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6화 〉 296화 : 바다와의 만남 (2)
* * *
영주의 성에 도착하자, 문 앞에 알스 사제가 나와 있는 게 보였다.
후드조차 쓰지 않은 채, 비가 퍼붓고 있는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다.
눈 꽤 아플 텐데…….
“알스 사제님!”
배에 힘을 주고 부르자, 하늘에 머물러 있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빗물을 쓸어내리듯이 얼굴을 한번 닦은 후, 살짝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시간 맞춰서 오셨네요. 방향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시라고 들어서 조금 염려했는데, 괜한 걱정이었군요.”
고급스러운 말로 칭찬하는 것 같지만 속아서는 안 된다.
내가 방향치라고 들어서 못 찾아올 줄 알았다는 뜻이니까!
어휴, 누가 왕족인 율리아 공주를 모시던 사람 아니랄까봐, 그쪽 사람들처럼 돌려 말하고 있네.
“방향이 좀 헷갈릴 뿐이지, 눈이 먼 건 아니거든요? 멀리서도 꼭대기 지붕이 보이는데 못 찾아올 리가 없잖아요.”
“아, 그렇겠네요. 그럼 돌아가실 때가 문제겠군요?”
“……”
그러고보니 어제 부두가 아니라 신전에서 돌아갔잖아.
젠장, 아무 반박도 못하겠군.분하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어서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알스 사제는 그게 재미있다는 듯이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왜 내가 만나는 사제들은 죄다 이 모양이냐?
창조주의 자비와 사랑을 그대로 체현한 듯한 자애로운 성직자는 정말 없는 거야?
오늘 벌써 몇 번째 쉬는 것인지 모를 한숨을 또 쉰 후, 나는 그와 함께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 넓지 않은 안마당엔, 여러 병사들과 하인들이 포대자루를 짊어지고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바깥으로 옮겨지는 자루 틈으로 흙이 약간씩 떨어지는 걸 보면, 성이나 마을 어딘가에 둑을 쌓으려는 모양이었다.
그게 얼마나 소용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병사들 개개인의 사기면에서 말야.
손 놓고 가만히 있으면 괜히 더 불안해지니까.
잔뜩 긴장된 얼굴로 지나쳐가는 병사들을 힐끗 보면서, 성문 맞은편에 보이던 또 다른 문으로 향했다.
문 근처에 선 보초병들과는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었는지, 우리가 안에 들어가는 걸 누구 한 사람 막지 않았다.
“이쪽입니다.”
알스 사제는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킨 다음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와, 여길 엄청 뻔질나게 드나들었나봐.
구조를 다 외우고 있네.
감탄하면서 그를 따라 복도를 걷자, 문득빗방울이 세차게 창문을 두들기고, 거센 바람이 유리를 뒤흔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도 여러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면서, 그들의 신발굽이 돌바닥을 힘차게 때리고 있는데도, 비바람 소리를 채 지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에 왠지 모를 불안이 느껴져, 나는 묵묵히 앞을 걷고 있는 알스 사제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사제님, 왜 밖에 계셨던 거에요?”
그는 나를 살짝 돌아보더니 걸음을 늦추어, 나와 나란히 걸어가면서 대답했다.
“카엘 님을 기다리고 있었죠. 모르는 사람이 안내하는 것보단 좀더 편하실 테니까요. 겸사겸사 비도 좀 맞고요.”
“일부러 비 맞고 계셨다고요? 왜요?”
“잡념이 좀 씻어질까 싶어서요. 지금 제가 집중해야 하는 건 이 마을 일이니까요.”
겸연쩍게 웃으면서 시작된 그의 대답은, 깊은 한숨으로 마무리되었다.
그새 오늘 하늘처럼 짙은 먹구름이 낀 그의 얼굴을 보고, 나는 그가 말한 ‘잡념’이 뭘 말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율리아 님이 걱정되시나요?”
그래서 던진 의문에, 그가 눈썹을 살짝 움찔거렸다.
이미 그걸로 대답을 들은 거나 다름없었지만, 그는 곧 씁쓸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어떻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평소처럼 일과를 수행하고 계셔도 걱정될 판에, 한가하기 그지없을 연금 생활 중이신걸요. 림이나 대사제님께서 잘 돌보고 계시리라 믿지만…….”
그래도 걱정이 된다.
말소리 대신 표정으로 그렇게 말을 맺은 후, 알스 사제는 심호흡을 하듯 긴 숨을 내뱉으며 재차 말했다.
