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0화 〉 300화 : 폭풍고래 (2)
* * *
추위 때문에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블루벨이 말을 이었다.
“넌 몰랐겠지만, 너랑 그 사제가 부두에서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그 큰 놈이 돌진하고 있었어. 부두가 완전 가루가 되더라. 너희가 부두에서 벗어나자마자, 이 꼬맹이가 놈의 돌격을 정면으로 막았어. 그 벌레 때처럼 말야.”
“뭐……?”
그럼 그때 들린 쿵 소리는, 로나가 보호막으로 놈을 막을 때 났던 소리였단 말야?!
그녀는 경악에 찬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쓰러져 있는 로나를 바라보았다.
“……돌격 자체는 막은 거 같아. 놈이 튕겨나가는 걸 봤거든. 꼬맹이도 날아가서 그렇지. 내가 간신히 받긴 했는데, 역시 충격이 컸던 모양이야. 이미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어. 그 다음에 물에 휩쓸렸고.”
그 거대한 놈이 돌진하면서 일으킨 물살에 더해, 놈이 튕겨나가면서 일어난 파도가 부둣가를 덮쳐버린 것이리라.
블루벨은 그렇게 말하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말은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이 꼬맹이나 저 까만 꼬맹이 아니었으면 다 죽었을 거야.”
로나가 놈을 막아서지 않았다면, 위슨이 거북이를 불러서 우리를 건지고 늑대를 통해 돌벽을 세우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는 모두 물고기밥이 되었겠지.
그보다 블루벨 저 할망구가 지금……!
나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블루벨, 위슨을 그렇게 부르지 마.”
“뭐? 무슨 소리야?”
“까맣다고 하면 안 돼.잘못하면 큰일나……!”
그녀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얼굴 빼고 다 까맣잖아. 머리도 시커멓고, 옷도 시커멓고, 눈도 까맣지? 까만 걸 까맣다고 하는 게 뭐가 잘못이라는 거니?”
“으아악, 큰일난다니까 그러네! 검은색을 사람에 갖다 붙이면 절대 안 돼! 아니, 그냥 색깔을 붙이지 마, 그게 제일 안전하겠다!”
“하? 나 참, 진짜 어이가 없네…….”
블루벨은 스스로 말한 것처럼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내 안의 무언가가 크게 외치고 있단 말야.
절대 그런 말을 쓰면 안 된다고!
세계가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블루벨의 시선이 불편해진 탓에 억지로 고개를 돌려 위슨을 보았다.
마침 그는 솥 위에서 사발을 툭툭 털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앉아있던 자리에 마른 이파리들이 널려 있는 걸 보니, 무언가 약초 같은 걸 넣은 모양이었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블루벨의 말을 다 들었을 텐데, 위슨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묵묵히 솥을 젓기만 했다.
그런 그를 대신하듯, 그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파랑새가 블루벨에게 날아오더니 톡 쏘아붙였다.
“위슨 덕분에 산 줄 알면 제대로 이름 불러라, 변태야. 하여간 귀쟁이 새끼들은 싸가지가 없어요. 목숨 구해줬는데도 이 따위 태도로 나오니 말야.”
“시끄러, 이 깃털덩어리야, 누구 보고 변태라는 거야?! 그리고 왜 나만 해야 되는데? 너도 그렇고, 쟤도 내 이름 제대로 안 부르잖아!”
“네가 먼저 꼬맹이, 꼬맹이 지랄을 하니까 그렇지, 등신아. 나는 어쨌든, 위슨은 네가 이름 불러주면 귀쟁이라고 안 할 거다.”
“너도 하지 말라고!”
“내 맘이다, 변태 년아!”
또 다시 투닥거리기 시작한 엘프와 파랑새의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는 미세하게 떨면서 큰 숨을 내쉬고 있는 알스 사제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사제님, 저 놈이 폭풍고래라고요? 본 적 있으세요?”
“아뇨, 처음 봅니다. 하지만 놈이 나타나자마자 날씨가 이 모양이 된 걸 보면 확실해요.”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폭풍고래.
폭풍을 맞은 것처럼 험상궂게 생긴 고래가 아니다.
