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4화 〉 314화 : 바다에서 올라온 무언가 (3)
* * *
세상 모든 일은, 사람 마음먹기에 따라 달렸다고 했다.
이 상황도 마찬가지야.
내가 원래 힘없는 병신이 아니라,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나서 일시적으로 못 움직이게 된 거지.
아니면 촉수 피하다가 미끄러져서 삐었던가.
………음, 아냐, 이건 안 되겠어.
초마다 마음이 깎이면서 울적해지는군.
그냥 필요성에 집중하는 게 훨씬 낫겠다.
나는 메린의 눈을 진지하게 보면서 재차 말을 이었다.
“시간이 없어. 놈이 바로 신전을 무너뜨릴 거야! 내 다리랑 팔이 되어줘, 메린. 내가 네 검이 될게!”
“……”
진심을 담아 그렇게 전했는데도, 메린은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정말로 괜찮다고 또 한 번 말하려는 찰나, 그녀가 진지하게 나를 마주보며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그래, 이러면 됐지.
저 민머리 촉수생물을 끝장내는 게 훨씬 중요하니까.
남몰래 씁쓸히 웃으며, 다시 두 손으로 검자루를 꽉 쥐었다.
이내, 메린이 내 손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받치고, 내 허리를 한층 더 깊이 안으며 꽉 붙드는 게 느껴졌다.
이거 검이 아니라 창이 된 기분인데.
살짝 가라앉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내 귀에, 그녀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번에도 이거랑 비슷하게 했었는데. 갑자기 생각나네.”
“저번……?”
“까마귀 잡을 때.”
까마귀……?
눈을 두어 번 끔뻑이고서 겨우 떠올렸다.
위슨이 살던 섬에서 잡놈 악마를 해치울 때의 모습을.
놈이 뿜은 저주 때문에 쇠약해진 나를 대신해, 메린이 내 손을 붙잡고 놈을 반으로 쪼개버렸던 것을.
……그렇구나.
지금 우리의 모습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아.
그저 몇 가지 차이만 있을 뿐.
우리는 오늘 공중에서 낙하하는 게 아닌, 지상에서 뛰어오를 것이다.
그녀가 붙잡고 휘두를 내 손은, 쇠약해 있긴커녕 오히려 그때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우리는 서로 마음이 이어져 있다.
그러니 그때보다도 더 굳게 확신할 수 있어.
이 싸움은, 우리가 이긴다……!
“메린.”
“엉.”
“단숨에 쳐죽이자!”
“당연하지……!!”
웃음 섞인 외침과 함께 그녀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놈을 향해 질주했다.
우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민머리 놈은 환희에 찬 함성을 지르며 팔을 쳐올렸다.
아마 지붕을 때리려는 심산이리라.
메린은 살짝 방향을 틀어, 신전 벽을 향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깎인 돌로 쌓인 벽에 한쪽 발이 닿는다.
이윽고 그 발에 힘을 주고 튀어오르며, 다른 쪽 발을 내밀어서 벽을 밟는다.
그렇게 한 발짝, 한 발짝.
사선으로 벽을 타며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끄르르……!”
단숨에 지붕에 올라온 우리를 발견한 모양이다.
놈은 마침 잘됐다는 듯이 어깨를 떨며, 공중에 쳐올렸던 팔을 그대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피하려고 하면 피할 수 있을 터.
그러나 메린은 오히려 몸을 살짝 굽히며 공중으로 힘차게 뛰어올랐다.
“……!”
이 녀석, 이대로 팔을 베어버릴 심산이야!
너무 무모한 거 아냐?
하지만 메린이잖아.
당연히 할 수 있겠지!
문득 성검의 검신에 눈이 갔다.
그 끝 너머에 있는 민머리 놈의 얼굴이 보인다.
여전히 그림자 속에 묻혀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어째서인지 멋대로 몸이 굳으려 했다.
……괜찮아.
