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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312화 (312/475)

〈 312화 〉 302화 : 폭풍을 헤치며 (2)

* * *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위슨의 거북이가 아직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 빗방울이 얼굴을 때리는 대신눈앞에서 흘러내려가고 있다.

그 덕에 비교적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깎인 돌로 쌓은 벽 위, 작은 발코니에서 외치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당신은 제 남편에게서 이 마을을 지킬 의무를 받았습니다! 그걸 저버릴 셈인가요?! 남편이 베푼 은혜를 배신하려는 건가요! 어서 용사를 체포하세요! 지금 당장!!”

기껏 마음을 다잡은 위병대장이 흔들리지 않도록, 내가 곧바로 그 새된 목소리에 응수했다.

“날 죽인다고 인어들이 곱게 물러날 거 같아요?! 우리끼리 이럴 때가 아니에요!”

“입 닥쳐!! 다 네놈 때문이야! 네놈이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오늘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을!”

와, 평소에 생각하던 대사 그대로인걸?

근데 죽어달라는 말을 들은 뒤라서 그런지, 그다지 마음에 울리진 않는다.

그냥 조금 심기가 불편할 뿐이다.

되도 않는 생떼를 부리는 어린애를 볼 때처럼.

“네놈만 없었으면 영주님은 돌아가시지 않았어! 내가 또 다시 천애고아 신세로 전락하는 일 따위도 없었을 거다! 이 마을이 멸망할 거란 예언도 내리지 않았을 거고!

전부 다 네놈 때문이야! 네놈이 내 앞날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어!!”

“나이값 그만하고 체통이나 지키세요! 안 도와줄 거면 가만히 있기라도 하란 말입니다!”

“감히 누구에게 함부……”

……응?

갑자기 고함소리가 끊어지면서 테레지아의 모습이 사라졌다.

누가 끌어당기기라도 했나?

고개를 갸웃하며 발코니를 계속 지켜보았다.

잠시 후, 이번에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게 보였다.

하나는 그럭저럭 길다랗고, 다른 하나는 그의 허리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짤막하다.

일단 짧은 쪽은 누구인지 알 거 같아.

이 성의 일원 중에 로나보다도 더 키가 작은 사람은 딱 한 명, 열 살 먹은 영주의 아들밖에 없으니까.

근데 그 옆은 누구이지?

안 그대로 빗줄기가 거세어서 잘 안 보이는데, 투구까지 쓰고 있어서 진짜 모르겠어.

“용사님, 알스 사제님! 안으로 드십시오! 던트 위병대장! 성문을 여시오!”

굵직한 목소리가 울린 후, 두 사람의 모습이 한꺼번에 안쪽으로 사라졌다.

다시 고개를 내려 위병대장을 보자, 그가 마침 뒤를 돌아보며 손짓하고 있었다.

곧, 차각차각 하는 소리와 함께 성문에 내려져 있던 창살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 이제야 겨우 들어가는구만.

작게 한숨을 쉬는데, 메린이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면서 속삭였다.

“야, 진짜 들어갈 거냐? 함정일수도 있잖아.”

“그래도 들어가야지 어쩌겠냐? 여길 버리고 갈 순 없어. 놈들이 여길 가라앉힌 다음, 땅 속의 물길을 하나라도 잡아봐. 그땐 대륙이 몽땅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 거라고. 너나 나나 집이 없어져!”

집이 없어진다.

그게 내가 이 마을을 위해 움직이는 이유이다.

저 놈의 고래를 어떻게 잡을지, 놈을 풀어놓은 망할 참치 년의 다리로 뭘 해먹을지를 고민하는 이유인 것이다.

뭐, 다른 걸 들려면 들 수 있긴 하다.

이 마을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

인어들이 대륙을 망치도록 둘 수 없다.

또는, 용사의 의무로서 맹약을 배신한 놈들을 처단해야 한다 등등.

‘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가 들 만한 멋진 이유들은 얼마든지 있겠지.

하지만 그런 대의들은 썩 와 닿지 않는다.

대륙이 없어진다는 것보단, 내 집이 없어진다는 게 더 뼈아프게 다가온다.

대륙에 사는 수많은 생명들이 물에 빠져 죽을 거라는 것보단, 나 자신이 물고기밥이 될 거라는 게 더 무섭다.

……안 그래, 메린?

너나 내가 힘내서 움직이려면, 그런 작은 이유를 앞세우는 게 훨씬 낫지.

내 눈과 손이 닿는 곳을 지키기에도 버거우니까.

