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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313화 (313/475)

〈 313화 〉 303화 : 폭풍을 헤치며 (3)

* * *

알현실에서 듣게 된 현황은 썩 좋지 않았다.

현재 성 안에 피한 마을 주민은 극히 일부뿐.

나머지는 신전이나 자신의 집에 있는 상태이다.

애초부터 외부인이던 피난민들은 죄다 신전에 모여 있고.

신전에 있는 건 그렇다 치고,왜 집에 남아있는 거지?

평생을 살던 곳이니 뼈를 묻겠다는 심정인가?

아, 어쩌면 거리가 멀어서 포기한 건지도 모르겠다.

“집들을 일일이 뒤지려면 시간 걸릴 거 같은데, 뭔가 방법 없나요?”

“보통은 성에서 경보를 울립니다만……. 날씨가 이래서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신전 종은 들릴 거에요……. 음색이 낮으니까요…….”

로나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도 애착무기를 잃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어휴, 여기서 대체품 빌려서 쥐어줘야지, 안 되겠네.

아무튼 로나의 말대로 신전의 종소리는 이런 날씨에도 들리긴 할 것이다.

낮은 음일수록 더 멀리멀리 퍼지니까.

“근데 그거 듣고 위급한 상황이라고 알까? 정각 알리는 거랑 예배 시간 알릴 때밖에 안 쓰잖아.”

“그래도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건 알 테니, 그때 집들을 찾아가면 문 열어주겠죠…….”

으응~ 그럴싸한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일단은 넘어가자.

상황을 쭉 듣는 게 먼저야.

그때, 위슨이 내 팔을 툭툭 치더니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손짓했다.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서 위슨과 함께 테이블에서 약간 떨어지자, 녀석이 파랑새를 통해 말을 꺼냈다.

“여기 있을 거지? 위슨은 바깥을 보러 갈게. 고래놈이 정중하게 물만 튀기고 있을 거 같지 않아. 그 물뿌리기도 제법 세니까 벽이 깎였을지도 모르고.”

“혼자서? 괜찮겠어?”

“어. 혼자가 편해. 냅다 튀면 되니까.”

파랑새는 위슨의 말을 전한 후, 자신의 몸에서 길다란 깃털을 하나 뽑더니 내 귓가에 폭 꽂았다.

지난번 엘프의 숲 때처럼 연락용으로 주는 것이리라.

“맞아. 연락용이다. 뭐 있으면 그리로 알려주마.”

“알았어. 아, 그리고,”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서 말을 이었다.

“……블루벨에게만 들리도록 전해줘. 3층 동쪽 침실 좀 살펴달라고.”

“왜, 그 여자랑 기사 놈 때문에? 둘이 눈 맞았다며? 귀쟁이 요즘 그런 거에 좀 예민한데.”

“뭔가 좀 걸려서 그래. 엘프이니까 소리를 듣든, 창 밖으로 들어가든 해서 알 수 있을 거 아냐. 진짜 둘이 그런 사이라면 다행이지만………”

만약 아니라면?

그 의심이 떠나가지 않고 있다.

자신의 남편될 사람이 죽은 걸 내 탓으로 돌릴 정도로 화를 낸 사람이, 사실은 기사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뭐, 그래, 그럴 수 있지.

귀족들은 연애랑 결혼이랑 별개로 생각한다고들 하니까.

하지만……

글쎄, 나라면 굳이 그런 위험을 지지 않을 것 같은데.

적어도 결혼하기 전까진 말야.

“만약 아니라면, 뭔가 일이 벌어지기 전에 막아야지. 죽이지만 않으면 상관없으니까 맘대로 하라고 해줘.”

“전하는 건 상관없는데, 굳이 그래야 되냐?”

“찜찜한 건 싫다니까.”

“하여간 특이한 놈이야. 아무튼 알았어. 간다.”

“그래, 조심하고.”

위슨은 고개를 끄덕인 후, 알현실 문 바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테이블로 돌아간 다음, 나를 빤히 쳐다보는 리히트 경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제 동료가 바닷가에 돌벽을 세워났거든요. 지금 그게 파도를 막고 있습니다. 그 돌벽 상태를 확인할 겸, 바깥 상황을 보러 가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어요.”

“아아, 예,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제법 신비한 능력을 부리신다고 하더군요. ……꼭 마녀처럼.”

“마녀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저 놈 저래 봬도 남자에요. 아, 블루벨,”

태연한 목소리로 블루벨을 부르자, 그녀가 진지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의아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파랑새가 짧게나마 말을 전한 듯했다.

“댁도 같이 가서 도와줘. 하나보단 둘이 낫지.”

“………알았어.”

블루벨은 별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위슨을 따라 밖으로 향했다.

이제 할 건 다 했으니 이 일에 집중할 수 있겠군.

