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4화 〉 294화 : 한밤의 대화
* * *
종이를 긁던 깃펜을 들어, 천으로 그 끝을 스윽 닦는다.
잉크병의 뚜껑을 꽉 닫고, 안에서 새어나오지 않도록 뚜껑을 작은 천으로 덮은 후, 끈으로 묶는다.
종이 위의 잉크가 마르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할 터.
책상 위에 한 장 한 장 놓여있는 그 상태 그대로 두고서, 나는 창 밖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캄캄한 하늘에 떠 있는 건 금빛 초승달뿐.
그새 구름이 몰려온 건지, 그 밝은 샛별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그들의 몫까지 분발하고 있는 것처럼, 달 주위에는 은은한 고리가 만들어져 있다.
달무리가 뜨면 비가 온다고 하던가?
나 참, 어제까지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는데, 왜 하필이면 오늘 우중충해지는 거야?
괜히 불길하게시리.
가볍게 한숨을 쉬며 벽시계를 돌아보니, 커다란 시침이 숫자 3을 가리키고 있다.
지금이 여름인 걸 감안해도, 동이 트려면 아직 한참 먼 시간이다.
……근데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나?
꿈 때문에 강제로 깬 김에, 어제 하다 말았던 기록을 했더니 시간이 훌쩍 흘러버렸다.
덕분에 뒤숭숭하던 것도 가라앉았고, 적당한 피로감도 몰려오고 있으니, 이번엔 아무 꿈도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등불을 들고 침대로 다시 향할 무렵, 메린이 부스스 일어나 하품을 했다.
불빛 때문에 깼나?
그럼 좀 미안한데.
침대맡에 등불을 두고 불을 끈 다음, 눈을 비비고 있는 메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 밝아서 깼어?”
“아니, 그냥 눈이 떠졌어……. 몇 시냐……?”
“세 시.”
“원래 깨던 때구만…….”
그녀는 재차 크게 하품을 하더니,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내 이마를 짚어 열을 재었다.
“열 안 나네.”
“그래? 하하, 나도 꽤나 체력이 좋아졌나보네. 음…… 넌 괜찮아? 어디 아프진 않고?”
“엉? 어. 좀 나른하기만 해.”
“그래……. 다행이다.”
깊이 안도하면서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녀가 내 머리를 와락 껴안더니,
“왁?!”
자신 쪽으로 홱 당기면서 벌러덩 누워버렸다!
졸지에 그녀에게 안긴 채, 침대에 나란히 드러누운 꼴이 되고 말았다.
“야, 얌마, 갑자기 뭐하는 거야?!”
“왜? 어차피 더 잘 거 아냐?”
“놀라서 그렇지!”
“히힛.”
나 참, 모처럼 걱정해줬더니 장난이나 치고 말야…….
근데 이 자세 좀 위험한 거 같은데.
얼굴이 너무 푹신하고 따뜻해서, 머리 끝까지 따끈따끈 데워지는 거 같다.
이러다 허리 아래까지 후끈해지는 거 아닌가 했는데, 이내 꽃향기가 섞인 그녀의 체취가 물씬 풍기면서 마음속이 포근포근해지기 시작했다.
그 덕에 고개를 내밀려던 음심이 도로 저 아래로 기어들어가, 상당히 편안한 마음으로 그녀를 껴안을 수 있었다.
내가 팔을 두른 게 기쁜지, 그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내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근데 나 왜 옷 입고 있냐? 네가 입혀준 거야?”
“엉? 어, 응. 아무리 여름이라도 그…… 아무것도 안 입고 자면 감기 걸릴 수도 있잖아.”
“아, 그래? 그런 거 치곤 밑이 엄청 허전한데? 가랑이에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
“………봐줘.”
메린의 배낭에서 실내복을 꺼낸 것까진 좋았다.
아니, 이불을 걷을 때까지만 해도 내 마음은 극도로 잔잔했다.
