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4화 〉 284화 : 폭풍전야 (4)
* * *
건물에 다가가면 갈수록, 사람들이 북적이는 소리가 점점 더 커져갔다.
곧바로 바짝 다가가기엔 왠지 모를 압박감이 느껴져, 일단 약간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흐음…….”
바깥쪽으로 활짝 열려 있는 커다랗고 높다란 문.
그 안팎으로 흘러 넘치고 있는 인파.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게, 정말 말 그대로 사람으로 된 물결이 넘실거리는 것 같다.
근데 멀리서 봤을 땐 무질서하게 와글와글 모여 있는 줄 알았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완전 정반대네.
한 줄당 네 명씩 착착 줄을 서 있어!
건물 관리인이 따로 줄을 세우고 있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정말로 기도만 하고 나오는 건지, 사람들이 문지방을 넘나드는 속도가 꽤 빠르다.
단지 줄이 줄어드는 만큼, 여기저기서 새로운 사람들이 와서 줄을 서며 보충하고 있어서 그렇지.
그나저나 참 신기하네.
누구 하나 시키지 않았는데도 줄을 서다니.
‘경건한 자세로 임해야 부정을 안 탄다’는 생각 때문일까?
불안에 빠져 있을 사람들을 저렇게 통제하다니, 성물이 맞긴 하구만.
속으로 감탄하며, 나는 메린과 잡고 있는 손을 살짝 끌면서 말했다.
“메린, 저기 들어가보자.”
“사람 꽤 많은 거 같은데? 괜찮겠냐?”
“어. 저 사람들이 날 쳐다보진 않을 거 아냐.”
사람이 많으면 조금 답답할 뿐이지, 시선들이 나한테 모일 때처럼 속이 뒤집어지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러니 시장도 다니고 그러는 거지.
“그리고 네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래? 뭐, 맘대로 해라.”
시큰둥하게 툭 던지면서도, 메린의 눈은 시종일관 건물을 향해 있었다.
아…… 이 녀석, 말은 저래도 안에 들어가고 싶은 거구만?
그 추측은 줄을 서면서 완전히 확신으로 굳어졌다.
녀석은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눈이 점점 더 반짝이고, 이따금 발끝으로 저 앞을 보기도 하고 있다.
기대감에 젖어서 들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 참, 마침 나도 고래뼈 칼에 동했으니 망정이지, 그냥 가자고 하면 어쩔 뻔했어?
쓴웃음과 함께 그녀에게 물었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말을 하지. 왜 가만히 있었냐?”
“데이트 아니라고 해서.”
“……”
데이트였다면 여기 오자고 했을 거란 소리 아니야?
돌겠네, 진짜.
독실한 신자가 들었다면 눈에 핏발 세우겠구만.
어쩌면 우리랑 같이 줄을 서고 있는 두 사람이, 이미 속으로 뭐라뭐라 비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신성한 장소에 연애질하러 다니다니 발칙한 놈들이라고 말야.
“어이가 없네. 기도하러 가는 거랑 데이트랑 뭔 상관이냐?”
“노는 게 아니니까 딴 길로 새면 안 되잖아.”
……아, 그런 뜻이었구나.
일하는 중엔 한눈 팔지 말고, 심부름 중에 옆길로 새지 마라.
어렸을 적, 녀석과 함께 그런 잔소리를 들었었지.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였다.
“그래도 한 번 물어나 보지. 내가 고개 끄덕일 수도 있잖아.”
“안 할 게 뻔한데 굳이? 너 그런 거엔 칼 같잖아.”
“뭔 소리야, 내가 얼마나 유연한데. 그리고 진짜 그렇게 생각했다면 더더욱 물어봤어야지.”
의아해하는 두 눈동자에 미소를 지어주면서 말을 이었다.
“장보는 게 끝나면 마을 돌아보기로 했잖아. 여기 먼저 가보자고 하면 되지.”
“핑계잖아. 맨날 핑계대지 말라고 하면서.”
