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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354화 (354/475)

〈 354화 〉 외전 6) 너에게 좋은 기억을 (Side : Merin) (1)

* * *

※ 341화 ~ 342화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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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 꿈이다.

메린은 눈을 뜨자마자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지를 전부 태우고서 그 잿더미조차 삼키려는 듯이 계속 타오르는 불길.

그 중심에 선 자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누군가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다.

그 피의 주인은 이미 자취를 감춘 상태이다.

잿더미가 되었는지, 아니면 바닥에 말라붙은 검붉은 흙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하늘의 달과 별마저 사라진 마당에,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

그렇게 잿더미와 불길밖에 남지 않은 공간에 멀거니 서 있다가 목소리를 듣고 깨어난다.

­머지않았다. 때가 오고 있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그 목소리가 잔향이 되어 머릿속을 울리긴 했으나, 아침을 먹을 즈음엔 사라지는 탓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그 꿈을 되풀이해서 꾸고 있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렇기에 사나흘에 한 번씩, 장장 반 년 이상이나 꾸고 있음에도, 그녀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있었다.

며칠 전, 산꼭대기 사원에서 카엘에게 밝힌 게 처음이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에게도 말했듯이, 그녀는 그 황량한 풍경을 보면서도 아무 느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만 홀로 남았다는 사실이 무섭지도 않고, 피를 뒤집어쓴 게 불쾌하지도 않다.

간절히 바란 풍경이라고 기쁘지도 않고, 전부 다 없어졌다고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덤덤하게 그 자리에 서서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고,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뿐이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끝나야 했을 터인데,

갑자기 풍경이 달라졌다.

별안간 카엘이 대지를 휩싼 불길을 뚫고 들어와,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둘러댔다.

딱히 막을 생각이 없는데도, 그녀의 팔이 멋대로 움직이면서 그 칼날을 쳐냈다.

달라진 건 또 있었다.

검붉은 흙과 시커먼 재만 있던 땅 위에, 익히 아는 얼굴들이 구르고 있었다.

싸우고 있는 탓에 그 얼굴들을 볼 수는 없었지만, 메린은 그들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나마 사람 짓을 하도록 교육해주었던 엘라이스와 피아를 비롯해, 비교적 자신을 호의적으로 대한 사람들이다.

이번 여행으로 알게 된 두 소년소녀와 귀 뾰족한 재수덩어리의 머리도 그에 섞여 있었다.

다행히 그녀가 가장 아끼는 머리는 바닥이 아니라 어깨 위에 붙어 있다.

그녀를 향해 반짝반짝 빛나던 푸른 눈동자는 이제 깊은 증오와 살의로 흐려져 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아끼는 사람들을 그녀가 전부 죽인 것이다.

그러니 그는 마땅히 자신을 미워해야 한다.

그의 눈이 싸늘해진 건 슬프지만, 생각해보면 그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증오를 품었다면, 카엘은 자신을 죽인 뒤에도 고통을 느끼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이건 아니었다.

채앵—

그의 손에서 성검이 미끄러져 날아가고, 그녀의 참격에 두 팔과 다리가 사라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하늘 높이 웃으며 그의 배를 찌르고 조롱하는 것은, 설사 그게 그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해도 용납할 수 없었다.

죽어야 하는 건 그가 아니라 자신이다.

애초에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을 터.

그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다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충격에 휩싸인 메린의 눈에, 참혹한 고깃덩어리가 된 그의 모습과 그녀 자신…… 아니, ‘메린 소더’를 차지한 드래곤이 그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놈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밟아 부순 뒤, 옆에서 망연히 바라보는 그녀와 눈을 맞추고 씨익 웃었다.

­이게 너와 나의 운명이다.

메린은 지랄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이딴 게 운명일 리가 없어.

머리를 부여잡고 끝없이 되뇌었다.

­실컷 부정하고 발버둥치거라. 그 끝에 열릴 절망까지도, 내 기꺼이 삼켜주마……!

놈은 그런 그녀가 가소롭다는 듯이 조롱했다.

한껏 고양된 목소리로 소리 높여 웃었다.

두 귀를 틀어막아도 들려오는 광기어린 웃음소리.

그녀는 처음으로 꿈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그 직후,

“캬하아……!”

메린은 크게 숨을 토해내면서 눈을 떴다.

호흡이 지나치게 흐트러져 있었다.

이대로는 숨이 막힌다는 생각이 들자, 본능적으로 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격한 기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케흑, 켁…! 윽, 하아, 핫……!”

‘지금 기침하면 안 되는데!’

그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메린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생각이라는 걸 하기엔, 그녀의 몸이 너무나도 비정상적인 상태에 처해 있었다.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미친듯이 뛰어대고, 추운 것도 아닌데 몸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다.

눈과 얼굴이, 땀이 아닌 눈물로 완전히 푹 젖어서는 그 주변까지 전부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끅, 우으, 흑, 쿠흑, 욱……!”