“여기서 제가 걱정한들 아무것도 달라지진 않죠. 그런 의미에서도 인어들을 곱게 볼 수가 없네요. 왜 하필이면 지금 난동을 피워서는…… 하, 이것만 아니면 지금쯤 왕성을 다 뒤집었을 텐데.”
“우와, 그거 너무 위험한 말씀 아니에요? 누가 들으면 어쩌시려고…….”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도 수틀리면 골치 아파지는데, 세상에, 왕성을 뒤집고 싶어하다니!
잘못하면 역심을 품었다고 책잡힐지도 모른다.
괜히 그 말을 들은 나까지 말야!
그러나 알스 사제는 손을 내젓는 것뿐 아니라, 아예 콧방귀까지 뀌었다.
“듣든 말든 상관없어요. 이 상황에서 제 말을 제대로 들을 사람도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아무 의미도 없거든요.”
이 마을, 이 성에 있는 누군가가 알스 사제를 고발하려면 왕성으로 가야 한다.
몬스터가 득시글거린다는 중부 지역을 뚫고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설령 근방의 다른 영주, 즉 다른 귀족에게 일러바친다 해도, 그들은 몬스터의 공세를 막느라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놈들이 대언자인 율리아 공주를 감히 지하 신전에서 끌어내어 탑에 가둘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바깥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을 이용한 것이다.
“그 분이 구금된 건 아마 밑작업일 거에요.”
“밑작업? 뭘 위해서요?”
“이 난리요. 인어가 이 마을을 대륙 침공의 교두보로 삼으려 하는 이 상황을 위해서요. 대언자님이 움직일 수 있으셨다면, 인어들을 설득하는 것 따위 일도 아니었을 거에요. 그걸 예상하고 선수를 친 거죠.”
단호한 그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수를 치다니, 그 말은 즉……
“사제님, 누가 이 일을 꾸몄다고 생각하시는 거에요?”
“물론이죠. 인어들은 대언자님이 구금된 후에야 선전포고를 했어요. 그 전까진 가만히 있다가. 설마 우연히 일이 겹쳤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카엘 님. 특히나 지금처럼, 지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알스 사제는 냉담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면서, 보초병이 지키고 있는 어느 문 앞에 섰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은 채, 나를 힐끗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서 저는 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용사라는 걸 밝히려 합니다. 그래야 당신이 저와 함께 대담 대표로 나갈 명분이 생기는 데다, 뒤에서 웃고 있을 놈들이 방심할 거거든요.”
“으음…… 방심 어쩌고는 차치하고, 제가 용사라는 걸 믿을까요?”
“믿을 겁니다. 예언이 있었으니까요.”
확신 있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그는 문고리를 힘차게 잡아당겼다.
끼이익, 육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을 향했다.
아마 다들 내가 아닌 알스 사제를 보는 거겠지.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망토 자락을 꽉 쥐었다.
“……후드 벗어야겠죠?”
“네? 어어, 그렇죠?”
“하………”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면서 안에 들어갔다.
시선들 때문에 긴장한 것도 잠시, 나는 곧 편안한 마음으로 뒷짐 지고 있을 수 있었다.
우리가 오기 전에 이미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건지, 알스 사제가 인사하자마자 서로 자신들의 편을 들어달라고 요청해대기 시작한 것이다.
곧바로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인상을 쓴 알스 사제에겐 미안하지만, 그 덕에 나는 누구의 시선도 받지 않은 채 사태를 관망할 수 있었다.
이곳은 회의실인지, 방에 있는 가구라곤 지금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앉거나 근처에 서 있는 테이블뿐이었다.
그 위에는 이 마을과 주변 지형을 그린 지도가 펼쳐져 있고, 모두들 그걸 내려다보면서 큰 목소리로 논쟁 중이다.
“지금 이렇게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닙니다! 더 늦기 전에 여길 당장 떠나야 해요!”
한쪽은 엘레브라는 이름의 기사를 위시해 성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는 주장을,
“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건 영주님 뿐이라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가신으로서 이곳을 지킬 의무가 있어요!”
그리고 리히트 경이라는 기사를 대표로, 성을 지키고 싸워야 한다며 맹렬히 주장하고 있었다.
마치 그 중간에 낀 것처럼, 테이블의 상석엔 어린 소년이 앉아 있었다.
아마 영주의 아들이겠지.
열 살이라 했던 거 같은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는 게 무척 안 되어 보였다.
그 아이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차는데, 엘레브 경이 테이블에 펼친 지도를 툭툭 건드리면서 소리치는 게 들렸다.
