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5화 〉 외전 6) 너에게 좋은 기억을 (Side : Merin) (2)
* * *
아침해가 떠오르면서 그녀의 머릿속도 밝아진 것 같았다.
메린은 카엘과의 잠자리 외에도 여러 좋은 기억들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카엘과 술래잡기를 했던 것, 낚시하는 그에게 물장난을 쳤던 것, 처음으로 젤리를 먹었던 것.
그의 어머니인 피아와 함께 파이를 만들었던 것……
모르던 것을 아는 게 항상 좋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즐겁고 재미있었다.
지금 떠올려도 웃음이 절로 떠오를 만큼.
메린이 어느 사제가 아침식사로 챙겨준 빵을 떼면서 그렇게 말하자, 카엘은 곧바로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배우는 게 재미있는데 왜 글공부할 땐 구겨대냐?”
“머리 아프니까. 그래도 못 해먹겠다 싶진 않아.”
“그러냐.”
쓴웃음을 지으면서 수프를 마시는 카엘.
메린은 그가 입 안의 음식물을 삼킬 때까지 기다린 다음, 떼어낸 빵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근데 역시 너랑 자는 게 제일 좋은 거 같아.”
“……아, 그래.”
“기분 좋은 걸 잔뜩 느껴서 그런가? 아니면 그냥 최근 일이라서? 야, 네가 보기엔 어느 쪽인 거 같냐?”
“…………몰라.”
툭 내뱉듯이 대답하는 카엘의 얼굴은 햇살에 익은 것처럼 새빨갰다.
여기서 더 그런 쪽 이야기를 꺼냈다간 소리를 빽 지를 터.
그 얼굴을 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메린은 그가 웃는 걸 보는 게 더 좋으니 이 정도에서 그쳐주기로 했다.
그 대신, 굉장히 시덥잖은 장난을 걸었다.
“야, 카엘.”
“……왜.”
“으응~ 그냥 불러봤어.”
“뭐? ……나 참.”
카엘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음을 켜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모습에 그녀가 쿡쿡 웃자, 그 역시 그녀를 따라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가 기분 좋게 귀를 울리면서, 그녀의 얼굴에 한결 더 깊은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역시 웃는 게 좋아.’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서 그녀를 볼 때 짓는 부드러운 미소도, 낮에 이따금 눈을 마주했을 때의 들뜬 웃음도 좋다.
저녁에 일기를 쓰거나 글공부를 하는 그녀를 보며 은근히 뿌듯해하는 걸 보면, 그녀 자신도 조금 기분이 뜨는 것 같다.
그리고 밤에, 열기에 전부 다 녹아버린 듯한 그의 웃음을 마주할 때는……
심장이 꽉 조이는 것 같으면서 몸이 한층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지금 잠시 떠올린 것만으로도 조금 빠르게 두근거릴 정도로, 카엘의 그 웃음은 꽤 자극적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메린은 수프를 담은 스푼을 입에 물면서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지극히 평안한 얼굴로 빵과 수프를 먹고 있다.
그녀의 예리한 눈으로도, 그의 얼굴에선 어제 겪었던 일들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혹시 잊어버렸나?’
그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란 건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카엘의 기억력은 그녀보다 좋지 않긴 해도, 하루 전의 일도 잊어버릴 만큼 나쁘지 않다.
그럼에도 메린은 그가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하기를 바랐다.
정확하게는, 그녀가 악몽 때문에 제대로 숨을 못 쉴 정도로 겁을 먹었던 것을 잊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일이 꽤 충격적이었는지, 카엘은 어젯밤 내내 그녀가 약간만 몸을 뒤척여도 그녀를 꼭 껴안고서 토닥였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즉, 잠든 와중에도 그녀를 달래려 한 것이다.
다행히 그 기묘한 잠꼬대는, 메린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괜찮다고 속삭이자마자 사라졌다.
그래도 잠에서 깨자마자 공연히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이제 괜찮은데.’
그가 ‘좋은 기억’을 심어준 덕분인지, 다시 잠들었을 때엔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이후에 또 같은 악몽을 꾸더라도, 이미 한 번 꿨던 꿈인 만큼 어제처럼 호흡이 심각하게 흐트러지진 않을 터.
게다가 그에게 악몽을 잊어버리는 방법도 배웠으니, 이 다음부턴 그를 방해하는 일 없이 혼자서도 스스로를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가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할 게 뻔하다.
아마 계속해서 그녀를 염려하고 또 악몽에 시달리지 않을까 걱정하겠지.