그러나 막상 그녀가 아무것도 입지 않은 걸 보니, 여러모로 떠올라버려서……
으으, 이 녀석 실내복이 통짜로 되어 있어서 천만다행이지!
하지만 역시 브리프를 입히는 건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맨다리 하나하나를 잡아서 끼우고, 그 천조각을 쭉 올려서 입힌다고?
아~ 절대 못해.
자연히 여러가지 보게 될 텐데, 맨 정신으로 그걸 어떻게 해?
으으으,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젠장, 모처럼의 평온이……!
내 머리 위에서, 메린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는 게 들렸다.
“너 진짜 어이없는 거 아냐? 할 거 다 하고, 볼 거 다 봤으면서 뭐가 쪽팔리다고…….”
“시끄러, 임마, 네가 남자 마음을 알아?! 사… 사라……좋아하는 여자의 알몸 보고 차분하게 있을 수 있는 놈은 없다고!”
온 힘을 다해 항의하자, 그녀가 돌연 내 뺨을 감싸며 들더니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런 뒤, 입에 장난끼 가득한 미소를 띄우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안 차분하면 어떻게 되는데? 자고 있는 나를 덮치는 거냐? 아까처럼 마구마구 날뛰는 거고?”
“………야, 제발 좀…….”
“푸흡, 아하핫! 얼굴 엄청 뜨거워졌어! 알았어, 알았어. 이제 안 놀릴 테니까 삐치지 마.”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그녀는 킥킥 웃으며 도로 나를 꽉 껴안았다.
애초에 삐친 적도 없지만, 다시금 내 머리에 찾아온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에, 마음이 다시 포근해지는 것 같았다.
절대로, 삐친 적 따위 없지만!
“카엘,”
“……왜.”
“기분 풀렸어?”
“야, 내가 뭐 좀생이냐, 툭하면 삐치게? 안 삐쳤어, 임마, 네가 좀 놀렸다고 내가 삐칠 줄 알아? 절대 아니거든, 이 나쁜 자식아!”
“엉? 그 얘기가 아닌데. 역시 삐쳤구만? 내 말은, 아까 답답했던 거 풀렸냐고.”
아, 그거.
난 또 뭐라고.
잠들기 전에 느꼈던 그 진득한 행복감을 되새기며, 나는 그녀를 한층 더 꼭 껴안았다.
“……응. 네 덕분에 풀렸어. 고마워.”
“그래? 뭐, 너도 평소에 내 짜증이랑 다 받아주잖아. 그러니 나도 그래야지.”
“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이 녀석, 무슨 무시무시한 착각을……!
황급히 그녀를 마주보면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냐아냐아냐! 절대 그런 거 아냐! 너한테 화풀이했던 거 아냐!”
“어? 아니야? 답답하다면서 거칠게 하길래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럼 속이 왜 풀렸는데?”
“어, 그건……”
으, 이걸 말해야 하나?
내 입으로, 그것도 메린에게 이야기하는 건 너무 한심스러워서 죽고 싶어질 거 같은데!
하지만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여자한테 화풀이한 쓰레기가 되잖아!
젠장할, 병신이나 쓰레기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다니.
뭐 이딴 선택지가 다 있어?!
“그……, 네가 다른 누구보다 나를 먼저 생각한다는 게, 엄청나게 기뻐서…….”
그리고 나는 기꺼이 병신이 되기로 했다.
쓰레기가 되는 것보다 낫다는 건 차치하고, 메린이 자신을 화풀이감으로 생각하게 할 순 없으니까.
아니나다를까, 그녀는 뭔 멍청한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으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야, 내가 너 말고 달리 신경 쓸 사람이 누가 있냐? 그런 당연한 것도 모르고 있었어? 하여간 헛똑똑이야, 헛똑똑이. 나 참, 진짜 그것 때문에 풀린 거야?”
“………응.”
