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7화 〉 344화 : 적당히, 적절히, 알맞게 (1)
* * *
길을 따라서 한참 북쪽으로 올라가던 와중, 문득 나무 사이로 비추던 저녁놀이 진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선을 앞에 고정한 채 시계를 꺼내어 대강 살피니, 역시나 해가 저물어가는 시각이었다.
슬슬 야영 준비를 해야 되는데……
길 주변이 숲, 그것도 나무가 군데군데 부러져 있는 숲인 게 마음에 걸린다.
꼭 온 몸이 바윗돌에 감싸인 곰, 스톤베어가 굉장히 화가 나서 앞발을 마구 휘두르고 다닌 듯한 꼴인데, 실제로 누가 했든 이 주변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나는 일단 팔을 들어서 멈추라는 신호를 보낸 후, 나보다 감이 훨씬 좋은 두 사람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이 근처에 묵어도 괜찮을까?”
“안 될 게 뭐가 있어?”
“저 꼴을 만든 놈이 어슬렁거릴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묻는 거야.”
뚝 부러져선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나무들을 가리키자, 메린은 그를 슬쩍 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돌 박힌 곰이나 좀 큰 놈이 몽둥이 휘두르고 다닌 거겠지. 설마 거인이 밟았겠냐?”
“거인은 옛적에 멸종했으니 아니겠죠. 적어도 이 남부에선 목격담이 없는 걸로 알아요.”
평소처럼 헤실헤실 웃으면서 로나가 말을 이었다.
“조금 꺼림칙하긴 하지만, 쓰러진 나무가 방책(??)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요? 적어도 머리 바로 위를 걱정할 필요는 없으니 나쁘진 않은 거 같네요.”
“흠…….”
둘 다 별 문제없다고 보는 모양이군.
로나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식수도 보충할 겸 이 숲에 묵는 게 좋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메린과 로나, 그리고 조금 더 뒤쪽에 서 있는 블루벨에게 말했다.
“그래, 그럼 이 주변에서 천막 치고 쉬자.”
“네!”
로나의 힘찬 대답이 숲 속을 작게 울리는 동시에,
철푸덕.
뒤편에 서 있던 블루벨이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워버렸다.
나는 말에서 내려, 고삐를 쥔 채로 그녀에게 다가가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방긋 웃으면서.
“어이구, 블루벨 씨, 완전히 지치셨어요? 역시 나이는 못 속이시나봐.”
“헤엑, 헤엑…! 너, 이, 케헥…! 너 이 새끼, 일부러 한 번도 안 쉰 거지?!”
“뭔 소리야? 중간에 잠깐 쉬었구만.”
“지도 확인하느라 멈춘 거잖아!”
빽 소리지르는 블루벨의 목소리엔 울분이 한껏 담겨 있었다.
그녀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눈가를 팔로 덮고 호소하듯이 말을 이었다.
“헤으, 우으, 어떻게, 다섯 시간을 계속 뛰게 만드냐고……!”
“계속 이렇게 다녔었잖아. 새삼스럽게 뭘 그래?”
“아침에 퍼졌던 거, 아직 다 안 풀렸단 말야……! 힘들다고!”
역시 몇 시간 쉰 걸론, 메린에게 호되게 당해서 고갈된 체력을 다 회복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내 그럴 줄 알았지.
눈가 쳐져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
“그러게 누가 허세 부리래? 난 출발하기 전이랑, 아까 갈림길에서 분명히 물어봤어. 근데 댁이 하나도 안 힘들다고 했잖아.”
“그렇다고 다섯 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계속 뛰냐, 미친놈아! 너 혹시 내가 기운 덜 차린 거 다 알고 그런 거야? 어?!”
“당연한 걸 뭘 물어?”
“캬아아아아악!!”
낮에 나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블루벨이 쇳소리를 내며 나를 향해 발길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뱀 같은 눈동자를 부릅뜨면서 발광하는 걸 보니 왠지 리자드맨이 생각난다.
바닥을 짚고 몸을 띄우면서까지 발을 날려대던 것도 잠시, 블루벨은 갑자기 다시 철푸덕 드러눕고는,
“너무해… 우으… 맨날 나만 괴롭히고… 나쁜 새끼……! 으흑… 흐읏…!”
다시 팔로 눈을 덮더니 훌쩍이기 시작했다!
어라, 이건 전혀 예상 못했는데!
그 순간, 누군가가 내 등을 툭 치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내가 고삐를 쥐고 있는 말이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푸르릉 소리를 냈다.
왠지 얼른 달래주라고 채근하는 것 같았다.
하, 진짜 돌아버리겠구만.
나는 공연히 머리를 세게 털면서 블루벨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 저기, 블루벨,”
“흐아아아앙! 너무해애애!”
