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8화 〉 298화 : 바다와의 만남 (4)
* * *
검붉은 핏덩어리가 빗줄기에 녹아내리며 바닷물로 흘러들어간다.
팔과다리는 각각 더블릿과 바지에 가려진 탓에, 안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시체의 손가락 몇 개가 하얗게 뼈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에서 짐작할 뿐.
그런 의미에서, 시체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건 천만다행이었다.
사흘만에 물 밖으로 나온 걸 감사하듯이 부두 바닥에 입을 맞추고 있는데, 오히려 내가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물에 불은 시체, 그것도 뼈가 드러날 정도로 훼손된 시체만큼 보기 끔찍한 건 없으니까.
이 이상 악몽거리가 늘어나는 건 사양이야.
그대로 고개를 들고 알스 사제를 바라보았다.
미간을 좁힌 채 시체를 쳐다보는 그의 얼굴은, 아주아주 약간 창백해져 있었다.
어쩔 수 없지. 그 역시 본바탕은 사람이니까.
나는 재차 시체를 내려다보면서 그에게 물었다.
“영주님이신가요?”
“예.”
“씨발.”
하필이면 가장 나쁜 예상이 걸려버리다니!
혀를 차면서 다시 몸을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다.
시체가 튀어나오기 직전에 올라왔던 그 작은 물보라 위에, 하반신이 물고기로 되어 있는 여자가 고아한 자태로 앉아있는 게 보였다.
그 주위를 감싸듯이 서 있는 생물들은다리가 여럿 달려 있거나 커다란 집게발을 지니는 등, 상당히 괴상한 외양을 지니고 있다.
어쨌든 그들도 인어일 것이고, 아마 여자의 호위병이리라.
우리가 말하길 기다리는 건지, 그들은 모습을 드러낸 뒤에도 아무 말없이 잠자코 있었다.
알스 사제를 힐끗 쳐다보자, 그가 나에게 맘대로 하라는 듯이 손짓했다.
이미 다 조졌는데 뭐 어떻냐?
그런 속마음이 들려온 것 같았다.
그래서 맘대로 했다.
놈들을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인사 한 번 화려하게 하는구나, 생선대가리 년아!! 인질이 아니라 도시락으로 잡아간 거였냐?! 네 어머니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던?!”
바다에 있지만 않았으면 곧바로 조져버렸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분을 삭이며 놈들을 노려보고 있는데, 별안간 우리 바로 앞에 커다란 물방울이 떠오르면서 어떤 여자의 모습이 비쳤다.
동그란 눈과 뭉툭한 코. 가느다란 입술.
귀 대신 달린 지느러미와 푸른빛 머리카락만 아니었으면 인간 여자로 착각할 법한 얼굴이었다.
옷차림 또한 인간과 흡사했다.
긴 머리카락이 한쪽 어깨로 흘러내리고 있고, 그로 인해 훤히 드러난 반대편 어깨엔 얇은 끈이 걸쳐져 있다.
그 끈은 가슴을 감싼 천에 이어져 있는데, 해당 신체부위의 모양대로 윗부분이 둥그렇게 곡선이 그어져 있다.
한 마디로, 가슴속옷 비슷한 걸 입고 있었다.
비슷하게 생긴 암컷 리자드맨은 아무것도 안 입던데 말야.
지성체는 옷을 꼭 챙겨입는 모양이군.
그게 지성의 유무를 가르는 척도 중 하나일지도 몰라.
아무튼 물방울에 보이고 있는 이 여자는, 저편 물보라에 앉아있는 여자 인어이겠지.
목에 걸친 장신구나 호위병들이 붙어있는 걸 보면, 신분이 높은 여자인 게 분명하다.
우릴 노골적으로 깔보고 있는 시선이 뭣보다도 큰 증거였다.
그럼 이 여자가 선전포고를 한 장본인이겠군.
내 추측을 뒷받침하듯이, 알스 사제가 옆에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왕녀인 카스피입니다.”
