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8화 〉 318화 : 그저 의무이기에 (3)
* * *
가볍다.
내 손이 휘두르는 은검, 놈이 베어오는 철검.
모두 가볍기 그지없다.
이거보단 오우거가 휘두르는 몽둥이를 막았을 때가 훨씬 더 묵직했던 것 같은데.
이런 솜털 같은 검을 잘난 듯이 휘두르고 있던 건가.
챙—!
사선으로 들어오는 검을 쳐낸다.
쇳소리가 울리자마자 몸을 회전시키면서 가로로 크게 벤다.
놈이 검을 방패삼아 칼날을 막아내고는 뒤로 물러났다.
놓치지 않아.
곧바로 쫓으며 바닥의 물을 차 날린다.
물방울이 놈의 한쪽 눈을 가격하는 게 보였다.
“큭……!”
나머지 한쪽 눈을 부릅뜨며 놈이 다리를 휘둘렀다.
초점이 안 맞는 발차기 따위 아무 위협도 못 된다.
오히려 기회이지.
놈의 발을 피해 옆으로 돌아서 그 허벅지를 걷어찬다.
놈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더니, 곧바로 빗물 고인 바닥을 구르며 일어나 검을 휘둘렀다.
그 탓에 놈을 쫓던 발을 뒤로 물러야 했다.
“하아, 하……!”
가쁜 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온다.
물론 내 거는 아니고, 내 앞쪽에 있는 기사 엘레브의 호흡 소리이다.
거리가 조금 되는데도 이게 들리다니, 그새 내 귀가 트인 것도 아닐 텐데.
그때, 놈의 뒤쪽에 건물이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그에 뒤이어, 나는 등 뒤에서 귀청 떨어지게 마구 울리던 싸움 소리가 꽤 작아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래도 신전에서 꽤 멀어진 모양이었다.
놈을 주시하면서 슬며시 양 옆을 보니, 지금 큰길 한복판에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객관적으론 넓은 공간이긴 하지만, 신전 앞마당보다는 좁지.
거긴 자그마한 광장이나 다름없으니까.
속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고개를 돌려 놈을 향했다.
놈은 검을 수직으로 세워 잡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함성을 지르며 덤벼들었다.
오른쪽 어깨 위로 들린 놈의 팔이, 휘둘러지기 직전에 밑으로 홱 꺼지는 게 보였다.
공격 방향을 속이려면 좀더 빨라야지.
이렇게 눈에 보일 정도로 느리면 누가 당하겠는가?
왼쪽 위 방향으로 비스듬히 긋는 검격.
그를 검으로 받아 흘리면서 몸을 살짝 튼다.
그대로 품을 파고들어 놈의 대가리를 폼멜로 내려찍는다.
터엉— 터엉—
생각보다 소리가 맑진 않군.
속에 뭐가 들어있긴 한가보다.
하긴, 아무것도 없으면 ‘구출을 포기한 사람들은 전부 외부인’이라는 말도 못하겠지.
“크악……!”
놈이 왼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오른손 하나만으로 크게 횡베기를 날려왔다.
공격하기보단 나를 쫓아내려는 목적이 더 큰 것이리라.
실제로 내가 두 걸음쯤 뒤로 물러났는데도, 놈은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놈은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서 던져버렸다.
한쪽이 찌그러진 쇳덩어리가, 빗물이 고인 바닥을 처량하게 데구르르 굴렀다.
정수리랑 이마, 그리고 코 약간이 가려져 있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투구를 마구 때려서 놈의 머리를 뒤흔드는 작전은 이제 못 쓰게 됐지만, 그리 크게 아쉽진 않다.
오히려 나보다는 저 놈이 더 아쉬워하고 후회하겠지.
곧 대가리가 깨져버릴 테니까.
그 확신과 함께, 놈과 검을 맞댔을 때 생겨난 의문이 재차 떠올랐다.
……이 놈, 진짜 기사 맞나?
메린보다 못한 건 당연한데, 고향 검술 사범님보다도 느리고, 어느 웃긴 귀족 친구보다도 무뎌.
심지어 그 친구는 하루종일 묶여 있던 탓에, 몸 상태가 그리 좋지도 않았었는데 말이지.