“현실을 보세요, 리히트 경! 저들은 작정하고 쳐들어왔어요! 설사 영주님을 돌려받는다 해도, 놈들은 여길 칠 겁니다! 경은 바다를 검으로 벨 수 있기라도 한 겁니까?! 지금 시간이 있을 때에 여길 빠져나가야 해요. 유일한 길인 이 협곡이 비에 불어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그 말에, 리히트 경이 얼굴을 찌푸렸다.
“현실을 보지 못하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레브 경. 협곡은 이미 물이 불어서 넘치고 있습니다. 말이 있는 당신과 달리, 대다수 주민들은 걸어서 움직여야 하는데, 맨다리로는 그 물살을 견디지 못해요. 설마 그들조차 버리자고 하는 건 아니시겠죠.”
“큭……! 그럼 남은 건 하나군요.”
분한 듯이 이를 간 후, 엘레브 경은 상당히 딱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투항합시다.”
“뭐요?!”
“인어들에게 항복하는 겁니다. 무작정 공격하는 게 아닌 ‘선전포고’라는 형식을 따른 걸 보면, 이곳을 순순히 내놓는 대신에 목숨을 건질 수 있도록 협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안 그렇습니까, 알스 사제님?”
그는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알스 사제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사제님께서 이 대담을 이끌어내셨으니 아시겠죠. 어떻습니까, 사제님? 인어들은 협상이라는 걸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성을 지니고 있습니까?”
기가 막혀 하는 리히트 경을 비롯해, 방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알스 사제에게로 향했다.
어떠한 기대감을 가지고 자신을 보는 엘레브 경을 향해, 알스 사제는 무감정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대륙의 대표 지성체 중 하나이니 당연히 있지요. 그러나 엘레브 경, 협상은 불가능합니다. 경께선 놈들이 선전포고하면서 했던 말을 잊으신 모양입니다?
놈들의 목적은 복수입니다. 인간을 비롯해, 대륙에 사는 모든 종족에 대한 복수. 항복한다고 살려줄 리가 없죠.”
“그건 그저 선전포고를 위해 내세운 거죠! 놈들은 그저 대륙으로 진출할 발판이 필요한 게 분명합니다. 인간을 말살할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시간을 줄 리가 없죠. 굳이 영주님을 납치할 필요도 없고요. 그게 다 항복을 종용하기 위한 게 아니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긴 해.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어가 인간에게 복수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하는 사람에겐 아마 그렇게 보일 것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몇 명이나 인어의 복수심을 믿고 있을까?
일단 두 명은 단단히 믿고 있다.
하나는 나이고, 또 다른 한 명은 당연히 내 옆에 있는 사람, 엘레브 경의 말에 곧바로 얼굴을 찌푸리며 대꾸하는 알스 사제였다.
“항복을 종용하기 위해 시간을 주고, 영주님을 납치했다? 상당히 긍정적이시군요, 엘레브 경. 저에겐 무력감과 절망에 젖은 채 종말을 맞이하라는 뜻으로 보이는데 말이죠.
오늘 대담 결과는 둘 중 하나밖에 없습니다. 평화 아니면 전쟁이에요. 그리고 안타깝지만,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고요.”
반면, 엘레브 경은 인어의 복수심을 포함해 여러가지로 믿지 않고 있는 듯했다.
그는 코웃음을 치면서 알스 사제에게 말했다.
“지나치게 비관적이신 것 아닙니까? 아, 혹시 예언 때문인가요? 이 마을이 멸망할 거라는 예언 말입니다. 하지만 그 예언은 힐데 사제님이 혼자 멋대로 말씀하신 것이죠.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예언이라고 떠드신 걸 믿으라고요?”
“예, 믿으세요. 믿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엘레브 경. 그 분이 그 예언과 함께 발견하신 징조들을 제가 확인했으니까요. 무엇보다, 마을의 멸망과 더불어 하셨던 예언이 훌륭히 실현되었거든요.”
“그게 무슨……?”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는 엘레브 경에게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알스 사제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나를 향해.
……엉? 이 흐름에서 날 소개하는 거야?
이 사제님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당혹해하는 내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알스 사제는 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힐데 사제님께선 이 마을의 멸망과 함께, 용사가 찾아오리라 예언하셨습니다. 여기, 제 옆에 선 자가 그 용사입니다. 북의 대재앙을 물리치라는 사명을 지닌 용사.”
“………”
다행히 이름을 말하면서 인사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알스 사제는 나에게 그런 틈을 주지 않은 채, 경악해하는 사람들을 보며 말을 이었으니까.
“용사가 찾아올 거란 예언은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마을은 멸망할 겁니다. 반드시.”
헛된 희망 따위는 품지 말라는 듯이, 그는 딱 잘라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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