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350화 (350/475)

〈 350화 〉 340화 : 쟤가 성녀라고?! (4)

* * *

하나, 주민들에게 암시를 걸어서 폭풍고래가 나타난 적이 없다고 믿게 한다.

둘, 주민들이 메린을 ‘창조주가 세운 성녀’로 계속 믿도록 둔다.

셋, 주민들이 스스로 그 믿음을 버리도록 한다.

알스 사제는 손가락을 하나씩 펼치며 열거한 후, 질문이 있으면 하라는 듯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 결정이 기대된다는 듯한 미소를 띤 채.

지금 들은 것만 따지면 첫 번째 방법이 가장 온건하긴 한데……

왠지 그냥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 될 거 같아.

속 내용을 하나하나 확인해보는 게 좋겠어.

일단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을 물어보기로 했다.

“암시를 걸다뇨?”

“쉽게 말해, 기억을 바꾸는 겁니다. 사실 시행하기 힘든 환경이라서 하지 않으려 했는데, 로나가 그러더군요. 위슨 씨가 물약을 다루신다고. 위슨 씨의 도움을 받는다면, 재료 수급뿐 아니라 작업 성공도 보장되니 잘됐다 싶었죠.”

“………”

“오해 마세요,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니까. 주로 악마와 관련된 피해자들에게 시행하는 치료책입니다. 이번엔 예방책으로 쓸 뿐이에요.”

뭐, 차라리 잊어버리는 게 나을 만큼 끔찍한 일을 겪은 사람들에겐 고마운 시술이겠지.

근데 ‘주로’라는 건, 다른 경우에도 시행한다는 거잖아.

어떤 사람을 실컷 고문한 다음, 그걸 잊게 해서 없던 일로 만드는 식으로 쓰고 있는 거 아냐?!

“아니에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고 계시다는 게 표정에 다 나와요. 무슨 상상을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데에 안 씁니다. 저희 내부적으로도, 퇴역하는 사제나 퇴소하는 수련사제에게만 쓰는걸요.”

그것도 이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문 일이다.

보통은 죽으니까.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말한 후, 알스 사제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희에겐 이게 최선의 방법입니다. 비틀어질 가능성이 큰 신심도 잠재우고, 메린 님도 휘말리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그럼 다른 방책은 왜 내놓으신 거죠?”

“제가 낸 게 아니에요.”

마뜩잖은 표정으로 말하며, 알스 사제는 테레지아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무래도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그녀의 제안인 듯했다.

그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테레지아는 날씨 이야기라도 하는 듯이 평탄히 말했다.

“솔직히 나쁠 것 없잖아요? 주민들은 곧 다른 마을로 가서 피난민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다지 좋은 대접은 받지 못할 거에요. 그러니 고된 생활을 견디게 해줄 버팀목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창조주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

우리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때에, 성녀님을 보내셔서 구원해주셨다.

그러니 이 힘든 생활도 반드시 끝나게 해주시리라.

그러한 희망의 상징으로 삼는 게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인가?

테레지아는 그렇게 계속 말을 이었다.

“알스 사제님은 저 사람들 때문에 성녀 신앙이 퍼질 거라 하셨지만, 그렇지 않을 거에요. 사제님 당신도 말씀하셨듯이,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의심하는 종족이니까요.”

저 바깥의 사람들이 메린을 성녀로 믿게 된 건, 녀석의 활약을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폭풍고래를 베는 건 보지 못했을지라도, 그보다 한참 아래인 ‘어선 쪼개기’는 똑똑히 목격한 사람들이기에 품게 된 신앙인 것이다.

그 어떤 증거도 보지 못한 다른 마을 사람들이, 과연 이들의 말만으로 성녀를 믿을까?

테레지아의 결론은 ‘아니다’였다.

“물론 교단의 권위를 깎아내리려고 이걸 이용하는 자가 있겠죠. 하지만 그건 저 사람들이나 당신과는 관계없는 정치판의 이야기에요. 진심으로 성녀를 믿는 사람이 더 생기진 않을 거란 거죠.

그리고 만약 신앙 때문에 메린 씨가 정말로 신성력을 가지게 되면, 용사님께는 더 도움이 되는 일 아닌가요?”

“아니에요.”

“네? 왜요?”

“그런 게 있어요.”