“그야 좋지 않은 짓이니까.”
핑계를 대는 건, 스스로의 허물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이다.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피하고, 그에게서 도망치는 비겁한 짓이지.
“근데 필요한 짓이기도 해.”
“왜?”
“지나치게 정직한 건 다들 싫어하거든.”
일거리를 부탁하는 사람에게 ‘귀찮아서 하기 싫다’고 하거나, 음식을 준 사람에게 ‘맛없어서 못 먹겠다’고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면 어떻게 될까?
십중팔구 싸우겠지.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그 정직함을 꺾고, 양심에 천을 씌워서 덮어버린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대거나, 다른 이유를 대면서 본심을 숨기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상대 또한, 어지간히 낙천적인 사람이 아닌 한 그 ‘본심’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넘어가주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다.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하는 건 단 하나.
서로 불편해지는 걸 피하기 위해서이다.
누군가와 갈등을 겪느니, 뻔히 보이는 핑계를 주고받으면서 뒤에서 한숨을 쉬는 거지.
특히나 계속해서 그 사람을 만나야 한다면 더더욱 필요한 행위이다.
“……다들 ‘네가 맘에 안 들어서 사귀기 싫다’는 정직 대신, ‘아직은 연애할 생각이 없다’는 핑계를 원해. 그게 덜 아프거든. 솔직하지 않다고 다들 핑계를 싫어하지만, 정작 진짜 솔직한 말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야.”
“흐음…… 그래서?”
“네가 핑계 댔으면 모르는 척 넘어가줬을 거란 거다.”
물론 솔직하게 말했더라도 들어주었겠지.
메린이 고래뼈 칼을 보고 싶다고 눈을 빛내는 걸, 내가 어떻게 거절해?
그녀가 미처 대지 않은 핑계는, 내가 대신 만들면 되는 일이다.
“그러니 미리 안 될 거라고 접지 마. 핑계라도 좋으니까 말해. 애초에 나부터도 핑계 막 치고 다니잖아.
난 있지, 네가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더 싫어.”
……어떤 일이든 말해줬으면 좋겠다.
약속 진짜 까먹었냐고 물어봐주고, 자신 대신 블루벨을 쓰려는 거냐고 따져줬으면 한다.
혼자 씁쓸해하거나 시무룩해하지 말고.
녀석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당부하듯이 말했다.
“알았지? 앞으론 말해주기다.”
“……진짜 그래도 되는 거냐? 너한테 부담되는 거 아냐?”
“걱정 마. 네가 같잖은 억지를 부리면 지랄 말라고 해줄 테니까.”
“그거 그냥 하지 말라는 소리 아니냐?”
툴툴대는 메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 신경 쓸 필요 없다는 거다, 임마. 근데 새삼스럽게 뭘 그래? 아까 사탕 사달라고 하는 거 보니 핑계 잘 치더만. 야, 누가 보면 여태껏 핑계 한 번 안 치고 산 줄 알겠다?”
“그거 핑계 친 거 아닌데. 내가 잔소리를 하지 않는 거에 대한 값이지. 핑계는 네가 호구 짓할 때 치는 거고.”
“내가 언제 그랬냐, 이 자식아, 음해하지 마! 호구 짓이라니,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한 적 없거든?!”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고찰과 분석을 통해 이루어진, 지극히 이성적인 행위였어!
아까 신전에 가다가 만났던 거지 아줌마도, 자꾸 들러붙어서 지랄하니까 쫓아내려고 동전 준 거지, 불쌍해서 준 게 아니라고!
그러나 메린은 내 열변을 듣고, 건조한 표정으로 딱 한 마디 내뱉었다.
“퍽이나.”
“호구 아니라고!”
“그래, 그렇다 쳐. 이야, 저기 날아가는 게 그거인가? 갈매기?”
“으으……!”
대놓고 코웃음 치는 그녀의 뺨을 향해 빈 손을 뻗었다.
