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4화 〉 334화 : 수확의 밤 (4)
* * *
끄르륵, 들끓는 듯한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또렷한 시야 속에, 성검이 세모꼴로 솟은 천장을 겨누고 있는 게 보였다.
고개를 쳐들고 있지도 않은데 천장이 보인다는 건, 내가 누워있다는 거지?
즉, 내가 지금 바닥에 누워서 칼 들이밀고 있다는 거 아냐.
왜……?
꿈에서 칼싸움이라도 했나?
꿈………?
꿈……!
“……!”
황급히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돌렸다.
카스피 왕녀가 왼쪽 가슴에 두 손을 댄 채 신음하고 있는데, 그 손 틈으로 검푸른 피가 줄줄 새어나오고 있다.
마치 커다란 칼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
어라?
내가 찌른 건 환상 속의 메린이었을 텐데?
어, 뭐야, 설마 왕녀가 직접 메린을 연기했던 거야?
그럼 아까 키스도 그렇고, 막 더듬던 것도……?
“……”
눈꺼풀이 점차 크게 열리면서, 몸이 슬슬 떨리기 시작했다.
오싹한 느낌이 스멀스멀 등골에서 피어올라, 느릿느릿하게 온 몸으로 퍼지는 게 느껴졌다.
아, 아냐아냐, 침착해, 카엘, 일단 침착하자고!!
인어였을 땐 어땠는지 몰라도, 왕녀는 지금 세이렌이잖아.
노래로 유혹하는 몬스터인 세이렌!
그러니까 아까 내 입이 저 징그러운 입과……?!
“………”
침착해애애!!
생각, 생각을 돌리자!
아, 그래, 아까 저 새끼가 소리질렀을 때, 왜 메린은 멀쩡하고 나만 죽을 맛이었는지 이제 알 거 같아.안 그래?
세이렌의 목소리는 남자한테만 통해서 그런 거야, 그래, 그런 특성이 있는 거라고!
즉, 노래를 들은 남자가 환상에 빠지면 그걸 이용해서 이런저런 짓을 하는 거지!
그러니까 아까 왕녀가 날 막 더듬은 것도 그런 의도였다는 거 아냐, 이런 씨발!!
씨바아아알!!
“……끄흐윽…….”
터져나오려는 비명과 절규를 힘겹게 눌러버렸다.
풀썩 꺾이려는 무릎을, 성검을 지팡이 삼아서 가까스로 지탱했다.
아직은 안 돼. 여기선 안 돼……!
상황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어. 가슴에 구멍 낸 정도론 안 돼.
저 씨발년의 목을, 완전히 으깨버리기 전엔 끝난 게 아니야!!
아, 여기가 바닷속인 게 이토록 다행스러울 수가 없다.
차마 다 억누르지 못하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아무도 보지 못할 테니까.
“우윽… 끄흑… 이, 씨발년……!”
………제기랄, 목소리가 꺽꺽대고 있잖아!
아, 몰라, 씨발, 아무튼 죽여버릴 거야아아!!
바닷물 속으로 눈물을 펑펑 쏟으며, 내 입을 더럽힌 망할 년을 향해 성검을 겨누는 순간,
“야, 정신 들었으면 이쪽 좀 보지?”
진짜 메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맞아, 나 여기 혼자 온 거 아니었지!
내가 정신 겸 육체공격을 다 당하고 있었다는 건, 메린이 손을 전혀 쓸 수 없는 상태였다는 거 아냐!
“메린……!”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런 뒤, 그 자세 그대로 굳은 채 망연히 녀석을 바라보았다.
뭐…… 일단 메린은 무사한 것 같았다.
팔다리는 안 보여서 모르겠지만, 얼굴엔 생채기 하나 나 있지 않으니까.
하지만…… 음……
여자의 명예가 좀 심각하게 다친 것 같은데?
저 녀석이 그런 거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지만.
아무튼 무언가 말을 건네야 할 듯싶었다.