폭풍처럼 더러운 성질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저 폭풍을 불러올 뿐.
구름 한 점 없는 저편에 먹구름이 몰려 있는 게 보인다면.
그 속에서 번갯불이 번쩍이고 있다면.
지체없이 그곳을 떠나라.
노 대신 손으로 물을 저어서라도 벗어나라.
그리고 신께 기도하라.
폭풍을 품은 고래가 너를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그러한 훈계가 뱃사람들 사이에서 전해내려오고 있다고 말하며, 알스 사제는 김이 올라오는 물잔을 꽉 쥐었다.
“놈이 있는 곳엔 반드시 폭풍이 일어납니다. 그야말로 폭풍 속에 사는 고래이죠. 그래서 이름이 ‘폭풍고래’인 겁니다.
하지만 놈의 서식지는 바다 한가운데에요. 참치나 새우 등을 잡는 어부들이나 볼 수 있죠. 그것도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전설적인 놈이고요.”
하긴, 폭풍을 불러오는 생물이 정어리처럼 우글우글하면 상당히 곤란하지.
아니면 놈과 마주치고 살아남은 사람이 전설적으로 드물 뿐이지, 의외로 많이 살고 있는 게 아닐까?
땅 위에서도 죽을 맛이었는데, 바다 한가운데에서 폭풍을 맞아봐라.십중팔구 죽겠지.
어찌어찌 살아남는다 해도, 배가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있을 터.
수일 내에 육지를 찾지 못하면 그대로 말라죽어버릴 것이다.
아무튼 먼 바다에나 사는 놈이라고 하니, 우연히 이 근처를 지나가던 건 아니리라.
나는 희희낙락하게 웃어대던 생선대가리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런데 그런 귀한 몸이 여기 납시었단 말이죠. 역시 그 왕녀가 불러온 거겠죠? 청새치를 조종해서 도둑을 잡았던 것처럼.”
“정황상 그렇겠지만 말이 안 돼요. 인어들이 다룰 수 있는 건 물고기들뿐이거든요. 고래처럼 지성이 있는 생물을 조종할 순 없어요. 계약을 맺은 협업관계라면 몰라도.”
계약조건이 까다로워서 골치가 아프다고 여왕이 푸념했었다.
알스 사제는 그렇게 덧붙이며 물잔을 기울였다.
“그럼 저것도 협업 중인 걸까요? 왕녀는 명령조로 말하긴 했지만, 그건 그냥 싸가지가 없어서 그런 거고……. 아까 말하는 걸 보니, 같이 복수하자고 꼬드긴 것 같은데요.”
“그것도 말이 안 돼요. 인간이 잡은 폭풍고래는 딱 한 마리에요. 그것도 대충 육백 년 전 일이고, 이 해안이 아니라 좀더 남쪽, 대륙 최남단의 항구마을입니다. 여긴 그저 그때의 기념품을 뒀을 뿐이에요.위치를 헷갈릴 만큼 멍청한 생물이 절대 아니에요.”
“살다 보면 헷갈릴 수도 있는 거지, 방향 좀 틀렸다고 멍청하다는 건 조금 너무하신 거 같은데요!”
나도 모르게 발끈하고 말았다.
그치만 너무하잖아!
방향 좀 헷갈린다고 곧바로 멍청이 취급을 받다니!
길 못 찾는다고 머리 나쁜 게 아닌걸!
전혀 상관없는걸!
“네? ……아, 아아, 음, 그렇네요. 죄송합니다. 예에, 그럼요. 방향 감각이랑 지능은 아무 상관없죠. 그렇고 말고요.”
알스 사제가 곧바로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앞으론 발언을 좀더 조심해달라고 하려던 찰나, 위슨을 도와서 차를 나눠주고 있던 메린이 끼어들었다.
“아니, 상관 있지 않나? 제대로 기억을 못한다는 거 아냐. 머릿속에서 지형을 그려서 돌리지도 못하고. 그러니 멍청한 거지.”
“시끄러, 임마!”
“오냐, 돌대가리야. 닥치고 이거나 마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는 그녀의 손에서 물잔을 받아 홀짝였다.
흑. 멍청하지 않은데. 진짜인데!
