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4화 〉 324화 : 전설을 재연하라 (1)
* * *
흘러간다.
콰앙—!
쿠웅—!
바닥으로 지붕을 깔아뭉개고, 측면에 닿는 벽을 박살내면서 떠내려간다.
아니, 물길을 타고 있다고 해야 하나?
뱃머리로 들이받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지나가면서 부득이하게 부수고 있긴 하지만, 일단 길을 따라서 가고 있긴 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거침없는 돌진을, 난간에 기대어 앉은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바닥에 주저앉은 건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 다리가 풀린 건지, 아니면 날 붙잡고 있는 메린이 앉혀버렸는지도 알 수 없다.
배의 출입구 앞에 펼쳐져 있던 깔개가, 언제 내 엉덩이 밑으로 이사왔는지도 모르겠고.
나는 그저 후드조차 벗어버린 채, 비가 얼굴에 쏟아지도록 내버려두고 있을 뿐이다.
……이틈에 흘려버릴 수 있을 만큼 흘려버려야 한다.
그 생각이 막연하게 들고 있는 탓이었다.
마침 내가 끼어들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니, 뭐…….
굳이 입을 열 필요도 없고, 메린이 바짝 붙어있으니 나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도 없다.
……설령 누가 본다고 해도, 지금은 신경도 안 쓸 것 같지만 말야.
멍하니 그렇게 생각하면서, 내 허리를 감싸고 있는 메린의 목을 안고 그 머리에 입술을 댔다.
“카엘?”
“……미안. 불편해도 좀 참아줘.”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으니,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마음을 추슬러야 한다.
우선은 신나게 울어젖히는 저 시커먼 고래 새끼에게, 그 다음은 이 사태를 일으킨 참치 년에게 응당한 대가를 받아내야 하니까.
“혹시 추워? 어, 자면 안 돼. 눈 감지 마!”
“……아냐. 빨리 기운 차리려는 거지.”
그러려면 네 온기가 필요해.
이대로 네 따스함과 체취에 감싸여 잠드는 게 제일 효과적이겠지만, 네 말대로 지금 잘 순 없어.
이 배는 그리 오래 운행되지 않을 테니까.
메린은 그 이상 묻지 않고, 내 허리에 두른 팔을 한층 더 바짝 끌어당겼다.
그런 뒤, 가만히 손을 움직여 토닥이듯 두드리기 시작했다.
……녀석이 내 배를 매만지고 있는 건, 아마 망토에 가려서 안 보일 거다.
나 참, 이 녀석이나 나나, 다들 보는 앞에서 뭐하는 건지 모르겠네.
“이거 성벽 못 넘을 거 같은데?!”
자조하는 내 귀에, 불현듯 질겁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쪽으로 시선만을 움직이자, 블루벨이 뱃머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는 게 보였다.
성벽을 넘지 못할 거라는 말에, 근방에 있던 테레지아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어라, 저 귀족 아가씨, 아직 갑판에 나와 있었구나.
저 둥그런 구조물 안에 들어간 줄 알았는데.
그녀는 알스 사제에게 안긴 채, 뱃머리 앞에 서 있는 위슨에게 소리쳤다.
“성벽에 걸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뚫어버릴 정도로 이 배가 튼튼한가요?!”
“그냥 박혀버리겠죠.”
“불길한 말씀하지 마세요, 사제님!!”
사색이 된 테레지아와 달리, 알스 사제는 지극히 태평하게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엔 걱정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역시 사제라고 해야 하나……?
로나는 아예 비바람을 즐기듯이 환호까지 하고 있고 말이지.
………응? 환호?
아니, 저 빨간 사제님은 좀 많이 이상한 거 같아!
“그러니까 내가 나와 있는 거 아니에요! 이걸 넘기려고!”
위슨이 소리치면서 한 팔로 어느 방향을 가리키자, 배가 혼자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아직도 휘몰아치는 물살을 타며 배가 향하는 곳엔……
“방향 잘못 잡은 거 아냐?!”
“아아아, 저긴 막다른 길이잖아요오오!!”