그리고 내가 말을 걸자마자 블루벨이 크게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니, 진짜 어이가 없네, 내가 뭘 어쨌다고?!
“우아아아…!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몸 말고는 아무 쓸데도 없는 년 주제에 징징대지 말라니 너무 심하잖아아……!!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는데에……! 흐에에엥……!”
으아악, 이 변태 할망구가 피곤해서 또 미쳐버렸나봐!
나는 눈을 가린 채 훌쩍이는 미친 할망구에게 황급히 쏘아붙였다.
“내가 언제 그딴 소리했다는 거야, 나 아직 한 마디도 안 했구만!”
“속으로 했잖아, 다 알아!!”
“안 했다고오오!!”
온 숲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힘있게 외쳤다.
이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든 게 짐승형 몬스터라면, 방금 내 포효로 죄다 도망갔을지도 모르겠다.
“거짓말 마, 분명히 했어, 안 했을 리가 없어! 방금 나 꼴 좋다고 내려다봤으면서 뭘 안 했다고……!”
“안 했다잖아, 미친년아.”
돌연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마치 땅 속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그 목소리는, 블루벨이 새되게 내지르는 발광을 짓누르며 숲 속에 묵직이 내리깔렸다.
정말로 그 무게에 눌려버린 것처럼, 바로 전까지 마구 몸부림치던 엘프 할망구가 그 자세 그대로 바짝 얼어붙었다.
“안 했다는데 왜 자꾸 지랄하냐? 어디서 개수작이야?”
말소리에 담긴 한기가 목 뒤를 스치며 지나간 듯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목소리의 주인인 메린은 그대로 나를 지나쳐 블루벨에게 다가가더니, 돌연 그녀의 두 손목을 콱 붙잡고서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으아아, 어째 상황이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어!
황급히 손을 뻗어, 무심히 블루벨을 끌고 가는 메린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 메린, 아무리 그래도 이건……!”
“뭐.”
“…………”
나를 향해 살짝 돌린 고개, 그 얼굴에서 엿보이는 주홍빛 눈동자는 약간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응, 이거 건드리면 죽겠는걸?
근데 이미 말을 걸었잖아?
안 될 거야, 아마.
“뭐. 말해.”
“그, 그래도 동료이니까 살살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로나랑 같이 물이나 찾아와라.”
“옙.”
빠른 손놀림으로 안장에 걸쳐져 있던 물통을 빼어 들고, 로나와 함께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왠지 뒤쪽에서 겁에 질린 듯한 흐느낌이 들려오는 듯했지만, 아마 바람이 나무 사이를 스치며 나는 소리이리라.
흐에에엑……
히이이잇……
“……여기 밴시가 사나본데.”
“사는 게 아니라 불러온 걸 거에요. 나 참, 메린 님을 잘 모르면서 함부로 부추기려고 하다니, 제 꾀에 넘어간 셈이죠.”
“응……?”
부추기려고 했다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더 자세히 물으려 했지만, 로나가 곧바로 다른 말을 꺼내는 바람에 때를 놓치고 말았다.
“자자, 카엘 님, 얼른 물 있을 만한 곳 좀 보세요~ 되도록 가까이에 있는 걸로 찾으셔야 돼요~”
“그게 뭐 내 맘대로 되냐? 음……”
천천히 걸으면서 난장판이 되어 있는 숲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때, 한 방향에서 퐁, 하고 물이 튀기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잘못 들은 건가 하는 의혹과, 제대로 들은 거라는 확신이 뒤섞여 올라오는 기묘한 느낌.
이미 여러 번 겪어서 익숙해진 그 감각을 따라, 나는 로나를 데리고 그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오~ 역시 카엘 님!”
작은 비탈 아래를 흐르고 있는 개울을 발견했다.
조심스럽게 내려가, 손으로 한 모금 떠서 냄새를 맡아보았다.
“색깔도 투명하고 냄새도 안 나네.”
“어디어디…… 네, 독도 없는 거 같아요! 이야~ 역시 숲이 도와주는 용사님이시네요~ 매번 이렇게 바로바로 맑은 물 찾으시고!”
“하하……”
달리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웃기만 했다.
위슨의 정령이 말한 바로는 숲……
즉, 자연의 정령이 나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소소한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내가 뭘 했다고 그러는 건지는 진짜 모르겠지만.
얼마나 소소한 도움이냐면, 엘프의 숲에서는 가지를 움직여서 숨어있는 적을 찾아주거나, 나뭇잎을 마구 흔들어서 내 숨소리를 듣고 추적하려는 적을 방해해주었다.
바닷속에서 몸을 피할 때도 도와주었다고 하고.
그 외에도 지금처럼 물길을 찾도록 유도하거나, 과일을 떨어뜨려서 나무를 찾게 해주거나, 숲에서 빠져나가는 방향을 알려주기도 하고 있었다.