지금 내 앞에 선 저 기사 놈이 몇 살에 서임됐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어렸을 때부터 검을 잡았을 거다.
남자이고 또 귀족이니, 이론까지 제대로 짜인 검법을 배웠을 거고.
게다가 이십 대 후반이라고 했지?
그럼 내가 태어나기 조금 전부터 수련했겠구만.
깡촌인 우리 마을도 빠르면 여덟 살부터 목검 휘두르는데, 귀족 도련님이면 더 빨리 잡았을 거 아냐.
근데 이 정도밖에 안 된다고?
나이프를 든 오크보다도 못한 거 같은데?
내가 비록 여행 나와서 대련과 전투로 빡세게 구르기는 했지만, 그거 석 달도 채 안 된다.
더군다나 아홉 살 때 기초만 일 년 배운 뒤로는 막대 칼싸움도 안 한 놈이라고.
그런 조무래기인 나한테 움직임이 다 보이는 것도 모자라, 계속 허를 찔리기까지 해?
이 새끼, 존나 농땡이친 게 분명하다.
검 솜씨가 아니라 집안 뒷배로 기사가 된 게 틀림없어.
좋은 환경에서 나고 자랐으면서 게으름을 피우다니 어이가 없구만.
그 대가도 포함해서 치를 거 다 치러라, 등신 새끼야.
속으로 쏘아붙이며 휘적휘적 다가가자, 놈이 그만큼 뒤로 물러나면서 입을 열었다.
“펴, 평민 주제에 어떻게 이런……! 네놈, 정체가 뭐냐……!”
“양치기 겸 보조필경사.”
“끝까지 날 농락, 윽?!”
떠벌대는 놈의 머리를 쪼개려고 내려친 검이 물만 튀기고 말았다.
옆으로 굴러 피한 놈을 쫓아서 팔을 휘두른다.
첨벙. 데굴데굴.
첨벙. 데굴데굴.
“아오, 씨발!”
바닥을 구르는 놈을 네 번째로 따라잡은 뒤엔, 그냥 발로 물을 차서 얼굴에 뿌려버렸다.
그래도 제대로 된 검법을 배우긴 했나봐.
구르기는 존나게 잘 구르네.
고향인 놋지빌식 실전검법도 구르기부터 가르치는데, 교본으로 정립된 건 오죽할까?
내가 차 날린 물이 코에 들어가기라도 했는지, 놈은 켁켁거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런 비겁, 한……!”
“판금갑옷 입은 새끼가 지랄하고 있네.”
난 천갑옷도 아니고 그냥 천옷이구만.
놈의 개소리를 일축하고서 곧바로 달려들려는 찰나,
“카엘 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서 걸음이 멈추고 말았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로나가 제 얼굴만 한 전투망치를 손에 든 채 달려오고 있었다.
……어쩌면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몰라.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려, 비틀대며 일어서는 기사 놈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로나, 던트 대장님을 봐줘.”
“네?! 하지만……”
“얼른.”
“……네, 알겠습니다!”
힘찬 대답과 함께, 작게 첨벙이는 소리가 울렸다.
내가 일을 마칠 때까지 그 발소리가 다시 들리지 않길 빌며, 숨을 헉헉대고 있는 놈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너도 비는 게 좋을 거다.”
“무슨, 헛소리를……!”
“대장님이 살면 깔끔하게 목만 쳐줄 거거든.”
놈이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럼 위병대장이 죽으면 어쩔 거냐?
왠지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어쩌긴 뭘 어째?
놈을 검 끝으로 가리키며 하나씩 읊어주었다.
“오른쪽 팔. 왼쪽 귀.”
네놈이 빼앗아간 대로 되갚은 뒤,
“그 등신 같은 머리.”
내가 받아갈 걸 가져갈 뿐.
사지를 조각내거나 눈을 파내거나 혀를 뽑아버리거나, 아니면 내장을 뽑아서 개먹이로 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개 같은 새끼이긴 해도 일단 사람이고, 내 원수는 아니니까.
그러나 놈은 그게 조금도 안심이 되지 않는 듯했다.
점차 파랗게 질려가던 놈의 얼굴이, 내가 머리를 가리키는 순간 흙빛으로 짙게 물들었다.
지금도 비를 퍼붓는 저 징글맞은 하늘처럼.
