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8화 〉 328화 : Deep Dive
* * *
속에 담아두고 있던 감정이 생각보다 훨씬 컸던 모양이다.
그녀가 나를 일으켜 앉히고, 등을 토닥이며 달래고 나서야 겨우 조금 가라앉았을 만큼.
격정을 쏟아내고 긴장이 풀린 반동으로 축 늘어져 있는 나와 얼굴을 마주보며, 메린이 빙긋 웃었다.
얼굴을 감싸고 있는 손으로 내 눈가를 부드럽게 쓸면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하여간 울보야.”
“……안 울었어.”
“얼굴 축축하던데, 뭘.”
“……물이겠지. 네가 타고 올라온 거 나한테 다 튀었거든?”
내 코앞에서 물이 솟구쳤는데 그걸 어떻게 안 맞겠는가?
이 발코니에 지붕이 달려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러니 이 녀석이 만진 건 바닷물이지, 내 눈물이 아니다.
아무튼 아니야.
“눈도 빨갛고.”
“……바닷물이잖아. 소금기 있는 물이 들어갔으니까 당연히 빨개지지.”
“아, 그래.”
하나도 안 믿는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인 후, 메린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그렇게 걱정됐어? 나 믿고 뼈칼 쓰기로 한 거 아니었냐? 사실 못 미더웠던 거야?”
“……네가 해낼 줄 알았어. 믿기도 했고.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생각이, 계속…….”
“흐음…… 아, 그거구나, 알고 있어도 걱정이 되는 거. 그래도 너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쫄보라서 그런가?”
메린에겐 나를 비난하거나 비웃으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다.
말씨가 험해서 그렇지, 녀석은 그저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 증거로, 녀석의 말투는 지극히 덤덤하다.눈빛도 그렇고.
비웃을 생각이었다면 코웃음 치면서 좀더 비꼬았을 거다.
의외로 그런 거 잘한단 말이지…….
누구한테 그런 몹쓸 걸 배웠나 몰라.
물론 내가 처음부터 그걸 구분할 수 있던 건 아니다.
익숙해지기 전까진 자주 울컥하고, 녀석에게 시비 거냐고 버럭 화를 냈었지.
메린은 메린대로 내가 괜히 화를 낸다고 짜증냈었고.
서로 간격은 있긴 하지만, 꼴도 보기 싫으니 꺼지라는 말을 주고받기도 했다.
실제로 며칠간 얼굴 안 보기도 했고.
……뭐, 어느 시점부턴 아무리 크게 싸우더라도 그 다음날에 얼굴 꼭 보였지만.
그렇게 부딪치면서 서로에게 익숙해졌다.
나는 너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너는 나에게 맞추느라 골치를 썩였지.
솔직히 행복과는 거리가 한참 멀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없어서는 안 될 시간들이었을 거야.
너를 사랑하는 이 마음은, 아마 그 쌓이고 쌓인 시간들을 먹고 자란 것일 테니까.
두 눈을 깜빡이며 의아해하는 메린에게, 나는 쓴웃음을 띄우며 대답해주었다.
“겁 많은 거랑은 상관없을걸? 난 네가 싸우는 거 자체가 싫어. 네가 무지하게 세긴 하지만, 위험해지거나 다칠 가능성은 항상 있잖아? 그래서 싫어.”
“너 그거 아니냐? 뭐라고 하더라, 그…… 너무 싸고 도는 거.”
“과보호요? 뭐, 좀 그러신 거 같긴 해요. 왜 그러시는지는 알 거 같긴 하지만 말이죠~”
“이게 뭔 과보호……………”
발끈해서 곧바로 대꾸하다가 우뚝 멈추었다.
방금 그 말, 메린 녀석이 한 거 아니지?
뻣뻣해진 고개를 애써 옆으로 돌렸다.
빨간 옷을 입은 어린 사제님이 히죽히죽 웃으면서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응, 맞아.
여기 우리 둘만 있는 게 아니었지.
애초에 나랑 로나가 먼저 여기 와 있었던 거잖아.
그럼, 내가 지금 저 녀석이 보는 앞에서, 메린과 신나게 껴안은 것도 모자라서……
키, 키키, 키스까지……!
“………아으.”
“아, 익었다.”
