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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315화 (315/475)

〈 315화 〉 305화 : ‘이러니 선택지를 안 주지.’ (1)

* * *

영주의 기사와 눈이 맞았다던 테레지아가, 연인을 내버려두고 신전에 있다.

그 의미는 명백하다.

특권 따위 하나도 없는 일개 평민으로선, 개미 콧구멍만큼도 궁금하지 않은 일이 얽혀 있다는 것.

그리고 테레지아 아델하이트 로웬하임이라는 소녀에겐, 이제 비호해줄 힘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먼저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다.

나는 두 사람을 향해 그곳에 있으라고 손짓한 후, 문 앞에 꽂혀 있는 성검을 뽑아서 위병들과 교대하듯이 나가려……고 했는데 뭐야, 이거 왜 안 뽑혀?!

“야, 이……! 나와, 새꺄! 지금 바빠 죽겠구만, 뭐 하자는 거야?!”

이를 악물고 안간힘을 써도 빠지지 않는다!

와, 이거!

꼭 땅바닥에 힘주고!

버티는 느낌인데!

“끄으으……!”

……희한하네. 어째 당기면 당길수록 안으로 들어가는 거 같아.

잠시 손을 놓고 성검을 살펴보니, 진짜로 칼날이 땅 속으로 좀더 들어가 있었다!

아니, 진짜 어이가 없네!

이 놈이 갑자기 왜 이러지?

아, 설마……

“이, 이 자식, 이제 와서 내가 용사의 자격이 없다고 시위하는 거냐? ‘이 검을 뽑는 자, 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이리라.’ 뭐 이런 의식이라도 하려고?! 왜 하필 지금 지랄이야, 나중에 해!”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그야 당연하지. 검이니까.

입도 안 달린 쇳덩어리가 어떻게 말을 하겠는가?

나는 그렇게 검에게 말을 거는 미친놈이 되었고,옆에 선 이름 모를 사제의 안타까워하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면서,자괴감과 오기에 힘입어 다시 검자루를 잡았다.

이기든 지든 등신이 된다면, 승리한 등신이 낫다고 그랬어!

팔 빠질 각오를 하고 다시 당기려는 찰나,

“야야, 카엘, 저기 신기한 거 있다!”

메린이 눈을 빛내면서 경쾌한 발걸음으로 다가와선, 나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근데 너 뭐하냐? 바닥에 검은 왜 꽂고 있어?”

“반대야, 반대! 뽑으려는 거다! 이 놈이 지 혼자 박혀서는 안 나오고 있다고!”

“그래? 넌 여기 있어야 하나보지.”

시원스럽게 답하는 메린이었다.

어…… 내가 여기 있어야 한다고?

그 생각은 못해봤는데.

그치만 지금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는걸!

우리 쪽에 동원된 위병은 여섯 명 밖에 안 되는걸!

나머지는 영주의 병사들과 함께 마을에 넘어온 인어들을 상대하러 갔는걸!

위슨이 파랑새의 소리 조절 능력 때문에 바깥으로 못 나가는 지금, 나라도 나가서 분주하게 뛰어야 하는데……!

“야야, 포기해. 그냥 검도 아니고 성검이잖아, 뭔가 의도가 있겠지. 설마 괜히 생지랄하는 거겠냐? 그냥 여기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더 생산적일 거다. 종이라도 치든가.”

“하…… 그래야 하나? 아오, 진짜.”

검자루를 홱 놓고 한숨을 쉬었다.

성검만 아니었어도 발로 찼을 텐데!

메린은 그런 내 팔을 잡아당기며 다시 빙긋 웃었다.

“그보다 카엘, 잠깐 나와봐. 신기한 거 있어!”

“뭔데?”

대답 대신, 그녀는 히히 웃으며 나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대로 신전 문 바깥으로 나오자,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의 세기가 조금 약해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길거리 한가득 피어 있던 물안개도 약간 옅어져 있다.

시야가 맑게 개였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정도면 뭐가 튀어나와도 속수무책으로 당하진 않겠지.

기청(??)의 기도……

비를 그치게 해달라는 기도가 효과를 본 모양이었다.

신기한 게 이걸 말하는 건가 했는데, 메린 녀석은 생선대가리, 아니 인어 병사들이 엎어져 있는 데로 나를 데려갔다.

새로운 놈들이 찾아오지 않는 걸 보면, 종소리 때문에 마을 어딘가에서 바닥을 구르고 있는 모양이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나저나 시체들이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사지가 다 붙어 있거나 셋으로 쪼개져 있거나.

전자는 가슴이나 목 부분에 칼집이 나 있고, 후자는 목과 상반신, 그리고 하반신으로 말끔하게 나뉘어져 있다.

나는 아주 깔끔하게 토막이 나 있는 시체 한 구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가 했지?”