머리를 감싼 무언가로 입을 틀어막고서 울음 섞인 기침을 토해냈다.

소리를 내선 안 된다.

숨이 점점 막혀오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소리가 새어나가서는 안 되었다.

잠을 깨워버릴 테니까.

가까이에 있을 카엘의 잠을 방해해선 안 된다.

본능적으로 그 생각만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으응……?”

그래서 메린은 그가 몸을 뒤척이는 것에 좌절했다.

더 많은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한층 더 거센 기침이 터지기 시작했다.

소리를 줄여도 모자랄 판에 더 크게 내지르고 있는 스스로가 당혹스러웠다.

토닥. 토닥.

……그럼에도 그가 몸을 일으키고서 자신을 깊이 껴안는 것에, 차분히 등을 두드려주는 것에 기뻐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미웠다.

‘미안해. 깨우면 안 되는데. 네가 내일 하루 힘들지 않으려면 잘 자야 하는 거 아는데도 깨워서 미안해.’

말이 안 나오는 탓에, 메린은 숨을 고르려 애쓰며 속으로 열심히 사과했다.

“케흑…! 우으…! 큽, 흐으… 후으으…!”

“……”

그의 포근한 손길과 온기 덕분일까?

그녀 혼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진정되지 않던 몸이, 차츰차츰 평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내 완전히 진정된 그녀가 긴 숨을 내쉬자, 그도 길게 한숨을 쉬면서 다시 그녀와 함께 나란히 몸을 뉘였다.

그저 자세만 조금 바뀌었을 뿐, 그는 여전히 그녀를 품에 꼭 안고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격한 기침과 과호흡으로 기진맥진해진 그녀가 그 포근함에 빠져들려던 차, 카엘이 불현듯 눈을 맞추면서 나직이 물었다.

“메린, 꿈꿨어?”

“……”

메린은 대답하기 싫었다.그러나 솔직하게 답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사람의 표정에서 거짓말을 읽어내는 카엘의 눈을 속이는 건, 그녀에겐 절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 다음에 그가 입에 담을 터인 질문을 떠올리며 전전긍긍했다.

‘어쩌지?’

대체 무슨 꿈을 꿨기에 그녀가 그리 평정을 잃었던 것인가?

카엘은 분명 그 질문을 던질 게 분명하다.

그가 묻는 말엔 솔직히 답하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니, 정말로 그가 꿈 내용을 묻는다면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메린은 죽어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 내용을 입에 올리면 정말로 이루어질 것 같았기에.

그녀가 그를 무참히 죽이는 일이, 정말로 현실이 될 것 같아서 무서웠다.

“메린.”

그가 그녀와 이마를 맞대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그녀가 무슨 꿈을 꿨던 것인지 물으려는 것이리라.

곧 맞닥뜨리게 될 지독한 난관에 가슴이 내려앉으려던 그녀는,

“그냥 꿈이잖아. 잊어버려.”

“……?!”

전혀 다른 말이 들려온 탓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용을 묻지도 않고 잊어버리라고 하다니, 그건 일반적인 대화 순서가 아니다.

절차와 단계를 중요시하는 그가 중간을 빼먹는 건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다.

카엘은 자신을 멀뚱히 보는 그녀를 마주보며 빙긋 웃었다.

“네가 뭔 사제도 아닌데, 꿈이 그대로 이루어지겠냐? 절대로 안 이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냥 잊어버려.”

“……”

모르는 소리.

그녀가 무슨 꿈을 꿨는지 모르니까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이리라.

물론 그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그 끔찍한 악몽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꿈 속에서 본, 그 검붉은 바닥에 굴러다니던 목들 중 몇은 이미 죽은 사람들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건 이루어질지도 몰라.’

그것도 악몽의 핵심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의 카엘이 자신을 이길 가능성이 상당히 낮다는 건, 카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터.

꿈에서 했던 것처럼 그가 혼자 싸우려 든다면 십중팔구 자신에게 쓰러질 것이다.

물론 그에겐 동료가 셋이나 되니, 정말로 싸우게 되면 한꺼번에 달려들 것이고,‘메린 소더’로서는 그들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놈으로 바뀌었을 땐, 또 다를지도 몰라.’

‘메린 소더’가 아니라 ‘아트라토스’일 땐, 어쩌면……

“메린.”

시커멀 뿐인 상념에 빠져 있던 그녀를, 나지막한 목소리가 불러 깨웠다.

깊은 호숫물과 같은 푸른빛 눈동자가,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온 새벽 어스름 속에서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괜찮아. 안 이뤄져.”

“하지만……”

“나쁜 꿈이잖아. 원래 네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나쁜 일들만 보는 법이야. 메린, 너 지금 혼자 있는 거 아니야. 나도 있고, 로나나 다른 애들도 있어. 너한테 나쁜 일은 우리한테도 좋지 않을 게 뻔하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애쓸 거야.”