성벽은 물론이고, 그 너머에 절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쿠아! 제2구속 해방!”
힘찬 외침과 함께, 바닥이 일순 들썩이는 게 느껴졌다.
이 배 밑을 무언가가 받치기라도 한 것처럼.
어린 마법사는 그 움직임에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들어서 뱃머리 너머, 그 위를 가리켰다.
어두컴컴한 먹구름이 드리워진 갈매기의 둥지들, 무심하게 우리를 내려다보는 절벽 위.
그 허공을 향해 손을 뻗은 채 우렁차게 외쳤다.
“통째로 띄워버려!!”
파아앙—!!
“?!”
굉음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뭐가 폭발한 것 같긴 한데, 자연히 뒤따라와야 할 매캐한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다.
발은 확실하게 갑판에 닿아 있고, 엉덩이도 깔개 위에 차분히 놓여 있다.
근데 어째서……?
어째서, 내 몸이 지금 공중에 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그 수수께끼는 눈을 뜨자마자 곧바로 풀렸다.
뱃머리를 보는 내 눈이 저절로 휘둥그레 커지며, 메린을 껴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간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과 함께 몸이 바짝 굳는다.
뭐? 왜 공중에 붕 뜬 것 같냐고?
진짜로 허공을 날고 있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이제 아래로 떨어져서 산산조각 날 예정이고!!
“꺄아아아아!!”
새된 비명소리가 귀에 꽂히고 있는데, 누가 지르는 건지 모르겠다.
음색이 엄청 가느다란 걸 보면 테레지아나 블루벨 둘 중 하나이겠군.
덕분에 내 소리가 묻혔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아니, 뭐가 다행스럽다는 거야, 이제 곧 죽을 판이구만, 시간 남으면 주마등이나 볼 것이지, 뭐 그딴 하찮은 생각이나 하는 거냐, 으아아아, 멈췄어, 멈췄다고, 이제 떨어진다아아아!!
“‘소리’의 울림을 빌어 청하노라! 속박되지 않는 너, 자유로운 실프여! 우리에게 보이라! 그대의 격정적인 춤을, 거침없는 질주를, 백조와 같은 기품 있는 피날레를!”
휘이이잉—!
“히익?!”
몸이 갑자기 앞으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맞부딪치는 바람이 뺨을 때리고, 그 함성이 귀를 마구 울려대는 이 감각.
익숙해져서 좋을 거 없는, 이미 몇 번이나 겪어서 몸이 기억해버린 이 느낌……!
그야말로 쏜살같이 하늘 위를 날던 그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나는 메린을 꽉 붙잡은 채로 무릎을 높이고, 고개를 뒤로 돌려서 난간 너머를 내다보았다.
……어이씨, 진짜 날고 있잖아.
내심 빗나가길 바랐는데!
저 넘실거리는 잿빛 물결은 바닷물일 거고, 그 물이 찰싹 부딪치고 있는 건 절벽이겠지?
근데 바닷물이랑 높이 차이가 잘 안 보여.
얼핏 보면 마주 이어져 있는 거 같아.
아니, 그보다 왠지 점점 가까워지는 거 같은데?
왠지 밑에서 뭐가 사정없이 끌어당기고 있는 거 같은데!
느릿하게 내려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땅에 부딪치면 배도 부숴지고 좀 많이 아플 거 같은데?!
“아쿠아!!”
“헛허어~”
태평한 웃음소리가 위슨의 부름에 응했다.
곧이어, 몸이 붕 뜬 듯한 느낌이 사라지면서 바닥이 약간 흔들렸다.
그 상태로 얼마간 계속 질주하더니,
쿠과과과아앙—!
“와아아아, 꺄아아악?!”
갑자기 굉음이 울리면서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또 다시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면서 메린을 꽉 껴안았다.
……아, 왠지 거북이가 된 기분이야.
그래도 이 녀석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지.
이 난리들 속에서도 그저 미간만 조금 찌푸리고 있을 뿐, 제자리에서 꼿꼿하게 버티고 앉아 있으니까.