순수 힘밖에 없는 지금도 못 이기는데, 뭐? 신성력?

그딴 특수능력까지 가지면 진짜 답이 없어지잖아!

그 힘이 아트라토스에게서 메린을 지켜준다는 보장도 없고!

로나 말처럼, 중간에 악마가 껴서 그 신앙에 개입하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그게 그대로 메린에게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거 아냐.

그 상태에서 아트라토스가 메린의 몸을 차지하면, 그 힘까지 받아서 놈이 더 강해질지도 모르는 거다……!

으으, 절대 안 돼!

두 번째는 무조건 기각이야!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쉰 후, 다시 알스 사제에게 물었다.

“……마지막 방책이 뭐였죠? 스스로 믿음을 버리도록 한다고요? 어떻게요?”

“이런 말을 전하는 겁니다. ‘율리아 대언자님이 이미 계신데, 창조주께서 성녀를 또 세우셨을 리가 없다. 그 검사는 성녀가 아니라, 창조주께서 잠깐 힘을 보태셨을 뿐이다. 조심해라. 이단이 될 수도 있다’.

아마 마지막 말에 다들 두려움을 품고 신앙을 버릴 겁니다. 사람들은 전투사제를 두려워하거든요.”

“협박이잖아요?!”

“협박이라뇨, 조금 공격적으로 사실을 전달하는 것일 뿐입니다.”

방금 본인 입으로 ‘사람들이 두려워할 것’이라 하지 않았나?

세간에선 그걸 협박이라고 하는 걸로 아는데 말야.

나 참, 사람에게 물약을 먹여서 기억을 바꾸질 않나, 겁을 주질 않나…….

그러고보니 고문도 하잖아?

하하, 정말 대단한 교단이야.

신이시여, 진짜 이래도 괜찮은 겁니까?

그나마 사제들이 ‘창조주의 자녀인 사람을 돌본다’는 사명에만 충실하니 망정이지.

까딱 잘못하면 오히려 이쪽이 사악으로 물들 거 같아.

“……”

……그래서 사제들이 이런 모습인 건가?

자신을 사람이 아닌, 쓰다 버리는 도구로 여기는 사고방식.

원망이나 오해를 받아도 그냥 흘려버리는 무심함.

그럼에도 주인의 자녀라며 사람을 아끼고, 때로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제 목숨마저 아낌없이 버리는 맹목적인 헌신.

이 중에 하나라도 빠져버리면, 사제들이 지닌 칼날은 사람을 해하는 흉기가 될 수 있으니까.

“더 질문하실 건 없나요? 그럼 카엘 님, 당신의 선택을 들려주시지요.”

결정을 내리라고 요구하는 알스 사제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고,테레지아는 조용히 빵과 수프를 먹으면서 이따금 나를 힐끔거리고 있다.

그 외의 나머지, 즉 내 동료들은 전부 식사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당사자인 메린까지도.

여러 사람에게 집중받는 걸 싫어하는 나에겐 절호의 환경이긴 한데…….

저 녀석들, 날 배려하는 게 아니라 그냥 흥미가 없는 거 아니야?

매정한 자식들 같으니.

그 중에 제일 웃긴 건 역시 메린이다.

아니, 어떻게 지 일인데 저렇게 관심이 없냐?

옥수수빵이 그렇게 맘에 들었나?돌겠네, 진짜.

어휴, 나중에 불평하기만 해봐.

한숨을 푹 쉰 후, 나는 옥수수차를 한 잔 따라 마셨다.

고소한 풍미가 입 안과 목구멍 너머까지 배어들면서 뱃속을 편안히 가라앉혀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제 선택은요…….”

절로 떠오른 미소와 함께, 두 사람에게 내 결정을 전했다.

내가 하자는 대로 따를 거라던 말처럼, 알스 사제는 별 이의를 제기하기 않았다.

그저 알겠다고만 한 후, 곧바로 다른 의논사항들을 줄줄이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한차례 논의를 마친 뒤, 빈 접시로 가득해진 카트를 끌고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방을 나가버렸다.

진짜로 내 선택을 따라줄 건지 살짝 의심이 들 정도로 깔끔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그렇게 다시 둘만 남게 된 방 안.