멀뚱히 눈만 깜빡이고 있으니, 물 속에 있는데도 메린의 눈빛이 점점 더 건조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충격과 당혹감과 혼란스러움으로 뒤섞인 머리가 짜낼 수 있던 건 단 한 마디뿐.
나는 최선을 다해 만들어낸 그 한 마디를 멍하니 입에 올렸다.
……바닥에 자라난 촉수에 온 몸이 돌돌 감싸인 채, 허공에서 두 다리를 쩍 벌리고 있는 메린에게.
“뭐하냐……?”
“……”
휙.
녀석은 말없이 시선을 피해버렸다.
성검의 하얀 불꽃이 촉수를 전부 태워버리자, 놈에게 묶여 있던 메린이 스르르 바닥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메린……!”
황급히 녀석을 받아 세우고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위아래 옷은 전부 멀쩡하고, 얼굴에도 목에도 상처는 전혀 없다.
그저 곱게 땋아져 있던 머리가 헝클어져 있고, 바지를 동여맨 허리끈이 느슨하게 풀렸을 뿐.
………잠깐, 허리끈?
설마……!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불길한 느낌에 몸을 떨며, 나는 상당히 덤덤한 얼굴로 허리끈을 다시 동여매는 메린에게 물었다.
“너……저 촉수한테 당한 거야……?”
“못 봤냐? 완전히 묶였었잖아. 제길, 놈 자체는 별 거 아니었는데.”
메린은 툴툴대면서 헝클어진 머리를 풀고 돌돌 말아버렸다.
물 속에선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니, 평소처럼 땋으려면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이리라.
……그나저나 투덜대는 대상이 나와는 완전히 다른걸?
녀석은 그 낯부끄러운 자세를 취한 것보다도 그 놈을 이기지 못한 게 더 분한 듯했다.
언뜻 보기엔 놈이 그냥 꽁꽁 싸매기만 하고, 별다른 짓은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나는 확인해야 했다.
“메린, 솔직히 말해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메린이니까.
몹쓸 짓을 당하더라도 수치스러워서 숨기는 게 아닌, 진심으로 별일 아니라고 생각해서 넘겨버릴 여자이니까.
“촉수가 네 몸을……유린한 거야……?”
“엉? 그게 뭔 소리야?”
……제길, 이 녀석에겐 너무 어려운 단어였나?
나는 목을 가다듬고 다시 물었다.
“겁탈당했냐고.”
“아니.”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메린의 얼굴엔,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와, 다행이다!
아무리 책이 사실을 기반으로 쓰인다지만, 역시 촉수가 인간 여자에게 씨를 뿌리려 드는 건 그냥 상상이었던 거야!
그럼 왜 다리 벌리게 했나 싶긴 하지만, 뭐, 그 놈 나름대로 무언가 이유가 있었겠지.
별로 궁금하진 않지만.
아무튼 묶인 걸로 끝나서 정말 다행이야.
어디 찔려서 체액을 빨아먹히지도 않은 거 같고…….
차림새가 조금 흐트러졌던 건, 아마 놈에게 저항하느라 그랬던 거겠지.
그래도 수난을 당한 건 마찬가지이니, 이따가 잔뜩 위로해주자.
크게 안도하며 다짐하는 순간,
“뭐, 바지 속에 들어오긴 했어.”
“………”
불길한 예감 직전의 말이 들려버리고 말았다……!
녀석은 내가 충격에 빠져가는 것도 모른 채, 돌돌 말아올렸던 머리를 다시 풀면서 말을 이었다.
“브리프에 대고 꿈틀거리다가 안에까지 들어오려고 하는데, 네가 그때 딱 저거 찔렀어. 그랬더니 곧바로 멈추더라.”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마치며, 메린은 틀어올린 머리 느낌이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원래는 위에도 만지려던 거 같은데, 주먹이랑 발 계속 날렸더니 아예 돌돌 말아버린 거 있지? 하, 대가리가 어디 달려 있긴 했나봐.”
“……미안. 내가 좀더 빨리 정신차렸어야 했는데.”