“집이 없어지는 건 아깝기 한데,”

그리고 메린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어차피 난 못 돌아가지 않냐?”

“………”

가슴을 푹 찌르는 말을 던졌다.

……한순간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순식간에 텅 비워진 머릿속에서,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러니까 네가 등신인 거야, 카엘 에스트렐!

메린에게 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거야?

그 애가 이 여정의 끝에서 어떤 결말을 맺게 될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놈이……!

속에서 울컥 솟아오르는 건 자책일까?

아니면 나 자신에 대한 분노?

무엇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걸 그대로 터뜨릴 때가 아니다.

보는 눈이 너무 많으니까.

그 대신 그걸 힘겹게 억누르며,

“돌아갈 수도 있어. 잘하면.”

“엥? 어떻게?”

“그건 모르지만, 음, 뭐든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 신이 날 불쌍하게 여겨서 널 돌려줄지 누가 알겠어? 우리가 엄청 일찍 간 탓에, 드래곤이 의식을 옮길 힘이 부족할 수도 있고.”

나 스스로도 믿지 않는 희망.

있을 리 없다고 부정하는 낙관.

그럼에도 미처 버리지 못하는 소망을 전했다.

웃으면서 말할 생각이었는데, 제대로 웃고 있을지 모르겠네.

……산꼭대기의 붉은 드래곤은 말했다.

영혼을 채워야만 몸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그보다 더 전에, 로나가 영혼을 채우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교감이었다.

영혼은 곧 감정이나 다름없으니, 교감을 통해 녀석의 감정이 좀더 풍부해지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희로애락.

가장 기본적인 이 감정들은, 다른 사람과 부딪치면서 좀더 복잡해지고 다채로워지니까.

그 교감 덕분일까?

메린은 여행을 떠나기 전과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블루벨도 알아볼 정도로 환히 웃기도 하고, 다른 녀석들과 스스럼없이 잡담을 나누기도 한다.

예전에는 나만 겨우 표정을 알아보고, 나 외에는 거의 입 꾹 다물고 있었는데 말야.

……하지만 그 모습이, 영혼을 얼만큼 채워서 나타나는 결과인 건지 모른다.

앞으로 얼마나 더 채워야 하는지도 모르고.

아니, 평소에는 영혼의 ‘영’자도 생각 안 하고 있지.

그저 그녀와 있는 매 순간순간을 즐기고 진심으로 대하고 있을 뿐이다.

정말로……

정말로 만약에, 메린의 영혼이 충분히 채워진 덕분에 드래곤이 몸을 빼앗는 데에 실패한다면.

“진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기적이겠네.”

“……맞아. 기적이겠지.”

어깨를 으쓱이며 덤덤히 말하는 그녀를 따라, 담담하게 보이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적은 이미 한 번 일어났다.

얻을 리 없을 거라 생각했던 메린의 사랑을 품에 담았으니까.

근데 또 다른 기적을 바란다고?

아서라. 헛된 기대일 뿐이야.

평생에 한 번도 일어나기 힘드니까 기적이라 불리는 거잖아.

이 이상을 바라는 건 헛된 욕심일 것이다.

……그래,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괜히 원망할라.

그래도 역시……

“……”

……아니, 감상에 젖는 건 이쯤으로 하자.

거의 다 올라간 창살을 보면서 남몰래 크게 심호흡한 후,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우리가 맘놓고 뭔가 하려면, 먼저 여기 사는 사람들을 전부 피신시켜야 돼. 그 전에 놈들을 상대하다가 누가 죽어봐. 내 꿈자리만 사나워지지.”

“그건 절대 안 되지.”

메린이 눈을 살짝 동그랗게 뜨면서 즉각 수긍했다.

“안 그래도 맛탱이가 갔는데, 잠까지 제대로 못 자면 더 돌아버릴 거 아냐. 어휴, 절대 안 되지.”

“뭔 소리야, 나처럼 멀쩡한 놈이 또 어디 있다고?”

“앞뒤 안 가리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놈이 어디가 멀쩡하냐?”

“얌마, 누가 들으면 오해하잖아. 네가 떨어지니까 쫓아간 거라고 똑바로 말해야지!”

그게 제일 중요한 부분이구만, 그걸 빼먹고 있네!

꼭 자결하려고 뛰어내린 것처럼 들리잖아!

그렇게 항의하자, 메린이 건조한 눈초리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대꾸했다.

“그게 미친 짓이라는 거다, 등신아.”

