

……한 손은 맞잡고, 다른 한 손은 서로의 뺨을 하나씩 잡아당기는 이 상황.

누가 봐도 우스꽝스러운 꼴이지만, 아마 우리 둘에겐 가장 어울리는 모습일 테지.

잠시 후, 우리는 각자 빨갛게 부은 뺨을 문지르면서 나란히 시장을 걷기 시작했다.

뾰로통한 얼굴로 툴툴대는 메린.

그녀에게 약간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불만을 품는 나.

……그런 우리의 손은, 여전히 서로 깍지를 낀 채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

손에서 한껏 전해져 오는 그녀의 존재감에 몰래 웃음을 지으며, 한결 가벼워진 걸음을 내딛었다.

그 후, 우리는 다색다양한 차림의 사람들을 지나다니면서 가게들을 살펴보았다.

노점과 노점 사이가 크게 비어 있고, 불이 꺼진 가게들도 여럿 보인다.

……역시, 마을을 떠난 사람도 꽤 있구나.

다행히 내가 가려던 가게들은 아직 문을 열고 있었고, 그 덕에 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살 수 있었다.

“다 산 거야?”

“어.”

여분의 필기용품, 비누, 소금, 검을 손질할 때에 쓰는 기름과 숫돌, 부드러운 면포, 조금 까끌까끌한 면포 등등.

내가 개인적으로 쓰려는 물건, 메린이 깜빡하고 사지 않은 여행물품들을 전부 넣었는데도, 배낭은 아주 약간만 무거워졌다.

오오, 찬양하라. 드워프의 놀라운 기술력이여!

비록 배낭에 들어간 기술력 대부분은 마법이지만, 마법사가 아닌데도 마법물품을 만든 거니 대단한 거지.

암, 그렇고 말고.

아무튼 이제 남은 건, 메린이 직접 자신의 입막음용으로 요청한 젤리인데…….

가게가 문을 닫은 건지, 시장을 서너 번 왕복하면서 샅샅이 뒤졌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없네.”

“그러게. 그냥 후식으로는 안 되냐?”

“상관없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음…… 꿀이나 설탕이라도 사서 과일에 뿌려 먹으라고 할까?

잡화점으로 다시 갈지 고민하면서 무심코 고개를 돌린 순간,

“……?”

시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굉장히 높다란 건물이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사람이 웅성웅성 모여 있는 게, 무언가 특별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그 한 무더기의 사람들 근처에,

“……!”

사탕봉지를 내밀며 판촉하고 있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메린, 저기 봐. 사탕 있어.”

“엥? 어디? ……와, 진짜네. 얼른 가자!”

“으악!”

메린이 다짜고짜 그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이 녀석, 얼마나 젤리가 먹고 싶었던 거야?!

팔과 손이 단단히 이어져 있는 덕분에, 그녀가 가차없이 나를 끌고 가는데도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러려고 잡은 게 아닌데, 나 참, 어이가 없네.

메린은 그렇게 매서운 기세로 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다짜고짜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외쳤다.

“사탕 주세요!”

“힉?!”

……아마 아주머니의 눈엔 우리가 갑자기 튀어나온 걸로 보일 거야.

아니나다를까, 아주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들고 있던 사탕봉지를 놓치고 말았다.

메린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허공을 돌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사탕봉지를 훌륭히 낚아챈 뒤,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얼마에요?”

“어어……”

“이거 알사탕이죠? 혹시 다른 것도 있나요? 어떤 거 있어요? 젤리나 막대사탕도 있나요? 젤리가 있으면 제일 좋은데!”

“그러니까……”

“바닷가이니까 생선 맛도 있으려나? 아, 혹시 생선으로 만든, 우읍.”

아잇, 진짜.

상대가 말할 틈도 안 주고 혼자 떠들고 난리야!

나는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는 녀석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렸다.

“으읍, 읍읍읍.”

“좀 진정해라, 임마! ………죄송해요. 어떤 거 파세요?”