“어? 어, 맞아. 어떻게 알았냐?”

“너 말고 누가 저러냐.”

갑옷까지 종이 자르듯이 썰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메린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사지 멀쩡한 시체보다, 바닥을 구르는 대가리 숫자가 훨씬 많고 말야.

사지 멀쩡한 시체들은 아마 위병들이 만든 거겠지.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모르니까, 급소만 빠르게 푹푹 찌른 거다.

그리고 몬스터를 더 많이 상대해본 메린은, 한 발 더 나아가 확실히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트롤이나 리자드맨처럼 신체재생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겠지.

인어에 대해선 아는 게 없으니까 말야.

뭐, 딱히 뭐라 할 생각은 없는데……

아니, 어떻게 여섯 명보다 한 명이 더 많이 해치울 수가 있지?

그것도 세 토막을 내면서!

정말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근데 뭐가 신기하다는 거람?

설마 또 처음 보는 생물이라고 뱃속 까본 건 아니겠지?

“저 놈이랑 저 놈 좀 봐. 차이점이 보이냐?”

“엉……?”

녀석이 가리키는 두 시체를 번갈아 쳐다본 후, 어깨를 으쓱였다.

“하나는 생선 닮은 머리이고, 하나는 생선 대가리네. 좀 신기하게 생기긴 했다.”

“닮은 놈이 먼저 죽었거든? 생선 대가리는 맨 마지막에 죽였고. 근데 이 생선 대가리, 원래 없었다가 갑자기 튀어나왔어.”

“………뭐?”

“딴 놈들 해치우고 저 놈 끝장내러 갔더니, 그 전에 구르고 있던 놈은 없어지고 이 생선 대가리가 있더라.”

원래 바닥을 구르고 있던 인어가 없어지고, 이 생선 대가리가 있었다고?

그 인어가 이 놈을 두고 튀기라도 했다는 건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메린이 꺅꺅 재잘대며 말을 이었다.

“와,나 이런 몬스터 처음 봐! 야야, 이거 손 봐. 손가락 사이사이에 달린 거 물갈퀴지? 개구리 손보다 더 못생겼어!”

“얌마, 개성 있게 생겼다고 해야지. 너 지금 개구리랑 이 놈 둘 다 욕한 거야, 알아?”

“이것도 인어인가?”

“그렇겠지.”

카스피 왕녀 옆에 서 있던 그 해괴, 아니 독특한 외모의 인어들을 떠올렸다.

가재 무늬 얼굴에 눈코입 달리고, 두 손 대신 집게발을 가진 놈도 있었는데, 생선대가리에 물갈퀴 달린 손을 가진 놈이 왜 없겠는가?

음…… 그래도 뭔가 좀 걸리네.

진짜 이렇게 생긴 인어도 있다고? 이건 인어보단피쉬맨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 거 같은데.

알스 사제가 물고기 인어는 죄다 상반신은 인간에, 하반신은 물고기였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건 뭍으로 올라온 모습을 본 게 아닐 테고…….

뭐, 나중에 생각해야지.

지금은 사람들을 옮기는 게 급선무이니까.

“고마워, 메린. 기억해둘게. 혹시 모르니까, 네가 주택가 도는 수레마차랑 같이 가라.”

“아니, 바깥으로 가는 거 타기로 했어. 성 밖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아, 로나가 다른 호위 없이 주택가를 돌겠대. 보호막 범위가 더 넓기도 하고, 인어들이 덤벼도 죄다 해치울 수 있고, 또 유사시엔 직접 문 부수고 주민들을 끌고 나올 수 있으니 더 나을 거라던데.”

뒷말이 심각하게 불안해서 황급히 수레마차를 세워둔 곳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미 알스 사제가 맡은 것 외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엘시아 사제가 나를 따라가라고 지시한 그 이름 모를 사제도, 어느새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아마 내가 메린에게 끌려갈 때 혼자 수레마차 쪽으로 간 것이리라.

거참 행동력 하나는 진짜 끝내주네.

부디 마을 사람들이 고분고분하게 집을 떠나길 바랄 뿐이었다.

“우우우우—"

“……”

종소리가 작아진 탓인지, 폭풍고래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다.

그러고보니 바닷가는 괜찮을까?

인어들은 종소리 때문에 못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저 고래는 아직 건재하다.

카스피 왕녀랑 같이 돌벽을 부술 궁리를 하고 있을지도 몰라.

으으, 살펴야 할 게 천지구만!

저 놈의 검이 왜 쓸데없이 뻗대서는……!

내가 대체 여기서 뭐 할 게 있다고?

진짜 종이라도 치고 있어야 하나?

한숨을 쉬면서 다시 신전으로 돌아왔다.

“난 수레마차 지키고 있다가 출발할게.”

“아, 응. ……메린, 잠깐만.”

“엉?”