“사… 좋아하는 사람이 그런 일을 당하면 쫓아가게 되어 있다니까?”

“그래? 난 그럴 생각이 별로 안 드는데, 역시 널 좋아하는 게 아닌 건가?”

“다시 생각해보니 네 말이 맞는 거 같아. 내가 미친놈인 거지. 응, 그게 틀림없어.”

메린은 날 사랑한다.

그걸 부정할 바에야 내가 미친 걸 인정하는 게 낫지.

………이것도 미친 생각인가?잘 모르겠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활짝 열린 성문 안으로 들어가면서 재차 입을 열었다.

“걱정 마. 만약 성에 들이는 게 함정이라면 미친놈답게 전부 쳐죽이지, 뭐. 몬스터가 대륙 곳곳에 활개치는 마당에, 범인이 인간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겠어? 하핫.”

“위슨이 알릴 거다, 미친놈아.”

곧바로 날아온 위슨의 딴지.

그와 함께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황당해하는 시선.

그 모든 것을 한쪽으로 흘려버리며, 한두 시간 전에 들어갔던 커다란 문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번에 들어선 곳은 알현실이었다.

정면 맨 안쪽 중앙엔 의자가 딱 하나 놓여 있고, 그 뒤에 물고기 문장이 수놓인 깃발이 걸려 있다.

양쪽 벽에는 역대 영주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각 액자당 연도 두 개씩 적혀 있었다.

연도가 서로서로 맞물려 있는 걸 보니, 영주의 자리를 물려준 다음에야 초상화가 걸리는 모양이다.

근데 흰머리를 지닌 사람이 하나도 없네.

영주가 되고나서 가장 먼저 하는 게 초상화 그리는 건가봐.

……그래도 이번 대엔 좀 늦추는 게 낫지 않을까?

다시 정면, 의자에 앉아 있는 새 영주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큼지막한 의자를 다 채우지 못하고, 땅에 발이 닿지도 않고 있는 어린 소년.

그리고 그 옆에는 한 손에 투구를 든 기사가 서 있다.

조금 전엔 비 때문에 안 보였는데, 아마 저 기사가 소년과 함께 발코니에 서 있던 거겠지.

회의실에서 격론을 벌이던 기사 중 하나, 리히트 경은 우리를 향해 가볍게 목례한 후, 옆의 소년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소년이 긴장된 얼굴로 천천히 말을 꺼냈다.

“대담에 임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어려운 상황이에요. 아버님…… 전 영주가………”

한순간 소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이내 눈을 질끈 감고서 고개를 살짝 저은 후, 소년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도, 폭풍 때문에 피난 계획을 이행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부디 두 분의 고견을 들려주세요.”

“이 목을 원하시진 않는 겁니까?”

나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묻자, 소년…… 아니, 어린 새 영주의 낯빛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

이내 그는 손을 휘휘 내저으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절대 아니에요! 테, 테레지아 누님의 말은 개의치 마세요!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릴 테니……!”

“영주님, 침착하시지요.”

“앗, 죄송, 아, 아니……!”

어린 영주는 리히트 경의 말에 더욱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래도 열 살 치고는 꽤 빠르게 침착을 되찾는 걸 보면, 후계자로서 어느 정도 교육을 받긴 한 모양이었다.

그는 약간 빨개진 얼굴로 심호흡을 한 후, 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여, 영주로서 보증합니다. 걸리프는 용사님을 적대하지 않을 거에요.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용사님. 부디 힘을 빌려주세요.”

“흠…… 테레지아 님은요?”

주변을 살짝 살피면서 그에게 물었다.

사방 가장자리에는 검을 찬 병사들이, 우리가 서 있는 곳 양쪽으론 기사 두 명이 서 있다.

그러나 테레지아의 모습은 방 안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비공식적인 영주의 아내이니, 여기 있더라도 이상하지 않은데.

아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발코니도 여기, 알현실에 나 있는 거 아닌가?

혹시 상심이 커서 침실로 가버렸나?

그리고…… 기사도 하나 적은 거 같다.엘레브라고 했던가?

리히트 경과 격한 논의를 펼쳤던 그 기사가 없네.

혼자 성을 탈출해버렸나?

“어…… 누, 누님은 왜……?”

“그 분이 생각을 바꾸시지 않는 한, 조금 난처할 듯합니다만.”

정신없이 움직이는 와중에, 갑자기 포도주병으로 뒤통수를 때리려 들거나 하면 어떡해?