살짝 후련해진 마음으로 리히트 경에게 물었다.

“혹시 여기 대포 있나요?”

“대포요? 예에, 있기야 합니다만…… 아, 그 고래 때문입니까? 이 날씨에는 무리입니다. 애초에 성에서 바다까진 닿지도 않을 터이고요.”

아잇, 젠장. 이게 안 되네.

그럼 진짜 그 뼈칼이라도 써야 되나?

아니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데……!

아냐아냐,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짧게 한숨을 쉬는데, 알스 사제가 입을 열었다.

“카엘 님께서 잠시 테이블을 떠나셨을 때 이야기한 건데, 보호의 기도로 폭풍을 뚫을 수 있습니다.”

“보호의 기도? 어, 보호막이요? 엥? 그게 비바람도 막아요?”

“그럼요. ‘나를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보호해달라’는 기도이거든요. 아마 신전에서도 지금 그 기도를 올리고 있을 겁니다. 다만,”

알스 사제는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물이 차는 건 막을 수 없어요. 돌풍이나 물살에 떠내려가는 걸 보호할 뿐입니다.”

“신전도 쭉 안전한 건 아니군요. 알겠습니다.”

일단 들을 건 다 들었다.

남은 건 앞으로 무엇을 알아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하는 것뿐.

나는 아무나 답하라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들 저보다 전문가이실 테니 아시겠죠. 우선은 어디까지 가야 이 폭풍에서 벗어나는지, 아니면 비를 좀 맞더라도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해요.”

“그건 지금 당장 확인하죠. 영주님, 병사 다섯을 데리고 가는 걸 허락해주십시오.”

곧바로 말을 꺼낸 기사는, 영주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즉각 알현실을 나섰다.

역시 기사라서 그런지 행동력 하나는 끝내주는군.

나는 속으로 감탄한 후, 이어서 말을 꺼냈다.

“그리고 한 번에 수레마차 몇 대를 움직일 수 있는지도 알아야 하고요. 어디서 모여서 출발할지도 정해야 합니다.”

“출발이야 당연히 신전이죠…… 종 치잖아요……. 여기보다 공간도 더 넓고요…….”

축 쳐진 로나의 목소리에, 영주의 또 다른 기사가 즉각 반발했다.

“하지만 성보다 지대가 낮습니다. 물이 차게 되면 신전이 더 빨리 잠길 거에요. 성문으로 향하는 길도 거의 곧은 편이고요.”

“그 대신, 신전은 마을 중앙에 있습니다. 어디에 사는 사람이건 모이기 쉬워요.”

톡톡, 지도를 두드리며 알스 사제가 말을 이었다.

“물론 이미 이곳에 있는 사람까지 옮길 필요는 없죠. 여러분도 여기 계셔야 하고요. 신전에선 마을 상황을 파악할 수 없으니까요.”

“예에, 그건 그렇습니다만…… 상황을 볼 필요가 있을까요? 비바람만 불고 있는 상태이지 않습니까?”

물 외에 막아야 하는 적이 없지 않느냐고 묻는 듯했다.

바다와 맞닿은 곳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일단 마을 쪽은 위슨이 돌벽으로 막은 것 같긴 한데…….

“뭐가 또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발린 경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곳이 지대가 더 높으니 행여나 물이 밀려오더라도 영주님은 무사하실 겁니다.

그럼 우선 수레마차 두 대를,”

알스 사제가 그렇게 말을 잇는 중, 갑자기 내 귓가에 꽂혀 있던 깃털이 부르르 떨렸다.

위슨이 연락하는 거 같은데, 으으, 이거 진짜 느낌 이상해!

표정을 찡그리며 깃털에 손을 대니, 파랑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병사를 풀라고 해! 너네도 튀어나오고!]

“엉? 왜?”

[인어가 벽을 타고 넘어오고 있어!]

“뭐야?!”

나도 모르게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빌어먹을, 그 망할 년이 뭔가 수를 썼구나!

[몇 군데 더 벽을 세워서 막긴 했는데 별 소용없을 거다. 아무튼 신전으로 와!]

뚝.

연결이 끊어질 때 특유의 소리가 들렸다.

녀석이 전할 말은 그게 전부인 것이리라.

“카엘 님?”

모두가 의아해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속이 울렁거릴 텐데, 상황이 급박해서 그런지 아무 느낌도 없었다.

“인어가 돌벽을 넘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병사들을 보내서 맞서야 해요.”

“네?! 아니, 어떻게……!”

“왕녀가 물보라를 일으켜서 거기 앉기도 했으니, 그런 비슷한 수를 썼겠죠. 아니면 고래가 날려줬던가! 아무튼 적습이에요, 바로 움직여야 합니다!”

가엾게도 어린 영주의 얼굴은 도로 창백해졌다.

