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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346화 (346/475)

〈 346화 〉 336화 : 이독제독을 시도했을 뿐 (2)

* * *

여왕이 있는 방에선 야광석등을 꺼낼 필요가 없었다.

반투명한 둥그런 생물 여럿이 침상 주변에서 둥실둥실 떠 있는데, 그 산호들처럼 혼자서 빛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저렇게 혼자 빛을 내는 생물은 뭍에도 있다.

대표적으로 반딧불이가 있고, 또 발광버섯도 있지?

스프라이트도 혼자 빛을 낼 수 있고 말야.

……스프라이트는 생물이 아닌가?

아무튼 뭍에도 종종 그런 생물이 있긴 한데, 유독 바다에 더 많은 것 같아.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바다의 맨 밑바닥도 아니고, 직접 보진 못했지만 어쨌든 햇빛이 닿기는 할 터.

그런데도 빛나는 생물이 두 종류나, 그것도 엄청나게 다양한 형태로 쫙 깔려 있다.

그럼 여기보다 더 깊은 곳, 빛이 아예 닿지 않는 곳엔 얼마나 더 많은 생물이 스스로 빛을 내고 있을까?

어쩌면 모든 생물이 다 빛을 낼 수 있어서, 오히려 여기보다 더 밝을지도 모르겠다.

“……”

짧은 감상 후, 나는 다시 침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붉은빛 관을 쓴 아드리아 여왕이, 말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사실 정말로 나를 보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여왕의 두 눈동자는 흐릿하고, 주변에 무엇이 움직이건 그저 멍하니 앞만 보고 있으니까.

주름진 얼굴도 퀭하고, 눈가도 시커멓게 물들어 있고…….

로나나 치유사제가 돌본 것 치고는,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뭐, 그건 그거이고,

“……”

난 딱히 할 말이 없는데 말이지?

굳이 인사를 하고 싶지도 않고, 왜 이 지경이 됐냐고 안타까워할 마음도 없고, 이들의 사연도 별로 궁금하지 않아.

그냥 빨리 지상으로 돌아가,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쉬고 싶을 뿐이다.

여왕의 시녀가 우릴 여기 데려온 걸 보면, 여왕이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겠지.

그럼 후딱 했으면 좋겠는데, 여왕은 처음에 ‘용사님’이라고 입을 뗀 뒤론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냥 갈까?

으응,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그렇지.

나는 여왕이 말을 잇길 조금 더 기다린 후,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요?”

작게 한숨을 쉬면서 말을 건넸다.

결국 아쉬운 사람이 먼저 손을 내밀기 마련이다.

여왕은 내 물음을 듣고도 잠시 뜸을 들인 다음,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에겐… 맹약에 반(反)할 마음은… 결단코 없었습니다……. 내가 바란 것은… 단 하나… 카스피의 자멸뿐…….”

“생각보다 더 살기 넘치는 관계였군요. 따님이 그렇게 눈엣가시였습니까?”

“예에… 상당히 거슬렸지요…….”

체념 섞인 미소를 띠며 여왕은 말했다.

카스피 왕녀는 자신의 친딸이 아니라, 전대 여왕의 사생아이자 인간과의 혼혈이었다고.

“아버지가 다른 자매……?”

“후후… 아니요… 나는 선왕의 조카입니다… 그 애는 내 사촌동생이지요…….”

“……어머니라고 하던데요.”

“양녀로… 맞이했으니까요…….”

여왕에겐 아직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수양딸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는 듯했다.

왜 굳이 그래야 하는지는 잘 이해가 안 가지만.

……아니, 애초에 처음부터 말이 안 되지 않나?

전대 여왕에게 사생아 외엔 다른 친자식이 없었다면, 왕위는 그 사생아가 물려받는 법 아냐?

머릿속에 떠오른 그 의문에, 여왕은 힘없이 웃었다.

“후후… 후후후…, 무척 간단하답니다…….”

곡선을 긋는 여왕의 입술에 흐릿한 잔혹이 섞였다.

“내 손으로 선왕을 끌어내렸으니까요…….”

“………”

……진짜 인간이랑 똑같네.

지식으로만 배우는 역사를 등한시하는 것도 그렇고, 권력을 위시한 욕망을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혈연의 피를 손에 묻힐 수 있는 것도 말야.

정말 인간과 닮았어. 소름 끼칠 정도로.

이 정도면 사는 곳과 겉모습만 다르지, 그냥 바다에 사는 인간이라 해도 되는 거 아냐?

당연히 좋은 뜻은 조금도 없었고, 그 의미를 담아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는데, 지금 발언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빌어먹을 생선인간들, 집안싸움 하고 싶었으면 지들끼리 조용히 할 것이지.

괜히 우리만 중간에 껴서 등 터진 거였잖아.