“이야~ 저 있는 거 알고 하셨던 게 아니었군요~ 재회의 기쁨이 너무나도 커서,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깜빡하셨나봐요~? 꺄아~”
……다른 의미로 감정이 폭발한 탓에, 손으로 얼굴을 덮고서 한동안 바들바들 떨어야 했다.
여러모로 추스른 후, 메린을 기다리며 생각했던 대로 식량 창고를 찾아보기로 했다.
제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왠지 몸이 쇳덩어리가 된 것처럼 엄청나게 무거웠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엉거주춤 일어나는 나를 향해, 로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정령들이 힘을 써서 그런 거 아니에요? 카엘 님과 연결되어 있다면서요.”
“그렇게 많이 한 것도 아닌데…….”
“카엘 님은 마법사가 아니시니까, 위슨 씨와 달리 순전히 기력으로만 값을 치르신 게 아닐까요? 게다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아침부터 쭉 움직이고 계시잖아요. 그나마 과자 먹어서 이 정도일걸요?”
“그런가…….”
마법사는 그 마력이라는 걸로 일부 보충하거나 뭐 그런 식인지도 모르겠다.
엘프의 숲에서 늑대와 다녔을 땐 그럭저럭 괜찮았던 걸 보면, 내가 지금 피곤하긴 피곤한가보네.
발코니에 달린 문을 열고 터덜터덜 안으로 들어가자, 발코니와 이어졌으리라 예상했던 장소 중 하나인 알현실이 나타났다.
메린은 이 안에 딱 하나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나를 돌아보았다.
“넌 그냥 저기서 좀 쉬고 있지 그래?”
“싫어.”
“피곤하다며? 그냥 나 혼자서,”
“싫어.”
단칼에 잘라버리면서 문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또 날 떼어놓고 가겠다고? 어림도 없지.
가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따라갈 거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묵직한 발걸음을 옮기는데, 돌연 든든한 힘이 등을 받치면서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나 참,”
그 주인인 메린은 내 팔 하나를 잡아 자신의 어깨를 두르게 한 뒤, 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툴툴거렸다.
“왜 그렇게 쓸데없이 고집 피우냐? 저거 그 꼬맹이 영주가 앉던 의자잖아. 꽤 편해보이던데, 좀 쉬면 어때서.”
“네가 있으면 몰라, 너 없는 데서 어떻게 편하게 있냐?”
“아니, 네가 무슨 애냐? 뭐 얼마나 떨어져 있는다고…….”
“시끄러. 오늘은 더 안 떨어질 거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녀석이 그 무시무시한 놈에게 혼자 맞서는 걸, 그저 무력하게 멀리서 지켜만 봐야 했다.
뼈칼이 제대로 통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이따 봐’라는 말이 그대로 녀석의 유언이 되고, 그 시신조차 찾지 못할 뻔했다.
녀석이 무사할 거라는 확신,
그럼에도 좀처럼 돌아오지 않아서 점점 더 커져가던 걱정과 불안,
일어날 리 없는 일이 일어난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그 감정들이 머릿속을 마구 헤집어대는 느낌이 얼마나 끔찍했는데, 그걸 작게나마 또 겪으라고?
싫어, 절대 안 해.
……적어도 오늘은 안 된다.
아까 치밀어 올라왔던 격정이 가라앉긴 했지만, 완전히 다 가신 게 아니니까.
메린은 더 말을 하는 대신 한숨만 푹 쉬었다.
그러면서도 나를 한층 더 바짝 끌어당기며 부축해오는 건 뭘로 해석해야 되는 걸까?
여하튼 그렇게 식량 창고를 찾아서 성 안을 걸었다.
예상대로 식당은 알현실과 같은 층에 있었지만, 부엌은 그보다 아래층에 있는 듯했다.
식당 안쪽, 짧은 복도 너머에 마련된 준비실 구석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 있었던 것이다.
……누가 설계했는지 진짜 구조 한 번 특이하네.
보통 부엌이랑 식당은 같은 층에 두지 않나?
계단의 단차도 꽤 높은 편이다.
여기 부엌 일꾼들은 죄다 말 허벅지가 됐겠구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발등까지 올라온 물을 첨벙거리며 복도를 지나 부엌에 들어섰다.
여기가 입구보다 약간 높은데도 이 모양이니, 앞마당과 성문은 말할 것도 없겠구만.