겁을 먹은 건지, 눈물까지 살짝 어려 있다.

그럼에도 그는 의연하게 두 기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발린 경, 용사님과 사제님이 요청하시는 걸 처리해주세요. 리히트 경, 속히 적에 맞설 준비를 해주세요!”

“예, 영주님!”

떨리는 목소리로 명을 내리는 자신의 주군을 격려하듯, 두 기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수레마차가 물을 튀기며 힘차게 달리는 가운데, 알스 사제의 기도 소리가 조용히 들려오고 있다.

아마 우리 뒤에 있는 마차에서도 같은 기도를 올리고 있겠지.

얼굴에는 아무런 바람도 닿지 않고 있다.

돌풍을 보호해준다더니, 바람 자체를 그냥 막아버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차에 함께 탄 위병들도 그게 놀라운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주의 손으로 우리를 덮으소서. 어미새가 날개 아래에 제 새끼들을 품음 같이, 주의 날개를 우리 위에 펼치소서.”

위슨은 몇 군데에 벽을 더 세웠다고 했다.

성에서 위치를 확인한 바론, 일단 주택가는 피한 것 같은데…….

그럼에도 별 소용없을 거라고 한 건, 지금 이렇게 비가 퍼붓고 있기 때문이겠지.

만약 벽으로 사방이 꽉 막혔다면, 물이 고이게 될 테니까.

놈들이 바닷물을 가져올 수 있다면, 금방이라도 넘어올 수 있을 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지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안위하시니,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리오.”

……두려워할 건 정말로 없는 걸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아무도 모르는데, 이 사제는 자신이 올리는 기도말처럼 정말 아무것도 무섭지 않을까?

그때, 마차를 모는 위병이 신전에 다 와간다고 소리쳤다.

그 말대로, 저 앞쪽에 하늘 높이 솟은 종탑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걸 보는 순간, 내 손이 자동으로 검자루를 쥐었다.

이 빗줄기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

“……지존자시여, 나의 주인이시여, 당신의 자녀를 지키소서. 당신의 백성을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기도는 계속된다.

마차 바퀴가 구르는 소리도 계속 이어지며, 눈에 보이는 종탑 그림자는 서서히 본 형체를 드러내어간다.

……도착지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데,

어째서 긴장은 더 고조되는 걸까?

“가는 길이 사악하나이다. 그 발을 붙드시어 당신의 자녀들이 넘어지지 않게 하소서.”

“히히잉—!”

마침내 커다란 문 앞에 다다라, 말이 크게 울면서 발을 멈추었다.

수레에 올라타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아래로 내려오자, 또 다시 바람이 얼굴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사제의 기도가 멎은 탓에, 보호막이 사라진 것이다.

그 때문일까? 어째서인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무사히 신전에 도착했으니 곧바로 안에 들어가야 할 텐데, 어째서인지 수레마차 옆에서 떨어질 수가 없다.

나서면 안 된다.

비 때문에 피어오른 물안개 속으로 발을 내딛어서는 안 된다.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끝이라고, 온 몸이 경고하고 있었다.

“……우리는 주의 것. 머리털 한 올까지 모두 주를 위해 쓰이는 도구일지니,”

그런 우리의 앞을, 알스 사제가 중얼거리면서 나섰다.

망설임 따위 조금도 보이지 않는 발걸음으로 나아가며, 품속에서 작은 막대기 하나를 꺼냈다.

그가 막대기를 반 바퀴 돌리면서 쭉 잡아당기자, 고작 두 뼘 정도밖에 되지 않던 막대기가 그의 목까지 올 정도로 길어졌다.

다른 마차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차이가 있다면, 알스 사제 대신 로나가 두 눈을 금빛으로 빛내고 있다는 것뿐.

그녀의 손에는 성에서 빌린 전투망치가 들려 있다.

평소에 쓰던 철퇴만큼은 아니어도 길고 묵직해서 좋다고 고른 무기였다.

“주의 사랑하시는 자녀를 지키리이다.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끄리이다. 상처를 싸매고 품에 보듬으리이다.

그를 위해 우리를 세우시고 사랑하심을 아오니,”

쿵. 쿵. 쿵.

뒤에 선 우리를 북돋듯이 각자의 무기로 바닥을 울리며, 두 사제가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의 목숨을 다하여 이행하오리다……!!”

쿠우웅—!

알스 사제가 막대기를 흙바닥에 내려꽂는 순간,

퉁퉁퉁퉁퉁—!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은은한 빛에 부딪치며 마구 튕겨나가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눈에, 공중을 빙빙 도는 두 물체가 보였다.

하나는 세 갈래로 갈라진 길다란 창.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두 다리에 비늘이 붙어있는 갑옷차림의 병사.

물고기를 떠올리는 머리에 두 발을 지닌,

인어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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