달리 할 게 없던 나는 티 테이블에서 하다 만 기록을, 그리고 메린은 책상에서 내가 내준 작문 숙제를 끝내기로 했다.

각자 한참 종이에 끼적거리다가, 불현듯 메린이 툭 내뱉듯이 말을 건넸다.

“근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되냐?”

“엉? 뭐가?”

“아까 네가 알스 사제님한테 말한 거.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해야 되는 거야?”

아까 내가 그 사제님한테 말한 게 한둘이 아닌데 뭘 말하는 거지?

잠시 깃펜을 놓고 녀석을 뚱하게 쳐다보자, 내 시선을 느낀 메린이 나를 힐끗 쳐다보며 재차 말했다.

“네가 그랬잖아. 갈색 머리의 천사가 나타났다가 사라진 걸로 암시를 걸라고.”

“……아, 그거? 난 또 뭐라고.”

메린을 향한 성녀 신앙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에 대한 내 결정은, ‘천사가 기적을 베풀고 사라진 것’이라는 기억을 심는 것이었다.

깊은 바닷속에 사는 촉수생물체가 던진 고기잡이 배를 자른 것도, 폭풍을 일으킨 고래를 쪼개버린 것도, 전부 창조주가 보낸 천사가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갈색머리 여자의 모습을 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세상에 간섭하기 위해 잠시 인간의 형태를 빌렸을 뿐,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한 기억을 심으라고 알스 사제에게 전했던 것이다.

“그게 뭐가 복잡해?”

“그냥 아예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게 더 간단하잖아. 왜 천사이니, 실제론 없는 사람이니 하면서 말을 만들어?”

“왜, 불만이야? 그럼 아까 말을 하든가.”

실컷 얘기할 땐 밥만 먹더니, 얘기 다 끝나니까 딴죽 걸고 있네.

진짜 어이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핀잔을 주자, 메린이 샐쭉해하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누가 불만 있댔냐?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묻는 거지.”

“아까 다 얘기했잖아. 실제로 일어난 일을 살짝 바꾸는 게, 아예 없던 일로 만드는 것보다 더 확실할 것 같다고.”

이 성에 모인 사람들만 걸리프의 주민이 아니다.

영주와 함께 길을 떠난 주민들도 폭풍고래가 나타났다는 걸 알고 있고, 그중 일부는 메린이 고기잡이 배를 쪼개는 걸 목격하기도 했을 터.

만약 그 사람들을 만나거나, 그들의 귀에 ‘걸리프에 폭풍고래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들린다면 고개를 흔들면서 사실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겠지.

그 목격담과 충돌하면서, 또 다른 귀찮은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그러니 어디까지나 두루뭉실하게, 애매~하게 만들어버리는 게 좋을 듯했다.

폭풍 때문에 주변이 어두컴컴했으니, 그 부분을 찌르고 들어가면서 ‘잘못 본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고 말야.

“그리고 테레지아 님의 말도 일리가 있어. 저 사람들은 곧 힘든 생활을 하게 될 테니, 그걸 견디게 해줄 버팀목이 필요해. 신의 기적을 체험한 것만큼 든든한 건 없을 거야.”

저들이 메린을 열렬히 숭배한 것도 그 일환이었을 것이다.

자신들은 어쩌지 못하는 적을 시원하게 해치워버린 힘.

그 강함에 의지하고 싶었던 거겠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나부터 그러고 있으니까.

……그래도 성녀는 너무했어. 태양의 여신이니 하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고.

메린이 드래곤의 정수를 품고 있다는 걸 떠나서, 녀석의 두 위업은 신과 전혀 관련이 없다.

그런데도 곧바로 신을 떠올리다니, 걸리프 사람들은 신앙심이 꽤 깊은가보다.

“근데 그게 끝날 때까지 밖에 못 나가잖아. 오늘 저녁에 시행하더라도, 내일까지 쭉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며.”

“어쩔 수 없잖아. 새 기억이 정착되기 전에 네 모습을 보면, 예전 게 떠오르면서 암시가 풀릴지도 모른다는데.”

그 주의사항은 비단 이번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설령 알스 사제의 맨 처음 제안인 ‘폭풍고래가 나타난 적이 없다’는 암시를 건다고 해도, 메린은 그 일이 끝날 때까지 이 방을 나갈 수 없다.