그제야 겨우 여유를 찾은 아주머니가 바구니에서 꾸러미 두 개를 더 꺼냈다.

하나는 왠지 광택이 나는 노란 과자가 들어 있고, 다른 하나는 세 가지 색깔의 젤리와 마시멜로가 들어 있었다.

“그 알사탕이랑 옥수수과자, 그리고 젤리랑 마쉬멜로. 이렇게 세 가지가 있어요. 뭘로 드릴까?”

“하나씩 다 살게요.”

“고마워요!”

잠시 메린과 손을 놓고, 아주머니에게 과자값인 동화 서른 개를 지불했다.

메린이 아주머니에게 받은 과자 꾸러미들을 내 배낭에 넣는 동안, 나는 사람 무더기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물었다.

“저기 무슨 일이 있나요? 사람이 많네요.”

“으응? 아, 여기 분이 아니시구나. 저 안에 성물이 있거든요. 그에 기도하러 온 사람들이에요.”

“성물? 성인의 유해라도 있나요?”

“그만큼이나 귀한 물건이에요. 고래뼈로 만든 칼인데, 그냥 고래뼈가 아니라, 무려 폭풍고래의 뼈로 만든 거랍니다.”

폭풍고래?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아, 맞아. 엘프의 숲에서 잠깐 얘기가 나왔었지.

이름처럼 폭풍을 일으키던 고래인데, 무려 최초의 대언자가 주먹으로 때려눕혔다고 했었다.

……아니, 돌려차기였나?

어쨌든 폭풍고래라……

그러고보니 이 마을은 천사가 말했던 ‘고래의 무덤’ 중 하나였지?

남쪽 해안가에 나타난 폭풍고래를 물리친 후, 그걸 기념하려고 뼈로 칼을 만든 모양이군.

“내일이면 없어질지도 모르니, 오늘 꼭 보고 가세요.”

그렇게 말하는 아주머니의 웃는 얼굴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슬픔이 서려 있었다.

“……안 없어질지도 몰라요.”

“아니요. 이 마을은 없어질 거에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아주머니는 내가 내미는 희망을 단호히 거부했다.

절망과 체념이 마음을 좀먹었다고 하기엔, 그 목소리에는 아직 생기가 남아있다.

그 모순된 모습에, 나는 그녀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믿으시는 거죠?”

“사제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저희 사제님은 예언을 하시는 분이거든요.”

와, 힐데 사제님 대단해!

‘마을이 멸망한다’는 걸 그대로 이야기했구나!

근데 그런 예언을 들었는데도 마을에 사람이 이만큼이나 남아있는 거야?

헛소리로 치부하지도 않고, 그 말이 그대로 이뤄질 거라 믿으면서?

참 신기한 사람들이로구만.

“그런데 왜 떠나지 않으시는 거죠? 고향이라서 그런 건가요?”

아주머니는 내 질문에 눈을 약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사제님이 또 그러셨거든요. 배가 올 테니 기다리라고요.”

“배……? 어어, 구조선이라도 온다는 뜻인가요?”

“그건 아무도 몰라요. 힐데 사제님 당신도 진짜 무엇이 오는지는 모르실 거에요.

설령 정말 구조선이 오는 것이라 해도, 저 성물을 옮길 순 없을 테니 꼭 보고 가세요.”

음…… 저렇게까지 권하는데, 한 번 보고 갈까?

고래뼈로 만든 칼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때, 메린이 과자 꾸러미를 다 넣었는지, 배낭 끈이 다시 꽉 동여매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내 옆에 온 메린에게 손을 내밀자, 그녀가 순순히 내 손을 잡았다.

아까처럼, 팔을 살짝 얽으면서.

“어머나, 보기 좋네요. 호호, 사이좋게 나눠 드세요.”

“아, 예에, 뭐, 음, 감사합니다.”

푸근하게 웃는 아주머니에게 멋쩍게 인사를 건넨 후, 나는 메린과 함께 고래뼈 칼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아주 살짝 올라온 열기를 긴 숨으로 내보내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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