“사연 늘어놓고 싶었던 거라면 이제 됐습니다. 댁들이 앞으로도 쭉 인어로 남을지, 아니면 왕녀처럼 세이렌이 될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둘이서 알아서 사세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용사님…….”

“변명 더 들어드릴 생각 없어요. 과정과 의도가 어쨌건, 이 결말을 불러온 건 여왕님과 왕녀입니다. 인어 스스로 멸망을 자초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여왕님께서 참회를 하시건 후회를 하시건, 아무 소용없다는 겁니다.”

엎질러진 물을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이미 벌어진 일들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왕녀는 여왕이 몸져누운 틈을 타서 권력을 잡고 전쟁을 일으켰다.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여왕을 실각시키려던 것인지도 모른다.

겸사겸사 뭍도 지배하고.

그리고 그걸, 여왕은 왕녀가 자멸할 기회로 보고 침묵했다.

다른 동맹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하지 않고, 왕녀가 선전포고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아마 패전할 거라 생각했던 거겠지. 어쩌면 여왕도 뭍을 정복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때로는 독으로 독을 고치는 법이에요.

문득 치유사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독을 써서 독을 고친다…….

하, 진짜 딱 그 말대로네. 대차게 망해서 그렇지.

크게 한숨을 쉰 후, 애처로이 나를 보고 있는 여왕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저는 여왕님의 말씀에 흥미가 없습니다. 두 분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관심 없어요. 이 대면은, 저에겐 그냥 시간 낭비밖에 안 돼요.

더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방금 하신 말씀을 들으니, 처음에 왕국이 습격당한 것도 자작극이었나 싶네요.”

“그건… 결코……!”

“예. 당연히 아니겠죠. 정적을 없애겠다고 왕국을 멸망시키는 바보가 어디 있겠어요? 근데 그런 같잖은 의심이 들 만큼, 저는 지금 당신들에게 호의가 없어요.”

애초에 내가 왜 여왕의 사정을 들어줘야 되는가?

그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만약의 만약에, 여왕의 이야기를 듣고 동정한다고 쳐. 그럼 뭐가 달라져?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길 해, 망가진 마을이 다시 고쳐지길 해?

저주를 받아 몬스터가 된 인어들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

뭐, 대부분은 이미 죽은 것 같지만.

“그러니 의도만 말씀하세요. 뭣 때문에 저를 보려고 하신 건지.”

“그저……”

여왕은 한두 번 크게 숨을 들이쉰 후, 나를 멍하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나는… 당신의 적이 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는 것을…….”

“……”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쿨럭. 쿨럭.

격하게 어깨를 들썩이는 여왕의 등을 쓸면서, 시녀가 당혹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더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용사가 저리 단호하니, 이제 그만……!”

“아니… 아니야…….”

여왕은 힘겹게 고개를 저으며 그 손을 물리친 후, 다시 나를 올려다보았다.

한결 더 파리해진 입술을 움직여, 말소리를 꺼냈다.

“용사님… 감히 부탁드립니다… 우리를… 인어를 용서해주세요…….”

스러지듯 침상에서 내려와 엎드리면서 여왕이 말을 이었다.

“인어에게 자비를… 다시 한번 더 기회를 베풀어주세요……!”

“폐하!”

“………”

……이건 또 뭔 상황이야?

왜 나한테 용서를 비는 거람?

내가 뭔 기회를 줄 수 있다고??

황당하기까지 한 전개에, 나도 모르게 로나를 돌아보았다.

녀석은 무감정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인 후, 말없이 여왕을 향해 고갯짓할 뿐이었다.

알아서 대답하라는 듯이.

……평소엔 헤실 웃으면서 떠드는 애가 저렇게 입 꾹 다물고 본모습을 보이는 걸 보면, 뭐가 있긴 있나보군.

뭐…… 내가 용서하면 살길이 주어지는 모양이지?

정말로 그런 거라면, 여왕의 불행은 아직도 진행 중인 거나 다름없다.

난 지금 여왕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지 않으니까.

쇠약한 몸으로 엎드려 자비를 구하는 모습이 안타깝지도 않다.

다 저질러놓고 뒤늦게 수습하려는 꼴이 화가 나지도 않고.

정말 신기하게도, 나는 여왕에게 개미 눈썹만큼의 감정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눈앞에서 죽어도 좀 놀라고 끝날 거 같아.

“……”

만약 정말로 내 용서가 무언가의 조건이라면, 아마 말로만 그러겠다고 해도 아무 소용없겠지.

그런 마음이 들 때까지 여기 있을 수도 없고.

그래서 나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마음에 떠오른 그대로 여왕에게 말했다.

“용서 안 합니다. 자비를 베풀 것도 없고요.”

“용사님……!”

