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1화 〉 331화 : 수확의 밤 (1)
* * *
허전한 느낌에 눈이 뜨였다.
뭐가 허전한 건지 알 수 없어서,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팔을 움직여보았다.
그러자 품 안에 자리한 포근한 온기가 웅얼거리면서 몸을 꼼지락거렸다.
그 움직임을 따라, 내 목에 닿고 있던 갈색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가슴속까지 간질이는 느낌에 한숨과 같은 짧은 웃음이 새어나와, 그만 눈꺼풀 속에 숨어있던 잠기운이 죄다 달아나버렸다.
그런데도 속에 떠오르는 건 불평이 아니라 진득한 평온이다.
이대로 쭉 있고 싶다는 온화한 바람과, 품 안에 고요히 자리한 이 따스함을 더더욱 뜨겁게 달구고 흐트러뜨리고 싶다는 갈망이 서로 멱살 잡고 싸우고 있긴 했지만.
그 싸움을 중재하듯, 잔잔한 향취를 풍기는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그대로 이마에, 콧잔등에, 뺨에 살며시 입술을 댄 후, 아주 살짝 열려 있는 입술을 포개었다.
보드랍고 촉촉한 감촉.그 안에 고이 담긴 감미로운 샘.
살짝 혀를 내밀어 맛만 본 후, 얌전히 입술을 떼었다.
좀더 파헤치고 싶고, 좀더 오래 느끼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무척이나 아쉬웠다.
이 이상은 그녀의 허락을 받은 뒤에나 할 수 있으니까.
허락없이 손을 대면 안 된다고.
자꾸만 충동이 올라오는 나 자신을 다그치며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근데 진짜 뭐가 허전해서 잠이 깬 거지?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품 안에 잘 있는데.
“………덮쳤어.”
퉁명스러운 중얼거림 후, 길다란 눈꺼풀 뒤에 숨어있던 주홍빛 눈동자가 딱 절반만 모습을 드러냈다.
메린은 어딘지 불만스러운 빛이 담긴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입을 비죽 내밀고 재차 중얼거렸다.
“자는 걸 막 덮치네. 쌓였냐?”
“……내가 혈기왕성한 십대 후반이긴 한데, 하루이틀만에 못 참을 정도로 막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그러진 않거든? 그리고 그냥 인사 대신에 키스했을 뿐이야. 뭘 덮쳤다고 투덜대고 그러냐?”
자기는 요전에 진짜로 나 덮쳤으면서.
그 뒷말을 꾹 삼켜버리고, 나는 손끝이 저려오는 걸 애써 무시하며 녀석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하읍.”
“……?!”
그런데 갑자기 녀석이 내 손가락 끝을 물더니 잘근잘근 씹으면서 혀로 핥기 시작했다!
살짝 아프면서도 간지러운 기묘한 느낌에, 등줄기가 찌릿하면서 단숨에 머리 끝까지 열이 올라왔다.
아으, 이, 이거 뭔가 위험해!
황급히 녀석의 뺨을 부여잡고 손가락을 빼냈다.
“무, 무무머뭐, 뭐하는 거야?!”
“배고파서.”
“뭔 소리야!”
“배고프다고.”
“히윽?!”
이번엔 내 뺨을 살짝 물면서 쪽 빨더니, 그대로 목을 살짝 깨물면서 핥기 시작했다!
으아아, 잡아 먹힌다!
“배, 배고프면 일어나면 되잖아……! 아까 네가 챙겼던 거 먹으라고……!”
“네가 놔줘야 일어나지.”
할짝할짝.
축축한 혀가 턱선을 따라 꾸물꾸물거리는 느낌에, 어깨가 저절로 움찔거렸다……!
이거 진짜 위험해!
녀석에게 두르고 있던 팔을 곧바로 떼면서 호소하기 시작했다.
“아읏, 놨어, 놨다고! 이제 그만해! 읏, 야아, 팔 치웠잖아, 근데 왜……! 아, 흐읏, 시, 싫어엇……!”
………결국 메린은 내 목덜미를 완전히 침으로 범벅을 만든 뒤에야 나를 풀어주었다.
주섬주섬 몸을 일으킨 후, 이불 대신으로 삼았던 망토를 몸에 두른 다음 웅크려 앉았다.
“흑…… 덮쳐졌어…….”
“그냥 핥기밖에 안 했잖아. 뭘 덮쳤다고 난리냐?”
“싫다고 했는데도 계속했으니까 덮친 거지!”
화끈거리는 얼굴로 항의하자, 자신의 벨트가방에서 먹을 것을 꺼내던 메린이 약간 시선을 내리며 고갯짓했다.
“흥분했으면서.”
“시끄러, 임마!”
“빼줘?”
“………됐거든!”
젠장, 순간 솔깃해버렸어.
진짜 잠깐이었지만 저 녀석의 손이랑 입이랑 가슴에 눈이 가버렸다고!
으아악, 왜 아까 저 녀석이 내 손가락 물던 게 생각나는 거야, 더러운 음란마귀 새끼, 얼른 꺼져, 아으, 난 진짜 쓰레기야……!