내 손을 감싼 포근한 온기가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때, 놈의 호박빛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심연을 품었다고 해도 좋을 법한 어둠이 일렁거리는 것 같아, 소름이 쫙 돋았다.
그와 동시에 바라기 시작했다.
놈의 저 눈이 흐려지기를.
그래서 두 번 다시 바깥을 보지 못하게 되기를 빌었다.
그 기분 나쁜 눈동자가 비추는 마지막 풍경은, 네놈 자신이 하얗게 불타는 광경이 될 거다, 대머리 새꺄……!!
검신이 빛을 내기 시작한다.
우리를 향해 내려오는 팔 때문에 드러워진 어둠 속에서, 성검이 환히 빛나며 눈앞을 밝혀주고 있었다.
“이야아아!!”
메린은 나를 붙잡은 채 몸을 틀고, 내 팔을 아래에서 사선으로 크게 휘둘렀다.
사악—!
화르륵!
눈앞이 밝아지며 하얀 불꽃이 크게 타오른다.
시야가 탁 트여오고 빗줄기가 다시 얼굴을 때리기 시작한다.
뼈에 걸리는 느낌도 없이 썩둑 잘린 팔뚝이, 신전을 비껴가며 다른 집을 뭉개는 게 보였다.
……그보다 이 녀석, 착지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슬슬 아래로 떨어지려는 느낌에 저절로 눈이 꽉 감기려는 순간, 메린이 내 손을 놓으면서 크게 외쳤다.
“카엘! 내려찍어!”
“큭……!”
눈을 부릅뜨고서 검을 고쳐 쥐자마자 아래로 찍었다.
곧바로 그녀가 다시 손을 꽉 붙드는 게 느껴지면서, 동시에 들끓는 비명이 귀를 후벼 파고 들어와 속을 흔들어댔다.
생선이 썩은 냄새가 풀풀 풍겨오는 탓에, 또 다시 구역질이 꾸물꾸물 올라오려 했다.
입술을 깨물어 그걸 참으면서 칼끝을 보니, 성검이 민머리 놈의 팔에 푹 찍혀 있다.
흠, 놈이 다른 쪽 팔을 휘둘렀던 건가?
메린은 그걸 놈에게 들러붙을 기회로 삼은 거고?
그 생각이 미친 다음 순간, 시야가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윽……!”
저절로 눈이 질끈 감겼다.
침착해라, 카엘. 속을 다스려!
여기서 입 밖으로 꺼내면 여러모로 끝장이야!!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아랫입술을 한 번 더 물면서 눈을 떴다.
민머리 놈이 한쪽밖에 남지 않은 발목으로 용케 껑충껑충 뛰면서 발광하고 있는 게 보인다.
그러나 메린에겐 그 발버둥이 아무런 문제도 안 되는지, 나와 함께 검자루를 꽉 쥐고서 그대로 팔을 따라 질주하기 시작했다.
“끄르라아아아—!”
놈의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린다.
그야 당연하지.
우린 지금 놈의 팔에 하얀 불꽃으로 된 선을 쭉 그으면서 목을 향해 뛰고 있으니까……!
메린이 성검을 뽑아 내었다.
다시 성검을 고쳐 쥐어, 칼날을 앞으로 향하게 한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키득 웃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마치 손 대신이라는 듯이, 그녀가 몸을 굽히며 내 머리에 얼굴을 문질렀다.
“야, 나 믿냐?”
“안 믿고 별 수 있냐?”
“히힛.”
재미있다는 듯한 웃음과 함께, 메린은 놈이 발악하듯이 휘두르는 촉수 수염을 베거나 뛰어넘으면서 한차례 더 빠르게 내달렸다.
곧바로 나무통만큼이나 쓸데없이 굵직한 목이 가까워진 순간, 그녀가 발을 크게 차면서 앞쪽으로 도약했다.
푸욱.
