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9화 〉 299화 : 폭풍고래 (1)
* * *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음에도, 고개를 힘껏 쳐들어야만 꼭대기가 보인다.
그저 두둥실 떠 있기만 해도 위압감이 상당한 그 거대한 생물은,
푸우우우—
꼭대기에서 별안간 물을 내뿜었다!
왠지 모르게 빗물이 좀더 뜨뜻해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그보다 고개를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겠어!
빌어먹을, 뭔 바람이 이렇게 세?!
“아하하핫! 방금 전까지 보이던 위세는 온데간데없구나, 용사여! 네놈의 그 잘난 성검으로 파도를 가를 수 있을까? 휘몰아치는 폭풍을 견딜 수 있을까!”
왕녀의 목소리는 살짝 울리고 있었다.
눈을 부릅뜨고 물방울을 바라보자, 왕녀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나울나울 나부끼고 있다.
마치 물 속에 있는 것처럼.
……‘것처럼’이 아니야.
저 비겁한 년, 물 속으로 들어갔구나!
“자아, 질주하라, 폭풍이여! 그대의 선조를 해한 후예들이 저 앞에 있노라! 그 원한을 마음껏 풀거라!”
“우우우우우—”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생물이 음산한 소리를 냈다.
질주하라는 게 무슨 뜻인지 채 깨닫기 전, 몸이 갑자기 뒤로 홱 당겨지면서 저절로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멍한 시선을 돌리자, 알스 사제가 내 왼팔을 얽고서 달리고 있는 게 보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튀어야 된다는 건 알겠어!
성검이 검집에 돌아가길 바라며 공중에 던졌다.
검이 알아서 빛덩이가 되어 검집으로 들어오는 걸 곁눈질로 확인한 후, 나는 그의 팔을 풀고서 몸을 낮춘 채 힘껏 뛰기 시작했다.
“사제님!! 저거 뭐죠?!”
“일단 뛰어요!! 부둣가까지 가야 합니다!!”
젠장, 바람 때문에 제대로 못 가겠어!
기어가듯이 가도 속도가 안 날 것 같은데……!
……그렇게 이를 악물었을 때, 두 가지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하나는 누군가가 내 팔을 홱 끌어당기며 쏜살같이 질주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콰과과과과아앙—!
뒤쪽에서 상당히 불길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궁금하긴 한데 뒤를 보면 끝장날 거 같아!
소리만 들으면 뭐가 마구마구 박살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잠시 후, 나무를 두드리던 발이 단단한 흙바닥을 딛는 게 보였다.
그럼에도 팔을 당기는 힘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쿠우웅!!
“우우우우우—”
둔탁한 소리와 함께 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억센 힘은 여전히 내 팔을 붙잡고 있었지만, 다리는 움직이는 걸 멈추고 말았다.
그럼에도 몸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아예 발이 땅에 닿지를 않고 있다.
몸 전체가 두둥실 뜬 듯한 느낌과 함께, 짭짤한 물이 입 안에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야가 멋대로 움직인다.
머리 위로 물이 쏟아지고 있다.
본능적으로 숨을 참다가, 간간이 틈을 봐서 들이쉰다.
똑바로 정신이 차려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물에 빠져 있다!
한 팔은 굳게 붙잡혀 있는 탓에, 팔 하나와 다리 둘만으로 버텨야 했다.
다행히 헤엄은 칠 줄 알긴 한데,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야말로 성난 파도가 휘몰아치고 있는 이 순간에선, 그나마 물을 덜 먹는다는 것 외엔 별 의미가 없었다.
불현듯, 무언가 말랑한 게 다리를 받치면서, 이리저리 정신없이 흔들리던 몸이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잠시 후, 시야가 한바퀴 돌면서 몸이 딱딱한 바닥을 굴렀다.
아, 진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콜록콜록! 빌어먹을……!”
딱딱한 바닥에 엎드린 채, 얼굴을 문지르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단 아는 사람은 모두 모여 있었다.
몸을 숙인 채 켁켁거리고 있는 메린, 그녀에게 한 팔을 붙잡힌 채 엎어져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알스 사제.
앞쪽으로 엎드린 블루벨에게 깔린 채로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는 로나,
마지막으로 상당히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으로 저편을 쳐다보고 있는 위슨이 있었다.
그 중에 내가 먼저 찾아갈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메린!”
메린의 팔은 각각 다른 사람을 붙잡고 있었다.
하나는 알스 사제를,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를 잡은 채로 격하게 기침하는 그녀.
그런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고서 등을 두드려주었다.
……메린이었구나.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 녀석이 알스 사제와 나를 부두에서부터 쭉 끌고 뛰었던 거야.
하긴, 그럴 사람이 얘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근데 그게 어떻게 가능했던 거지?
이 녀석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 바람 속에서 멀쩡하게 뛸 순 없었을 텐데……?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여기가 어디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일단 주변엔 집이 있는 걸 보니 마을인 건 분명한데, 왠지 평소보다 문이 더 아래쪽에 있는 것 같다.
바닥을 내려다보니 약간 오돌토돌하고 딱딱한 게, 마을 길바닥이 아닌 건 분명한데.
“어떻게 된 거야?”
이중에 가장 멀쩡해보이는 위슨에게 묻자, 그가 자신이 보던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아마 보라는 거겠지.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멀리 떨어져 있는 부둣가에 돌벽이 높이 쌓여 있는 게 보였다.