녀석이 놈을 베는 걸 직접 본 사람이 있으니까.

뭐, 내가 요청한 기억은 실제 일어났던 일을 살짝 비튼 것인 만큼, 보다 세심하게 주의해야 할 필요가 생기긴 했다.

“원래는 나만 못 나갈 걸, 너까지 여기 갇혔잖아. 쓸데없이.”

“……”

깃펜을 손 안에서 휘휘 돌리면서 투덜거리는 메린에게, 나는 그저 쓴웃음만 보낼 뿐이었다.

……그렇다.

나는 방에서 나가지 못하는 메린을 위해 남아있는 게 아니라, 이 녀석이랑 같이 방에 갇힌 것이었다.

배와 폭풍고래를 쪼갠 메린, 즉 갈색머리 여자는 실제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천사가 잠깐 나타났던 걸로 설정하기로 한 상태이다.

그런데 내가 이 녀석과 찰싹 붙어있던 걸 다들 보았으니, 나를 보면 자연히 메린을 떠올릴 터.

그랬다간 이 녀석이 그 위업들을 이룬 장본인이라는 걸 다시 기억해낼 가능성이 크다.

그 이유에서, 나도 사람들의 새 기억이 정착되기 전까진 꼭꼭 숨어있어야 했다.

“난 상관없는데? 때 되면 알아서 밥 챙겨주지, 저 좋은 침대에서 하루종일 뒹굴거려도 되지, 너랑 쭉 같이 있지……. 좋기만 한데?”

말이 갇힌 거지, 공식적으로 메린과 노닥거려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진 건데 무슨 불만이 있겠는가?

설령 메린만 방에서 못 나온다고 해도, 어차피 나는 여기 있었을 거야.

내가 이 녀석을 두고 다른 데에 갈 수 있을 리가 있나.

“……진짜 불만 없어?”

……내 눈치를 살피며 여러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웅얼거리듯이 묻는 이 녀석을, 내가 어떻게 혼자 둘 수 있을까?

“없다니까 그러네. 왜, 넌 싫어? 나랑 계속 같이 있어야 돼서 불만이냐?”

“……아니.”

“근데 왜 자꾸 그래? 너 사실 농땡이 까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수작부리지 말고 얼른 숙제나 해, 임마.”

“그런 거 아니거든!”

알아. 내가 너 때문에 방에 갇힌 게 싫은 거지?

네 잘못이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이 무거운 거지?

다 알아, 메린.

내가 왜 모르겠냐?

네 목소리에 다 묻어나오는데.

“나는 그냥……”

“메린, 신경 쓰지 마.”

테이블 의자에 앉은 몸을 돌려 메린을 향했다.

약간 시무룩해져 있는 녀석의 얼굴을 마주보며, 또박또박 힘주어 말해주었다.

“이건 내 선택이 불러온 결과이고, 난 불만 없어. 너도 나랑 같이 있는 거 싫지 않다며. 그럼 된 거 아냐?”

“그래도 신경 쓰이는 걸 어쩌라고…….”

“괜찮아. 금방 잊어버릴 거야. 자꾸 그러면 내가 너 숙제하는 동안 옆에서 감시하고 참견해댈까 하거든. 어때?”

“아냐, 됐어, 더 말 안 할게, 하지 마!”

메린은 손까지 내저으며 사양한 후, 곧바로 종이에 코를 박듯이 숙인 채 깃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내가 피식 웃은 건 절대 못 봤을 거다.

하여간 귀엽다니까.

얼굴에 미소를 띄운 채, 나는 다시 수첩을 채우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깃펜 소리만 잔잔히 울리는 평화로운 오후였다.

그리고 맞이한 밤.

아침에 꽤 자버려서 잠이 안 올 줄 알았는데, 낮에 했던 의논이랑 기록이 은근히 기운을 쓴 건지 살짝 졸음이 느껴지고 있었다.

옆에 누운 메린도 졸린 듯이 크게 하품을 하는데……

아마 이 녀석은 글공부 때문에 피곤한 걸 거다.

녀석이 숙제를 마친 뒤에도 시간이 많이 남았길래, 간만에 내가 붙잡고 이것저것 시켰으니까.

“내일도 기대되는데.”

“윽.”

