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316화 (316/475)

〈 316화 〉 306화 : ‘이러니 선택지를 안 주지.’ (2)

* * *

예배당 2층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손이 잡힌 채 멀뚱히 서 있는 나.

그리고 내 손을 잡고서 망연해하고 있는 테레지아.

나는 원래 할 말이 없는 건데, 이 아가씨는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음, 내가 너무 딱 잘라 거절했나?

근데 솔직히 말이 안 되잖아. 고생한 적 없을 귀족 아가씨를 어떻게 데리고 가?

세수나 목욕할 때 말고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보고, 침대 말고 다른 데에서 자본 적도 없을 사람인데.

……뭐, 이런 이유를 떠올리기도 전에 싫다는 말이 튀어나간 건, 나 스스로도 좀 놀라고 있긴 하다.

그래서 아직도 멍하니 나를 쳐다보는 테레지아에게 말했다.

“저나 제 동료들은 편하게 다니지 않고 있어요. 마을에 머무는 것보다 노숙이 더 많죠. 천막 치고 바닥에서 잔다고요. 요즘 대륙의 북부와 중부 둘 다, 성채나 요새 외에는 몬스터에게 속속들이 멸망하고 있다던데, 그럼 더더욱 노숙하게 되겠죠.”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북쪽 산이다.

고향을 들를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륙 최북단에 있는 커다란 산으로 가는 것이다.

자연히 중부를 통과해서 북부로 올라가게 되겠지.

몬스터의 공세가 그렇게 심각하다면, 멀쩡한 성채가 있더라도 머무르기 어려울 터.

잘 들여보내주지도 않을 거고, 설사 들어간다고 해도 제대로 머무를 데를 찾기 힘들 거다.

각지에서 피난민들이 몰려들었을 테니까.

그러니 아마 계속 노숙을 하게 될 거고, 몬스터가 많아졌으니 밤에 자다가 천막 바깥으로 튀어나가는 일도 많아지겠지.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아가씨를 데리고 다니기엔 너무나도 위험이 크다.

“음식도 거칠어요. 세이지나 로즈마리 같은 기본적인 허브 외에는 향신료도 없죠. 무엇보다도, 우리는 싸우러 가는 겁니다, 테레지아 님. 그냥 세상 구경하고 다니는 게 아니라고요.”

“그, 그건 저도 알아요! 제 말은, 여행동료로 삼아달라는 게 아니라……!”

“어디 데려다 달라는 거죠? 압니다. 알고 말씀드리는 거에요. 어떤 목적이든, 우린 아가씨가 버틸 수 있는 일행이 아니에요.”

이 아가씨가 신체적인 고생을 한 적이 없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내 손을 덥썩 잡았을 때, 그 손바닥이 무척 부드러웠으니까.

손가락도 가느다랗고.

굳은살 하나 잡혀 있지 않은 곱디고운 손.

무기를 익히지 않은 건 물론이고, 설거지나 빗자루질 한 번 해보지 않은 손이었다.

그러한 사람이 마차도 없이 어떻게 여행을 버티겠는가?

그것도 나 빼고 죄다 정신나간 놈들 틈에 껴서.

……사실 위슨의 배낭에 집어넣어버리면 해결되는 문제이다.

블루벨이 몸소 증명했듯이, 시간감각이 꼬이는 거 말곤 산사람이 들어가도 별탈 없으니까 말야.

하지만 엮이는 것 자체가 싫으니 말 안 해야지.

“그러니 차라리 사제님들께 도움을 구하세요. 알스 사제님은 이 일이 끝나면 아마 수도로 가실 테니, 그를 따라서,”

“그건 안 돼요.”

테레지아는 내 말을 자르면서 힘없이 손을 놓은 뒤, 고개를 다시 떨구고서 말을 이었다.

“알스 사제님은 마을 멸망의 예언을 듣자마자 영주…… 전대 영주님께 주민들이 피할 데를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하셨어요. 다행히 여기서 하루 정도 걸리는 곳에 계신 영주님이 도움을 주시겠다고 응하셨죠. 그땐 이미 전대 영주님이 변을 당하신 뒤라, 제가 대신 감사하다고 답장을 보냈어요. 그때는 안주인 노릇을 하던 때였거든요.”