한심한 놈 대신 헛똑똑이가 되었는데, 신세가 나아진 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그보다, 이 녀석은 자신의 말이 얼마나 큰 파괴력을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걸까?
아마 모를 거야.
그러니까 ‘너 말고 달리 누굴 신경 쓰냐’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하지.
……다 알고 하는 거면 좀 많이 배신감 느낄 거 같은데.
메린은 또 다시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진짜 웃긴 놈이라니까……. 그럼 왜 답답했던 건데?”
“……말해야 돼?”
“나한테 말 못할 정도로 심각한 거냐? 아니면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종류야?”
“그……”
차마 메린의 얼굴을 보면서 할 수는 없어, 나는 시선을 내리깔고서 입을 떼었다.
“어제 시비 건 놈이, 내가 너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게 정곡에 찔려서…….”
“엥? 왜?”
“……그 놈 말대로, 나 비리비리하잖아. 예전보단 나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근육도 없고, 체력도 떨어지고. 어제는 그 놈이 방심해서 쫓아버렸지만, 정면으로 붙었으면 아마 내가 졌겠지.”
되새기고 싶지 않은 사실을 들이밀어지는 것만큼 분한 건 없다.
놈이 메린을 추잡한 눈으로 본 것보다도, 내가 그녀에겐 턱없이 부족한 놈이란 사실을 들먹인 게 더 화가 났다.
“그래서 그걸 부정하고 싶었던 거 같아. 이런 나라도…… 네가 충분히 만족할 만큼 사랑해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나 자신한테.”
“만족? ………아~ 그래서 그렇게 막 해버린 거였냐? 근데 나 불만 가진 적 없는데.”
“나 혼자 괜히 그랬지, 하하…… 미안. 아니라고는 했지만, 결과적으론 너한테 푼 거나 다름없구나. 정말 미안해.”
“괜찮아. 아까도 말했지만, 네가 나한테 해주는 거랑 똑같이 했을 뿐이야.”
……똑같다니 가당치 않아.
나보다 네가 훨씬 더 너그러운걸.
하지만 이런 말을 해봤자 안 들을 게 뻔하니, 속에 담아둔 채 그녀를 더 힘있게 껴안았다.
그러자 그녀가 배시시 웃으면서 내 머리를 마구 헤집고는, 도로 천천히 빗어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 틀렸어. 네가 무조건 이겨.”
“……뭔 소리야?”
“네가 그 시비 걸었던 놈을 이긴다고. 절대 안 져. 네가 호구처럼 져주는 게 아닌 이상, 절대 질 리가 없어.”
이거 봐. 네가 더 너그럽잖아.
굳이 그런 말까지 하면서 북돋아줄 필요는 없는데.
“메린, 위로 안 해줘도 돼. 괜히 더 울적해지거든? 하…… 몸집부터 엄청 차이 나더만, 무슨…….”
“얼씨구? 야, 몸집 크고 힘 세다고 다 이기냐? 물론 네가 그 놈보다 힘이나 기운은 약하겠지. 하지만 실전 경험은 네가 훨씬 더 많잖아.
늑대, 곰, 오우거, 하피는 물론이고, 오크도 너보다 힘세. 근데 네가 다 쳐죽였잖아.”
“검이나 슬링으로 한 거지, 맨손으로 잡은 게 아니잖아.”
내가 그때 술잔으로 머리를 갈겨버려서 그렇지, 보통은 주먹다짐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몬스터를 잡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메린은 코웃음 치면서 내 말을 부정했다.
“그 놈들도 무기 들고 덤비잖아. 몽둥이나 도끼만 무기가 아니야. 이빨과 발톱, 부리도 무기이지.
어쨌든, 네가 그 금발 떡대랑 맨손으로 붙었어도 마찬가지야. 네가 이겨.”
단호히 말하면서, 그녀는 손가락으로 내 턱을 슥 밀어올리고 눈을 마주했다.