“엉? 네가 왜 미안하냐? 너도 당하고 있었잖아. 아, 맞다, 너 괜찮냐? 입 안이 막 파인 거 아냐? 저거 이빨이랑 손톱 엄청 뾰족하던데.”
“………”
그렇지…….
메린 녀석, 다 봤겠구나…….
마음이 도로 저 깊은 바닷속 아래의 심연으로 꼬로록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 반동인지, 무언가 질척한 감정이 울컥 솟아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 이름은 바로 좌절.
흔히 ‘조졌다’고 표현하는 어두운 감정 중 하나였다.
하하…….
나 이 녀석이 보는 앞에서 저 년한테 입술 틀어막히고, 여기저기 더듬더듬 당했구나…….
그랬구나…….
하하, 아하하……!
멍하니 고개를 들어, 염려가 깃든 눈으로 나를 보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니, 하나도 안 괜찮아. 저 씨발년 완전히 다져버리려고.”
“어…… 응, 그래…….”
격려하듯이 내 등을 두드리는 그녀의 손길에 또 다시 눈물이 왈칵 솟는 걸 느끼며, 나는 다시 왕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왕녀는 여전히 검푸른 피를 물에 퍼뜨리면서 웅크리고 있었다.
언제든 휘둘러 쳐버릴 수 있도록 성검을 꽉 잡고서, 나는 왕녀에게 다가갔다.
“내가 저주를 자초했다고……? 쿠흐흣……”
불현듯 왕녀는 얼굴을 들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두 눈은 나를 향하고 있지만, 그 시선은 다른 데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초점이 맞지 않는 거겠지.
목소리도 왠지 몽롱한 것 같고, 아까처럼 날 찢어 죽이겠다는 독기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죽어가는구나.
검자루를 한층 더 꽉 쥐고서 왕녀의 앞에 섰다.
“천만에. 나는 나와 내 백성을 위해 움직였을 뿐……. 저주가 갑자기 끼어든 것이지, 그 길로 뛰어든 게 아니니라…….”
맹약을 등지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 건지 몰랐으니까.
그 서약에 이름이 올라와 있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의미인지 알지 못했으니까.
“그저 상징인 줄로……. 이미 끝나버린 전설로 여겼다…….”
꾸르르, 들끓는 가래 같은 소리와 함께 검푸른 피를 토한 뒤, 왕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누가 짐작할 수 있으랴……? 이 몰골이 우리의 옛 모습이라는 것을. 세상을 노래하는 인어가, 본래는 저주와 정욕을 노래하는 세이렌이었음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
“역사 안 배우냐?”
“그것이 사실임을 누가 입증할 수 있더냐……! 축복을 받은 것은 ‘우리’가 아닌 아득히 먼 선조이니라……! 그저 태어났을 뿐인 우리가 어찌 그를 실감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인어였다.
문어나 가재, 조개 등에서 비롯된 인어들도 처음부터 그러한 모습으로 태어났지, 중간에 사라락 모습을 바꾼 게 아닌 것이다.
그러한 ‘축복’이, 아트라토스 토벌에 참가하겠다고 나선 몇몇 세이렌의 결심으로 비롯된 것은 알고 있다.
생생한 기억이 아닌, 책에 적힌 지식으로.
……흠, 인어도 인간처럼 단명하는 종족인가보군.
그럼 뭐, 이런 난장판을 벌인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인간도 이전 세대가 이룩한 위업을 뒤집어엎기도 하고, 옛날에 저질렀던 잘못을 되풀이하기도 하니까 말야.
옛 현인들은 그 모습에 한탄하며 한 마디 툭 던졌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나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인 뒤, 어깨를 한 번 크게 으쓱였다.
“그래서? 할 말 다했지? 그럼 이제 죽인다.”
“뭐……?”
왕녀는 성검을 쳐드는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내 행동이 완전히 뜻밖이라는 듯이.
“뭘 놀래? 사연을 줄줄 읊으면 그냥 넘어가줄 줄 알았냐? ‘이미 벌은 충분히 받은 것 같군’이라는 소리 지껄일 줄 알았어?”
“……!”
