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3화 〉 343화 : 바다와 갈매기에게 작별을 (2)
* * *
이튿날 아침 일곱 시, 부엌에 들어선 나를 본 로나가 경악에 찬 얼굴로 입을 벌렸다.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게 아닌지, 녀석의 손에 들려 있던 순무가 땅에 툭 떨어졌다.
……어이가 없네.
이미 알스 사제를 비롯한 사람들은 다 떠났으니 내가 여기 오면 안 되는 것도 아니구만.
“야, 뭘 그리 놀래? 내가 이 시간에 일어난 거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그래서 놀란 거에요! 위슨 씨가 어제 그랬는걸요! 어젯밤 내로 카엘 님이 말린 생선이 될 거 같다고요! 근데 이렇게 쌩쌩하다니,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
거기선 충격 받을 게 아니라, 멀쩡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니냐?
이딴 게 사제……?
하도 어이가 없어서 무어라 대꾸할 맘도 들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흔든 뒤, 다른 순무 하나를 집어서 다듬기 시작했다.
“근데 진짜 신기하네요~ 독기 빼서 회복이 빨라진 걸까요?”
“그렇겠지, 뭐.”
그것도 이유이겠지만,어제 저녁에 잠이 깬 뒤로는 안 했다는 게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할 거다.
그리고…… 메린이 목욕한 다음에 안마를 해준 덕분이 아닐까?
너 움직이는 거 좀 굼떠졌잖아. 그거 어깨랑 등이랑 뭉쳐서 그런 거니까 풀어줘야 된다고.
됐어.
나 잘한다고 칭찬받았다니까? 해줄게~
아, 됐다니까 왜 자꾸, 꺄악?!
후…… 나쁜 자식, 안 한다고 하는데도 침대에 던져버리고 말야.
그런 뒤, 녀석은 나에게 엎드려 누우라고 하고는 어깨와 목을 주물러대기 시작했다.
맨 처음엔 뒤지게 아팠지만, 그 다음은 몸이 푸근하게 풀리는 느낌이 들었었지?
그러다 도중에 잠들어버려서 녀석이 뭘 어디까지 했는지는 모른다.
그래도 뭐,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굉장히 가뿐한 걸 보면 안마 효과를 톡톡히 본 듯했다.
……하지만 로나에겐 말 안 할 거야.
붙잡고 놀릴 게 뻔하니까.
“그러고보니 메린 님은요?”
“블루벨이랑 대련하겠다던데.”
아마 지금 성 앞마당에서 신나게 챙챙거리고 있겠지.
평소라면 나도 메린에게 끌려갔겠지만, 녀석은 날 잡지 않는 대신 식사 준비하라며 부엌으로 보냈다.
위슨이 피난민 호위 때문에 자리를 비운 지금, 제대로 요리할 수 있는 사람이 메린과 나밖에 없으니까.
로나도 못하는 건 아닌데, 전투사제 규범상 스스로 요리할 때는 간을 못 맞추게 되어 있다고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배를 채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나?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닌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다.
그래도 요리를 배운 만큼, 지금처럼 재료를 다듬거나 잘게 써는 식의 보조는 할 수 있었다.
“근데 뭐 만들려고 했어?”
“야채 수프요. 딴 거 하셔도 상관없어요.”
“그래? 알았어.”
잘됐네. 모처럼 부엌에서 만드는 건데 수프는 조금 아쉽지.
지금 여기엔 소화력 좋은 사람밖에 없는 데다, 두 명은 빈 속에 운동하고 있으니 좀더 든든한 걸 준비하는 게 좋을 터.
창고에 생고기가 있을 테니 아직 안 상했으면 그걸로 스튜 끓이자.
그렇게 다짐하고 창고에 가니, 꼬챙이엔 검게 그을린 고기들만 걸려 있었다.
연기 냄새……이거 죄다 훈제한 건가?
“우와.”
이거 사흘은 먹겠는데?
위슨과 합류하기로 한 곳까진 닷새 정도 걸리니까, 아껴 먹으면 가는 내내 야생고기 안 먹어도 될 거야!
……라는 건 헛된 꿈이지.
가는 길에 분명 몬스터 튀어나올 거고, 그게 짐승형 몬스터라면 메린이 십중팔구 도축할 거다.