그러나 지금의 테레지아 아델하이트 로웬하임은, 시클로 가문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훗날 아내로 맞이하려 했던 전대 영주가 죽은 시점에서, 그녀는 그저 가족을 잃은 열 여섯 살짜리 소녀에 불과한 것이다.

방패막이 없어진 외부인 따위, 물 밖으로 홀로 튀어나간 물고기나 다름없다.

다시 물에 넣어줄 손이 없는 이상, 그대로 숨이 막혀 죽거나 다른 포식자에게 먹힐 뿐.

그리고 테레지아는 정말 말 그대로 잡아먹힐 뻔했던 것이었다.

“알스 사제님이 수도로 돌아가시는 건, 피난민들이 그 성채로 간 걸 확인한 뒤일 거에요. 말이 하루 거리이지, 수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걸어가는 건데 이삼 일은 걸리지 않겠어요?분명 그 사이에 엘레브 경에게 도로 잡힐 거에요!

그 사제님이 처음부터 절 보호해주지 않을지도 모르고요!용사님도 들으셨잖아요? 사실은 저희가 죽든 말든 아무 상관도 없다고 말씀하신 거!절대로 같이 갈 수 없어요!”

그런 말을 하긴 했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그 기사가 그렇게 싫으세요? 같은 귀족 아니에요?”

“격이 맞지 않아요. 로웬하임은 서북부의 수호자, 변경백이었어요. 변경을 지키는 백작으로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어요. 집안 문제가 겹쳐서 삼 년 전에 멸문되었지만, 영토는 아직 살아있어요.

그리고 그 영토들은 모두 로웬하임의 마지막 딸인 제 것이에요. 그저 지금은 다른 사람이 관리하고 있을 뿐이죠. 영지도 없는 기사 따위가 감히 넘볼 몸이 아니라고요.”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녀는 지금 바람 앞에 놓인 촛불이나 다름없다.

그냥 훅 불면 끝장나는 거지. 실제 목숨이 말야.

근데 테레지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새 주군을 깍듯이 모시고 있는 그 기사님의 행동이 이상해지는데 말이지?

“당신이 그렇게 귀한 분이라는 걸, 리히트 경이 모를 것 같진 않은데요. 자신이 차지하지 않고 남에게 양보할 정도로 너그러운 사람도 아닌 것 같고요.”

“엘레브 경은 새 영주…… 로버트의 삼촌이에요. 아마 저를 갖는 대신, 제 영토 권리를 로버트에게 양도하기로 했겠죠. 방법은 여럿 있거든요.”

……화제를 돌리는 게 좋겠군.

나는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머리를 부여잡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으으, 생각하지 말자!

“그럼 달리 갈 데라도 있어요?”

“따로 없지만, 영주라면 누구든 저를 거둬줄 거에요. 이용가치가 있으니까요. 아니면 로웬하임과 관계가 있던 다른 가문에게 연락할 수도 있고요.

그러려면 저들과 다른 성채로 가야 해요. 거기 신전에 잠시 피하면서 방도를 찾아볼 생각이에요.”

빠른 말투로 쭉 이야기한 후, 테레지아는 다시 내 손을 덥썩 잡았다.

그리고는 간절한 눈길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애원했다.

“제발 부탁드려요, 용사님! 그저 빼앗기기만 하고 끝나고 싶지 않아요!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면, 몇 년이 지나더라도 반드시 갚겠어요! 로웬하임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요!”

“그런 거 필요 없는데요…….”

부담스럽게시리…….

그리고 거듭거듭 말하지만, 높으신 분들과는 아예 연관이 안 되는 게 가장 좋다.

나쁜 일로는 두 말할 것 없고, 좋은 일이라 해도 엮이지 않아야 한다.

길 가다가 고급 실크드레스 입은 아가씨가 손수건을 떨어뜨리는 걸 보더라도, 그냥 못 본 척하고 지나가야 하는 거다.