‘웃었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조만간 그의 곁을 영영 떠나게 된다.
그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가능한 더 많이 웃으면서 즐겁게 지내고 싶다.
그래야 나중에 카엘이 자신을 떠올릴 때, 덜 우울해하지 않겠는가?
지금처럼 걱정거리만 만들면, 그의 성격상 더 잘해주지 못했다고 울적해할 게 뻔하다.
‘그래도 완전히 잊히는 것보단 낫지만.’
바닷속에서 만난 인어가 그에게 부탁한 것처럼, 메린 역시 카엘이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라고 있다.
인생 대부분을 함께 보냈고, 그녀가 항상 그를 지켰다는 걸 기억했으면 한다.
화려한 도시를 함께 구경하고, 눈부시게 빛나는 곳에서 함께 춤을 추었고, 또 밤을 같이 보낸 여자라는 걸 잊지 않길 바란다.
그의 곁에 메린 소더라는 여자가 있었다는 걸 언제까지나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가 남은 삶을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고 있었다.
무엇이 행복한 삶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는 많은 걸 바라지 않는 성격이다.
그러니 평범하게 사는 걸로 만족할 터.
무기와는 연이 없는 평범한 여자와 새로 만나서 결혼하고, 그를 닮은 아이에게 둘러싸여서 살면 행복해할 것이다.
매년 겨울이든 봄이든, 잔기침 한 번 안 하고 지낸다면 더더욱 좋으리라.
그렇게 오래오래 사는 동안, 그녀의 생일날 때만이라도……
아니, 한밤에 스쳐지나가는 꿈 정도라도 그녀를 떠올려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때마다 그녀와의 좋은 기억을 떠올리고 웃어준다면, 자신의 삶도 퍽 괜찮은 편이었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이 자식, 은근히 잘 잊어버린단 말이지…….’
약속을 잊어버리는 건 괜찮다.
그녀 자신도 상기시키지 않았으니 그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나 어제, 카엘은 무려 그녀의 존재 의의를 잊어버렸다.
그것도 본인이 직접 입에 올렸던 걸!
카엘은 어제 낮 동안 그녀와의 성적인 접촉을 일체 피했다.
키스조차도 안 하려 하는 게 수상해서 캐물으니, 세이렌이라는 바다 몬스터에게 홀린 걸 그녀를 배신한 거라 생각하고 자책하느라 그랬던 것이었다.
그 기가 막힌 정조관념에, 웬만해선 동요하지 않는 그녀조차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그러나 그걸 말해도 듣지 않을 게 뻔해, 메린은 그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용서해주니 뭐니 하는 말을 읊어야 했다.
자꾸만 피하려 드는 그가 괘씸해, 그 얼굴을 붙잡고 더 깊이 키스했다.
그러느라 그가 겁을 먹을 걸 알면서도 위에 올라타야 했다.
다행히 그는 그녀가 손을 잡아주면서 계속 입을 맞추자 곧 긴장을 풀었고, 용서해준다는 말을 들은 뒤론 그녀를 다시 안아주었다.
그 일 자체는 어처구니없긴 해도 좋은 추억이 되었지만, 한 가지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나랑 키스하는 게 더 좋았을 거 아니냐고.
그렇게 묻는 그녀에게, 그는 모르겠다고 답한 것이었다! 당연히‘네가 더 좋았다’고 답할 줄 알았던 메린은 내심 충격을 받았다.
‘나만큼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해놓고…….’
그런 여자와 하는 키스가 더 좋은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왠지 속이 조금 울컥하는 것 같아서, 메린은 용서해준다는 말과 함께 자그마한 진심을 전했다.
그 대신 이제 까먹지 마. 널 가장 기분 좋게 만들 수 있는 건 나야. 널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나라고.
그가 고개를 끄덕인 게 진심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솔직히 미덥지는 않았다.
‘내가 있을 땐 계속 상기시키면 되겠지만, 죽은 다음엔 그것도 못하잖아!’
한때의 선명한 기억으론 안 된다.
카엘은 앞으로 몇 십 년을 더 살아갈 텐데, 그 정도 수준의 기억으로는 일 년도 안 되어서 희미해질 터.
설사 이후에 그가 ‘그거 미친 짓이었다’고 생각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역시…….’
그야말로 미친 짓을 하는 게 가장 좋겠지.
그녀는 마음을 다잡듯이 나머지 빵을 해치운 뒤, 마침 식사를 마친 카엘에게 물었다.
“야, 카엘.”
“엉?”