눈 깜짝할 새에, 검신이 놈의 목을 찌르며 끝까지 쑥 들어가버렸다.
가드에 박혀 있는 구슬이 반짝이자, 수액처럼 줄줄 새고 있던 노란 체액이 화륵 타오르며 말라버리는 게 보였다.
그럼 칼날이 폭 들어간 이 안은 어떨까?
아마 뜨겁다는 말로는 부족하겠지.
“————!”
정신이 아득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놈이 몸을 마구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러다 앞으로 엎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메린……!”
“걱정 마!”
메린은 자신 있게 외친 후, 검자루를 꽉 붙잡은 그대로 놈의 목줄기를 따라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인간으로 따지면 목젖이 있을, 정면 중앙을 가로지르며 반 바퀴 빙 돈 것이다.
자연히 놈의 고개가 뒤로 젖히고, 그 커다란 몸뚱이가 뒤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메린은 놈의 반대편 어깨에 도착한 다음, 또 다시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나 믿는다고 했지?!”
“네가 물으니까 왠지 조금 흔들리는데!”
“아하핫! 이미 늦었어!”
아니, 늦고 자시고 할 게 없지.
네가 날 붙잡고 있는 시점에서 이미 끝났는걸.
텅 빈 마음으로 생각하며, 그녀가 내 허리를 두 팔로 감싸며 몸을 돌리는 게 느껴졌다.
빙글빙글.
아, 왠지 알 거 같아.
이 다음에 내가 어떻게 될지.
“가서 죽여버려!!”
그녀가 열띤 목소리로 외치기 무섭게, 몸이 아래로 빠르게 떨어졌다.
아니, 그냥 쏜살같이 휙 날아갔다.
아니아니, 진짜 화살처럼 휙 날아가서 폭 꽂혔다!
어디에?
민머리 놈의 민머리…… 맨들맨들한 이마에.
어우, 내 이럴 줄 알았어.
메린 저 녀석, 날 쓰라고 했다고 진짜 가차없이 써먹는구만!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초점을 맞추자, 놈의 이마 중앙에 성검이 반쯤 푹 들어가 있는 게 보였다.
아, 근데 혹시 팔에 이상이 생겼나?
얼얼한 걸 넘어서 감각이 없어진 거 같은데.
일단 자루는 놓치지 않고 있으니 됐지, 뭐.
멍하니 생각하며, 놈이 부릅뜨고 있는 호박빛 눈동자 하나를 보았다.
그 속에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게 보인다.
그 중에 공포도 섞여 있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하얗게 불타버려……!”
온 체중을 실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칼날이 끝까지 쑥 들어가면서, 놈의 머리가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저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듯한 비명이 귀를 푹푹 찔러댄다.
그 소름 끼치는 울림에, 눈앞이 살짝 희뿌옇게 흐려졌다.
약간 감각이 돌아온 팔을 깨물어서 정신을 다잡으며, 놈이 진동을 멈출 때까지 계속 검을 꽉 쥐었다.
그리고 잠시 후, 놈의 머리가 땅에 푹 젖히고, 그러기가 무섭게 하얀 불꽃이 작렬하며 놈의 몸을 집어삼켰다.
그 불길 가운데에 있는데도 뜨겁지 않은 것에 혀를 내두르며, 나는 놈의 머리에서 성검을 뽑아내고 폴짝 뛰어내렸다.
“아으으……”
기운이 좀 빠진 탓에 한두 발짝 앞으로 휘청거리는 걸,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섰다.
민머리 놈을 돌아보자, 몸이 불꽃에 휩싸여선 끝부분부터 하얀 재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누가 보면 봉화 피운 줄 알겠군.
커다란 흰색 횃불이 된 놈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이며 주변을 살폈다.
메린은 어딨지……?
“메린? 어딨어?”
“여기.”
대답이 돌아온 쪽을 돌아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눈을 비빈 후에 자세히 살펴보자, 메린이 바닥에 철푸덕 누워있는 게 보였다.
