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297화 (297/475)

〈 297화 〉 287화 : 같은 이유, 다른 마음 (2)

* * *

여름해보다 뜨거우면서도 겨울달보다 차가운 것.

하늘 위에 자리한 천상보다 밝게 빛나면서도, 때로는 대지 아래 심연보다도 어둡게 일렁이는 것.

숲 속의 호수처럼 잔잔하다가도, 돌연 거친 파도가 이는 바다처럼 날뛰는 것.

이는 사람의 마음이요, 이에는 세상이 담겨 있으니.

사람을 품음이 곧 세상을 품음과 같도다.

……옛 현인의 교훈을 가르치시면서, 아버지는 굉장히 진지하게 말씀하셨었다.

­­즉, 사람 마음은 종잡을 수 없으니 처신을 잘해야 한다는 거다. 특히 여자의 분노는 지옥불보다 더 뜨겁지. 죽을 힘을 다해 눈치를 살펴야 살아남을 수 있어.

아빠의 인생이 담긴 교훈이니 마음에 꼭꼭 새기렴!

그리고 곧바로 엄마한테 ‘애한테 뭔 소리하냐’고 등짝 맞으셨었지.

아아,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

왜 그 이야기를 여섯 살짜리 애한테 하셨던 겁니까?

적어도 석 달 전에 하셨어야 뼛속 깊이 새겼을 거 아니에요.

까먹고 있었잖아요!

……근데 왜 하필이면, 지금 메린에게 얼굴 붙잡혀 있는 중에 그 일이 떠오른 걸까?

이거주마등인가?나 죽는 거야?

“왜 대답이 없냐? 지금 묻고 있잖아. 둘이 뭐 작당하고 있었냐고. 아, 혹시 그거냐? 대답하기 껄끄러워서 그냥 다물고 있는 거? 얼마나 심각하게 껄끄럽길래 네가 입을 다무는 건지 상당히 궁금해지네.”

“아, 냐…… 그런 거……”

그런 거 아니야.

찔리는 거 없어.

너한테 잘못한 것도 없고.

……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돌겠네, 진짜.

그냥 눈을 들이대고 있을 뿐이잖아, 왜 얼어 있는 거야?

메린의 눈에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데.

심지어 분노도 담겨 있지 않다고.

근데……

근데 왜 이렇게 무서운 거야?

눈이 빨간색 계열이라 그런가?!

“그런 거, 아냐. 정말이야, 메린. 아니야.”

가까스로 입술을 떼며 대답하자, 그녀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사전협의 했다며. 둘이서만 미리 말 맞춘 거잖아. 근데 아니라고?”

“내, 내가, 다, 말할 테니까, 그, 화, 화내지 말고,”

“화? 내가 화난 거 같아? 나 화 안 났는데.”

그 말은 맞다.

그녀의 눈과 얼굴에선 자그마한 짜증조차도 느껴지지 않으니까.

그저 동짓날 밤처럼 싸늘할 뿐.

눈 내린 밤처럼 고요하게 얼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화가 난 거지.

“나도 모르는 화를 알아본 거냐? 그럼 그 이유도 알겠네. 야, 카엘,내가 왜 화가 난 거냐?”

이렇게 말꼬리를 잡으면서 내 숨통을 죄는 걸 보면……!

우와,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의 변형인가!

무어라 대답하든 지옥행이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오, 주여, 이 불쌍한 어린양을 제발 구원해주소서!

살려줘요!!!

“어? 말해봐. 내가 왜 화가 났냐? 말해보라고!!”

“히으!!”

메린이 눈을 부릅뜨며 고함을 친 순간, 공포가 몰려들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말을 골라낼 여유 따위 완전히 사라져버린 탓에, 나는 그저 떠오르는 대로 말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브, 블루벨, 이랑, 붙어, 있어서……!”

“왜?”

“내, 내가 그러는 거, 싫어, 하니까……!”

“왜?”

“네가, 블루, 블루벨을, 질투하고, 있으니까……!”

또 왜냐고 묻는 대신, 메린은 나를 물끄러미 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블루벨을 질투해서, 네가 그 엘프랑 붙어있는 걸 싫어하는데, 네가 딱 그러고 있으니까 내가 화가 난 거다? 그렇구나. 근데 난 내가 지금 화가 난 건지 정말 모르겠어.

하지만 네 눈엔 내가 화가 난 걸로 보이는 거지? 게다가 그 이유도 이렇게 곧바로 댈 수 있다는 건,”

“메, 메린.”