“너 어제인가 오늘 새벽에 그랬지? 나랑 잘 때마다 행복하다고.”
“…………갑자기 왜 묻냐?”
카엘은 경계하듯이 몸을 주춤거리면서 되물었다.
감은 그럭저럭 예리한 편이니, 그녀에게 어떤 꿍꿍이가 있다는 걸 느낀 것이리라.
하지만 그가 경계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해코지가 아니라 행복을 느끼게 해줄 생각이니까.
메린은 자신의 입술에 묻은 수프 국물을 핥으며, 어째서인지 살짝 움찔하는 그를 향해 빙긋 웃었다.
“솔직히 너 기억력 별로 안 좋잖아. 그러니 내가 어제 말한 것도 좀 지나면 까먹을 거 같거든?”
“어제……?”
“벌써 기억 안 나냐? 내가 그랬잖아. 널 가장 기분 좋게 만들 수 있는 건 나라고.”
‘역시 안 되겠어.’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의자를 옮겨 그의 옆에 바짝 앉았다.
그런 뒤,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면서 재차 입을 열었다.
“이거 봐. 바로 까먹었잖아. 역시 어젯밤에 새기는 걸론 부족한 거야.”
“아, 아냐아냐, 안 까먹었어, 기억하고 있다고! 어, 어제 그 일만 있었던 거 아니잖아. 그래서 잠깐 기억 좀 더듬느라……”
“응, 그러니까 더더욱 새겨야지. 이 뒤에도 이런저런 일 겪을 텐데, 그럼 더더욱 빨리 흐릿해질 거 아냐. 그래서 오늘 하루종일 새겨줄까 하고.”
“무, 뭐?!”
경악하는 그를 즐겁게 바라보며, 그녀가 입꼬리를 씰룩였다.
“하루종일 몸 섞으면 까먹을래야 까먹을 수가 없지 않겠냐? 안 그래?”
“잠깐,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와악?!”
아마 ‘뭔 말도 안 되는 소리하는 거냐’고 하려던 것이리라.
그를 번쩍 안아올리며 일어선 후, 메린은 싱글싱글 웃으며 침대로 향했다.
“날아라~”
“꺄아악?!”
그 위로 살짝 던지자, 카엘은 무척 재미있는 소리를 내며 시트 위에 쓰러졌다.
굉장히 푹신한 고급 침대이니 그냥 눈앞만 조금 흔들리고 말았을 터.
그가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 틈을 타, 메린은 그대로 그를 끌어안고 침대에 마주 누웠다.
“야, 잠까, 우읍?!”
“후우…… 잠깐이고 뭐고 없어. 각오해.”
“내 의사 좀 존중해주지?!”
“왜? 좋아하고 있잖아.”
키스하면서 혀를 내미니 곧바로 입을 열었다.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을 바짝 붙이는 그녀를 밀어내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뒤통수에 손을 댔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알아차리기 힘든 그녀조차도, 그가 지금 개미 눈곱만큼도 싫어하지 않고 있다는 건 훤히 알 수 있었다.
“으, 그, 그치만 지금 아침……!”
“뭐 어때?”
어차피 이 방엔 아무도 오지 않을 텐데.
점심식사를 가져다줄 때 외엔, 누구 한 사람 복도를 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아침이건 말건 무슨 상관이 있는가?
“후후후, 평생 안 까먹게 해줄게.”
“으……!”
또 다시 이어진 깊은 입맞춤.
숨결을 나누고, 서로의 타액을 마신다.
한껏 뜨겁게 달아오른 그와 몸을 겹치고, 그의 욕구가 이끌어내는 눅진한 쾌감에 몸을 떨었다.
“흐으읏…! 하아, 카에엘……!”
“큭… 메린……!”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감각에 절로 소리가 나온다.
몸 속에서 휘몰아치는 커다란 흐름에 떠내려갈까 무서워서 그를 꽉 껴안는다.
맡으면 맡을수록 몸이 뜨거워지는 기묘한 향취가 방 안에 떠돌고, 귀를 울리는 질척한 소리가 머릿속까지 마구 울려서 어지럽다.
메린은 자신을 짓누르듯이 꽉 안으며 몸 안팎을 매만지는 그를, 그에게 매달리듯이 감싸 안았다.
그 상태로 등줄기에 끊임없이 흐르는 찌릿함에 숨을 내뱉는데,
‘근데 이거, 내가 더 새겨지는 거 같은데?’
그 생각이 불현듯, 흐릿하게 떠올랐다가 곧바로 흩어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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