어쩌면 낚시가 전보다 더 잘 되는 것도 그 일환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도움 자체는 정말로 소소하지만, 그걸 굉장히 적절하게 제공해주고 있어서 내가 오히려 은혜를 갚아야 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물을 찾아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개울 주변을 살폈다.
땅도 비교적 단단하고, 뭐 이상한 게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처참하게 부러진 나무도 몇 안 되니, 기분상 여기에 묵는 게 좋을 거 같아.
“로나, 여기 어때? 묵을 만한 거 같지 않아?”
“네! 길에서 그리 멀지도 않으니 괜찮을 거 같아요!”
“그래, 그럼 다른 녀석들 데려오자.”
그렇게 다시 로나와 함께 돌아가기 시작했다.
날이 저물고 있으니 서둘러야 할 텐데, 두 아가씨가 있을 곳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약간 무거웠다.
문득 위를 올려다보자, 나뭇잎 사이로 노을 낀 하늘이 살짝살짝 엿보이고 있다.
그 진한 붉은빛을 보니, 블루벨을 끌고 가던 메린의 눈초리가 떠올라서 약간 몸서리가 쳐졌다.
하…… 메린 녀석, 설마 또 초주검으로 만들어버린 건 아니겠지……?
살짝 긴장한 채, 두 사람과 말 세 필이 서 있던 길가로 돌아가자,
“엉? 빨리 왔네. 금방 찾았나보다?”
꿇어앉은 말에 기대어 앉아 노닥거리고 있는 메린과,
“………”
어째서인지 그 옆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블루벨의 모습이 보였다.
바들바들 떨면서 바닥만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약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떠돌고 있었다.
이거 물어봐야겠지……?
나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는 메린에게 물었다.
“메린, 블루벨이랑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별 거 없었는데?”
“그래…… 뭐하고 있었는데?”
“대화.”
대화라…….
나는 덤덤하게 대답하는 녀석의 눈을 보면서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말로 한 거지?”
“……”
묵묵부답.
메린은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지도 않고, 그저 나를 물끄러미 보면서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뭐지? 긍정도, 부정도 안 하는 걸로 대답을 회피할 생각인가?
근데 대답을 안 하는 시점에서 이미 글러먹은 거 아냐?!
“야, 메린, 너……”
“물 찾은 거지? 천막 펼 데도 봤냐? 해 지기 전에 작업 끝내는 게 좋으니까 얼른 가자.”
녀석은 캐물으려는 내 말을 잘라버리고 먼저 걷기 시작했다.
한손에는 고삐를, 다른 손에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블루벨의 팔을 붙잡은 채.
……그리고 블루벨은 녀석이 팔을 잡자마자 사색이 되어서 입을 뻐끔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대체 뭔 일이 있었길래?
개울이 있는 곳으로 다시 가면서 메린에게 물어보았지만, 녀석은 별 거 안 했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블루벨 역시, 어떤 엄청난 일이 있었다는 표정과 목소리로 ‘아무 일도 없었다’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거 둘이서 뭐 저질러놓고 말을 맞춰버린 거 같은데…….
더 캐묻는다고 말이 나올 거 같진 않았다.
그래서 진상을 찾는 걸 포기하는 대신, 나는 메린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메린, 블루벨 때린 건 아니지?”
“아냐.”
“그럼 됐어.”
물리적인 힘을 가한 게 아니라면 됐지, 뭐.
블루벨은 평소에도 메린을 무서워했으니, 아마 그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노려보면서 윽박지르기라도 했던 것이리라.
……근데 왜 그런 거지?
블루벨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질러대는 게 거슬렸나?
고개를 갸웃하는 내 귀에, 메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카엘.”
“엉?”
“블루벨한테 요리 가르치기로 했잖아.”
“어? 어어, 응, 그랬지. 근데 왜?”
“내가 같이 봐줄까 해서.”
메린의 그 말에, 갑자기 블루벨이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사색에 질린 얼굴이 약간 흙빛으로 물든 것처럼 보였다.
“네가 같이 봐준다니?”
“어차피 나도 같이 식사 준비해야 되잖아. 겸사겸사, 네가 제대로 가르치는지 봐줄게.”
“아……”
난 또 무슨 말인가 했네.
메린은 우리 중에 가장 요리를 잘하니, 녀석이 감독해준다면 내가 잘못 가르칠 일은 없겠지.
나도 녀석에게서 무언가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고.
무엇보다도, 내가 블루벨과 따로 붙어 있는다고 녀석이 도끼눈을 뜨지 않아도 된다!
마지막 장점이 너무나도 커서, 나는 곧바로 메린에게 크게 고개를 끄덕였고,
“아아아………”
……블루벨은 세상이 끝장나기라도 한 것처럼 길고 긴 탄식을 내뱉었다.
* * *