설마 착지를 잘못했나?!
이따금 비틀거리는 발을 채찍질하며 황급히 다가갔다.
메린은 두 팔을 활짝 벌린 채로 드러누운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아, 하, 콜록! 아, 괜찮아, 괜찮아.”
내 표정을 읽은 건지, 그녀는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실실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구만! 어디 다친 거야?”
“그냥 숨이, 찰 뿐이야.”
“이쪽 발 크기가 좀 다른데?”
“살짝, 삔 거,콜록! 삔 거 같긴 한데, 괜찮아.”
“살짝은 개뿔! 다른 데는 괜찮고? 어, 아니야. 말하지 마. 일단 숨부터 고르자.”
잔기침을 하며 숨을 헐떡이는 메린을 끌어안고, 그 등을 토닥이며 슬슬 쓸어주었다.
혹시 몰라서 다시 민머리 놈이 있던 곳을 돌아보니, 놈의 몸뚱이가 벌써 절반 정도 없어져 있다.
만에 하나라도 다시 일어날 일은 없겠지.
놈을 해치웠다. 완전히.
……그래, 우린 이번에도 무사히 살아남은 거야.
“네 덕분이야.”
깊이 안도하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서 거친 숨을 쉬는 그녀의 뺨을 감싸고, 피로감으로 찬 두 주홍빛 눈동자를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다 한 거야, 메린. 하하…… 진짜 굉장해. 너 진짜 너무 대단한 거 아니냐?”
이걸 아무도 못 봤다는 게 정말 아쉬워.
나도 같이 움직였으니까 제대로 봤다고는 할 수 없다.
이 녀석이 움직이는 걸 옆에서 봤으면 얼마나 굉장했을까!
벅차오르는 감정을 웃음으로 바꾸며, 품 안의 메린을 한결 더 깊숙이 껴안았다.
“……그래도 역시 네가 무사한 게 가장 기뻐. 정말 다행이야.”
그렇게 속삭이며 목에 입을 맞추자, 그녀가 간지럽다는 듯이 몸을 꼼지락거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격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어깨를 붙잡듯이 턱을 걸치고, 다시금 천천히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세찬 빗소리 속에서도, 이따금 잔기침을 뱉으며 괴로운 듯이 크게 몰아쉬는 소리가 품 속을 울리는 게 똑똑히 들려왔다.
아까 눈도 그렇고, 그녀가 안 그런 척해도 사실 무척 지쳤다는 걸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숨 돌릴 틈도 없이 마구 뛰었잖아.나를 안아들고서 말야.
종국엔 내 몸을 던지기까지 했고.
이렇게 껴안고서 등을 토닥여주는 게 정말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조금이라도 빨리 안정을 되찾기를 바라며 손을 움직였다.
“후우…… 하……”
차츰차츰, 메린의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품 속을 울리던 잔기침 소리도 점점 뜸해지더니 곧 완전히 사라졌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시간이 점차 길어지고, 그 소리도 서서히 낮아져갔다.
마침내 귀에 빗소리와 그 음산한 고래 울음소리만 들려올 무렵, 메린은 나에게 완전히 몸을 맡긴 채로 긴 숨을 내쉬었다.
“후우……… 으…… 몸에 힘이 안 들어가……. 졸려…….”
“괜찮아. 조금 자.”
“조금……?”
“어. 조금. 아직 안 끝났으니 뭔 일이 생기면 깨워줄게.”
중간에 끼어든 문제를 처리했을 뿐, 완전히 일이 해결된 건 아니다.
메린에겐 미안하지만, 하루를 마치고 푹 쉬기에는 아직 한참 먼 것이다.
“그럼…… 조금 잘 테니까……”
이미 절반쯤 잠이 든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며, 그녀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쭉…… 꼭 껴안아줘…….”