……치밀어오르는 자괴감에 한바탕 몸부림을 친 후, 후드를 벗고서 동굴 입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전히 파랗게 빛나면서 가지 비슷한 걸 하늘하늘 흔드는 괴상한 덤불(산호라고 했던가?)이 입구를 막듯이 돋아나 있고, 그 바로 앞쪽 바닥엔 내 손만 한 거북이 등껍질이 얌전히 놓여 있다.
문득 지금 앉아 있는, 또 바로 직전까지 누워 있던 바닥의 모래를 한 줌 집은 후, 그대로 아래쪽으로 손바닥을 기울였다.
그러자 바싹 말라 있는 모래가 손바닥을 간지럽히며 사르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진짜 신기하네.
이렇게 직접 겪는데도 믿기지 않아.
이렇게 특수한 장비도 없이 바닷속에 앉아 있다니.
그것도 나와 메린이 앉아 있는 이 주변만 물이 싹 빠져 있는 상태로!
그뿐인가?
거북이는 주변의 물을 빼줄 뿐 아니라, 우리 머리와 피부는 물론이고, 속옷까지도 푹 적시고 있던 물기까지 죄다 가져가버렸다.
밤이 깊어지면서 으슬으슬 몸을 떨기 시작한 나를 위해, 거북이가 조치를 취해준 것이었다.
비록 동굴 바깥의 한기가 돌 틈으로 스며들어오긴 했지만, 마른 옷에 망토를 덮고 있으니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여기에 메린을 꼭 껴안으며 그 온기까지 더해, 완전히 포근포근한 기운 속에서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러다 이렇게 갑자기 깨어난 건데……
뭐가 부족해서 허전하다고 느꼈던 걸까?
고개를 갸웃하면서 먼저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시계바늘은 정확히 두 시를 가리키고 있고, 시계 한켠에 달린 작은 바늘은 ‘오전’이라 적힌 글자를 향하고 있다.
즉, 지금은 오전 두 시.
캄캄한 별하늘에 노란 달이 떠 있는, 한참 잠을 자고 있어야 할 시간이다.
그리고 그건 저 생선대가리 놈들도 마찬가지이리라.
혼자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휴대용 시계를 다시 품 속에 넣자, 갑자기 메린이 나에게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고서 살펴보니, 훈제 돼지고기에 치즈조각이 두 손 안에 담겨 있었다.
어…… 그러니까 지금, 메린이 나한테 먹을 거 나눠준 거지?
내가 딱히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뜻밖의 일에 녀석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눈을 깜짝이자, 메린이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배 안 고프냐?“
“배?”
아…… 그러고보니 저녁 굶었네.
마지막에 먹은 것도 살구 한 알밖에 안 되고.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뱃속에서 천둥이 치면서 몸이 저절로 스르르 무너지듯이 축 쳐졌다.
“으…… 배고파……….”
“안 고파도 먹으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잘됐네. 먹어.”
“응……. 근데 괜찮아? 원래 이거 다 너 먹으려고 챙겼던 거잖아. 한참 부족할 텐데.”
치즈조각이라도 다시 돌려줄 생각으로 말을 건네자, 메린이 훈제고기를 뜯어먹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어. 괜찮아. 너 먹을 거까지 가져온 거야.”
“엥? 내 거까지? 왜?”
“너 나 먹는 거 보면 배고파하잖아. 맨날 그거까지 챙기다 보니까 버릇됐나봐.”
“……”
절대로 일부러 빼앗아 먹은 게 아니다.
메린이 뭘 먹든 너무 맛있게 먹어서, 직전까지 없었던 허기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온 탓이지.
게다가 많이 얻어먹지도 않았어.
그냥 한두 조각 맛만 보는 정도였을 뿐이야.
근데 그 몫까지 맨날 계산해서 챙겼다고?
즉, 은근히 그게 신경에 거슬렸다는 거 아냐!
아아아, 난 진짜 쓰레기야!!
“그치만……! 네가 뭐 먹는 걸 보지 않는 이상, 밥 때 말곤 배가 안 고팠는걸! 간식거리를 챙겨도 헛고생이 될 뿐이었는걸! 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얻어먹었던 게 아닌걸!”
“엉? 누가 뭐랬냐? 갑자기 왜 혼자 난리야?”
“……나 때문에 네 몫이 줄어서 싫었던 거 아냐?”
“별 생각 없었는데.”
“아, 그래.”
덤덤한 애라서 참 다행이야.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훈제고기를 찢어 입에 넣었다.
그렇게 훈제고기와 치즈, 그리고 자두로 간단한 야식을 마친 후, 나는 물을 마시고서 만족스러운 듯이 웃고 있는 메린에게 물었다.
“메린, 우리가 끌려갔던 곳이 어디인지 기억해?”
“방향은 대충.”
……그럼 됐군.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여전히 등껍질 속에 있는 거북이에게 말을 걸었다.
“아쿠아, 움직일 수 있어?”
깨어 있었던 건지, 거북이가 곧바로 목만 빼꼼 내밀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려고? 더 쉬는 게 낫지 않나?”