곧바로 뒤돌아서 나가려는 메린을 불러세우고, 주위를 살피면서 가까이 다가갔다.

피난민들은 짐 챙기느라 바쁘고, 사제들은 그런 피난민들을 돕느라 바쁘며, 위병들은 신전 바깥을 지키거나 내부 질서를 유지하느라 정신이 없다.

즉, 아무도 우릴 보지 않고 있다……!

의아해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메린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부디 무사하기를.

그렇게 빌며 입술을 떼고, 그녀를 살포시 껴안으며 속삭였다.

“……조심해야 돼. 알았지?”

“지금 누가 누굴……… 으응, 아니다. 알았어, 조심히 다녀올게. 너도 여기 조심히 잘 있어.”

핀잔을 주려다 생각을 바꾸었는지, 그녀는 나지막이 말하면서 나를 힘껏 껴안았다.

그런 뒤, 내 뺨에 입을 맞추더니 배시시 웃으면서 바깥으로 나갔다.

……나 참,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보드라운 감촉이 아직 남아있는 뺨을 어루만지며 돌아섰다.

음, 왠지 좀 더운 거 같은데 그냥 여기 서 있을까?

아니, 그래도 그건 너무 농땡이 까는 거 같잖아.

괜히 성검 주위를 서성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문득 예배당 문 바로 앞의 작은 복도 옆쪽,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눈길이 간 순간,

“………”

뺨에 손을 올리고 있는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두 아가씨가계단 위쪽에서나를뚫어져라쳐다보고 있었으니까!!

대체 언제부터, 아니아니, 방금 전까진 정말로 아무도 없었는데?!

서, 설마 본 건 아니겠지?

하지만 저 뚱한 눈초리……!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다고 말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어!!

순식간에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어어, 저기, 그, 우, 위층에 계시라니까, 왜……?”

“이 아가씨가 너랑 꼭 이야기하고 싶으시다고 하셔서. 근데 딱히 뭐라고 할 생각은 없는데 말야.”

블루벨이 무언가 질겅질겅 씹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젠 그냥 대놓고 하는구나. 왜 이마에 키스하니? 입술 부르트게 물고 빨면서 혀로도 서로 포옹하고 하시지, 왜?”

“이, 이런 데서 어떻게 그러냐, 이 변태야! 애초에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는 건데, 그렇게 진하게 할 리가 없잖아!”

“이런 데가 아니었으면 했을 거란 거구나. 그래, 그러시겠지.

……야, 좋냐? 누구는 고향에 애인 두고 와서 보고 싶어 죽겠는데 염장이나 지르면서 실실 쪼개고 말야. 엉? 그렇게 좋아?”

“어. 좋아.”

주저없이 대답해주었다.

그러자 블루벨은 잠시 넋이 나간 것처럼 나를 멍하니 쳐다보더니,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는 바닥에 벌러덩 드러눕더니 몸부림을 치면서 고래고래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앙! 왜 이딴 고문을 당해야 하는 거야아아! 나도 애인 있는데에에! 나도 물고 빨고 부비적대고 싶은데에에! 보고싶어보고싶어보고싶어, 으아아아, 외로워어어!”

“이건 또 뭔 발작이야, 얼른 안 일어나?!”

바닥을 손발로 마구 두드려대는 미친 엘프 할망구에게 손을 뻗자, 그녀가 나를 향해 허공에 발길질을 하면서 빽 소리질렀다.

“꺼져, 새꺄, 꺼져꺼져꺼져! 다 너 때문이잖아, 이 나쁜 새끼야!! 아침에도 괜히 나만 욕 먹고!! 내가 뭘 그리 잘못했냐, 이 새끼야!!

아아아아! 씨발, 술 땡긴다아아아! 아아아! 부럽다아아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생난리를 치는 엘프를 내려다보고 있자, 문득 위슨이 성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요즘 블루벨이 ‘그런 거’에 예민하다더니, 그게 이런 뜻이었나보다.

“돌겠네, 진짜.”

며칠 집에 다녀오라고 해야 하나…….

근데 그럴 틈이 있어야지.

이젠 얼굴을 가리고 세상 떠나가라 울부짖는 170살짜리 할망구를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 파랑새가 준 깃털을 귓가에 꽂은 블루벨이 코를 훌쩍이며 중얼거렸다.

“다녀올게…….”

“어어, 응. 조심해.”

팅팅 부은 눈가를 비비면서, 터덜터덜 문을 나서는 블루벨을 배웅한 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다시 신전 안으로 들어왔다.

……머리 식힐 겸해서 바닷가 좀 보고 오라고 보냈긴 한데, 진짜 괜찮을까 모르겠네.

저렇게 축 쳐져 있다가 위험해지는 건 아니겠지?