역시 그렇군.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움직임이 보였는지, 물방울 속의 여자가 입꼬리를 비틀며 말을 꺼냈다.
“상당히 경박한 동행이구나, 사제여. 사죄한들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지? 마지막 대화를 모욕으로 매듭짓기로 했느냐?”
비웃음 섞인 말에, 알스 사제가 곧바로 얼굴을 찡그리며 맞받아쳤다.
“모멸을 받고도 잠자코 있을 줄 알았습니까? 정말로 그리 생각했다면, 앞으로 노래를 부를 땐 머리를 두드리면서 박자를 세길 권해드리지요!
카스피 왕녀, 어리석은 짓은 그만두십시오! 정녕 일족을 멸망으로 이끌려는 겁니까?!”
“닥쳐라!!”
물방울 속의 왕녀가 눈을 부릅뜨면서 소리쳤다.
“어리석은 짓이란 네놈들과 함께 선 것을 말한다! 네놈들의 꾀임에 넘어가 맹약을 맺음을 가리키는 것이니라!
현시(??)에 나와 나의 백성이 행함은, 일족이 저지른 과오의 청산이요! 네놈들의 도움을 바라며 헛되이 스러진 동포에의 진혼이며! 나의 어머니이자 주군이신 아드리아 여왕에의 위로이니라!
동맹의 위기를 관망할 것이라면, 어찌하여 맹약 따위를 맺은 것이더냐!”
왕녀는 이를 갈며 원망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들의 왕국은 용사가 나타났음을 알리는 선포식 직후에 공격받았다.
맹약을 맺은 다른 종족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왕국이 멸망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도움을 요청한 적이 없다는 부분에서 정당성이 팍팍 깎이지만, 여하튼 그들이 분노를 품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납득은 안 되지만.
“맹약을 맺지 말았어야 했다. 애초에 지상의 일에 관여해선 안 되었어! 그리 하였다면 지금도 바닷속을 자유로이 거닐고 있었을 것을……!”
“그리고 여전히 뱃사람을 홀려서 잡아먹고 있었겠죠! 세이렌이었던 그대들이 어떻게 인어로 바뀌었는지 잊으셨습니까? 그대들의 친구인 가재나 조개, 문어 등등이 어떻게 지성을 가지게 되었는지 잊으신 겁니까! 아트라토스와 맞서겠다는 용기와 결의에 대한 보상이자 축복이었습니다!”
크게 소리친 후, 알스 사제는 길게 숨을 내쉰 다음, 다시 차분히 말을 이었다.
“……카스피 왕녀, 재차 부탁드립니다. 여왕 폐하를 뵙게 해주십시오. 부상을 입으셨다면 곧바로 치유해드릴 것이고, 행여나 병을 앓고 계시다면 돌보아드리겠습니다. 탈타니스가 외로이 무너진 것에 대한 한탄이든, 원망이든, 그 무엇이든 듣고 배상하겠습니다. 그 대가로 제 목숨을 바라신다면 기꺼이 드리지요.
그러니 분노를 잠시 억누르시고, 무기를 거둬주십시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전쟁만큼은 절대로 안 됩니다!”
간절히 애원하는 그를,
“하! 네놈의 목숨 따위 모래알만큼의 가치도 없다! 네놈의 우두머리의 목이라면 또 모를까!
아아, 걱정 마라, 사제여. 원하는 대로 네놈의 목숨은 거둬줄 터이니. 네놈이 선 땅에 사는 모든 자들과 함께 말이지……!”
왕녀는 가차없이 내치며 큭큭 웃었다. 잔혹한 웃음을 띤 그 얼굴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예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영주의 시체를 봤을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역시 전쟁뿐인가?
알스 사제가 성에서 단언한 것처럼 이 마을이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면, 적어도 인어의 적개심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
아니야. 아직 완전히 포기하긴 일러.
아직 우린 제대로 ‘변명’하지 않았다.