‘훈제보단 생고기가 더 맛있지~’ 같은 소리하면서 말야.안 봐도 뻔해.
그냥 아끼지 말자.
한숨을 푹 쉬면서 훈제쇠고기 한 덩어리를 잘라 부엌으로 돌아온 다음, 한 입 크기로 크게 썩둑썩둑 썰었다.
그런 뒤, 솥에 기름을 뿌리고 양파와 당근, 순무를 썰어 넣었다.
치이익—
달궈진 솥 속에서 텅 빈 뱃속을 한층 더 요동치게 만드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아으, 배고파…….
“로나, 곡물가루 뭐 있어? 밀가루면 제일 좋긴 한데, 없으면 아무거나 좀 가져와줄래?”
“네, 잠시만요~”
잠시 후, 로나는 조리대에 밀가루가 든 작은 자루를 올려놓았다.
그걸솥에 약간 붓고 같이 볶다가, 아까 썰어 둔 훈제고기를 넣고 물을 부었다.
메린이라면 버터를 써서 야채를 볶거나, 물 대신 맥주나 포도주를 부었겠지.
하지만 난 그런 걸 써서 간을 맞출 자신이 없다.
괜히 시도했다가 망할 바에, 조금 맛이 덜해도 먹을 만한 걸 만드는 게 낫지.
마침 훈제한 고기이니 잡내 걱정도 없고.
홀로 어깨를 으쓱이면서,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 솥에 소금을 넣고 휘휘 젓기 시작했다.
이제 적당히 국물을 졸이면 끝. 속을 든든하게 해줄 훈제쇠고기 스튜가 완성된다.
……음, 일단 냄새는 괜찮군.
아, 배고파 죽겠네.
“위층 말고 여기 안쪽 테이블에서 드실 거죠? 빵 갖다 놓을게요~”
“어, 응. 고마워.”
로나 쟤도 배가 고픈 모양이네.평소보다도 더 빠릿하게 움직이고 있다.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로나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국물이 좀더 걸쭉해지도록 밀가루를 약간 더 넣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마침내 완성된 스튜를 솥째로 테이블에 올렸을 무렵,
“오, 냄새 괜찮은데?”
메린이 옆구리에 축 늘어진 블루벨을 낀 채로 안에 들어왔다.
기절한 건 아닌지, 블루벨은 의자에 앉혀지자마자 앞으로 푹 엎어져서는 괴상한 소리를 흘렸다.
“으으으어어…….”
“……”
되살아난 시체 같은 소리 내고 있네. 돌아버리겠구만.
나는 그릇에 스튜를 덜고 있는 메린을 뚱하게 쳐다보았다.
“야, 메린, 넌 사람 초주검 만드는 게 취미냐? 아침 먹고 출발하려 했구만…….”
“내 탓 아냐. 난 적당히 끊으려고 했어. 근데 얘가 계속 덤비는 걸 어쩌라고.”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엎어져 있는 블루벨을 쿡쿡 찌르자, 그녀가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들었다.
“으으으, 오늘은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단 말야……!! 어제 기운 다 썼을 텐데 어째서……!”
“저런.”
헛된 꿈을 꾸고 묵사발이 나버린 엘프에게 잠시 묵념한 뒤, 다른 두 아가씨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서 스튜를 한 술 떴다.
훈제고기는 연하게 풀어져서 부드럽고, 야채들은 조금 흐물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아삭한 식감이 남아있다.
육수가 아니라 맹물로 끓여서 고기스튜 치고는 담백한 게 조금 흠이지만, 아침인 걸 감안하면 그리 나쁘진 않다.
“괜찮네. 국물이 좀 연해서 그런지 잘 넘어간다.”
“네, 맛있어요! 배고파서 그런지 더 맛있는 거 같아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블루벨, 댁도 그만 엎어져 있고 얼른 일어나서 먹어.”
“으어어…….”
……진짜 시체되기 직전이구만. 그냥 냅두는 게 낫겠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납작한 옥수수빵을 한 입 뜯었다.
블루벨이 뻗어버린 탓에, 출발은 점심 이후로 미루게 되었다.