“착각하지 마라, 씨발년아. 네년이랑 네 종족이 저주를 받은 것 자체는 나랑 상관없어. 네년 때문에 죽은 사람들과 망가진 마을과는 *도 상관없다고.
네년은 여전히 선전포고를 때린 적군의 대장이고, 내 목숨을 노린 적이야. 딴 거 없어.”
맹약을 배신한 대가는 이미 치렀다.
이제 남은 건 인간과 내 개인의 몫뿐.
위로 쳐든 성검을 아래로 크게 휘둘렀다.
왕녀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어 그를 피했다.
물을 가르는 검을 붙잡고 곧바로 사선으로 베어들었다.
“캬아아악!!”
둥실둥실 떠가는 꼬리 한 토막.
큼직한 지느러미가 달린 꼬리 조각은, 이내 성검의 불꽃에 삼켜져 재가 되었다.
왕녀는 한차례 길게 비명을 지른 뒤, 격한 기침과 함께 검푸른 피를 토해냈다.
이제 저 소리를 들어도 아무 느낌이 없는 걸 보니, 진짜 다 죽어가고 있긴 한가보군.
재차 성검을 잡고 자신을 노리는 나를 향해, 왕녀는 검푸른 피를 흩뿌리며 날카롭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지성을 잃어가는 고통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내가 전부 재웠다……! 내 손으로, 내 백성을 영면에 들게 했단 말이다……! 게다가 나는 이미 죽어가고 있거늘……!
그럼에도 부족하다는 것이냐……? 정녕 내 목을 쳐야 직성이 풀리겠느냐……!!”
“누가 그걸, 하라고, 했냐고.”
한 마디 한 마디 끊을 때마다, 살점이 한 토막 한 토막 썰린 뒤 하얀 재가 되어 흩뿌려진다.
왕녀의 꼬리가, 팔이, 지느러미가 조금씩 제 주인을 떠나간다.
“아아, 아아아!! 참으로, 잔인하구나……! 한 번에 목을 치지 않고, 이리 욕을 보이다니……!”
“이게 끝까지 지랄이네?! 네가 자꾸 피하니까 그런 거 아냐, 개년아!!”
억울해!
난 아까부터 목 베려고 하고 있구만!
이윽고 두 팔이 전부 떨어져 나가고, 왕녀의 옷도 갈기갈기 찢기면서 그 뒤에 가려져 있던 두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작은 조개 같은 게 다닥다닥 박혀 있는 그 모습은, 관능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었다.
저주라는 말에 걸맞은 섬찟한 모습이다.
……괜히 환상을 보여주는 게 아닌 거지.
왕녀는 내가 또 다시 검을 쳐드는 걸 부릅뜬 눈으로 쳐다보았다.
살짝 벌어진 입에선 검푸른 피가 왈칵왈칵 뿜어져 나오고 있다.
그 참혹하기 그지없는 머리를, 목과 그 아래에 있는 몸뚱이를, 크게 세로로 갈라버렸다.
꾸르르……
부글부글……
끝까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면서, 둘로 쪼개진 시체가 하얗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인어에서 세이렌이 된 왕녀 카스피는, 그렇게 재가 되어 소리 없이 사라졌다.
바닥에 허망하게 내려앉은 장신구만이, 그녀가 이곳에 존재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끝났군.
한숨을 푹 쉬면서 성검을 거두고, 메린에게 다시 돌아갔다.
그러자 녀석이 슥슥, 곧바로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으면서도, 그 손길이 가져다주는 편안함에 웃음이 떠오르려 했다.
바로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끝났군요.”
“……!”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거북이가 막고 있어야 할 입구에 꼬리지느러미를 살랑이며 서 있는 인어가 하나 있었다.
몇 시간 전에 우리를 찾아왔던, 그 여왕의 시녀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잡았던 칼자루를 놓았다.
저 인어가 적이 아니어서 그런 게 아니라,그녀가 대동한 두 사람 때문이었다.
“야호~ 두 분 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로나?”
어떤 사제와 함께 선 빨간 사제가, 우리를 향해 헤실 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