알스 사제는 죽을 각오로 요청한 알현까지 거부당한 것에 낙담해서, 의욕이 완전히 꺾인 듯했다.
옆에서 이마를 짚으며 땅이 꺼져라 크게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럼 이제 내 차례로군.
나는 물방울 속 왕녀를 향해입을 열었다.
“왕녀님, 이 자리는 저희의 마지막 변명을 들으시기 위한 것이라 들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한 말씀 올리도록 허락해주십시오.”
“호오? 천박한 놈인 줄 알았건만 예의라는 걸 아는 놈이었구나. 그래, 좋다. 말해보거라.”
……턱을 쳐들며 입을 비죽거리는 왕녀. 그 모습에, 나는 곧바로 한숨을 쉬고 싶어졌다.
참 신기해.
종족이 달라도, 윗사람들의 태도는 하나같이 비슷하니 말야.
꼭 저렇게 거들먹거려야 속이 시원한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는 물방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귀하의 왕국이 침공 받았을 때에, 저희에게 어떠한 연락도 하지 않으셨다 들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인간은 대지에 속해 있으므로, 바닷속에서 일어난 일을 감지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왕국을 잃은 분노는 이해하지만,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왕녀님, 인어들이 적대해야 하는 건 인간이 아닙니다.”
“그래, 따로 있지.”
내 말에 맞장구를 치는 왕녀의 표정이 재차 일그러졌다.
진정한 적은 따로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인간을 치려고 한다는 건……
역시 ‘진짜 적’에 대한 생각이, 나랑은 완전히 다른 거겠지?
아니나다를까, 왕녀는 분노로 얼굴을 찌푸리며,
“그 가증스러운 종을 울려, 대재앙이 시작되었음을 알린 자. 대재앙에 맞서도록 하늘의 택함을 받은 자. 그 둘이 진정한 우리의 적이리라……! 네놈들의 목숨을 값으로, 그 두 놈의 목을 요구할 것이다! 그 자들의 피가 땅을 적시어 바다에 흘러올 때까지, 우리의 분노는 멈추지 않으리라!”
인간이 아닌, 용사의 적임을 스스로 공표하였다.
……그 천사는 알고 있었을까?
인어들이 대언자와 용사, 더 나아가 맹약 그 자체에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을.
그 모든 것을 알면서, 나에게 그들을 만나러 가라고 명령했던 걸까?
아마 알고 있었겠지.
앞날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일어나고 있던 일이니까.
기왕이면, 인어들의 기분이 상당히 나쁘다는 것도 같이 알려줬으면 좋았을 텐데.
천천히 검을 빼어, 바다를 겨누었다.
늘씬한 은검의 끝이 거칠게 넘실거리는 물 위, 물보라에 앉아 있을 왕녀를 향했다.
경악하며 만류할 거라 생각했던 알스 사제도, 곧로 역정을 낼 줄 알았던 카스피 왕녀도 잠자코 있다.
한쪽은 무표정, 다른 쪽은 비웃음을 띄우고 있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나는 대로 검을 겨눈 채, 바다 위의 왕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하죠. 왕녀님, 인어는 맹약에 반(反)한다. 맞습니까?”
“그러하다!”
“인어는 대재앙 아트라토스가 아닌 용사를 적대한다. 맞습니까?”
“아트라토스 따위 바다의 적이 되지 못하리니, 용사 따위는 필요치 않다! 대륙 어딘가에 숨어 있을 용사를 반드시 찾아내어 삼키리라!”
어쨌든 적대한다는 거군. 좋아, 알겠어.
고개를 끄덕이며,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 나를 보는 카스피 왕녀의 입꼬리는 한층 더 비틀어졌다.
“이것이 나와 나의 일족의 답이다, 인간! 비루한 변명은 더할 생각이 없느냐? 억지로 시간을 끌지 않고 곧바로 칼날을 들이밀다니, 비굴함을 보이지 않겠다는 허세이렷다.”