하늘을 본 채로도 내 움직임을 알아차렸는지, 메린이 자신의 빈 손으로 내 손을 툭 치려 했다.
어림도 없지.
대각선 위로 녀석의 손을 피하고서 다시 뺨을 노렸다.
녀석의 손이 곧바로 날아오며 손등을 찰싹 때렸다.
그래도 포기할까 보냐……!
살짝 빨개진 손등을 호호 불고서 다시 도전했다.
“순순히 잡히라고!”
“싫어, 임마.”
교섭은 결렬되었다.
남은 길은 단 하나, 누구 하나가 끝장이 날 때까지 싸우는 것……!
……그렇게 손과 손이 맹렬히 부딪치는, 무척이나 조용하면서 사소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주위에서 보내는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시선을 그대로 받으며.
마침내 우리 차례가 되어, 나는 손등이 완전히 빨개진 손을 휘휘 흔들면서, 메린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오로지 성물을 보관하기 위한 장소인 건지, 건물 안에는 벽등과 작은 기부함, 그리고 울타리와 그 너머에 있는 성물밖에 없었다.
“진짜 칼이네.”
“그러네.”
경건하게 기도하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나와 메린은 울타리 안쪽에 있는 성물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칼.비유도 뭣도 아닌, 진짜 말 그대로 칼이 있었다.
뼈로 만들었다는 말처럼, 가드 없이 자루만 달린 손잡이부터, 바닥에 박혀서 안 보이는 칼끝까지 누르스름한 빛이 살짝 도는 하얀 칼.
나를 서너 명 정도 쌓아야 겨우 닿을 정도로 긴긴 칼이 바닥에 꽂혀 있었다.
……진짜 폭풍고래를 물리친 기념으로 만든 거 같은데?
이거 사람이 쓸 수 있는 길이가 전혀 아니잖아.
왜 이 건물 높이가 큰 건지, 그리고 왜 과자 파는 아주머니가 성물을 못 옮긴다고 한 건지 알 것 같았다.
메린은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폭풍고래 뼈는 쇳물에도 안 녹는다며? 그럼 이거 깎아서 만든 건가?”
“그럴걸? 음…… 저쪽에 뭐 있네. 안내문일 거야.”
메린과 함께 울타리 구석에 세워져 있는 팻말로 다가갔다.
역시나 이 칼에 대한 설명이 쭉 적혀 있다.
대략적인 내용은 로나가 했던 이야기와 같았다.
먼 옛날, 남쪽 바다에 폭풍고래가 나타나 마을을 어지럽혔다.
이름처럼 폭풍을 불러 일으키는 고래라서 다들 손을 못 쓰는 와중에, 최초의 대언자인 조슈아가 오더니 단숨에 놈을 해치워버렸다.
창조주의 힘이 담긴 돌려차기로.
……박치기가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근데 더 기가 막힌 건, 그 돌려차기가 바로 조슈아가 대언자로서 처음으로 발휘한 능력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정확히 이마를 가격해 머리뼈를 부숴버렸고!
이야, 이거 율리아 공주도 할 수 있는 거 아냐?
괜히 로나가 ‘힘으로 아트라토스를 물리칠 수 있으면 율리아 선에서 끝난다’고 한 게 아닐 거야.
안내문의 내용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 뒤, 대언자 조슈아는 지존자의 명을 따라 폭풍고래의 갈비뼈를 벼려서 해안선을 따라 하나씩 꽂으셨다. 현재 그 자리엔 모두 마을이 들어서 있으며, 신자들이 승리와 안녕을 기도하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흠흠, 그러니까 이건 그 최초의 대언자가 직접 만든 칼이라는 거군?
성물이라고 할 만하네.
근데 이 칼을 왜 벼리라고 했는지는 안 적혀 있다.
물론 사람이 쓰려고 만든 건 아니겠지만……
기념할 거면 ‘기념하라고 명하셨다’고 적기 마련인데.
“근데 이걸 어떻게 만들었대? 쇠칼로 깎았나?”