“오해 마세요. 그냥 아무 감정이 없어서 그래요. 정말 말 그대로, 조금의 감정도 없습니다.”

화가 안 나는데 어떻게 용서를 할까?

불쌍하다는 맘이 안 드는데 어떻게 자비를 베풀겠는가?

“어째서……?”

“왜 그러냐고요? 글쎄요……,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니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전쟁을 일으키고 용사의 목숨을 노린 카스피 왕녀는 죽었다.

그 시점에서, 더 이상 인어와 나는 아무 관계도 아니게 되었다.

맹약을 맺은 동맹도 아니고, 물리쳐야 하는 적도 아니다.

그냥 길 가다가 지나가는 사람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희가 사는 것을… 용납하신다는 건가요……?”

“좋으실 대로 하세요. 저랑 상관없으니.”

“죽는다 해도……?”

“제 알 바 아닙니다.”

“………그렇군요.”

여왕은 크게 숨을 내쉰 후, 돌연 위를 올려다보았다.

존재하지도 않은 창문 너머를 보듯이 먼 곳에 시선을 던지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럼… 됐습니다…….”

“……”

“리구리아… 손님들을 배웅해드리거라…….”

“………알겠습니다.”

드디어 땅으로 돌아가는구나.

지금 몇 시인지 모르겠지만, 아직 동이 안 텄다면 쪽잠이라도 자야지.

“용사님…….”

시녀를 따라 방을 나서려는 나를 여왕이 불러세웠다.

살짝 몸을 틀자, 금방이라도 사그라들 듯한 여왕이, 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보였다.

“감사합니다…….”

“뭐가요?”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고 싶어서 낸 건 아닌데 말이지.

사제의 치유 부작용으로 푹 퍼진 틈에 여기로 옮겨진 거고……

“도중에 뛰쳐나가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요.”

단지 그뿐이다.

여왕은 내 대답에 한층 더 깊이 웃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나 역시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뒤를 돌아서 방을 나섰다.

축복을 빌어주는 말은 없었다.

그러한 말을 건넬 필요가 전혀 없는, 용사와는 무관한 이종족이니까.

……하지만 얼굴을 튼 사람끼리 주고받아야 할 몫은 있었다.

방 밖으로 나온 후, 시녀는 로나와 치유사제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두 분이 지금 아무 이상 없이 호흡하시는 건, 제 힘으로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저와 거리가 벌어지면 사라질 테니, 그 점 유의해주세요.”

“네, 그러죠.”

“………저기, 용사님.”

인어는 마주 잡은 두 손의 엄지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잠시 뜸을 들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

“덕분에 아드리아 님의 시간이 조금 늘어났어요. 그 답례로, 이걸 드리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며, 인어는 품 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낸 뒤 그 뚜껑을 열어서 내게 보여주었다.

노란빛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팔찌 하나가 들어있는데, 그에 박힌 돌멩이가 깊은 푸른빛을 내며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이건……?”

“팔찌에요. 거기 박혀 있는 돌은, 바다의 정수가 굳어서 생긴 결정을 깎아서 보석으로 삼은 거고요.”

“어……”

“필요 없다는 말하지 마세요. 귀한 거니까.”

단호히 내 말을 막아버린 다음, 인어는 살짝 미소를 띄우면서 말을 이었다.

“무려 여왕의 보물고에 있던 팔찌랍니다. 특별한 힘이 있진 않겠지만, 이 보석은 저희가 주로 부적으로 쓰는 거니, 지니고 계셔서 나쁠 건 없을 거에요.”

“부적? 뭘 비는데요?”

“보호요. 여기보다 더 아래, 빛조차 닿지 않는 깊은 곳의 존재에게서 지켜달라는 기원을 담지요.”

깊고 깊은 바닷속엔, 산호의 빛조차 삼켜버리는 어둠이 자리한다.

그곳에는 산호는 물론이고, 여왕의 방에 떠있던 그 둥그런 생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흔한 벌레 한 마리도 볼 수 없는 적막한 어둠 속엔, 무수한 형태의 공포가 군림하고 있다.

바닥을 뒤집어 엎을 기세의 폭풍이 부는 날에나 나올 수 있는 생물들.

바다의 일족인 인어조차 다 알지 못하는 오랜 생물들이, 지상의 빛이 꺼지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번에 폭풍고래 때문에 하나가 뭍으로 나갔다고 들었어요. 또 비슷한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가지고 가세요.”

“이제 평원 아니면 숲에 갈 건데요? 최종 목적지는 산이고요.”

“바다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에요. 뭍에도 어둠은 있을 거고, 거기 사는 존재가 있지 않나요? 아무튼 가져가세요.”

인어는 그렇게 말하며, 상자의 뚜껑을 덮고 나에게 내밀었다.