사과해야 할까?

근데 나 잘못한 거 없잖아.

그래도 미안하다고 해야 되나?화를 내게 했으니까 미안하다고?

그건 너무 불합리하잖아!

망설이는 사이에, 그녀의 입이 재차 열렸다.

“내가 화낼 줄 알면서 그랬다는 게 되지 않냐?”

“아, 아냐, 아냐아냐아냐, 아냐, 메린, 정말 아니야.”

“그럼 어쩌다 보니 그런 거다? 아, 그래. 갑자기 다리가 길어지는 바람에 걸릴 리가 없는 테이블에 걸려서 넘어질 뻔했으니, 그 말이 맞네.

……그래서 둘이 뭔 협의했냐고. 왜 대답은 안 하고 자꾸 말을 돌리냐? 말하기 싫어?”

“아, 아냐. 할 거야. 할게. 다 말해줄게. 처, 처음, 으, 처음부터 너한테 말하려고 했어. 숨기려던 거 아냐. 정말이야, 정말로……!”

“………”

메린은 말없이 나를 빤히 보기만 했다.

설마 못 믿는 걸까? 내가 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 같아서……?

근데 난 거짓말한 거 하나도 없는데!

역시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비는 게……

“……!”

순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나를 압박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무서워서, 머릿속까지 완전히 얼어버린 탓이다.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이는 손길.

얼굴을 감싼 포근한 온기.

은은한 라벤더 향기에 섞인, 그녀의 체취.

“물어보기만 했는데 왜 울고 그러냐? 진정해. 뚝 그쳐.”

그리고 머리 위에서 평소처럼 덤덤히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

……그녀가 내 머리를 폭 껴안고 있다는 것을, 조금 지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사시나무처럼 몸을 마구 떨고 있다는 것도.

근데 울고 있진 않은데.

울기 직전이었을 뿐이다.

“괜찮아… 괜찮아…”

“……”

괜찮다고 끊임없이 속삭이며 나를 보듬는 모습에선, 아까와 같은 싸늘함은 찾아볼 수 없다.

이따금 감정조절이 안 되거나 꿈 때문에 뒤숭숭해진 나를 달랠 때처럼, 따스한 온기만이 느껴지고 있었다.

화가 풀린 걸까……?

근데 내가 블루벨에게 요리 기초를 가르치기로 했다고 하면, 도로 화내는 거 아니야?

하지만 이미 전부 다 말하기로 했잖아.

이제 와서 못한다고 하거나 어쭙잖은 거짓말을 했다간, 그땐 진짜 끝장날 거야.

게다가 이미 블루벨에게도 메린을 설득하겠다고 한 상태이다.

한 입으로 두 말할 순 없어.

말을 내뱉은 이상 지켜야 한다.

그에 따르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게 사람의 도리니까.

“……메린, 할 말이 있어.”

“응.”

나를 가슴에 품은 채로 들으려는 건지, 그녀는 계속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짧게 대꾸했다.

한심한 이야기지만, 나 역시 그 편이 더 말을 꺼내기가 편했다.

“……블루벨이, 나한테 요리 가르쳐달라고 했었잖아.”

“응.”

“재료 손질하는 거 알려달래. 우리랑 입맛 맞춰보겠다고.”

“응.”

“그래서……, 들어줄까 해.”

그녀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순간 이대로 머리가 짜부라지는 거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 축 늘어졌던 몸에 다시 바짝 긴장이 감돌았다.

“……그걸 협의한 거냐?”

“그, 메린,”

“다같이 있을 때 논의한다더니, 이미 다 결정했구나. 그럼 왜 논의한다고 한 거냐? 그냥 생각해보고 결정하겠다고 하면 될 것을.”

“아니, 그러니까,”

“요리까지………”

갑자기 그녀의 손이 떨려왔다.

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면서, 몸이 서서히 죄이기 시작했다.

“그 년이, 요리까지……!”

“윽, 메린, 잠깐……!”

“싫어, 싫어싫어, 싫어! 그것까지 뺏기면, 남은 게 없잖아!!”

“지, 진정 좀, 큭?!”

어깨가 거세게 밀리면서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부딪친 등과 메린에게 붙잡힌 어깨, 둘 중 어디가 더 아픈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좀 있으니까 알 것 같아.

어깨가 더 아파.

부숴질 거 같아……!

메린은 그렇게 내 어깨를 으스러뜨리려는 듯이 꽉 쥐면서, 이번에는 정말로 울분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나 좋아한다며!”