“큰 차이 없지? 어차피 죽는 건 매한가지이니까.”
“나, 나는 귀족이다! 네놈이 날 죽이고도,”
“멀쩡하지.”
두 손으로 검자루를 쥐고 날을 겨누며 대꾸했다.
“넌 인어에게 뒈진 거니까.”
“……!”
“네가 마을 사람들까지 죄다 외부인으로 몬 것처럼, 넌 오늘 내가 아니라 인어에게 죽는 거다. 이제 문제없지?”
“이, 이 미친 새끼!! 더, 더는 용사라 해도 봐주지,”
첨벙!
빗물을 차며 달려들었다.
귀족이라고 다 똑똑한 게 아니구나.
내가 주절거리는 걸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도 못 알아채네.
하긴 검술도 땡땡이쳤는데, 다른 공부를 제대로 했겠어?
“흐읍……!”
쏟아지는 비조차 잘라버릴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인지, 놈이 벌린 입에서 나는 소리인지 모를 소음이 들려왔다.
어쩌면 연이어서 날린 횡베기에 손이 베여서 비명을 지른 건지도 모른다.
음, 놈을 자세히 보니 비명이 맞을 거 같아.
철에 덮이지 않은 손가락 두 개가 없어져 있었으니까.
“아아아아! 으아아아!!”
놈은 실성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왼손으로 검을 잡고 닥치는 대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눈먼 화살이 가끔 목숨을 앗아가는 것처럼, 이것도 무시할 수 없긴 하지.
나 역시 대련 막바지 때마다 오기로 마구 휘두르곤 했으니까.
그걸로 매번 메린을 한 걸음 물러나게 했으니, 그럭저럭 효과가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래봤자 마지막 발악이라는 건 변하지 않지만.
내가 늘 겪었던 결말을, 놈이 몸소 체험하게 해주었다.
채애앵—!!
딱 한 번.
마구 내지르고 있는 검격을 딱 한 번 힘껏 쳐낸다.
냉정을 잃은 발버둥 따위는, 단 한 방으로 잠재워지는 것이다.
그 다음은 폼멜로 손목을 치면 끝.
하지만 놈은 적이니까, 대가리부터 먼저 갈기고 손목을 후려쳤다.
칼날이 건틀릿을 때리는 맑은 소리와, 검이 빗물에 풍덩 잠기는 소리를 연이어 들으면서 다리를 걸었다.
첨벙!
놈이 바닥에 일으킨 작은 물보라를 목도하면서, 그대로 검을 내리찍었다.
철로 둘둘 싸인 몸 중, 얼굴 다음으로 훤히 드러나 있는 목을 향해.
“허, 꺼……!”
목청이 뚫린 건지 제대로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는 듯했다.
그 대신, 놈은 튀어나올 듯이 눈을 크게 뜨며 칼날을 붙잡고 버둥거렸다.
“아직 죽긴 일러.”
그대로 놈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면서 걷기 시작했다.
판금갑옷을 입은 데다, 목구멍에 검까지 꽂혀 있어서 그런지 꽤나 무겁다.
그래도 놈의 목에 박힌 검을 뽑을 순 없었다.
그랬다가는 피가 샘물처럼 뿜어져 나와서 죽을 테니까.
그래서는 곤란해.
이 놈은 아직 죽어서는 안 된다.
어떤 최후를 맞이해야 하는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으니까.
“……”
굳이 뒤를 돌아보진 않았지만, 왠지 놈의 목에서 질질 새는 피가 붉은 선을 긋고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비가 계속 오고 있으니 선이 되기도 전에 흩어지려나?
그럼 이 놈이 어디서 피를 흘리는지 아무도 모르겠군.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저 앞에 보이는 빨간 물체를 향해 걷고 또 걸었다.
문득, 전에 로나가 말했던 게 떠오른다.
전투사제가 붉은 옷을 입는 건, 눈에 잘 띄기 위한 거라고 했던가?
확실히 효과가 좋네.
주위가 이렇게 어두컴컴해도 선명하게 잘 보이니까.
휘적휘적, 물을 가르며 로나의 곁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가 지금 있는 곳은, 내가 맨 처음에 기사 놈에게 달려든 곳이자 위병대장이 쓰러진 곳이다.