굳이 준다는 걸 안 받을 이유는 없지만……

마땅한 이유가 없는 선물만큼 받기 꺼림칙한 것도 없는데 말이지.

“그……”

“………”

……눈이 무서워!

왠지 노랗게 빛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순식간에 등골을 타고 올라온 오싹한 느낌에 몸이 살짝 떨렸다.

그새 갈라져버린 목소리를 가다듬고, 나는 인어의 시선을 피한 채 말을 꺼냈다.

“……근데 이거 진짜 주셔도 돼요? 엄밀히 따지면 여왕님 거잖아요.”

“네, 괜찮아요. 이제 곧 주인 없는 물건이 될 거거든요.”

“………그런가요.”

여왕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것 같긴 했는데, 정말로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녀는 내 말에, 슬픈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를 전부 치료할 만큼의 기력이 없으신 모양이에요. 카스피의 저주 담긴 목소리를 들으신 것도 있고요. 여기 오셨을 때, 굉장히 조용하지 않았나요? 당신들을 놓친 카스피가 세이렌이 되면서 마구 저주를 불러댄 탓에, 다들 영원히 잠들어버렸거든요.”

“남자만 영향을 받는 게 아닌가요?”

“힘을 조금 쓰면 성별 상관없이 영향을 끼칠 수 있어요. 당신의 그 검도 몬스터만 찌를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 거에요.”

아무튼, 기력이 충분했던 자신은 저주의 노래를 들어도 큰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부상 때문에 쇠약해진 여왕은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그렇게 말을 마친 뒤, 시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조만간 저는 유일한 인어가 될 거에요. 그러니 그걸 당신에게 주더라도 아무 문제없어요. 사양 말고 받아주세요. ……저를 만난 기념으로.”

“네?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며 묻자, 인어가 눈을 약간 가늘게 뜨며 미소지었다.

“‘인어’는 당신의 적이었으니, 기념 같은 거 하기 싫을 거 아니에요? 하지만 ‘저’는 당신의 적이 아니었죠. 조금 날이 서 있긴 했지만 멀쩡히 대화도 했고요.

그러니 기념으로 삼아주세요. 저와 말을 나눈 것, 저에게 길을 알려주신 것, 그리고 이렇게 작별인사를 하는 것…….

……저라는 사람이 여기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이제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요.

인어는 속삭이듯이 말하며, 내 손에 상자를 쥐어주었다.

그런 뒤, 약간 뒤로 물러나 산호 줄기가 박힌 입구 근처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안녕히 가세요, 용사님. 기껍게 들으실 지는 모르겠지만,”

“……카엘.”

“네?”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시녀, 리구리아에게 재차 말했다.

“카엘. 제 이름이에요. 당신도 기왕에 기억할 거면, 용사보단 이쪽이 더 낫지 않겠어요?”

“……그렇네요. 그러고보니 자기소개도 안 했었군요. 저는 리구리아에요. 부디 기억해주세요.”

“그러죠. 잘 있어요, 리구리아.”

내 말에, 리구리아가 조금 전보다 더 밝게 웃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네, 잘 가요, 카엘. 당신의 발걸음에 푸른빛 축복이 항상 함께하길 바랄게요.”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다시 위로 올라갔다.

손을 흔드는 리구리아의 모습이, 물 속을 떠다니는 작은 거품보다도 더 작아져서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멈추지 않고 위를 향했다.

어차피 거북이가 움직이고 있겠다, 등껍질을 붙잡은 채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야광석등의 불빛이 닿지 않는 저 아래엔, 그저 검푸른 물만이 보일 뿐.

빛나는 산호도,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말한 인어의 흔적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지만 알고 있어.

설령 이 기억이 시간에 깎여 뭉툭해진다고 해도, 바다 밑에 인어가 있다는 것 자체는 잊지 않겠지.

꽃밭처럼 피어 있던 산호들도 그렇고.

씁쓸한 기분으로, 품 속에 담긴 상자의 감촉을 되새기며 다시금 고개를 돌린 순간,

“……?”

물결과 물거품 소리에 섞여, 노랫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세이렌이 된 왕녀의 노래처럼 머릿속을 뒤흔들지 않고, 그저 잔잔하게 귓가를 맴돌다가 물 속에 흩어져갔다.

……그러고보니, 육백 년 전의 그 대전투엔 인어 시인이 하나 있었다고 했던가?

아마 그냥 시인이 아니라 바드였겠지.

그리고 분명 엄청난 활약을 했을 게 틀림없다.

이렇게 희미한 노래를 듣는데도, 왠지 기운이 나는 것 같으니까 말야.

절로 떠오른 웃음을 머금은 채,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다.

저 바닷속만큼이나 검푸르게 물들어 있을, 드넓은 하늘을 향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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