그녀를 바라보는 내 뺨에, 뜨거운 빗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쭉 같이 있고 싶다며! 죽는 순간까지 함께 해달라며! 전부, 흑, 전부 거짓말이었어, 날 속였던 거야!!”

“아니야, 메린, 큭! 그런 거, 아니야!”

그녀의 팔을 잡고서 호소하듯이 외쳤다.

그러나 메린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건지, 대꾸도 하지 않고 혼자서 말을 쏟아냈다.

“그래서 그 엘프가 요리할 수 있게 만들려는 거지?! 완전히 날 대체할 수 있게! 그 다음에 날 죽일 생각이었고! 어차피 죽여야 하고, 죽이기로 했으니까!”

“말 좀 들어, 멍청아! 그딴 거 아니라고 하잖아!! 널 대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런 사람 찾을 생각도 없고!”

“거짓말.”

세상 떠나가라 외치던 그녀의 목소리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눈물을 뿌리는 두 눈동자 속엔 어떠한 빛도 비치지 않고 있다.

그 황량한 시선을 나에게 고정한 채, 그녀는 완전히 일그러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거짓말이야. 안 믿어. 네가, 네 손으로, 내 강점을 없애겠다고 했잖아. 그 년이 부족한 걸 채워주려고 하잖아.

요리밖에 없었는데. 내가 그 년보다 위에 있는 건, 요리뿐이었는데……!”

“아으윽!”

힘이, 더 들어가고 있어……!

손가락이 어깨에 파고들어가며, 뼈를 서서히 으스러뜨리는 거 같다.

칼에 잘린 건 아니니 로나에게 기도 받으면 낫겠지.

하지만 지금 어깨가 나갔다간, 메린을 말릴 수단이 완전히 사라진다!

“메, 메린, 큭, 진정해! 제발 좀……!

“………아.”

잔뜩 일그러져 있던 그녀의 표정이 펴지면서, 경악이 차오르는 게 보였다.

이내, 그녀가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어깨를 압박하던 힘이 사라지자, 몸에 쌓여 있던 긴장이 한순간에 탁 풀리면서, 절로 긴 숨이 새어나왔다.

……얼얼한 건 차치하고, 어깨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움직일 때 숨도 못 쉴 정도로 극심한 통증이 없는 걸 보니, 좀 많이 욱신거려서 그렇지, 뼈는 멀쩡한 듯했다.

그리고 메린은,

“미, 미안. 다치게 하려던 건…… 아, 아아……”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충격에 휩싸여,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는, 나란 년은……!”

그리고 그대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 뜯을 기세로 감싸며, 고개를 숙이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메린.”

황급히 몸을 일으켜 그녀를 끌어안았다.

내 말이 닿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을 건넸다.

“메린, 나 괜찮아. 하나도 안 다쳤어. 아무렇지도 않아. 봐, 이렇게 너 껴안고 있잖아. 응? 괜찮으니까 진정해.”

“나, 난 역시 안 돼. 너한테 도움되는 게 하나도 없어. 괜히 더 다치게만 해. 그 엘프가 훨씬 나아.

맞아, 어차피 난 죽어야 하잖아. 넌 계속 살아야 하니까, 나 대신 널 지킬 사람이 필요하긴 해. 그 엘프라면 충분히 할 수 있겠지.

근데…… 싫어. 미안해, 네가 그 엘프한테 가는 거, 보기 싫어. 어차피 죽을 거, 완전히 빼앗기기 전에 죽을래. 죽여줘. 지금 죽여줘!”

“싫어!”

이 자식이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어……!

제멋대로 떠드는 그녀를 더 힘껏 안으며 소리쳤다.

“절대 안 해! 북쪽 산까지 같이 가서, 그 드래곤 새끼 앞에서 죽일 거야! 누구 맘대로 죽겠다는 거야, 그 전까진 꿈도 꾸지 마!”

“읏, 흐윽, 우으으으……!”

오열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 누군가가 가슴 속을 마구 찌르고, 사정없이 파헤치는 것 같아.

하지도 않은 거짓말 때문에 날 믿지 못하는 것보다도, 메린이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있다는 게 더 아프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울고 싶을 정도로 아팠다.

“메린, 제발 들어줘. 제발……. 너 블루벨보다 나아. 나 많이 도와주고 있단 말야.

네가 나 검 가르쳐주고, 내 건강 챙겨주고 있잖아. 네가 옆에 있는 게 얼마나 안심되는데. 너랑 같이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데……!”

