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7화 〉 317화 : 그저 의무이기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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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에 질린 비명소리가 울리는 순간, 황급히 검 끝이 가리키는 쪽으로 뛰어가서 소리쳤다.
“당신, 진짜 미쳤어?! 이게 뭔 개짓거리야!!”
“어이쿠, 말씀을 조심하시지요. 당신이 용사인 것이 무조건적인 면책권이 되진 못합니다. 어찌되었건 평민이시니 말이지요.”
“네 손이나 조심해, 미친 새끼야! 칼 치워! 댁들도 지금 어딜 겨누는 거야, 동네 사람 직접 죽이고 싶어?! 창 치워!!”
그러나 검을 쥔 기사는 물론이고, 병사들 중 누구 한 사람 무기를 거두지 않았다.
내 말을 듣기는커녕, 기사 새끼는 오히려 나를 가엾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다.
그 얼굴이 더럽게 빡치지만, 그래도 싸우는 건 되도록 피해야 한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여기서 쓸데없이 더 힘을 뺄 순 없어.
싸우느라 버리게 될 시간도 아깝고!
그러니 그냥 꺼져줬으면 좋겠는데,
“용사님, 공연히 수고하지 마십시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미 바닷물이 흘러 넘치고 있어요. 어차피 다 구하지 못할 자들이니, 그냥 포기하십시오.”
“닥쳐! 처음부터 이 일에 끼지도 않은 놈이 멋대로 입 털지 마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하는데, 안 도와줄 거면 그냥 꺼져!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게 하지 말고!”
“이거 원……. 뭐, 좋습니다. 그리 고집을 피우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한 분만 모셔가게 해주신다면 그냥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성질 뻗치게 능글거리던 기사는, 돌연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말을 이었다.
“테레지아 님을 내어주십시오.”
“여기 없는데요.”
“시치미 떼셔도 소용없습니다. 거기 동료분이 제 눈앞에서 그 분을 데려가셨으니까요. 당신이 저들과 함께 발버둥치다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테레지아 님을 돌려주십시오! 그 분은 제 아내 될 사람이란 말입니다!”
“테레지아 님은 여기 없어요! 저 신전 안에도, 이 마을 안 어디에도 없다고요!”
위슨 배낭에 들어가 있으니까.
당연히 뒷말은 속에 감춰두었다.
그러나 기사는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젖히며 웃더니, 돌연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며 외쳤다.
“좋게 대하니 내가 우습게 보이더냐, 비천한 것아!! 용사인 게 면책권이 되지 않는다고 내 경고했거늘, 감히 되도 않는 거짓말로 나를 농락하려 들어?!”
“없으니까 없다고 하는 건데, 왜 지랄이야! 이렇게 찾아올 줄 알고 마을 밖으로 튄 거겠지! 나이 처먹을대로 먹은 놈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고작 열 여섯밖에 안 된 애한테 질척거리냐?! 찾고 싶으면 피난민들 사이에서 찾아보든가!”
“이 발칙한 놈이……!”
놈이 눈을 부릅뜨면서 검을 사선으로 치켜올렸다.
그리고는 박차가 달린 발을 움직여 말 옆구리를 찼다.
히힝 우는 소리와 함께 말이 내달리려는 순간,
내 어깨 너머로 축 늘어져 있던 팔이 움직였다.
“히히잉!!”
막 질주하려던 말이 고개를 마구 흔들면서 옆으로 쓰러져버렸다.
자연히 그 위에 올라타 있던 기사도 고삐를 잡은 채 꼴사납게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갑자기 말이 왜 넘어진 걸까?
기사가 타는 말이라고 씌워진 갑옷이 무거워서?
그럴 리가 있나.
기사를 태우고 다니는 말이 되려면 태생부터 엄청나게 튼튼하고 힘이 좋아야 할 터.
게다가 편자도 잘 박혀 있을 게 뻔한데, 빗물 좀 고였다고 미끄러질 리가 없지.
그러니 저 말이 쓰러진 건, 말 자신이나 그를 관리한 마부의 책임이 아니다.
말의 머리까지 씌워놓은 갑옷의 틈을 찌를 줄 누가 알았으랴?
그것도 눈구멍을.
나는 최대한 고개를 뒤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뭐야, 메린, 너 일어나 있었어? 엥? 언제부터?!”
“네가 미친 새끼 어쩌고 할 때부터. 하음…… 그렇게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는데 어떻게 안 깨냐? 암튼 내려줘.”
“아, 응.”
메린은 내 등에서 내리자마자 검부터 챙겨갔다.