어떤 의도이든 손수건을 건드는 순간 끝장이야……!

만약 일이 잘 풀려서 아는 사이가 되었다고 해봐.

정적이라고 하나? 반대편 귀족에게 괜히 찍혀서 귀찮아질걸?

신분 높은 사람과 연이 생겨서 좋아해도 되는 건 같은 귀족뿐이라고.

나 같은 평민은 그저 꿈을 꾸는 걸로 만족해야 한다.

절대로 그 꿈이 이루어져선 안 되는 것이다.

벌꿀보다도 더 달콤한 만큼, 그 뒤에 찾아올 씁쓸함도 몇 배로 더 클 터.

책은 절대 무(無)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설령 이야기책이라 해도 말야.

로나가 이따금 들려주는 지하 신전 수도사들의 이야기가 그 증거이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당신 일에 연관되고 싶지 않아요. 귀족 일은 귀족이 알아서 해주세요. 정치다 권력이다, 그런 머리 아픈 일에 연루되기 싫습니다. 안 그래도 돌겠구만…….”

“그 심정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용사님, 당신은 이미 발을 들인 거나 마찬가지에요.많은 상류귀족들, 그리고 국왕 폐하와 왕비님이 모인 자리에서 선포식 했다면서요!”

“………”

………아, 맞다.

그딴 거 했었지.

내 손을 붙잡고 있는 테레지아의 두 손을 살며시 떼어낸 후,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양손으로 나 자신의 무게를 받친 다음,

“아아아아아! 씨바아아아아!”

소리를 죽이면서 절규하기 시작했다.

젠장, 생각해보니까 그렇네!

심지어 이름도 다 까발려졌지?!

그 때문에 기억력 좋은 귀족님들한테 정체 들켰었잖아!

다행히 얼굴은 기억 못하는 거 같지만!

아아아, 이건 아니야!

이래선 기적이 일어나도 엄청나게 귀찮아질 거 아냐!

그래도 역시 메린과 같이 이후를 살아간다는 기적이 일어나면 좋긴 한데!

“……”

………잠깐.

그래, 귀족님들은 내 얼굴을 몰라.

워낙 흔하게 생긴 탓에, 다들 이름만 기억하고 있잖아.

왠지 좀 울적해지긴 한데, 어쨌든 이름만 알려져 있다면 바꾸고 살면 그만 아냐!

하하, 뭐야, 별 거 아니네.

아무 걱정없이 매일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할 수 있겠어.

“휴, 괜히 쫄았네.”

“……혼자서 뭘 좌절하시다가 다시 일어나신 건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당신은 이미 정치판에 발을 들인 거나 마찬가지에요. 용사 일을 마치시는 순간, 손을 뻗어오기 시작할 거라고요. 그러니 저를 도와주세요. 제가 힘을 얻으면, 당신을 지지해드릴게요!”

“아뇨, 됐습니다. 그들이 손을 뻗기 전에 숨어버리면 되니까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테레지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앞에 주저앉고서 다리를 붙잡았다!

으아악!

이 아가씨가 진짜 가지가지 하네?!

“지금 뭐 하시는 거에요, 이거 안 놔요?!”

“도와주시겠다고 할 때까지 안 놓을 거에요! 설령 걷어차신다고 해도, 절대로 반드시 결단코 놓지 않을 거라고요!”

“돌겠네, 진짜! 몇 번을 말씀드려야 돼요?! 엮이기 싫다고요!”

이런 망할, 이걸 진짜 확 뿌리칠 수도 없고!

테레지아도 그걸 눈치채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어깨를 밀면 밀수록, 내 다리를 감은 두 팔에 힘을 꽉 주면서 더더욱 매달렸으니까!

“그럼 절 로웬하임의 여식이 아니라, 열 여섯 살 계집애로 봐주세요!”

“아니, 그건 또 뭔……!”

“나이 많은 남자한테 시집가기 싫어요! 서른 셋은 그나마 성이라도 있었지, 이번 스물 여덟짜리는 손바닥만 한 집이랑 말 한 필 밖에 없다고요! 싫어어어!”