그래도 일이 끝나면 여기서 하루 보낼 만할 거 같다.
어쨌든 화덕을 쓸 수 있고, 이 위엔 물이 올라오지 않아서 그럭저럭 말라 있을 테니까.
침실도 넉넉할 거고.
“저기가 창고이겠지?”
“그렇겠지.”
내 대답에, 메린이 눈에 띄게 방긋 웃으며 부엌 한켠에 나 있는 문으로 향했다.
아니, 식량 창고 보는 게 그렇게 좋은가?
작게 한숨을 쉬는 내게 아랑곳하지 않고, 메린은 창고 안 구석의 빈 나무통 위에 나를 앉혀준 뒤, 선반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와, 제법 많은데?”
“며칠분만 챙겨갔나봐요~ 와, 이거 그거죠? 드워프들이 쓰는 향신료요. 마늘이라고 했던가요?”
“영주님 밥상에 올린다고 고기는 종류별로 다 쟁여뒀네. 생선도 있고.”
그 밖에도 과일, 소금, 이름을 알 수 없는 향신료 등등을 찾을 수 있었다.
의외로 비축량이 꽤 많은 게,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도 남을 것 같았다.
고급 식재료도 있겠다, 이건 돌아가서 논의 좀 해야겠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아가씨에게 말했다.
“좋아, 장소 알았으니까 일단 놔두고 다시 오자.”
“뭐?! ………아, 지금 배낭도 뭣도 없구나. 물 때문에 옮기기도 힘들고. 할 수 없지.”
화들짝 놀란 눈으로 나를 보던 메린은, 스스로 납득하면서 손에 든 훈제 생선을 다시 선반에 내려놓았다.
그런 뒤, 허리춤의 벨트가방에서 훈제 햄과 치즈와 말린 생선……
아니, 그새 저만큼 챙긴 거야?!
“야, 누가 보면 너 굶고 산 줄 알겠다! 왜 그렇게 먹을 거 못 챙겨서 안달이야?”
“비축은 많을수록 좋잖아. 거래도 할 수 있고. 지금은 그보단……”
하아, 메린은 크게 한숨을 쉬면서 자신의 배를 매만졌다.
“출출해. 아니, 배고파. 배낭 있으면 버터 비스킷이라도 먹는데, 그것도 없고.”
“점심에 수프 먹지 않았냐?”
“수프……? 아, 신전에서 주던 거? 건더기 거의 없었어. 그냥 물 마신 거나 똑같았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메린은 표정을 있는 대로 쭈그러뜨렸다.
제법 배가 많이 고픈 모양이었다.
하긴 건더기 있는 수프도 배가 빨리 꺼지는 판에, 뭐 씹는 것도 없이 마시기만 했으니 오죽하겠어?
나보다 먹성도 좋은데 말야.
어쩌면 이 녀석이 뼈칼을 휘두를 수 있었던 건, 그때 과자를 먹은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할 수 없지.
연신 한숨을 쉬는 녀석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요기거리 정도만 가져가. 크게 한 건 했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어, 진짜? 진짜이지? 아싸!”
곧바로 화색이 되어서 다시 선반을 살피는 메린이었다.
미간을 좁히며 선반을 쏘아보고 있는 게, 뭘 챙길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메린 님, 좀 귀여워지신 거 같아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로나가 내 옆에 섰다.
치즈 조각을 우물거리면서.
이 녀석이 어느 틈에……?
로나는 내 시선을 알아챘는지 헤실 웃고는, 벨트가방에서 살구를 꺼내더니 내 입에 콱 물려버렸다!
와, 이 자식, 곧바로 공범을 만들어버리네!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녀석을 보면서 살구를 한 입 베어먹었다.
신맛이 조금 섞인 달콤함이 혀를 감싸면서 기운이 조금 솟는 듯했다.
로나는 그런 나를 방실 웃는 얼굴로 바라보면서, 재차 입을 열었다.
“카엘 님 보자마자 와락 안는 것도 그렇고, 아까 뼈칼 쓰자고 조르다가 토라지시는 것도 그렇고요. 좀더 감정적이게 되신 거 같아요.”
“역시 그런 거 같지?”
“네. 기복은 큰 거 같지만요.”
나는 메린에게 눈길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마침 결정을 내렸는지, 선반에서 무언가를 집어 벨트가방 안에 넣고 있었다.