하품을 쩍 하면서 허리에 검을 차고 있는 모습에선 조금의 긴장도 보이지 않는다.
저 녀석 주변만 딴 세상이 펼쳐져 있는 거 같아.
“크으윽……! 버러지 놈들이, 감히……!”
그에 비하면, 기사는 말에서 떨어져서 그런지 상당히 초췌해져 있었다.
놈은 부하들에게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우리를 향해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그 방종을 후회하게 해주마……!! 뭣들 하고 있느냐, 저자들을 죽여라!!”
“예?! 하, 하지만……!”
“저들은 걸리프와 무관한 자들이다! 모두 외부에서 온 피난민이지!”
“……!”
기사의 고함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사방에 울려퍼졌다.
놈은 피 섞인 침을 퉷 뱉은 후, 부하가 주워준 검을 들어 우리와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을 겨누었다.
“알겠느냐! 걸리프 주민들은 모두 피난을 완료했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바깥에서 온 피난민! 네놈들이 꺼려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소리입니까, 엘레브 경!!”
그에 맞서듯이 분통에 찬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나도, 그리고 알스 사제도 아닌 완전히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울려왔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활짝 열려 있는 신전의 문 앞에 엘시아 사제가 서 있었다.
얼굴엔 약간 지친 기색이 묻어나 있지만, 그 두 눈은 여느 때보다도 또렷하고 날카로웠다.
그녀는 한 손을 뻗어,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이들 중에도 걸리프의 주민이 있어요!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이죠?! 외부인이라고 당신이 함부로 해야 할 목숨이 아니에요! 모두 우리가 돌봐야 하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좌우로 사제들이 뛰쳐나와 사람들의 앞에 주르륵 섰다.
조금 전에 그 민머리 촉수생물체가 쳐들어왔을 때처럼, 자신들의 몸을 방패로 삼을 생각이리라.
……라고 생각했는데,
쿵!
갑자기 엘시아 사제가 발을 구르더니, 팔을 앞으로 뻗으며 크게 호령했다.
“주의 도구 되길 맹세한 자들아, 태세를 갖추어라! 주의 자녀를 위협에서 보호하라!”
“주여, 함께하소서! 신명(??)을 다하여 이를 이행하리이다!!”
그러자 사제들이 일제히 답하며, 알스 사제가 가진 것과 똑같은 막대기를 꺼내 들고 자세를 잡았다!
어라, 이건 전혀 예상 못했는데!
전투사제 아니어도 싸울 수 있는 거야?!
자연히 내 시선이 옆으로 옮겨졌다.
몸을 풀 듯이 긴 막대기를 이리저리 휭휭 돌리던 알스 사제는, 내 눈길을 받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호신술입니다. 사제의 기본 덕목이죠.”
“……”
기도가 아니라 무술이 기본 덕목이라니, 신을 섬기는 종교집단이 그래도 되는 건가?
근데 최초의 대언자가 처음 발휘한 신의 기적이 돌려차기였잖아?
그것도 무려 폭풍고래 대가리를 깨부순 돌려차기.
처음에 말만 들었을 때는 왜 그딴 게 기적인가 했는데, 실제로 폭풍고래를 보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발로 그 대가리를 부쉈다고? 암, 기적이지.
앞으로 누가 그 이야기를 비웃거든, 내가 손수 대가리를 깨뜨려줄 거다.
아무튼 사제들이 죄다 우르르 나와서 무기를 들고 맞서자, 병사들의 동요가 한층 더 심해졌다.
앞으로 내밀고 있는 창 끝은 덜덜 떨리고, 그 너머를 바라보는 얼굴들은 모두 파랗게 질려있다.
그럴 만도 하지.
이제 그들이 상대해야 하는 건 ‘피난민’이 아니라 사제들이니까.
왕국에 속한 사람 중, 그 누가 교단 사제를 스스럼없이 해할 수 있을까?
사제를 해치는 것은 그의 뒤에 있는 신에게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러니 그들은 물러나야 한다.
정신 멀쩡한 사람이라면, 여기서 항복하고 물러서야 해……!
“에, 엘레브 경!”
한 병사가 도움을 청하듯이 기사를 불렀다.
창을 쥔 손을 덜덜 떨며 자신의 상관을 애걸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명령을 물러주길 바라고 있으리라.
그러나 기사는 그 시선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정신이 산책나간 기사 놈은 명령을 취소하는 대신, 애원하는 듯이 자신을 보는 병사의 멱살을 잡고서 윽박질렀다.