엘레브 경은 새로 영주가 된 그 아이의 삼촌이라고 하지 않았나?

즉, 전대 영주의 친형제라는 거잖아.

근데 왜 생각보다 가진 게 없지? 친형제가 아닌가?

아니, 그게 나랑 뭔 상관이야.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서 잡념을 떨쳐버렸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생떼를 부리는 테레지아를 보니, 왠지 그 나이대의 동네 여자애를 보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그러고보니, 술집에서 그 촌장 아들 새끼한테 매달리던 여자애가 하나 있었지.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애원했던가?

마침 나랑 테레지아의 자세도 그거랑 비슷하군.

염병할.

“하……… 알았어요, 알았어. 도와드리면 되잖아요. 얼른 일어나요, 안 좋은 기억 떠오르니까.”

“저, 정말이죠? 사내대장부에 용사이시니 두 말하시진 않겠죠?!”

“안 해요, 안 해.”

한숨을 쉬며 내던지듯 대답하니, 테레지아가 크게 안도해하는 얼굴로 웃으면서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손수건을 꺼내어 자신의 얼굴을 닦는 동안,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위슨을 찾았다.

내 배낭을 맡긴 것도 있지만, 테레지아의 부탁을 들어주려면 녀석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긴 의자에 앉아서 하품을 하고 있던 위슨을 데리고 위층으로 다시 올라오자, 테레지아는 얼굴도 옷매무새도 다시 말끔해져 있었다.

나한테 매달린 적 따위 없다는 듯한 도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태세전환 참 빠르다.

뭐, 그래야 살아남겠지.

홀로 어깨를 으쓱인 뒤, 나는 위슨의 배낭에서 내 배낭을 꺼내고, 거기서 또 지도를 꺼내어 펼친 다음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전대 영주님이 연락했다는 성채가 어디에요?”

“여기, 레드힐이에요.”

그녀가 걸리프의 북동쪽에 표시된 점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점이 제법 큰 걸 보니, 수도만큼은 아니어도 꽤 규모가 되는 성채인 듯했다.

“그럼 거기 빼고……… 흠…… 여기나 여기, 둘 중 하나로 가시면 되겠네요.”

레드힐이라는 곳의 정반대쪽에 있는 두 점을 가리켰다.

하나는 모이트라 적혀 있고, 다른 하나는 베르탱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모이트……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아무튼 두 곳 다 색칠되지 않은 점이 그려져 있다.

성채라는 표시이니, 이 난리 속에서도 아직 건재할 가능성이 크다.

레드힐보다는 작긴 하지만, 어차피 신전에 잠시 몸을 의탁한다고 했으니 어디를 가든 상관없겠지.

테레지아는 내가 가리킨 두 곳을 보더니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둘 중 어느 곳이든 괜찮아요.”

“좋습니다. 당신의 신분을 증명할 건 가지고 계신가요?”

“네, 성을 나올 때 전부 가지고 나왔어요.”

그렇게 대답하면서, 그녀는 드레스 허리자락에 매여 있는 가죽주머니를 살짝 두드렸다.

블루벨과 함께 성을 나설 때부터, 여길 완전히 떠나기로 마음 먹었던 모양이다.

정말 철저하군.

어디 가도 잘 살아남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위슨에게 물었다.

“위슨, 벤투스만 혼자 이 두 곳으로 보낼 수 있어?”

“위슨은 여기 있고? 너무 멀어서 안 돼. 협곡 바깥이 한계다. 그 이상은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고, 잘못하면 연결이 끊겨서 모습이 흩어져버릴 수도 있어.”

“멀다고? 하지만 전에 미로에선…… 아, 그땐 나랑 연결되어 있다고 했지. 이 아가씨는 안 돼?”

테레지아를 가리키며 묻자, 위슨은 그녀를 뚱한 눈으로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더러,”

퍼억!

위슨이 파랑새를 바닥에 패대기친 탓에 말이 끊겨버렸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이랴?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는지 다 알 거 같은데.

조심스럽게 테레지아를 돌아보았다.

아니나다를까, 몸을 꼿꼿이 펴고 앉아서 정면을 보고 있는데, 그 두 눈에는 생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다.