그런데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왜 날 빼앗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사랑하는 건 너인데.

너 말고 다른 사람은 생각할 수도 없는데.

“그러니까 부탁이야. 그런 소리하지 마. 죽겠다고 하지도 말고. 내가 약속 지키게 해줘. 끝까지 너랑 같이 있게 해줘.

나 블루벨한테 안 가. 그러려고 그 제안 들으려는 거 진짜 아니야.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여자는, 지금도 앞으로도 너 하나란 말야. 제발 믿어줘. 메린, 제발……!”

“사랑………”

그녀가 코를 훌쩍이면서 가만히 중얼거렸다.

드디어 내 진심이 전해진 걸까? 그녀를 품에서 떼어낸 후,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완전히 축축해져 있어.

그 감촉에 가슴이 아려오는 걸 느끼며, 차가워진 그녀의 뺨을 데워줄 겸 가만히 어루만졌다.

“그래, 내가 사랑하는 건 블루벨이 아니라 너야. 거짓말이 아니야. 난,”

“맞아. 그게 있었구나.”

땅을 기는 듯이 낮게 깔린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려온 순간,

“큭?!”

한 번 더 어깨가 세게 밀리면서, 또 다시 등이 바닥에 부딪쳤다.

묵직한 통증이 올라와, 당장이라도 손을 대면서 바닥을 구르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지금은 메린이 우선이야……!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바로 눈앞에 그녀의 얼굴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늘이 짙게 낀 얼굴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며,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직 그게 있었어. 아직…… 하나……”

“메린,”

“내 몸이 취향이라고 했지. 그래, 아직 그 쓸모가 있었네.”

“뭐……? 지금 그게 무슨, 우읍?!”

무슨 소리하는 거냐고 물으려던 찰나, 갑자기 입이 틀어 막혀서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내 얼굴을 꽉 붙잡은 손, 입 안을 휘젓는 혀.

갑작스럽게 닥친 격렬한 키스에, 머리가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평소였다면 그녀가 적극적으로 나를 원하는 모습에 불타올랐겠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뭔가 낌새가 수상해.

몸이 취향 어쩌고 한 직후에 갑자기 키스한다고?

메린 녀석, 설마………!

“……!”

질척이는 타액 소리에 섞여, 스르륵,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빌어먹을, 안 돼!

멈추라고 어깨를 두드렸다. 예상대로 아무 반응도 없다.

말을 하려고 해도, 그녀의 입술이 거의 틈을 안 주고 있는 탓에, 숨 쉬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강제로 떨어뜨리려고 어깨를 미는 것도 소용없었다.

얼굴을 붙잡은 손을 떼어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아아, 내 힘으론 그녀를 어찌할 수 없다.

그 진리를 새삼 깨달았다.

“하아……”

……기나긴 키스 후, 마침내 그녀의 입술이 떨어졌다.

호흡이 부족했던 탓에 희뿌얘진 시야 속에서, 그녀가 엷은 미소를 지은 게 보였다.

“어제는 여자였으니까, 남자 쪽은 쌓였을 거야. 그렇지? 풀어줄게. 그것도 내 역할이잖아. 안 그래?”

“그게 뭔……! 아냐, 메린. 안 돼. 안 된다고. 이건 아니야. 제발 부탁이야, 내 말 좀 들어줘!”

“이건 아니야? ……아, 그렇구나.”

무감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게 들리자마자, 갑자기 몸이 붕 뜬 듯한 느낌이 들며 천장이 가까워졌다.

그새 내려앉은 건가?

……아냐, 내가 다가간 거야!

메린이 날 집어던진 거라고!

“으윽!”

또 다시 등부터 떨어졌지만, 이번에는 그리 아프지 않았다.

약간 딱딱하긴 해도 충분히 푹신한 감촉이 느껴진다.

침대……!

저 녀석, 설마 내가 바닥에서 일을 치르면 안 된다고 한 줄로 알아들은 건가?

이런 망할!

여기서 벗어나야 돼.

지금 메린은 제정신이 아니야!

이대로 있다간……!

흔들리는 시야를 가다듬을 새도 없이, 옆으로 몸을 굴리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무언가가 얼굴을 덮은 탓에, 깜짝 놀라서 움직일 때를 놓치고 말았다.

시야를 가려버린 것들을 황급히 치웠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절대…… 안 빼앗길 거야…….”

완전히 탁해진 주홍빛 눈동자가,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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