메린은 그동안 빵을 굽겠다면서 창고에 있던 곡물가루를 죄다 꺼내기 시작했다.
지금 여기 남은 건 원래 있던 비축분의 극히 일부라지만, 그래도 혼자 하기엔 양이 많은 거 같은데.
“도와줄까?”
“아니.”
칼 같이 거절당했다!
뭐, 혼자 하는 게 비율 맞추기 편하다는 이유이겠지.
녀석의 저런 대답에 마음 상해하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났다.
……근데 그럼 난 할 게 없는데. 뭐하지?
으음…… 역시 산책밖에 없나?
이제 물도 다 빠졌을 테니 돌아다녀도 괜찮겠지.
나는 커다란 통에 밀가루를 쏟아붓고 있는 메린에게 말했다.
“동네 좀 돌아다니고 올게.”
“어.”
고개도 안 들고 대답하는 메린.
나는 그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부엌을 나와 성 바깥으로 향했다.
활짝 열려 있는 문을 지나 앞마당으로 나오자, 로나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를 훙훙 휘두르고 있는 게 보였다.
뭘 휘두르나 싶어 조금 가까이 가보니, 평소에 쓰고 다니던 철퇴를 휘두르며 빙글빙글 춤추듯이 돌고 있다.
아마 무게가 쏠리는 걸 이용하는 동작이겠지.
볼 때마다 참 신기하단 말야.
어떻게 멀미가 안 나는 거지?
“아, 카엘 님.”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로나가 철퇴를 든 채 쪼르르 달려왔다.
“산책 가세요?”
“응, 시간도 때울 겸 마지막으로 좀 보려고. 철퇴 찾았나보네?”
“네! 테라가 어제 찾아줬어요! 하아~ 이 손맛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요! 헤흐, 역시 윌이 최고야……!”
로나는 철퇴자루를 꽉 껴안으며 헤죽헤죽 웃었다.
두 볼이 상기되어 있지만, 아마 방금까지 몸을 움직여서 그런 거겠지.
아무튼 그럴 거다.
……왜 진짜 내 주변엔 멀쩡한 놈이 없는 거지?
한숨을 쉬고 싶은 걸 꾹 참고, 철퇴를 보면서 헤헤 웃는 로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무튼 다녀올게. 아마 한두 시간 걸릴 거야.”
“아, 카엘 님. 기왕 나가시는 거, 신전에 꼭 들르세요.”
“신전? 왜?”
내 물음에, 로나는 그저 방긋 웃을 뿐이었다.
성문을 나와, 바싹 마른 돌길을 따라 걸었다.
들리는 소리는 바닥을 두드리는 신발 굽과 하늘을 날아다니는 갈매기 울음소리뿐.
바람조차 울적해서 구석에 들어가 있는지, 부숴지거나 덜 부숴진 건물들이 적막에 싸여 있다.
그 쓸쓸한 거리를 계속 걸었다.
광장에서 시장, 성물 보관소, <파도타는 고래=""> 여관에 들러서 돌아본 다음, 다시 광장으로 향했다.
우리가 이 마을에 왔을 땐 이미 태반이 비어 있던 탓에, 추억을 되새길 만한 장소가 그리 많지 않았다.
부둣가는 아예 없어졌고.
“……”
부둣가……
문득, 그곳에서 나눴던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슬프지 않나요? 마을이 많이 비었던데.
……그렇게 묻는 나에게, 그 사람은 햇살처럼 밝게 웃으면서 힘차게 대답했었다.
네. 전혀 슬프지 않아요. 모두 살아있으니까요.
그 말을 듣는 나까지도 정말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을 만큼, 단 한 점의 의심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실상은 다를 수도 있는데.
아니, 다를 수밖에 없는 시대인데.
……쓸쓸한 분위기에 휩쓸린 걸까?
왠지 울적해져서 무거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무도 없는 광장에 서서 시계를 꺼내 보니, 삼십 분밖에 안 지나 있다.
이대로 돌아가기도 뭐한데…….
아, 로나가 신전에 가보라고 했었지?
왜 그런 권유를 한 건지 모르겠지만, 달리 갈 데도 없으니 한 번 가보기로 했다.
……그리고 울타리문을 지나자마자 로나가 왜 그랬는지 단박에 깨달았다.