시무룩해진 나를 조금도 개의치 않고, 메린은 느긋한 목소리로 재차 말을 꺼냈다.
“그 기념품이라는 거, 고래뼈로 만든 칼 말하시는 거죠? 꽤 멋있던데.”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또 다른 물잔에 뜨거운 물을 채운 후, 잔기침을 하는 블루벨에게 건넸다.
그런 뒤,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로나를 바라보며, 자신 몫의 잔을 홀짝였다.
잠시 후, 그녀의 입이 열리며 나지막한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고래도 베면 죽죠?”
“사람의 무기로는 벨 수 없어요.”
딱 잘라 돌아온 대답에, 그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여전히 시선을 로나에게로 고정한 채,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왜죠? 몸뚱이가 달려 있잖아요. 트롤처럼 재생이 빨라서 베어도 소용없는 게 아니라면,”
“아니요, 메린 님. 길이가 안 돼요. 사람의 무기는 너무 짧아서 놈의 심장을 뚫을 수 없어요. 조슈아 님이 괜히 머리를 노렸던 게 아닙니다.”
“……”
반항적인 빛이 감돌던 그녀의 눈이 일순 커졌다.
허를 찔렸다는 듯이, 그녀는 고개를 들고 멍하니 알스 사제를 쳐다보면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런 뒤, 옆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뚫고 들어가면 되지 않을까요?”
“너무 위험해요. 심장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애초에 뼈를 뚫을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드워프도 못 잘라서 포기할 정도로 단단하거든요.”
“그 조슈아 님이란 사람은 뼈 부쉈다던데요.”
“그야 창조주의 대언자이니까요. 괜히 기적이라 불리는 게 아니에요.”
……절대신의 대리자가 일으킨 첫 기적이 괴생명체 머리뼈를 부순 거라니.
몇 번을 들어도 현기증이 일어나는 거 같아.
근데 그런 역사를 가졌는데도, 교단은 딱히 무(?)를 숭앙하거나 하진 않고 있다.
전투사제를 제외하면, 다들 무기를 들고 다니거나 하지도 않고 말야.
참 신기하다니까.
메린은 아직 납득이 되지 않은 건지, 나를 가리키면서 또 말을 꺼냈다.
“그럼 이 녀석이 받고 다니는 도장은 어떻게 만든 건데요? 꽤 작던데요. 로나가 저번에 그랬어요. 카엘 녀석이 그 종이에 받는 도장은 폭풍고래 뼈로 만든 거라고.”
그런 이야기가 있었던가?
한 번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으음…… 그 이야기가……
아, 그래, 엘프의 숲에서 나왔었지.
도장이 안 보여서 자료를 찾아보니, 바다로 이어지는 호수에 던져버렸다고 해서, 인어에게 물어보려고 어느 동굴 속 호수를 찾아갔었어.
맞아, 그래. 그때 잠깐 이야기가 나왔었다.
‘폭풍고래’라는 이름을 들은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고 말야.
“아, 그거요?”
쇳물에도 녹지 않고, 어떤 무기로도 자르지 못하는 뼈로 어떻게 도장을 만들었는가?
그 질문에 대한 알스 사제의 대답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뼈로 깎았죠. 칼 만들었을 때처럼.”
“뼈? 어, 고래뼈요?”
“예. 놈의 다른 뼈를 조각칼 대신 써서 만든 겁니다. 대언자 조슈아의 숨은 작품이죠.”
그러고보니 힐데 사제가 그랬었지.
성물 취급을 받던 그 거대한 고래뼈 칼은, 같은 폭풍고래의 뼈로 깎은 거라고.
진짜로 같은 뼈가 아니면 안 잘리나보다.
“그럼 그걸 쓰면 되겠네.”
“뭐?”
어리둥절해하며 되묻는 나에겐 아랑곳하지 않고, 메린은 덤덤한 표정으로 혼자 말을 이었다.
“어디 삭지도 않았으니 얼마든지 쓸 수 있을 거야. 그 정도 길이라면 썰어버릴 수 있을 거고. 안 그래요, 사제님?”
“어…… 네?”
멍하니 되묻는 알스 사제를 향해, 그녀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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