“폭풍고래의 뼈는 칼로 안 잘려요.”
“?!”
꺅?!
……와, 다행이다.
입 밖으로 소리가 안 나갔어.
작게 안도하면서 고개를 돌리자, 힐데 사제가 싱글벙글 웃으며 우리 옆에 서 있었다.
그녀의 주위엔 아무도 없는 걸 보니, 또 혼자 신전 밖으로 나온 듯했다.
“사제님, 또 혼자 나오신 거에요? 또 혼나시려고…….”
“괜찮아요~ 제대로 허락받고 나온 거거든요! 두 분은 데이트 중이신가봐요?”
“아뇨. 내일을 대비해서 마을 둘러볼 겸 장보러 나온 건데요.”
“에이~ 굉장히 사이좋게 손 꼭 잡고 계시면서~ 데이트네요, 데이트!”
“아니라니까요!”
속삭이듯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아니 손잡고 다니면 다 데이트야?
진짜 어이가 없네!
나는 킥킥 웃는 힐데 사제의 모습에 한숨을 푹 쉬면서, 아까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되물었다.
“근데 칼로 안 잘린다고요? 그럼 이건 뭘로 만들었대요?”
“뼈요. 돌은 돌에, 쇠는 쇠에 잘리는 것처럼요.”
뼈? 흠…… 같은 폭풍고래 뼈로 깎았다는 뜻인가?
이건 갈비뼈라 했으니, 등뼈 같은 걸 쓴 모양이다.
“아, 사제님은 아세요? 조슈아 님이 이걸 왜 만드셨는지요.”
“창조주께서 명하셔서 만드셨죠.”
“무슨 용도로 쓰라고 하셨는지는 안 적혀 있어서요.”
“그건 조슈아 님만 아시죠~ 뭐, 무기로 쓰려던 거 아니겠어요? 칼이잖아요.”
……저걸 어떻게 써?
사람 여러 명이 목마 태우면서 쓰는 건가?
거참 볼 만하겠네.
“카엘 님, 카엘 님.”
다시 칼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돌연 힐데 사제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면서 말을 걸었다.
“마을 둘러보신다고 하셨죠? 저랑 데이트하실래요?”
“아뇨.”
단 일 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자 힐데 사제가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볼멘 소리로 투덜거렸다.
“어머, 단칼에 거절하다니 너무해! 왜요, 두 분이 데이트하는 거 아니라면서요, 왜 안 하신다는 거에요? 제가 나이가 많아서 그래요? 아직 서른 여섯밖에 안 됐는데!”
“‘아직’이랑 ‘밖에’가 붙을 숫자가 아닌데요. 그리고 나이 이전에, 전 이미 사귀는 사람이 있어서 안 됩니다.”
메린과 잡고 있는 손을 흔들면서 대답하자, 힐데 사제가 재차 환히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이건 어때요? 제가 두 분께 마을 안내해드릴게요!”
“흐음……”
힐데 사제의 안내라…… 그냥 산책의 연장선이 될 거 같은데.
뭐, 내일을 대비해서 둘러본다고는 하지만, 내가 무슨 전략안이 있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겠지.
어디에 뭐가 있는지만 알면 충분할 거다.
그래도 메린에게 먼저 물어볼까?
나는 여전히 칼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메린, 사제님이 마을 안내해주신다는데.”
“어~”
……진짜 듣고 대답하는 건가?
칼에 정신 팔려서 적당히 대답하는 거 같은데.
“메린, 칼이 그렇게 신기하냐?”
“어~”
“뒷목 안 아파?”
“땡겨~”
“마시멜로는 내 거지?”
“지랄 마~”
음, 제대로 들었군.
고개를 끄덕거린 후, 힐데 사제에게 승낙의 뜻을 전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헤헤, 맡겨주세요!”
이상한 생물 보듯이 우리를 쳐다보던 힐데 사제는, 내 말에 기쁜 듯이 발뒤꿈치를 들썩이며 밝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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