사아아……
흙먼지가 가라앉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뒤이어, 배의 진동이 완전히 멈추고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제 다 끝났나?
아니면 그새 심장이 멈춘 탓에 저세상에 와버린 걸까?
하지만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코를 간지럽히면서 상당히 익숙한 향이 느껴지고 있다.
내 것이 아닌 숨결이 팔에 닿고 있기도 하고.
살…았나……?
살며시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몸을 한껏 낮추고 있던 사람들이, 나처럼 하나 둘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팔을 뻗어 난간을 잡고 몸을 일으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오……?”
풀이 촘촘하게 자라나 있는 들판.
그 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나무가, 잎이 풍성하게 맺힌 가지를 자랑하며 나를 멀뚱히내려다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밝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환한 빛이, 마구마구 내리쬐고 있었다.
자연히 내 시선이 위로 향했다.
멍멍한 시야 한가득 들어온 건, 조각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바로 어제까지 걸리프의 바다가 품고 있던 청명한 청천(?)이었다.
……빠져나왔구나.
멍하니 생각하며, 꿇고 있던 무릎을 펴고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이 저절로 배의 뒤편, 배꼬리를 향해 움직였다.
바닥이 처음보다 더 미끄러워져 있어, 난간을 붙잡지 않고서는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착실하게 한 걸음씩 떼어, 뭉툭한 굴곡을 지닌 배꼬리에 다다랐다.
“……”
난간 중앙을 붙잡은 채 앞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시커먼 먹구름 아래에 거무튀튀한 물결이 자리하고 있는 게 보인다.
우우우우—
희미하게 들리는 음산한 울음소리와 함께, 물결 속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튀어오르고선 곧 사라진다.
진득하게 낀 먹구름, 이따금 빛을 번뜩이는 그 속에 숨으려는 듯이.
……어림없는 소리.
난간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제 저 안에, 곧 벌어질 난리에 휘말리지 않도록 빼내야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 손에 부숴지면 어쩌나 싶은 건물도 없고.
……이제 우리 차례야.
신물이 날 정도로 네놈들이 떠안긴 것들을, 죄다 돌려줄 때가 왔다.
또 한 번 크게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거대한 그림자를 쏘아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둥그런 구조물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사제들의 도움을 받으며 한 사람씩 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어른과 아이 모두, 물이 뚝뚝 떨어지는 사다리에서 풀밭으로 발이 옮겨지는 순간, 하늘을 올려다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이제 다 끝났다는 안도감을 숨기지 않은 채, 먼저 내린 사람들이 있는 그늘에 앉거나 햇빛을 쬐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위슨의 엘크가 말 세 필과 함께 앉아 있었다.
어째 말이 안 보인다 싶더니…….
대체 언제 데리고 나간 거야? 도무지 모르겠네.
아무튼,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에선 조금 전까지 치렀던 난리는 꿈이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평온한 분위기가 넘치고 있었다.
……그 두 사람도 저 광경을 보고 싶었을 텐데.
적어도 한 명은 간접적이나마 볼 수 있긴 하겠군.
나는 위병들이 커다란 나무상자를 내리고 있는 걸 잠시 지켜본 후, 따로 모인 여섯 사람을 향해 돌아섰다.
“그래서 슬슬 고래 잡으러 갈까 하는데요.”
“전 못 가요.”
꼭 이렇단 말이지.
여럿이서 뭘 하려고 하면, 꼭 한두 명은 말 꺼내자마자 못한다고 한다니까.
하지만 그걸 비난할 순 없었다.
그 말을 꺼낸 사람은, 저 평화로운 풍경을 만드는 데에 크게 공헌한 위슨이었으니까.
나는 그새 눈 밑이 한층 더 검게 물든 듯한 녀석에게 물었다.
“보조도 못할 거 같아?”
“못해요. 지금도 눈 감으면 바로 잘 거 같은데요.”
“저런.”
배를 만들고 움직이고 띄우는 데에 기운을 다 쓴 모양이군.
혹시 이럴 거 같아서 테레지아를 배낭에서 꺼낸 건가?