재차 크게 한숨을 쉬면서 위층으로 올라가자, 벽 쪽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던 테레지아가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나는 그냥 앉아 있으라고 손짓한 후, 그 의자의 맨 가장자리에 앉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흠흠, 여기도 천장에 그림이 그려져 있군.

중앙에는 커다란 빛이 자리하고 있고, 주위 가장자리에는 산천초목과 여러 종족들이 서로 모여 있는 그림이다.

아마 빛이 있기 때문에 나머지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리라.

멍하니 그 그림을 계속 바라보면서, 나는 입을 열고 나지막이 물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요?”

“……”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막상 말하려고 하니 입이 안 떨어지는 모양이다.

어차피 달리 할 일도 없어, 천장 그림에 그려진 종족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인간, 엘프, 드워프, 인어, 유니콘, 그리고…… 뭐지?

얼굴이 하얗게 칠해진 사람이 그려져 있는데, 거리가 좀 떨어져 있는 탓에 잘 보이지 않는다.

난간에 바짝 붙으면 더 잘 보일 거 같은데.

살짝 보고 올까 고민하기 시작할 무렵, 옆에서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해요.”

“뭐가요?”

“제가 한 말들…… 사과드리고 싶어요.”

“뭐 하러요?”

“……”

또 다시 침묵.

슬쩍 옆을 보니, 테레지아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무릎 위에는 두 손을 올리고, 서로 포개어 꽉 맞잡은 채로 미세하게 떨고 있다.

아마 손수건이 있었다면 그걸 구기고 있었겠지.

분한 걸까? 귀족도 아닌 놈이 수치를 주려 한다고 말야.

어쩌면 아랫입술도 꽉 깨물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착각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아니, 애초에 사과를 안 했으면 좋겠어.

개같이 망한 사람의 사과만큼 무의미한 게 또 있을까?

“무언가 해주길 바라고 말씀하시는 거면, 그냥 그 용건이나 말씀하세요. 맘에도 없는 사과하시면서 동정 구하려 하지 마시고.”

“그,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정말 진심으로……!”

“그럼 더더욱 하지 마세요. 이런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지금 테레지아 님의 상황에선 진심이 빛을 바래네요.”

“………”

세 번째 침묵.

고개는 여전히 떨구고 있지만, 두 손은 꽉 맞잡아져 있는 대신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다.

아니, 축 늘어져 있다고 해야겠지. 두 어깨처럼 말야.

어쩌면 내가 초장부터 잘라버린 탓에 의욕을 잃은 건지도 모른다.

그럼 나야 좋지.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실례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그녀가 몸을 기울이고서 내 손목을 콱 잡아챘다.

덕분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녀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비로소 보인 테레지아의 얼굴은, 무척 당황해하는 빛을 띠고 있었다.

“뭐 있으신가요?”

“그…… 저기, 그러니까……!”

아무래도 무의식적으로 내 손을 잡은 모양이다.

그녀는 급하게 할 말을 찾는지, 시선을 이리저리 튀면서 허둥지둥해하고 있었다.

그러다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한결 차분해진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고마워요. 그 엘프분에게 들었어요. 당신이 저를 찾아가보라고 하셨다고……. 덕분에 치욕을 당하지 않았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인사는 블루벨에게 하세요. 저는 그저 확인하라고 했을 뿐입니다. 당신을 도운 건 순전히 그 할망, 아니 블루벨의 의지였으니까요. 그럼, 이만 놓아주시지요.”

“왜죠……?”

손을 놓기는커녕 오히려 더 힘을 주면서 그녀가 중얼거렸다.

“왜 감사도 받지 않으시려는 거죠? 제가 이런 꼴이기 때문인가요? 실질적인 보상도 주지 못하는 사람의 고마움 따위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건가요……?”

착각이 크시네.

나는 그녀가 붙잡은 손을 직접 떼어내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뇨. 받을 만한 일을 안 했거든요. 저는 그저 석연치 않은 게 불편해서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마침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에게 확인해보라고 한 거고요.”

블루벨이 없었다면 이 일이 끝나고 나서야 확인했을 터.

그리고 진상을 알게 된 후, 한숨을 쉬면서 잠깐 안타까워한 다음, 그대로 내 갈 길을 갔겠지.

어쩌면 이 아가씨가 당한 일에 화도 좀 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가엾다는 생각은 들지라도, 이 아가씨를 도와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고.

“당신의 사정을 들을 마음도 없고, 그 상황에 개입할 마음은 더더욱 없어요. 권력투쟁 같은 거에 엮이기 싫거든요. 그러니 당신 일은 알아서,”

“………세요.”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길래 되물으니, 불현듯 그녀가 내 손을 두 손으로 꽉 잡으면서 입을 열었다.

“저를 같이 데리고 가주세요.”

“싫어요.”

생각하기도 전에 곧바로 말이 튀어나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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