……부둣가가 이렇게 멀었는지는 차치하고, 저 돌벽은 갑자기 어디서 솟아났데?
바다가 안 보여.
그 위로 불룩 솟아 있는 시커먼 동산은 또 뭐고?
“우우우우—"
음산한 울음소리와 함께, 돌벽 위로 꼬리가 살랑거리다가 사라졌다.
꼭 인사라도 건넨 것 같다.
잠시 후, 벽 위가 검게 물들더니 물방울이 마구 튀기는 게 보였다.
쿠우웅, 하는 진동음도 강하게 들려왔다.
응, 봐도 모르겠어.
위슨을 다시 돌아보자,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위슨도 저게 뭔지 모르겠는데, 저 벽이 무너지면 끝장이야.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네.”
“아, 그래. 근데 우리 지금 어디에 앉아 있는 거냐?”
“아쿠아 등껍질.”
아, 거북이 등껍질이었구나.
즉, 물에 떠내려가던 우리 셋을 거북이가 건진 거군.
그리고 우리를 휩쓸었던 그 물살은 저 괴생명체 때문에 일어난 거고 말야.
“콜록! 하, 씨발, 진짜 존나 짜네.”
“……”
메린도 퍽 힘들었던 모양이다.
기침이 멎자마자 욕부터 날리고 있네.
로나도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니, 일단 비를 피하는 게 좋겠어.
간간이 잔기침을 하는 메린의 등을 토닥이며 위슨에게 말했다.
“여기서 얼마나 먼지 모르겠는데, 일단 우리가 묵었던 여관으로 가자. 자리가 넓은 데는 거기밖에 없어.”
“흠흠.”
위슨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등껍질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시야가 저절로 홱 돌아가더니, 바닥이 살짝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이내 주위 풍경이, 가볍게 달릴 때와 비슷한 속도로 우리를 지나쳐가는 게 보였다.
지금 타고 있는 게 거북이인 걸 감안하면, 상당히 빠른 속도라 할 수 있었다.
“우우우우—”
“……”
괴생명체가 내는 음산한 소리가, 시야 저편에서 끊임없이 들리고 있다.
부둣가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을 텐데, 왜 저 울음소리는 계속 가까이서 울리는지 모르겠네.
꼭 쫓아오고 있는 거 같아!
소름 끼치는 상상에 절로 몸이 떨리는 와중에, 톡톡, 메린이 내 팔뚝을 두드렸다.
그녀의 머리를 껴안던 팔을 풀고 얼굴을 마주하자, 한결 차분해진 눈으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야, 카엘, 아까 그거 뭐였냐? 물고기?”
“……”
이 녀석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느긋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걸까?
목소리만 따로 들으면 풀밭에서 노닥거리고 있는 줄 알겠어.
바다에선 웬 괴생명체가 날뛰고 있고, 주위에는 폭풍처럼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중이다.
조금이라도 몸에 기운을 빼면 몸이 날아가버릴 것처럼 센 바람이 불어대고 있는 거다.
이따금 번쩍번쩍 천둥번개까지 쳐대고 있고 말야.
그런데도 이렇게 침착하다니, 하여간 대단해…….
경탄 섞인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몰라. 나도 너처럼 바다 본 지 이틀밖에 안 됐어.”
“도감 같은 거 봤을 거 아냐.”
“저딴 게 실렸으면 평생 기억하고 있을 거 같은데!”
“……고래, 입니다…….”
쿨럭쿨럭, 거친 기침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래? 바닷속에 산다는 그 생물?
저만큼 큰 게 바다에 살고 있단 말야?!
바다 무서워!
화들짝 놀란 내 눈에, 알스 사제가 격한 기침 후 입가를 슥 닦는 게 보였다.
그는 목을 가다듬고서, 여전히 놀란 눈을 끔뻑이고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틀림없어요. 폭풍고래입니다……!”
갈라진 목소리로 외치는 그의 눈은, 돌벽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가 묵었던 여관, 는 조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유리창 덧문을 닫지 않고 있던 탓에, 창문이 죄다 깨져버린 것이다.
그 탓에 식당 안엔 빗물은 물론이고, 부숴진 테이블과 의자, 유리조각이 여기저기 뿌려져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다.
할 수 없이, 비교적 멀쩡한 네 사람이서 이 난장판을 조금 치우기로 했다.
물의 정령인 거북이가 빗물을 막아내는 동안, 나와 메린, 위슨, 그리고 알스 사제가 함께 부지런히 잔해를 치우고, 창의 덧문들을 닫았다.
그런 뒤, 벽난로를 지피고 솥을 올린 후, 열기가 충분히 닿는 곳에 로나를 뉘였다.
추위가 가신 덕분인지, 괴로운 듯이 찡그리고 있던 로나는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고른 숨을 쉬고 있었다.
……의식을 잃은 채로.
“너무 걱정 마세요. 그냥 정신을 잃었을 뿐이니, 조금 있으면 깨어날 겁니다.”
“예에…….”
알스 사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도 없고, 안색도 좋아진 게 얼핏 보면 그냥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그의 말대로 괜찮겠지.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역시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근데 이 녀석은 왜 기절한 거야? 블루벨, 댁이 얘를 안고 있었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놈이 돌진했어.”
블루벨은 담요로 몸을 싸맨 채 달달 떨면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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