꿈에서 뭔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말야.

작게 웃으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담아두지 말고 털어버려. 내 경험상, 이럴 때는 딴 생각하는 게 최고야.”

“딴 생각……?”

“응. 내일 해야 되는 일이나, 전에 겪었던 일들 중에 행복하고 즐거웠던 걸 다시 떠올리는 거야. 내일 뭐 먹을지 생각하는 것도 좋고.

내가 여럿 해봤는데, 좋은 추억을 떠올리는 게 제일 효과 좋더라. 나도 모르게 웃게 되니까 그런 거 같아.”

행복했던 때.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오는 기억.

물론 그녀에게도 있을 것이었다.

여태까지 살아온 시간 대부분을 카엘과 함께 보내왔는데, 즐거운 때가 하나도 없었다면 그렇게 계속 가까이 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 악몽이 머릿속을 전부 망가뜨린 건지, 그녀는 무엇 하나 제대로 떠올릴 수가 없었다.

분명히 있을 것인데.

절대로 잊지 말자고 다짐했던 기억이 있을 텐데.

‘기억…… 따뜻한 기억…….’

지금 부둥켜 안고 있는 것보다도 더 따뜻하고 포근했던 기억이,

‘있어.’

엉망진창이 된 머릿속에서 꿋꿋이 자리를 지켜주고 있었다.

산꼭대기에서 보낸 밤. 무척이나 추웠지만 그 뒤에 굉장히 따뜻했던 밤.

그와 처음 몸을 섞은 날의 기억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너랑 처음 잤을 때가 생각 나.”

“그, 그래? 뭐, 음, 그럴 수도 있지. 나, 나도 그땐 엄청 행복했거든. 무, 물론 너랑 그럴 때마다 행복해. 지금처럼 그냥 껴안고 있어도 행복하고.”

곧바로 횡설수설하는 그의 모습에, 메린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자 가슴속을 내리누르던 느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좋은 추억으로 악몽을 몰아낸다는 게 효과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추억을 새로 만들면 더 효과가 있지 않을까?’

애초에 악몽에서 눈을 돌리려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일 터.

그렇다면, 몸을 가만히 두고서 머릿속을 움직이는 것보단 몸을 직접 움직이는 게 훨씬 좋을 것이다.

검을 휘두르면 잡념이 사라지는 것처럼.

“카엘.”

“응.”

“안아줘.”

“……네? 어, 지, 지금 안고 있는데……?”

“더.”

메린은 그의 품을 파고들면서 손을 아래로 내렸다.

몇 시간 전에 그녀의 안을 두드렸던 길쭉한 살덩이를 살며시 감싸 쥐자, 그가 크게 숨을 삼키면서 어깨를 들썩였다.

그대로 그의 귓가에 입을 대며 속삭였다.

“더… 꽉 안아줘…….”

“……윽! 메, 메린, 잠깐만!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거야, 일단 손 좀 떼지?!”

“나쁜 꿈 꿨을 땐 다른 생각하면 좋다며? 그냥 아무 생각도 못하게 하는 게 낫지 않냐?”

“어, 그, 그건 그렇지만, 그……”

카엘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괜찮아? 안 힘들겠어?”

“하다가 기절하면 그대로 쭉 잠들고 편하지, 뭐.”

“야.”

“……난 괜찮아.”

메린은 그의 눈을 마주보면서 솔직히 대답했다.

행위를 마치고 그와 함께 잠들 수 있을 만큼의 기운은 있었고, 정말로 도중에 지쳐서 정신을 잃게 되더라도 크게 상관없었다.

속이 조금 가벼워지면서 돌아가기 시작한 머리가, 내일도 온종일 카엘과 함께 이 방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칼 몇 번 휘둘렀다고 자신을 성녀로 부르는 이상한 사람들을 피해서.

그러니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넌 피곤하지? 그러니까 한 번이면 돼. 한 번만, 안아줘.”

“……”

“나쁜 꿈은 아예 생각도 못하게 해줘. 그런 꿈을 꿨다는 것도 잊어버리게, 좋은 기억으로 덮어줘.”

“…………”

메린은 그가 내뱉은 짧은 숨결에서 확연한 열기를 느꼈다.

그의 두 눈도 아주 살짝 풀어져 있다.

그녀의 말에 욕구가 끓은 것이리라.

혹여나 그가 참아버릴까 싶어, 그녀는 그의 뺨을 감싸며 속삭였다.

“부탁이야.”

“……나 참.”

투덜거리듯이 내뱉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뺨을 감싸고 있는 손을 살포시 감싸 쥐었다.

그 손바닥에 아주 잠시 입을 댄 후, 그대로 그녀와 입술을 마주 포갰다.

이윽고 이어진 행위, 그 결합은 무척이나 깊고 진했다.

처음으로 공포에 휩싸이게 했던 악몽을 덮고도 남을 만큼, 포근하고 따뜻한 기억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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