그럼 필히 그 여자를 후려쳐야 하는데, ‘감히 귀족을 쳤다’면서 지랄할 게 뻔하다고!

그러니 그 여자가 날 노리지 않을 거라는 확증이 필요하다.

성을 빠져나갈 때까지 침실에 가두거나 손발을 묶는 등의 확실한 처치를 해주면 제일 좋고.

그 뜻에서 말을 꺼낸 건데, 어째서인지 영주는 상당히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누님은…… 저……”

“영주님, 제가 전하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어어, 음, 예에, 리히트 경. 그리 해주세요.”

무슨 얘기이길래 저러지?

의아해하며 눈을 깜빡이고 있자, 리히트 경이 헛기침을 하고서 말을 꺼냈다.

“테레지아 아델하이트 로웬하임 님의 발언은 아무런 영향력이 없습니다. 이 성의 위병들은 물론이고, 시클로 가문을 섬기는 다른 기사들에게도 명령할 수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네? 왜요? 안주인이나 다름없는 분 아니었나요?”

나이가 차지 않아 결혼을 못해서 그렇지, 이미 안주인 대우를 받고 있던 거 같은데.

알스 사제도 그런 식으로 말을 했었고.

내 의문에, 리히트 경은 살짝 냉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이제 아닙니다. 기사 엘레브 드 마크리시트와 통정했다는 게 드러났으므로, 그 분은 그저 로웬하임의 여식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 염려치 마십시오.”

“………”

통정이라면 둘이 그냥 치근거린 게 아니라 이러저러한 것까지 다 했다는 뜻이잖아.

세상에, 아무리 그 여자가 그럭저럭 자랐다고는 해도, 아직 앳되던데…….

성인식을 치른지 몇 년 됐을 기사에게 빠진 소녀를 비난해야 할까?

아니면 성인도 안 된 소녀를 손댄 기사를 욕해야 하는 걸까?

“그래서 둘은 어찌 됐죠?”

“위층 방에 함께 가뒀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편이 여러모로 나으니까요.”

한 방에 같이 가뒀다고……? 굳이 왜?

둘이 눈 맞았으니 짧은 시간 같이 있으라는 배려…인 건 아니겠지.

뭔가 좀 걸린다.

재차 입을 열려는데, 알스 사제가 옆에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카엘 님, 지금 중요한 건 인어입니다.”

“……”

그 외의 것은 신경 쓰지 마라.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 말이 맞긴 하지만,

“전 찜찜한 건 질색이라서요.”

“카엘 님,”

“리히트 경, 그 두 사람은 어디에 갇혀 있죠? 위치 좀 알려주십시오.”

내 말에, 영주와 리히트 경의 표정이 극명하게 달라졌다.

어린 소년은 깜짝 놀라고, 장년의 남자는 미간을 크게 찌푸렸다.

역시 뭐가 있긴 있구나.

“……괘념하실 필요 없다고 말씀드린 차입니다만.”

“이 성 어디에 누가 있는지 알아야, 차후 계획을 세울 때에 차질이 없지 않겠어요? 어쩌면 위층으로 피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두 사람이 연금 중인 방을 열기라도 하면 성가시니까요.”

“……”

“응? 제가 그렇게 곤란한 질문을 드렸나요?”

고개를 갸웃하면서,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리히트 경은 잠시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아주 잠깐 아랫입술을 깨물고서 입을 열었다.

“……3층 동쪽 침실에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의자에 앉은 어린 영주를 향해 몸을 굽혔다.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영주님. 미력하게나마 걸리프와 이곳 사람들을 위해 힘을 보태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용사님!”

눈에 띄게 밝아진 소년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입가가 풀어졌다.

역시 어린애에겐 밝은 웃음이 가장 잘 어울리지.

“그럼 곧바로 이야기를 나누시죠. 리히트 경, 부탁해요.”

“명 받들었습니다. 지도를 대령하라!”

굵직한 목소리가 알현실을 울리자마자, 하인 두 명과 병사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각각 테이블과 지도를 들고 오는 걸 보면,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듯했다.

영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리히트 경과 함께 우리에게 가까이 왔을 무렵, 하인 둘이 우리 가까이에 테이블을 놓고, 병사가 그 위에 지도 두 개를 차례로 펼쳤다.

하나는 마을 전체를 그린 것, 다른 하나는 마을 주변의 바다와 협곡 너머의 지대까지 그려진 작전용 지도였다.

아마 적이 쳐들어왔을 때에 보는 거겠지.

“그럼 현 상황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리히트 경의 목소리가 진중하게 울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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