“큰 게 당연하지. 아직 서투르잖아. 차츰차츰 나아지겠지, 뭐.”
“좀 각오하셔야 할지도 모르겠는데요? 아까 굉장했거든요.”
“아까……? 뭐 있었어?”
로나는 잠시 혼자서 키득키득 웃더니, 나를 향해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신전에서 모니카 만났을 때, 그 아이 번쩍 안고서 신전 들어가셨잖아요?”
“어, 응.”
“메린 님이 젤리 집던 손을 멈추시길래, 왜 그러시나 하고 봤거든요. 그랬더니, 세상에~!”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감싸면서 눈을 휘둥그레 뜨는 등, 로나는 과장스레 놀란 시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엄청 부러운 듯이 아랫입술을 깨물고 계신 게 아니겠어요!”
“뭐? 에이, 설마.”
말도 안 돼.
아무리 나를 좋아하게 됐다고 해도 그렇지…….
그보다는 나 혼자 과자 먹게 되는 걸 더 부러워할 거다.
“진짜라니까요? 그렇죠, 메린 님? 아까 카엘 님이 모니카 안아들었을 때 부러우셨죠?”
아니, 이걸 장본인한테 대놓고 묻고 있네!
기겁함과 호기심을 절반씩 섞은 눈으로 메린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검붉게 익은 자두를 손에 들고서 살짝 동그래진 눈을 깜빡이다가,
“……응.”
이내 시선을 약간 피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두 뺨을 아주아주 약간 발갛게 물들이면서,꼭 쑥스러워하는 것처럼.
………아니, 진짜 쑥스러워하는 건가?
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메린이,
딴 것도 아니고 쑥스러워한다고……?
세상에, 이게 뭔 일이래?!
너무나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들고 있던 살구를 떨어뜨릴 뻔했다.
나는 손을 바삐 움직이며 자두를 챙기는 메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왜 부러워……?”
“……나한텐 한 번도 안 해줬잖아.”
“어…… 비슷한 건 했잖아……?”
두 팔로 받치면서 안은 거긴 했지만, 그 상태로 침대까지 가기도 했다.
모니카를 만나기 전에도 했었지만, 그땐 자고 있었으니 모르겠지.
애초에 다 큰 사람을 어떻게 한 팔로 안아 들어?
메린이야 힘 세니까 될지도 모르지만, 난 절대 못한다.
솔직히 두 팔로 안고도 걷는 게 고작이구만.
“그리고 안아 올리는 거 해줬었잖아. 무도회에서 춤출 때.”
“그건 그냥 빙글 돌기만 했잖아. 전혀 다르다고. 아무튼 걔가 엄청 좋아하길래, 좀…… 그랬어…….”
“………”
메린은 시선을 피하면서 머리를 긁적이더니, 돌연 창고 밖으로 홱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내 입이 저절로 벌어지면서,
“꿈이 너무 큰데.”
메마른 목소리로 가차없는 평가를 툭 내뱉었다.
그러자 곧바로 로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귀여운 게 아니고요? 열심히 근력 키워서 해줘야겠다고 생각하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려면 내 팔뚝이 얼굴보다 더 커져야 할 텐데, 어느 세월에 키우냐? 기약 없는 약속은 안 하는 게 나아.”
“어머나, 매정하셔라~”
무감정한 게 기본인 녀석이 누구한테 매정하다는 거야?
어이가 없네.
콧김을 흥 내뿜으며 녀석에게 쏘아붙였다.
“그리고 쑥스러워하는 게 신선하긴 한데, 그게 뭐? 메린은 원래 귀엽잖아. 원래부터 엄청 귀여운 애가 조금 더해졌을 뿐이구만, 뭘 새삼스럽게…….”
“아, 예. 그러시겠죠.”
곧바로 대꾸하는 로나의 눈초리는 상당히 건조했다.
정론을 이야기한 건데 희한한 반응이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발코니로 돌아와, 저 멀리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는 수평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식량 창고도 확인했고, 계단 올라오느라 기운이 쪽 빠진 것도 알현실 의자에 앉아서 조금 추슬렀으니, 이제 슬슬 돌아가봐야 할 때다.
그래…… 돌아가야 해.