이 녀석의 배낭에 뭘 넣는 건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건 배낭 주인인 위슨밖에 못하니까.
“아, 그래, 말 나온 김에 소감이나 들어볼까요? 테레지아 님, 기분이 어떠셨어요?”
“……여쭤주셔서 감사해요, 용사님. 아까는 당신 얼굴이 말이 아니어서 따지지 못했거든요.”
“아, 예. 그래서 소감은요?”
한 번 더 되묻자, 바로 전까지 차분하던 테레지아가 곧바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누가 포대자루를 머리에 씌우고 곧바로 치운 기분이었어요!! 정말이지, 제가 순간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세요?! 미리 말씀이라도 해주셔야 할 거 아니에요! 대체 저에게 뭘 하셨던 거죠?!”
“영업비밀이에요. 뭐, 그 덕에 당신이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알스 사제님께 들으세요. 어차피 여기 계실 거 같으니까. 그렇죠?”
알스 사제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눈두덩이를 매만지면서 입을 열었다.
“저는 테레지아 님과 여기서 논의 좀 하겠습니다. 저 사람들을 어찌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니까요.”
“네, 그러세요. 그럼…… 블루벨, 댁이 여기 남아서 사람들 좀 지켜줘.”
“엥? 너희 셋이서만 가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하는 블루벨.
진짜로 자신을 빼고 갈 거냐고 묻는 듯한 그 눈을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잖아. 여기에 몬스터가 올지도 모르는데, 위병들만으론 저 사람들 지키기 버거울걸? 위슨도 못 움직이고.”
뭐, 엘크가 계속 나와있을 것 같긴 하지만, 지키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는 편이 마음 든든하고 좋을 터.
무엇보다도, 엘프인 블루벨은 시력과 청력이 모두 뛰어나다.
그 데굴데굴 구르는 벌레처럼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는 이상, 뭐가 쳐들어오면 미리 알아채고 선수를 칠 수 있겠지.
“음음, 집 지키는 데에 딱 맞아.”
“집 지키는……? ………윽, 이 추잡한 새끼! 날 개처럼 보고 있었구나! 내 목에 목줄 채워서 네발로 기면서 따라오라고 하려고……?!”
“아잇, 진짜! 이 화창한 날씨에 불경스럽게 뭔 개소리야, 머리 익었어? 저 얼음 속에 대가리 집어넣어줄까?!”
“모, 몸만 바깥에 나오게 해서 뭘 할 작정이야?! 나, 나나, 나한테 뭔 짓을 하려는 거야, 이 짐승!!”
“돌겠네, 진짜.”
어째 말하면 말할수록 내 머리만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아니, 대체 저 머릿속에 뭐가 들은 거야?
만약 저게 로나 말대로, 진짜 여자들 특유의 그 예민함 때문이라면, 앞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저딴 개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거 아냐.
아니, 예민해지려면 신경이나 날카로워질 것이지, 왜 더 예리하게 상스러워지는 건데?!
이런 씨발, 안 되겠다.
다음달 안에 이 여정 끝내버리고 저 할망구 빨리 집에 보내야지.
안 그럼 내가 돌아버릴 거 같아……!
관자놀이를 짚으며 한숨을 쉬는 나에게, 로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근데 폭풍고래를 뭘로 잡으시려고요?”
“지금부터 생각해봐야지.”
“에엥? 전 또 뭐 생각하신 게 있는 줄 알았네요.”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긴 하다.
힐데 사제가 친 종소리에 맞춰서 빛나던 그 빛.
근데 그게 뭔지 모르는 이상, 섣불리 말을 꺼낼 순 없다.
일단 방안을 하나 짠 다음, 가는 길에 여유가 있으면 그 빛의 정체를 확인하러 가는 게 좋겠지.
“뭘로 잡긴. 좋은 거 있잖아.”
“좋은 거라니?”
“까먹었냐? 뼈칼 있잖아, 뼈칼.”
“……허?”
맑게 빛나는 주홍빛 눈동자가, 벙벙해진 나를 마주보며 씨익 웃음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