“……”
“따뜻하고…… 심장 두근대는 소리…… 편하니까…….”
가슴에 뺨을 부비며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솟아올라오는 것 같았다.
“……으.”
어쩌지? 귀여워.
방금 그거 뭐야, 엄청 귀엽잖아!
아, 미치겠다.
지금 상황에 맞지 않는다는 건 아는데, 지금 당장 마구마구 키스하면서 내 품 안에 폭 가두고 싶어.
완전히 푹 잠들도록 마구 사랑해주고 싶다……!
자는 동안 꼭 껴안고 있어달라니.
게다가 그걸 뺨을 비비면서 조르다니!
돌겠네, 진짜.
이 녀석, 이런 거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어쩌면 아까 메린 때문에 몸에 지펴졌던 열기가, 아직 희미하게 남아있던 건지도 모른다.
그 잔열이 되살아나버린 게 분명해.
아아, 메린.
지금이 전시상황이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우리가 폭풍이 몰아치는 바깥이 아니라 아늑한 방 안에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우우우우—"
……그리고 저 고래 새끼가 눈치 있게 닥치고 있어줬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야.
놈의 음산한 울음소리에, 행복한 상념에서 힘겨운 현실로 끌려올라오고 말았다.
나는 진득한 아쉬움을 담아 한숨을 푹 내쉬며, 거의 잠들기 직전인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나지막이 말했다.
“알았어. 그러고 있을게. 걱정 말고 쉬어.”
“히히…….”
내 대답에 만족스러운 듯이 배시시 웃은 후, 메린은 곧바로 새근새근 잠에 들었다.
그런 그녀를 안아들며 조심스럽게 일어서자, 그녀가 몸을 꼼지락거리더니 내 목에 팔을 두르며 감쌌다.
그대로 쿨쿨 자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어, 절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나 참, 이거 아예 얼굴을 묻어버렸네.
몰래 키스하는 건 꿈도 못 꾸겠구만.
실없는 생각에 혼자 히죽거리며 천천히 모퉁이를 돈 순간,
“꺄아~”
“오.”
“얼씨구.”
내 동료들, 그리고 신전 앞에 모여 있는 무수한 사람들과 떡 마주치고 말았다.
“………”
아아, 느껴져. 힐끔힐끔 이쪽을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고……!
알스 사제까지 입꼬리가 올라가 있어!
아아아, 후드 쓰고 싶어.
근데 손이 모자라잖아, 이런 빌어처먹을!!
근데 로나나 블루벨은 어쨌든, 나머지 사람들은 왜 밖에 나와 있는 거야?
갑자기 단체로 속이 갑갑해졌나, 왜 안에 있지 않고 나온 거냐고!
“왜긴. 안이 좀 무너졌으니 나왔지.”
위슨의 어깨 위에 앉은 파랑새가 멋대로 대꾸했다.
아까 그 민머리 생물체가 신전 벽을 후려쳤을 때, 그 벽 말고도 건물 전체가 타격을 입은 모양이었다.
“그렇구나…….”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뻣뻣해진 다리를 향해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활짝 열려 있는 대문으로 들어가 복도의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여전히 아무도 없는 예배당 위층, 멀쩡히 남은 의자 하나에 앉은 뒤,
“우아아아아………!!”
결코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을 크기로 길게길게 절규했다.
태평하게 자고 있는 메린을, 녀석의 부탁대로 꼭 껴안은 채로.
아아아, 쪽팔려어어!
내가 실실 쪼개는 것도, 이 녀석이 나한테 안긴 것도 다들 봐버렸어!
죄 짓는 게 아니니 부끄러워할 거 없긴 하지만……! 아으……!!
이게 다 인어 때문이야!!
개 같은 새끼들, 처음부터 배신 안 했으면 이딴 일도 없었을 거 아냐!
반드시 쳐죽인다, 망할 참치 년……!
이를 박박 갈며 다시금 굳게 다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