“뭘 망설이느냐! 네놈들을 여태 먹여 살린 것이 누구인지 잊은 것이냐! 네놈들은 모두 시클로 가문이 내리는 녹을 받아먹고 살았다! 그러니 마땅히 내 주군의 명을 따라야할 터!”
놈은 병사의 얼굴에 침을 튀길 기세로 소리를 지른 후, 그를 밀치듯이 손을 놓았다.
가엾은 병사가 켁켁 잔기침을 하며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영주의 기사는 재차 우리와 그 뒤에 있을 사람들에게 검을 겨누었다.
“저들은 외부인이자, 영주님의 뜻에 반하는 반역자들이다!! 충성하는 자에겐 영주님께서 후히 상을 베푸시리라! 모두 쳐라아아!!”
“저 미친 새끼가……!”
곧바로 검을 뽑았다.
메린 역시 내 옆에서 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서 확실하진 않지만, 나머지 세 녀석도 우리 옆이나 뒤에 서 있겠지.
창을 든 병사들이 서서히 거리를 좁히기 시작한다.
얼굴은 여전히 애벌레를 한 줌 씹은 것처럼 구겨져 있지만, 그 손과 발에 보이던 망설임은 꽤나 희미해져 있다.
아, 그래. 병사의 본분을 다하겠다는 거지?
명령을 받았으니 어쩔 수 없다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정말로 영주에 대한 충성심으로 불타고 있거나.
어쨌든 저들은 결국 싸우는 걸 선택했다.
숫자는 대충 스물 조금 넘나?
우리는 고작 다섯밖에 안 되는데, 참 너무한 일이야.
아니, 열 두 명인가?
알스 사제와, 이 신전에 있던 사제들이 모두 긴 막대기를 들고서 병사들과 맞서고 있으니까.
스물 서넛의 정식 훈련을 받은 병사들을, 우리 다섯을 합친 열 두 명으로 상대해야 한다.
하지만 사제들은 사람들을 지키느라 움직이지 않을 테니, 만약 전진한다면 우리 다섯 명이서 해야 되겠지.
절로 미간이 좁혀지며 얼굴이 찌푸려졌다.
‘질 거 같아?’
천만에. 싸우면 십중팔구 우리가 이겨.
확신을 가지고 단언할 수 있다.
스물 조금 넘는 병사로는 우릴 당해낼 수 없어.
다섯이 전부 나설 것도 없을 거야.
세 아가씨 중에 아무나 한 명만 나가도 금방 정리될걸?
지금 내 얼굴을 구기는 건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니다.
불필요하게 칼을 맞대야 하는 이 상황이 더럽고 엿 같아서 그렇지!
빌어처먹을 엘레브, 이 개 같은 새끼, 꼭 이렇게까지 해야 되냐고……!
우리를 향해 검을 겨눈 채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기사를 쏘아보며 이를 악물었다.
……여행을 떠난 지 이제 세 달 가까이 되나?
그간 크고 작은 싸움을 계속 치러왔지만,몬스터이든 도적이든, 누군가와 칼을 맞댈 때의 그 긴장감은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고 있다.
여전히 손이 떨리고, 가슴이 마구 쿵쾅거리면서 몸이 뻣뻣해진다.
칼싸움 따위 질색이야.
그냥 말로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 뭐하면, 주먹다짐도 해줄 수 있는데.
그러나 정녕 피를 보길 원한다면, 상대가 내 목숨을 노린다면 어쩔 수 없지.
온 힘을 다해, 그 머저리 같은 생각을 한 머리를 떼어줄 수밖에……!
“마지막 경고다, 염병할 깡패 새끼들아!! 살고 싶으면 창 버려!! 네놈들의 우두머리 모가지만 따버리고 끝낼 테니까!!”
주춤거리면서도 한 걸음씩 착실하게 다가오고 있는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꾸역꾸역 와서 덤비는 새끼들은 죄다 적으로 간주하고 죽일 거다! 창만 부러뜨리고 마는 자비를 보일 거라 생각하지 마라!!”
무기를 버리면 살려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죄다 죽여버릴 것이다.
살고 싶다면, 병사이기를 포기해라.
그것은 윗사람의 명령을 따르는 게 의무인 병사들에 대한 내 마지막 자비였다.
그와 동시에, 내 동료들에게 내리는 지시이기도 했다.
영주의 병사를 모두 죽여라.
구하지 않겠다고 버리는 걸로 모자라, 그러한 사람들을 제 손으로 죽여 없애려는 놈들을 살려줄 이유는 없지.