“쉴 만큼 쉬었어. 게다가 우린 숫자도 적으니까, 밤을 노리는 게 훨씬 나아.”
“안 보일 텐데?”
“그건 놈들도 마찬가지일 거 아냐. 게다가 그 생선 몬스터들이 하루종일 움직일 리도 없고.”
대낮에 빨빨거리며 움직였으니, 밤에는 분명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설령 깨어 있다고 해도, 놈들 역시 무언가를 보려면 조명이 필요할 터.
그러니 만약에 싸우게 되더라도,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검을 휘두를 일은 없겠지.
뭣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휴대용 야광석등을 꺼내버리면 그만이다.
놈들의 눈을 일시적으로 멀게 만들 수도 있을 테니, 오히려 더 좋을지도 모르겠군.
“허허, 야습이라니. 정면으로 돌진할 줄 알았는데 뜻밖이구먼.”
“셋밖에 없는데 무슨……. 아, 맞다. 아쿠아, 위슨이랑 연락돼? 아직 뭍에 있는지 알 수 있어?”
“무언가 가로막고 있어서 안 돼.”
나 참, 꼭 필요할 땐 안 되는구만.
그 인어 여왕의 시녀를 따라서 바닷속에 온 상태라면, 어느 지점에서 합류하자고 정할 수 있을 텐데.
어쩔 수 없지.
일단 나와 메린, 그리고 거북이까지 합쳐서 셋만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메린, 네 생각은 어때?”
“나? 언제 가든 상관없어. 아…… 궁금한 건 하나 있다.”
메린은 앉은 채로 기지개를 쭉 켜면서 말을 이었다.
“다 죽일 거냐? 아니면 그 생선 년만?”
“……”
나 참, 뭘 묻나 했더니.
나도 녀석을 따라 기지개를 켠 뒤, 시큰둥한 말투로 대답했다.
“덤비는 놈은 다 죽여야지. 굳이 찾아다니면서 죽일 건 없고.”
“그래? 그럼 그 년은?”
“샅샅이 뒤져서 대가리 따야지. 적장이잖아.”
아직도 하반신이 참치라면……
곧바로 죽이는 대신, 잠시 붙잡아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 같아.
꼬리 부근을 잘라서 구운 다음, 본인에게 먹여서 맛 평가를 시킬 수 있을 거 아냐.
……뭐, 막상 만나면 죄다 까먹고 모가지 날려버리겠지만 말야.
씁쓸히 웃으면서 홀로 어깨를 으쓱였다.
메린과 함께 푸른빛 산호를 지나 동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곧바로 덩치를 키운 거북이의 등껍질을 잡아야 하는데, 나는 주변에 펼쳐진 풍경에 잠시 넋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시커먼 어둠 속을, 가지각색의 빛이 은은히 밝히고 있었다.
분홍색, 빨간색, 봄 새싹의 색, 파란색, 순무가 떠오르는 연한 색, 모니카가 준 산호석과 비슷한 색 등등, 온갖 빛깔의 산호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하늘하늘, 각자의 가지를 살랑거리며 그 고운 빛깔을 수줍게 내보이고 있었다.
……꼭 꽃이 피어 있는 것 같아.
바닷속이라는 특수한 장소라 그런지, 왠지 부엉이탑이 있던 그 신비로운 꽃밭이 떠올랐다.
“예쁘다.”
자연히 새어나온 감탄에, 메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예뻐? 이런 것도 예쁘다고 하는 거야? 신기한 게 아니라?”
“혼자 빛을 내고 있으니까 신기하긴 하지. 생긴 것도 특이하고. 근데 이것들을 멀리서 한꺼번에 봐봐, 꼭 꽃이 피어 있는 거 같지 않아?”
내 말에, 메린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며 산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 뒤, 다시 나를 보면서 키득 웃었다.
“네 말 들으니까 그런 거 같긴 하네.”
“그렇지?”
“그래도 역시 꽃이 더 좋아. 향기도 나고, 여러모로 쓸데도 많으니까. 그리고……”
메린은 바로 가까이에 있는 산호를 한 번 더 휙 본 후, 어깨를 으쓱였다.
“생긴 것도 꽃이 더 예뻐.”
“하하, 그렇기는 해.”
“꽃보단 네가 더 귀엽고.”
“아, 그래.
…………뭐?”
얘가 지금 뭐라고……?
녀석은 내 망연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향해 싱긋 웃으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아까도 얼굴 새빨개져선 막 버둥거리고! 히히, 또 보고 싶다~”
“그딴 거 보고 싶어하지 마, 이 나쁜 자식아!”
“왜? 너도 나 헐떡거리는 거 보기 좋아하잖아. 이런저런 소리 듣고 히죽거리기도 하면서.”
“………”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젠장, 정신 못 차리는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어.
완전히 볼 거 다 보고 있었구만?
그래~ 그렇게 여유가 넘쳤구나~
요전에 너무 험하게 한 거 같아서 반성 많이 했는데, 내 착각이었구나~
“……너 두고 봐.”
“뭘?”
“안 알려줘.”
의아해하는 메린의 시선을 무시하며, 거북이의 등껍질을 힘있게 꽉 붙잡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