“………”
입구 근처의 묘지에, 만든 지 얼마 안 된 무덤 두 개가 만들어져 있었다.
각각의 무덤 앞에는 꽃들이 둔덕을 만들 정도로 그득히 쌓여 있다.
누구 무덤일지는 굳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최근에 죽은 사람 중, 저렇게 사람들이 애도할 만한 사람은 손에 꼽히고……
무엇보다도, 무덤 스스로 제 주인을 알리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 반듯하게 깎은 돌에 또박또박 이름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웨이비 던트="" 대장.="" 마을의="" 수호자.="" 의무를="" 다하고="" 이곳에="" 잠들다.=""/>
<42번째 예언사제="" 힐데.="" 역할을="" 훌륭히="" 완수한="" 자매에게="" 안식을.=""/>
터덜터덜, 그 앞에 가서 몸을 낮추고 두 비석을 번갈아 보았다.
………작별 인사해야지.
“……”
던트 위병대장의 비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맨들맨들한 표면을 쓸어가면서, 머릿속에 그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사제에게도 가차없던 깐깐한 모습.
개인 집무실에서 봤던 사무적인 모습.
……그리고 주민을 해치려는 기사에 맞서고, 그를 이기지 못해 쓰러진 모습이 차례로 떠올랐다.
“로나에게 그러셨다면서요? 주민들을 부탁한다고. 가족들에겐 못 돌아가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전언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주민들은 무사히 여길 떠났습니다. 당신 부하들과 함께요.”
로나는 말했다.죽은 사람의 영혼은 지상에 머무르지 않고 곧바로 천상으로 떠나버린다고.
사제가 하는 말이니 아마 맞겠지.
그럼에도 나는 굳이 입 밖으로 전하고 싶었다.
그래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대장님 덕분에 다들 무사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때맞춰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크게 고생하셨으니, 이제 편히 쉬세요.”
힐데 사제님 옆이라서 쉬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요.
쓴웃음과 함께 중얼거린 후, 이번엔 그 옆 무덤 앞에 쪼그려 앉았다.
“……사제님.”
사람 차별하려는 건 절대 아닌데,
“힐데 사제님…….”
비석에 새겨진 그녀의 이름을 쓸자마자 속에서 울컥 솟아올라버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위병대장보다는 힐데 사제와 더 오래 시간을 보냈는데.
같이 마을 구경하고 사탕도 나눠먹은 사이라고.
그러니 이건 차별대우가 아니다.
내가 그녀의 죽음을 더 슬퍼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사제님…….”
……내 입으로 직접 전하고 싶었다.
사제님이 사람들을 전부 다 살리셨다. 하지만 그렇게 가시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아무리 사람이 갑자기 죽고 그러는 법이라지만, 그래도 그건 우리가 버리고 도망간 꼴이 되잖냐.
아마 사람들도 야속해할 거다……
……그 밖에도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었는데, 전부 다 눈물에 녹아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비석을 붙잡은 채 그저 단 한 마디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사제님……….”
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대답을 할 리도 없고, 애초에 이 아래에 시신이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그저 이 여름날처럼 해맑던 그 모습을 떠올리며, 목에 차오른 눈물에 전하고 싶었던 말이 전부 담겨 있기를 바라며 다 쏟아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모조리.
그런 뒤 올려다본 여름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없다는 것처럼.
……정말로, 가슴에 사무칠 만큼 푸른 하늘이었다.
다시 성으로 돌아오자, 메린이 성문 앞에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 일어나는 게 보였다.
내가 늦은 건 아닐 텐데……?
혹시 뭔 일 있었나?
하지만 가까이에서 본 메린은 엷게 웃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왜 나와 있어?”
“……그냥. 바람이나 쐴까 해서.”
“응? 빵은? 벌써 다 구운 거야?”
“………반죽, 재우고 있지.”
창고에 효모도 있었나……?
뭐, 내가 못 본 곳에 있었겠지.
메린이 눈을 다른 데로 둔 채 쭈뼛거리며 우물우물 대답했다는 건, 머릿속까지 나른해져서 그런지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내 바닥을 보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그대로 말없이 바라보던 것도 잠시, 그녀가 가만히 손가락을 뻗어 내 눈가를 쓸었다.