그리고 놈의 운명을 결정지을 곳이기도 하다.
“……”
사제의 기도를 받는 위병대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내 손에 잡혀 있는 기사 놈의 운명이 정해지는 데엔 일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게 목을 찔려서 죽어가는 이 놈에게 불행일지, 아니면 티끌만 한 행복일지는 모른다.
유언 겸해서 놈에게 그 답을 들을 수도 있겠지.
근데 별로 궁금하지 않아.
놈의 머리채를 잡은 손을 놓았다.
빗물 속에 첨벙 잠기는 놈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목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아서 치켜들었다.
초점이 흐려져가는 눈이 나를 멀거니 바라보는 게 보였다.
마지막까지 그 눈엔, 오로지 공포만이 떠올라 있었다.
로나와 함께 신전 앞마당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엔, 상황은 완전히 끝나 있었다.
알스 사제를 포함한 여덟 명의 사제가 부상당한 병사와 위병을 모두 치유하고 있고, 움직일 수 있는 위병들은 시체들을 한곳에 모으고 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시체들은 전부 영주의 병사들인데……
어쩌면 위병 중에도 몇 명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메린과 블루벨도 그들을 도와 시체를 치우고 있는 듯했다.
위슨은…… 이야, 마차 짐칸에 올라앉아서 졸고 있네.
저 녀석, 설마 처음부터 저기서 졸고 있던 건 아니겠지?
“카엘.”
혼자서 병사의 시체를 옮기던 메린이, 나를 보자마자 그걸 냅다 휙 던져버리고 나에게 뛰어왔다.
녀석이 던진 시체는 땅바닥에 널부러지는 대신, 앞마당 한켠에 만들어져 있는 구덩이로 쏙 들어갔다.
저 구덩이, 시체 묻으려고 판 거겠지?
나 참, 보지도 않고 저기다 집어넣네. 역시 대단하구만.
……근데 던지면 안 되지?!
“얌마, 사람 시체 막 다루지 마.”
“엥? 내가 언제?”
“방금 던졌잖아. 그러지 말라고.”
구덩이를 향해 고갯짓하며 대꾸하자, 메린이 살짝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왜? 적 시체잖아. 수레에 실었다가 쏟아서 버리는 거랑 똑같은 거 아냐?”
“넌 방금 갖고 노는 것처럼 보였단 말야. 시체를 장난감 취급하는 걸 좋게 보는 사람은 없다고 했지? 네 의도는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은 그렇게 보고 오해할 수 있으니까 던지지 마.”
“아, 그래? 흠…… 그래서 아까 블루벨이 하지 말라고 했던 건가?”
……아무래도 내가 오기 전에도, 방금처럼 구덩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시체를 휙 던져 넣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걸 본 블루벨이 하지 말라고 했고.
메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왜 안 되냐고 물어도 그냥 하지 말라고만 하더라. 귀찮으니까 안 하고 있긴 했어. 방금 거 빼고.”
“잘했어.”
썩 좋지 않게 보긴 해도 블루벨을 동료로 생각하긴 하는구나.
일단 말을 듣는 걸 보면 말야.
손에 쥐고 있던 짐을 놓고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자, 메린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뒤, 그녀는 내 뒤에 덩그러니 놓인 짐을 가리키며 물었다.
“근데 그건 뭐냐?”
“엉? 시체.”
조금 길게 말하면 ‘어리석은 기사의 시체’가 되겠지.
근데 어차피 시체잖아.
여기 묻어버리고 그냥 잊어버릴.
메린은 내 대답을 듣고 위아래로 나를 훑어본 후,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길 것 같긴 했어. 맨날 시작부터 쫄아서 몸이 굳는 게 문제였는데, 아까는 그런 걱정 안 해도 되겠더라고. 그럼 로나가 메고 있는 건?”
“……”
고갯짓하며 묻는 그녀를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로나의 어깨에는 한 사람이 메어 있다.
똑같이 명령을 따르는 병사이면서도, 저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는 자들과 맞서기를 택한 사람.
그리고 그들처럼, 주어진 의무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 메여 있었다.
“……명예로운 전사자.”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싸늘하게 식은 그를 바라보는 내 얼굴 위로, 차디찬 빗물이 흘러내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