“왜? 퍽 잘 읽고 쓰게 됐더만. 좀 있으면 내가 안 봐줘도 될 거 같던데, 뭐.”

“……진짜? 히히.”

그 말에 기분이 풀어졌는지, 메린이 평소처럼 몸을 꼼지락거리며 품을 파고들었다.

팔을 두르며 꼭 안아주자, 만족스러운 듯이 배시시 웃었다.

……근데 오늘 피곤하긴 한가보다.

아까 아침에 이 녀석이랑 같이 목욕했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이렇게 마주 누워서 귀여운 얼굴을 보고 있는데도 미소만 떠오를 뿐, 평소처럼 마구 두근거리지는 않고 있었다.

자격이 없으니까.

……아니, 그냥 나 자신이 느끼는 것보다도 훨씬 더 피곤한 거겠지.

그렇게 매듭짓고 잠을 청하려는 순간,

“야, 카엘.”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시선을 약간 내리자, 메린이 의문이 담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왜 키스 안 하냐?”

“……네? 키스라뇨?”

이건 또 뭔 뜬금없는 소리야?

나도 모르게 존댓말이 튀어나왔잖아.

멀뚱멀뚱 그녀를 쳐다보고 있자, 그녀가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더듬으면서 속삭였다.

“맨날 자기 전에 입술이나 이마에 키스했었잖아. 근데 왜 오늘은 전혀 안 하냐?”

“어……”

“아까 새벽이랑 아침에 껴안았을 때도, 원래는 머리에 키스하면서 코 박으면서 전혀 안 하고. 목욕할 때도 자꾸 딴 데 보고. 쪽팔려서 그런 것도 아니면서 왜? 너 이상해.”

“그건 그…… 피곤,”

“지랄하네.”

메린은 뚱한 눈으로 내 말을 썩둑 잘라버렸다.

“자면서도 발정하는 놈이.”

“내, 내내내, 내가, 어어, 언제……!”

“너 가끔 잠꼬대하면서 꽉 안고 내 얼굴 막 핥고 난리도 아냐. 아니, 대체 뭔 꿈을 꾸길래…….”

“몰라, 기억 안 나, 그런 적 없어, 난 모르는 일이야!!”

말도 안 돼, 내가 그럴 리가 없어, 진짜 말도 안 돼, 그냥 이 녀석이 나 놀리는 걸 거야, 잠꼬대하면서 껴안은 건 그렇다 치고 얼굴 핥았다니 뭔 변태도 아니고, 그거 그야말로 개나 할 짓이잖아, 으아아, 아냐아냐, 나 아니야, 그런 짓 안 했어, 기억 하나도 안 나, 몰라, 진짜 모르는 일이야아아!!

순식간에 머리 끝까지 열이 올랐다.

눈앞이 핑 도는 어지럼을 느끼면서도, 나는 그저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그런 내 얼굴을 한손으로 콱 잡더니, 메린이 얼굴을 약간 들이밀었다.

주홍빛 눈동자가, 입술이 점점 가까워진다.

그 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그 진득하게 달콤한 향이 입 속에 맴도는 듯했다.

“………어라.”

정신을 차리니 내 손이 녀석의 얼굴을 막고 있었다.

거부라도 하는 것처럼.

……말도 안 돼.

이거 비몽사몽 중에 얼굴을 핥는 것보다 훨씬 더 믿기지 않는 짓이잖아.

내가, 메린을 거부한다고……?!

“어…… 아냐, 메린, 이건……!”

“거봐.”

황급히 뗀 손을 꽉 붙잡으며,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표정은 지극히 덤덤한데, 그 눈동자는 어떤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너 이상해. 차가워졌어. 나한테 싫증났냐?”

“아, 아냐, 그런 게 아니라……!”

“아니면 뭔데?”

가늘어졌던 두 눈이 점차 크게 뜨이는 게 보였다.

공부 때문에 피곤했던 게 전부 날아간 건지, 주홍빛 눈동자는 굉장히 활기차게 빛나고……아니, 번뜩이고 있었다.

이런 눈을 하는 녀석이 성녀라니, 진짜 말도 안 되지.

속에 떠오른 중얼거림이 헛웃음을 켜며 조용히 사라졌다.

“말해. 화내기 전에.”

낮게 깔린 그녀의 목소리에 절로 몸이 떨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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