무자비한 놈들에겐, 똑같이 무자비로 응할 뿐이다……!
점점 더 다가오는 놈들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전원!! 무기를 들어라! 도적놈들에게서 주민들을 지켜라!!”
“?!”
별안간 저 앞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리며, 병사들의 전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당혹스러워하는 병사들을 공격하는 건, 천갑옷 위에 물고기 문장이 그려진 서코트를 입은 사람들.
던트 위병대장의 휘하에 있는, 위병들이었다.
“네놈, 무슨 속셈이냐! 명을 어길 셈이냐!!”
“닥쳐라, 도적놈아!!”
위병대장은 자신의 검을 뽑아 기사를 겨누며 소리쳤다.
“나는 걸리프의 위병대장이다! 이 마을의 치안을 지키고 주민들을 보호하는 것! 그것이 내 유일무이한 의무이다!! 그보다 더 우선해야 할 건 없다!!”
“배은망덕한 놈! 영주님의 은혜를 이리 돌리느냐!! 오냐, 반역자야, 내 손수 네놈을 처단해주마!!”
기사가 곧바로 성을 내며 대장에게 달려드는 게 보였다.
그러자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병사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위병들에게 맞서기 시작했다.
숫자가 엇비슷하기 때문인지, 우리에게 관심을 돌리는 병사는 한 명도 없었다.
“야, 카엘, 어쩔 거냐?”
어쩔 거냐니, 뻔한 걸 묻네.
나지막이 묻는 메린을 곁눈질로 한 번 스윽 본 후, 숨을 크게 들이쉬고 외쳤다.
“위병들을 도와! 깡패 놈들을 모조리 해치워!가자!!”
자세를 잡고서 곧장 앞으로 뛰쳐나갔다.
메린이나 다른 녀석들이 나를 따라오는지, 어디로 누구를 상대하러 갔는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내가 그걸 신경 써줘야 할 정도로 싸움에 서툰 녀석들이 아니니까.
뭐, 어느 까만 모자를 쓴 놈은 분명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쉬고 있겠지.
하지만 그걸 확인하면서 닦달할 마음도 없다.
언제나 그랬듯이, 녀석들은 저마다 좋을대로 하면 되는 거다.
내가 지금 집중해야 하는 건 오직 하나, 적을 치는 것뿐.
쓸데없이 분란을 불러온 기사 새끼의 목을 떨구는 것이다!
“비켜어어어!!”
“크억!”
위병과 맞서며 길을 가로막은 병사의 얼굴을 갈겼다.
다시 일어날 게 뻔하지만, 개의치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아마 상대하고 있던 위병이 숨통을 마저 끊겠지.
안 해도 상관없고.
송사리에게 지체할 시간은 없다.
한시라도 더 빨리 그 놈에게 가야 해……!
발걸음을 재촉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숨이 차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앞을 달리는 것만 전념했다.
제발 늦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윽고 내 목표인 기사 놈의 대가리가 보였다.
뒤이어, 놈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눈에 들어왔다.
놈은 자신의 앞에 선 위병대장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 손은 여전히 검을 쥐고 있었다.
한 손이 아닌 두 손으로.
……붉게 물든 웅덩이에 발을 담근 채.
“……!”
저절로 발걸음이 멈추었다.
열릴 대로 열린 눈꺼풀 속으로 빗물이 들어가는데도, 그걸 닫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눈앞의 광경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기사의 검 끝은 허공을 가리키고 있다.
그 자루를 쥔 채 몸을 낮추고 있는 기사는, 자신이 꿰뚫은 남자의 생명이 땅에 흐르는 모습을 무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리석은 놈.”
검을 빼내는 기사의 입에서 경멸 어린 목소리가 빠져나왔다.
싸늘한 지지대를 잃은 대장의 몸이 무릎을 꿇고, 하나 남은 팔로 배를 감싸며 힘없이 쓰러졌다.
소리 없이.
빗속에 묻히며.
……멈추었던 다리가 다시 움직였다.
여기까지 달려온 것보다도 더 빠르게.
입에서 무언가 소리가 나간 것 같기도 하다.
놈의 얼굴이 구겨진 걸 보면, 대충 개새끼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채앵—!
휘두른 일격은 손쉽게 막혀버렸다.
기사라는 지위를 허투루 얻은 게 아닌 것이리라.
상관없어.
용서 못해.
“윽?!”
“전부! 되돌려주겠어!!”
당혹감에 젖은 눈을 뜬 기사에게 선포하며 검을 휘둘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