가서 숨도 돌리고, 식량 창고 일이랑 참치…가 아니라 카스피 왕녀를 공략할 방법도 논의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불러. 당장 입을 벌려서 이름을 부르는 거야.
얼른 엘크를 불러서, 이 발코니에서 협곡 너머까지 한 번에 날아가자고!
“하………… 진짜 싫다……….”
“아니, 그냥 물로 가자니까? 생선대가리들 별 거 아니던데, 뭐. 굳이 날아갈 필요 없어.”
“싸울 기운 없어……. 게다가 어차피 절벽 올라가야 하잖아……. 별 차이 없다고…….”
물에 띄워지나 바람에 날리나, 어차피 하늘 위로 슉 날아야 한다는 점에선 똑같다.
거리만 좀 다를 뿐인데, 그렇다면 그냥 한 번에 날아가는 게 훨씬 낫지.
시간도 아낄 수 있고, 무엇보다 가다가 싸우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도 한숨이 새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음을 다잡으려 나 스스로 뺨을 착착 두드린 후, 저 푸른 물 속에 가라앉는 기분으로 엘크의 이름을 불렀는데,
“……응?”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겨우 마음 잡았구만, 왜 안 오는 거야?
혹시 연결이 끊어졌나?
혹시나 싶어 대안이었던 거북이를 불러보니, 곧바로 느긋한 웃음소리와 함께 머리 위가 무거워졌다.
“끊긴 건 아닌가보네. 흠, 벤투스 녀석, 자나?”
“거기 지금………대치 중이여……….”
“대치? 어, 몬스터가 뜬 거야?”
“아니………인간이구먼……….”
인간이랑 대치 중이라고?
도적은 아닐 테고, 설마 영주의 병사들인가?
협곡 입구에 있던 병사들이 리히트 경에게 보고라도 한 모양이다.
……아직 대치 중인데도 엘크가 오지 않는 걸 보니, 위슨이 계속 자고 있는 모양이다.
아마 자신의 계약자를 지키는 걸 우선하기로 한 것일 터.
어쩔 수 없지, 뭐.
“하…… 제기랄, 다시 내려가야 되잖아…….”
기껏 결심했는데 물거품이 되어버렸어.
아오, 그 귀족 새끼들, 진짜 도와주진 못할 망정 계속 방해만 해대네.
가서 한 방 먹이든가 해야지, 원!
“그냥 여기서 뛰어내리면 되지 않냐?”
“어. 안 돼.”
“왜? 그냥 이렇게 난간에 올라가서 눈 딱 감고,”
“아잇, 진짜! 굳이 그렇게 뛰어내릴 필요 없잖아! 안 해! 너도 하지 마, 임마!”
“칫. 쫄보 새끼.”
메린은 투덜대기만 할 뿐, 좀처럼 난간에서 내려오려 하지 않았다.
뭐지? 지금 시위하는 건가?
하, 어림도 없지.
이건 진짜 절대 안 들어줄 거야!
“아, 빨리 내려오…… ……!!”
말을 맺으려던 걸 도중에 내던지고, 녀석의 손을 잡고 홱 끌어당겼다.
“아, 깜짝이야! 뭐야, 갑자기 왜……”
메린이 뾰로통한 얼굴로 불평을 쏟다가 굳는 게 보였다.
……다행이다.
이번엔 안 늦어서.
깊은 안도감과 함께, 가슴과 배가 길다란 무언가에 칭칭 감기는 느낌이 들었다.
아, 역시 물은 물이구나.밧줄보단 부드럽네.
그런 얼빠진 생각이 드는 순간,
“커흑……!”
숨이 턱 막히며 몸이 뒤로 홱 잡아당겨졌다.
저항할 틈 따위 조금도 없이, 발이 곧바로 땅에서 떨어지며 끌려가기 시작했다.
공중에 떠올랐다는 생각도 들지 못할 만큼 빠르게,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억세게 끌어당겨지는 탓에, 곧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카에에에에엘——!!”
그녀가 필사적으로 나를 부르며 난간 아래로 뛰어내리는 게 보였다.
아니, 기껏 구해줬구만…….
어이없어 하는 나를, 바닷물로 된 줄만큼이나 억센 팔이 감싸는 게 느껴졌다.
그 의미를 채 깨닫기도 전에,
뚜둑, 그대로 의식이 끊어져버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