아…… 충격이 엄청 큰가 봐…….

하긴 대놓고 더럽다는 말을 들었으니…….

안타까운 마음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몸이 아니라 영혼이 더, 아야! ……불순물이 많아서 정령이 이을 수 없어.”

“그럼 나는 왜 된 건데? 용사라서 그런 거냐?”

일단 영혼이 깨끗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닐 거다.

사제처럼 수양하면서 산 것도 아닌데 깨끗할 리가 있나.

아마 성검 때문이겠지.

그러나 파랑새는 나를 보며 고개를 옆으로 까닥이더니,

“너? 넌 맛탱이가 가서 그렇지, 딴 놈들보단 맑은 편이야.”

상당히 뜻밖의 말을 던졌다.

영혼이 맑은 편이라고? 내가?

아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미간을 찌푸리면서 파랑새에게 대꾸했다.

“눈 삐었냐?”

“욕한 것도 아닌데 왜 뜨악해하냐, 미친놈아. 넌 말이지, 흙탕물이야. 정기적으로 진흙이 쏟아부어지고 있는 흙탕물. 딴 놈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불순물이 둥둥 떠다니는데, 넌 맑은 물에 일부러 갖다 붓고 있어.”

“뭔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모르면 말고. 아무튼, 넌 그 맛탱이 간 영혼에 더해서 숲이 은인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니 어느 정도는 정령과 이어질 수 있지.”

은인이라…….지난번에도 그런 말을 들은 것 같다.

근데 진짜 내가 뭐 했다고 은혜를 느끼는 걸까?

도통 모르겠어.

뭐, 그 덕에 낚시가 잘 되고 물을 더 빨리 찾으니 좋지만 말야.

아무튼 거리가 멀어서 안 된다면, 걸리프에서의 일이 끝난 뒤에야 이 아가씨를 데려다 줄 수 있다는 게 된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테레지아 님, 잠시 눈 감고 계세요.”

“네? 어어……. 네, 알았어요.”

테레지아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순순히 눈을 감았다.

나는 위슨의 배낭을 그녀의 머리 위에서 거꾸로 돌린 다음,

쑤욱.

그대로 쭈우욱 내리면서 집어넣었다.

배낭을 다시 본래 방향으로 돌릴 때, 발이 좀 버둥거리긴 했지만 금방 제압할 수 있었다.

“음음, 말끔하군.”

“위슨은 딱히 상관없는데, 그 아가씨한테 귀띔은 해줘야 되지 않았을까?”

황량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는 위슨을 향해, 나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배낭을 내밀었다.

“해봤자 안 믿을 게 뻔한데, 뭐. 또, 괜히 주구장창 설명했다가 나중에 피곤해지기만 할걸? 이런 사람은 말이지, 이용가치가 보이는 건 뭐든지 써먹으려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산단다. 항상 조심해야 돼.”

“막무가내로 저지르는 미친놈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인 거 같은데.”

“어허, 떽! 막무가내라니, 음해하지 말거라! 위슨아, 이게 다 아가씨에 대한 안전과 편의를 최대로 고려한 결과란다.”

이러면 우리가 없을 때에 엘레브 경에게 끌려갈 일도 없고, 불편한 여행길을 걸을 필요도 없다.

우리도 테레지아를 지킨다고 인원을 쪼개지 않아도 되니, 이보다 서로에게 더 좋은 길이 어디 있겠는가?

위슨은 내 말에 뚱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먼저 계단 아래로 내려가버렸다.

파랑새는 입 한 번 뻥끗하지 않았지만, 위슨 녀석은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어휴, 미친놈.’ 이라고.

훗, 역시 어린애로군.

이 어른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다니.

이제 예배당 위층에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왠지 모를 해방감에 크게 기지개를 켜며, 난간에 다가가서 천장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아까 뭔지 잘 모르겠던 종족이……

흠흠, 창백한 얼굴에 뾰족한 송곳니라…….

……봐도 모르겠네. 뭔 종족이지?

고개를 갸웃하며 위층을 뒤로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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