“반대다, 생선대가리야.”
불쾌감으로 일그러지는 왕녀의 얼굴을 노려보며, 깊이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젖혔다.
거센 빗줄기가 얼굴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눈이 아프거나 코가 막히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아무런 방해없이 외칠 수 있었다.
“똑똑히 들어라, 카스피 왕녀. 내가 바로 네년이 죽이려는 용사, 카엘 에스트렐이다! 생트집을 잡아서 인간에게 싸움을 거는 걸로 모자라, 맹약까지 거부하면서 내 목을 노려?
좋아, 이 배신자들아! 전부 다 쳐죽여주마!”
악에 받혀 소리친 순간, 검자루가 하얀 빛에 휩싸였다.
익숙하리만치 익숙한 눈부신 빛이 폼멜을, 가드를, 그리고 검신을 감싸며 빛을 뿜어냈다.
자루를 쥔 손이 저절로 약간 벌어지는 게 느껴진다.
검신이 순식간에 커지는 게 보인다.
손과 눈에 익숙한 이 모습은……!
머릿속에 그 정체가 떠오른 찰나,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대앵— 대앵—
“크흣?!”
물방울에 비친 왕녀가 고통스러운 듯이 신음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종소리를 막으려는 건지, 얼굴 양옆의 지느러미를 손으로 꽉 눌렀다.
생긴 게 좀 달라서 그렇지, 소리를 막는 동작조차도 인간과 꽤 흡사했다.
이윽고 빛이 터지듯이 흩어지면서, 널찍한 칼날을 자랑하는 성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묵직한 종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지난번 엘프의 왕 앞에 섰을 때처럼 엄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신의의 열매는 축복이며, 배신의 결실은 파멸이나니.
스스로의 앞날을 끊은 어리석음을 목도하라.
맹세를 저버린 자에게 심판 있으리.』
바다조차 잠잠하게 한 목소리가 사라지자, 종소리가 뚝 그치면서 적막이 찾아왔다.
성검은 여전히 내 손에 들린 채, 은은한 빛을 내면서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햇살?
웬 햇살?
어리둥절해하며 시선을 위로 들고서야, 나는 바다 위의 하늘이 푸르게 개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게 언제 그친 거지?
“말도 안 돼……!”
그때, 물방울에 비친 왕녀가 경악한 얼굴로 소리치는 게 들렸다.
어지간히 큰 충격을 받았는지,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말도안돼, 말도안돼, 말도 안 돼! 용사가 여기 올 거란 건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현실을 부정하듯 도리질을 하다가,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돌연 고개를 쳐들었다.
그런 뒤, 그녀는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았다.
긴장이 비치는 웃음을 띄운 채로.
“그렇다면, 큭큭, 이 마을의 멸망은 확정된 것일 터……! 네놈이 왔으니 이 마을은 멸망할 것이다, 용사!
네놈의 동족에게 원망을 받으며 절망하거라! 네놈을 보낸 신을 원망하며 죽거라!
자아, 복수의 시간이다!”
왕녀가 두 팔을 벌리며 크게 외치자, 맑았던 하늘이 곧바로 시커멓게 물들며 다시 비가 쏟아졌다.
조금 전보다도 더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는 탓에, 똑바로 서 있기도 버겁다.
바닷물이 금방이라도 부두를 집어삼킬 듯이 크게 일렁거리며, 우리에게 연신 물을 뿌려대고 있었다.
성검이 나타나기 전에 비가 퍼붓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날씨다.
심상치 않은 예감에 뒷목이 서늘해지는 걸 느낀 순간,
우르르릉—
콰앙!
굉음과 함께 벼락이 내려치며,
우우우우우——
왕녀의 뒤에서, 음산한 울음소리와 함께 거대한 물보라가 피어올랐다.
그 속에서 나타난 건 거대한 산.
“저…건……?!”
둥그런 눈알을 굴리는, 검은색의 거대한 생물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