“너 반사신경 그럭저럭 좋으니까 공격은 거진 피할 거고, 빈틈 잘 노리니까 공격할 기회는 얼마든지 잡겠지. 한 번 잡기만 하면, 주저없이 급소 갈겨버릴 테고.
단언할 수 있어. 그 놈은 절대 네 상대가 못 돼. 네가 겁만 먼저 안 집어먹으면 말야.”
네가 반드시 이긴다.
그렇게 확신하는 그녀의 모습에, 기쁨과 쑥스러움이 한데 섞여선 울컥 솟아나오는 것 같았다.
그게 밖으로 넘쳐서 더 꼴사나워지기 전에, 시선을 돌리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 빈말이라도 그런 말 들으니 좋다. 하하…….”
“엉? 진심인데.”
“………알아.”
넌 빈말을 할 바에야 그냥 입을 다물어버리는 성격이니까.
그런 그녀가 해준 말이기에 더욱 기뻤다.
“자신감 가져. 넌 전보다 훨씬 강해졌어. 전문병사나 기사는 모르겠지만, 일반 사람에겐 절대 안 져.”
“……응. 고마워.”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맞추고, 잠시 그녀와 숨결을 나누었다.
그런 뒤, 이불을 끌어와 그녀를 덮어주고서, 다시금 깊이 껴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포근한 행복감이 밀려와, 눈꺼풀이 서서히 닫히려는 찰나,
“있잖아, 카엘.”
“응.”
“나 이상해진 거 같아.”
“……엥?”
메린이 또 다시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눈이 도로 뜨여버렸다!
아니, 이 녀석은 훈훈한 분위기가 돌면 뭐 염증이라도 나나?
꼭 그럴 때만 이상한 소리를 해서 날 긴장시키네.
정말 대단한 녀석이라니까.
“뭔 소리야? 이상해지다니?”
눈을 끔뻑거리면서 묻자, 메린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떼었다.
“블루벨이 널 꼬시는 것처럼 보여.”
“미쳤냐?! ……아, 미안.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어. 아니, 근데 뭘 보고 그딴 생각을 한 거야?”
“아까 네가 그 놈한테 술 주려고 했을 때, 블루벨이 달라붙었잖아. 술 왜 주냐고. 그거 보는데, 순간 그런 생각이 들면서, 속이 좀 화끈거렸어.”
“………”
정말 모르겠어.
그 생떼부리면서 매달리던 모습이 어떻게 유혹하는 걸로 비치는 건지,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다.
메린 녀석, 혹시 겉으로만 멀쩡해보이는 건가?
머릿속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려서, 더는 예전처럼 냉정하고 냉철한 판단을 할 수 없게 된 거 아냐?
나는 그녀의 뺨을 감싸고, 그 눈을 똑바로 마주보면서 말했다.
“메린, 내 말 믿어줘. 블루벨은 날 꼬신 게 아니야. 남에게 술 주지 말라고 떼를 쓴 거지. 절대절대절대 유혹 같은 게 아니었어.”
“나도 알거든? 내가 뭐 그것도 구분 못할 줄 아냐?”
“아, 그래.”
다행이다.
미친 건 아니군.
“근데 알면서도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그래서 속이 좀 아팠는데……. 네가 그 엘프를 방으로 올려보냈잖아? 그러니까 속이 풀어지더니, 막 웃음이 나오더라.”
“세상에…….”
그래서 웃으면서 손수 나에게 튀김 먹인 거였구만?
그보다 이거 큰일났네.
질투가 없어지긴커녕 어째 이상한 방향으로 더 심해지고 있어!
돌겠네, 진짜!
“역시 이상해진 거 맞지? 나 어떡해야 되냐?”
“음…… 블루벨이 직접 그 말을 수긍하기 전까진, 네 생각을 믿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
“역시 그렇겠지……? 하…….”
한숨을 쉬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면서, 나 역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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