“눈 엄청 빨개.”
“조문……무덤에 인사하고 왔거든. 무덤 앞에 서면 괜히 눈물 나오고 그러잖아.”
울보인 너나 그런다고 받아칠 줄 알았는데, 메린은 의외로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기운 내라는 상투적인 말도 없이 그냥 머리만 슥슥 쓰다듬어지고 있는데, 어쩐지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냥 가만히 있기 뭐해서 그녀의 뺨을 쓰다듬다가, 손바닥에 전해지는 온기만으론 부족하다는 생각에 어깨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히히.”
“……”
……품 안에서 울리는 부드러운 웃음소리.
마주 꼭 안아오는 손길.
축 쳐져 있던 마음을 일으키기에 이보다 더 좋은 약은 없으리라.
때마침 바람 쐬러 나와준 그녀가 무척 고마웠다.
그 마음을 담아 정수리와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후,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들어가자. 슬슬 해 뜨거워진다.”
“응.”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와 손을 맞잡고서 성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에 그곳을 나오기 전, 짐을 챙기는 중에 그녀가 납작한 빵들을 배낭에 넣는 게 보였다.
무언가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 정도가 약해서 별 거 아니겠지 하고 넘겨버렸다.
이윽고 출발할 때가 되었고, 블루벨을 제외한 우리 세 사람은 각자 말고삐를 쥐고서 성문 바깥으로 나왔다.
안장에 올라앉아 말 갈기를 슬슬 쓸어주면서, 겨우 사람 꼴로 돌아온 블루벨에게 물었다.
“뛸 수 있지?”
“당연한 걸 뭘 묻니? 얼른 출발이나 해.”
입 놀리는 거 보니 완전히 멀쩡해졌군.
근데 아직 눈가가 좀 쳐진 거 같은데 말이지?
그걸 지적해도,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셔서 그런 거라고 대꾸할 게 뻔했다.
협곡까지는 가볍게 말을 달려야 하지만 거기 빠져나가기만 해봐, 진짜 쌩쌩해졌는지 한 번 보자고.
이따 보게 될 광경을 약간 기대하면서 대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 후, 잔해 외엔 아무것도 없는 거리와 텅 빈 초소가 있는 외벽 성문을 지나, 아무도 없는 평원을 달려서 가장자리가 무너져 있는 협곡을 빠져나왔다.
그 다음, 바로 블루벨의 호언장담을 시험하려던 찰나,
“잠깐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일전에 뛰어내렸던 절벽 끝으로 다가갔다.
탁 트인 시야 한가득, 군데군데 깨지고 무너져 있는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그리고 갈매기들이 그 위를 날아다니면서 끼룩끼룩 울고 있었다.
살 곳이 더 많아져서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잘 있어요.
태평한 갈매기들과, 잔해 사이에 잠든 사람들에게 속으로 인사를 건넸다.
하늘과 맞닿기까지 쭉 펼쳐진 푸른 바닷속, 검푸른 공간에 머물고 있을 아가씨에게도.
그런 뒤 다시 말을 돌리자, 세 사람이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뭘 했는지 다 안다는 듯이 말없이 서 있는 동료들에게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 이제 됐어. 가자.”
세 아가씨는 고개를 끄덕이곤, 내가 앞장서도록 살짝 길을 비켜주었다.
왠지 리더 취급을 받는 거 같아서 조금 속이 간질거렸다.
리더 맞지만.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한 후,
“이랴!”
마음을 다잡듯이 크게 호령하며 말을 달렸다.
바다도, 그 앞에 있는 황폐한 마을과 갈매기도, 방금까지 서 있던 협곡도 모두 빠르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곳에 남길 건 전부 남겼고, 흘릴 건 전부 흘려냈다.
그러니 이젠 떠나온 곳을 돌아볼 게 아니라,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길을 보아야 한다.
그 끝에 자리하고 있는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
적어도 해가 떠 있는 동안엔,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
“……”
대륙의 서쪽과 동쪽에 이어, 남쪽의 일도 전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북쪽뿐.
이 여정의 시작이자 종착점인 대재앙 아트라토스뿐이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어.
나도 모르게 고삐를 꽉 쥐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